오토 빌레 쿠시넨

 


핀란드어: Otto Wilhelm "Wille" Kuusinen(오토 빌헬름 "빌레" 쿠시넨)
러시아어: Отто Вильгельмович Куусинен(오토 빌겔모비치 쿠시넨)
1881~1964
1. 개요
2. 기타


1. 개요


핀란드의 공산주의 정치인.
1900년 헬싱키 대학교에 진학해 인문학을 전공했다. 당시 대학생들이 으레 그랬듯 이 시기에는 우파적 민족자각운동(페노마니아) 성향이었다. 1902년 졸업했고, 1904년 전에 좌경화되어 핀란드 사회민주당에 입당했고 1905년 혁명을 맞았다.
쿠시넨은 쿨레르보 만네르, 위리외 시롤라 등 대학생 출신들로 이루어진 사회민주당 계파 "11월 사회주의자파"(Marraskuun sosialistit)의 수장 격이었다. 이 젊은 계파는 당내 좌파라고 할 수 있었으며, 유호 퀴외스티 카리 등 당내 우파를 이룬 기성 당원들에게 비판적이었다. 1907년 의회개혁이 이루어지고 1908년 의원에 당선되었고, 1911년 온건파 지도부를 무너뜨리고 당권을 장악, 1911년 사회민주당 주석이 된다. 1918년 핀란드 내전 때는 적군 측 내각에서 교육장관을 맡았다. 내전기에는 만네르가 사회민주당 주석이자 내각수반이었다.
내전에서 패배한 뒤 쿠시넨은 다른 지도부급 당료들과 함께 러시아로 도피했다. 한편 핀란드에서는 친미파 배이뇌 탄네르가 주도하여 사회민주당이 온건화, 개량화되었다. 그러면서 쿠시넨 등 러시아로 도피한 모험주의 성향 구 지도부는 핀란드에서 만악의 근원으로 성토되었다. 1930년대에 대숙청이 벌어지면서 많은 핀란드계 소련인들이 핀란드 파시즘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숙청, 살해되었다. 이 즈음 쿠시넨은 스탈린의 측근이 되어 있었기에 숙청을 피했을 뿐 아니라, 다른 핀란드 망명자들에 대한 숙청에 앞장섰다. 망명 초기인 20년대에 자연사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소련에 망명한 거물급 핀란드 사회주의자들 중 대숙청 생존자는 쿠시넨을 제외하면 '''없다.'''[1] 심지어 1937년에는 아들이, 1939년에는 아내가 체포되었는데, 스탈린이 쿠시넨에게 왜 항의하지 않냐고 묻자 쿠시넨은 "체포당할 만한 이유가 있었으니 체포되었을 것"이라며 스탈린의 후빨을 해 주었다.
겨울전쟁 시기에는 소련의 괴뢰정권인 핀란드 민주공화국 수반으로 앉혀졌으나 소련이 겨울전쟁에서 핀란드를 멸망시키는 데 실패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하지만 쿠시넨은 그 뒤로도 카렐리야 소비에트 공화국 최고 소비에트 상무회 주석, 소련 공산당 중앙위 정치국원 등 요직을 맡으며 출세했다. 이런 행적 때문에 쿠시넨은 노르웨이에서 비드쿤 크비슬링이 그러하듯 핀란드에서 까야 제맛인 존재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이때쯤 되면 쿠시넨 본인도 스스로를 소련인으로 생각했고 핀란드에는 아무 미련도 없어져 버린 것 같다.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기에도 어떻게 처신을 잘했는지 정치국원 자리를 유지하고 1957년에는 중앙위 서기국장까지 되었다. 1964년 죽을 병에 걸리자 헬싱키 주재 소련 대사관을 통해 고향에 묻히고 싶다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크렘린 벽 묘지에 묻혔다.

2. 기타


  • 헤르타 쿠시넨은 냉전기에 합법화된 핀란드 공산당의 서기장을 역임했다.
  • 2004년 YLE에서 선정한 위대한 핀란드인에서 38위에 선정되었다.[2]
  • 다소 뜬금없지만 한국사에서도 얼굴을 내민다. 바로 한국 독립운동사의 초대형 사건이였던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에서(...) 코민테른에서 조선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를 두고 벌어진 논쟁에서 한쪽 입장의 대표였다고 한다. 관련 논문
  • 유리 안드로포프콤소몰 시절 이 자의 제자격으로 그를 따르며 배웠다는 기사가 아주 뜬금없게도 1982년 일간스포츠에 보도된 적이 있다. (#) 흥미롭게도 이 기사에서는 쿠시넨이 스탈린에 저항하는 내부 진보파였고 그것이 안드로포프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데, 윌리엄 트로터의 겨울전쟁 연구서에서 묘사되는 쿠시넨은 저항은커녕 스탈린의 개 수준이다.(...)[3]
[1] 에이노 라흐야 1937년 사형 집행 직전에 술병으로 사망. 레오 라우키 1938년 총살. 베르네르 레흐티매키 1938년 총살. 쿨레르보 만네르 1939년 라듐광산 굴라크에서 피폭사. 하나 말름 1938년 굴라크 호수에서 익사체로 발견. 에로 하팔라이넨 1937년 총살. 심지어 핀란드 내전 때 핀란드 적군을 도우러 파견되었던 미하일 스베츠니코프 대령도 1937년 총살되었다. 스베츠니코프는 핀란드에 전혀 연고가 없는 볼고그라드 출신이다. [2] 다른 나라들의 위대한 XX 시리즈와 달리 핀란드의 "위대한 핀란드인"은 트롤링이 극심했다. 이완용 취급을 받는 쿠시넨이 38위인가 하면, 선정 바로 전 해인 2003년 스캔들로 실각한 총리 안넬리 얘텐매키가 45위, 핀란드가 소련과 강화한 뒤 그것에 불복해 무단 탈영해 무장친위대에 들어간 라우리 퇴르니가 52위였다. 압권은 1156년 최초의 핀란드 주교 헨리쿠스가 무전취식을 했다고 도끼로 쳐죽인 랄리라는 이교도 농부가 무려 14위를 먹었다는 것. 조금만 더 힘냈다면 10위 안에 들어갈 뻔 했다. [3] Trotter, W (1991), //Frozen Hell//: “He also took care to ingratiate himself with Stalin from the earliest days of Stalin’s rise topower, and his master had rewarded him by making him secretary generalof the Cominte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