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드쿤 크비슬링

 




<colbgcolor=#00001b> '''노르웨이의 22대 총리
국민연합의 초대 당수
'''
'''본명'''
Vidkun Abraham Lauritz Jonssøn Quisling
비드쿤 아브라함 레우리츠 욘쇤 크비슬링[1]
'''출생'''
1887년 7월 18일
스웨덴-노르웨이 왕국 텔레마르크 주 퓌레스달
'''사망'''
1945년 10월 24일 (향년 58세)
노르웨이 왕국 오슬로 아케르스후스 요새
'''정당'''
조국동맹 (1930년 ~ 1931년)
농업당 (1931년 ~ 1933년)
국민연합 (1933년 ~ 1945년)
'''시민권'''
노르웨이
'''배우자'''
알렉산드라 보로니나
마리아 크비슬링
'''서명'''
[image]
1. 개요
2. 생애
2.1. 젊은 시절
2.2. 파시스트가 되다
2.3. 매국노가 되다
2.4. 몰락과 죽음
3. 여담
4. 매체에서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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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르웨이정치가, '''매국노'''. 국민연합의 당수로, 나치 독일괴뢰 국가크비슬링 정권의 총리다. 언어사전에서도 크비슬링(Quisling)은 반역자, 매국노와 동의어로 등재되어 있으며 현재에도 노르웨이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꺼린다. 한국인들이 이완용을 매국노의 대명사로 여기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2. 생애



2.1. 젊은 시절


비드쿤 크비슬링은 노르웨이의 시골 마을인 텔레마르크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수학 실력이 뛰어나서 '천재적인' 수학자라 불렸으며 뛰어난 암기력을 비롯해 재능이 출중한 인물이었다. 육군사관학교를 최고 성적으로 졸업해 소령까지 진급했고 1922년 프리드쇼프 난센의 조수로 그와 함께 러시아를 여행하며 러시아 기근 구제 사업에 참여했으며 이때 '러시아'에 대해서는 매력을 느끼게 되어 러시아 여자와 결혼했고 1920년대 후반 외교관 신분으로 러시아를 방문해서 소련과 외교를 단절했던 영국을 위해 영국의 대리대사 자격을 수행, 대영제국 훈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볼셰비즘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가지게 되었다.

2.2. 파시스트가 되다


노르웨이로 돌아온 크비슬링은 1931년부터 1935년까지 국방장관을 역임하고 1932년 국정조사를 통해 노르웨이 사회주의자들이 소련의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어 소련과 사회주의자들이 스칸디나비아를 무력으로 장악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그는 1933년 국민연합당을 창당하여 노르웨이 파시즘 운동을 이끌었으나 그 결과는 참담했다. 초기에는 국교회의 지원까지[2] 받았음에도 1933년 선거에서 2.2%의 지지를 얻었고 스타방게르 시와 두곳의 농촌에서 12%의 승리를 얻은 것이 고작이었을 뿐 단 한 석의 의석도 얻지 못했으며 1936년 선거에선 지지율이 1.8%로 추락했다. 당원의 수도 고작 2000명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노골적인 반볼셰비즘, 반유대주의 구상은 독일의 이목을 끌었고, 크비슬링 본인도 나치의 지도자 중 한명인 알프레드 로젠베르크의 북해 제국 구상에 공감하여 1939년에 히틀러와 만나 회담을 갖기도 했다. 1939년 12월 14일에 아돌프 히틀러는 비드쿤 크비슬링을 만났는데 크비슬링은 히틀러에게 독일과 노르웨이 사이에 협력관계를 제안했고, 첫번째 회담 4일 후에 치뤄진 1939년 12월 18일 두번째 회담에서 이 두 사람은 노르웨이에게 가해지고 있는 영국, 프랑스 연합국의 위협에 대해 논의했다.

2.3. 매국노가 되다


나치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 당일인 1940년 4월 9일, 크비슬링은 공영방송국인 NRK를 점거한 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쿠데타를 선언하고 스스로 정부 수반에 올랐음을 선포했는데, 이것은 방송 중계를 이용한 세계 최초의 쿠데타 선언이었다. 비드쿤 크비슬링은 히틀러와 이미 두 차례나 면담한 적이 있기 때문에 히틀러와 독일이 자신을 지지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 쿠데타는 독일의 침공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도 않았고 독일은 크비슬링이 노르웨이인들에게 전혀 인기가 없고 혐오감만 준다는 것을 포착, 크비슬링이 도움이 안된다고 판단해 그의 신정부를 6일만에 해산시키고 폴 베르그 대법원장이 임명한 행정위원회를 새로운 통치기관으로 내세웠다. 크비슬링의 정적들은 역으로 크비슬링이 독일의 사주를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생각했으나 독일에선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정도를 제외하면 크비슬링에 주목한 인물이 거의 없었고 오히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를 비롯한 독일 외무부는 그를 적대적으로 보고 있었다.
4월 15일 행정위원회는 크비슬링으로부터 정식으로 권력을 양도받으며 크비슬링에게 위기를 잘 대처해줘서 고맙다고 감사를 표하는 등 뻘짓을 하다가 국왕이 4월 17일 스웨덴에서 망명정부만이 정식정부이며 행정위원회를 불법이라고 선포하는 바람에 역시나 망해버렸다. 결국 히틀러는 노르웨이를 직접 통치하는게 낫다고 판단해 4월 21일 요제프 테르보펜을 국가판무관으로 파견했다. 또한 4윌 24일에는 행정위원회를 대신할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가 수립되었다. 히틀러는 테르보펜에게 크비슬링이 직접 정부를 구성하게 하라고 했지만 테르보펜은 이 지시를 무시하고 국민연합당 정부를 구성하고 국왕을 폐위, 국민연합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을 해산했다. 크비슬링은 국민연합당 위원장이었으나 아무런 권력도 없었다. 하지만 테르보펜의 정부 역시 제대로 돌아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고 테르보펜과 크비슬링의 권력 다툼이 이어졌다. 결국 1942년 1월 23일, 테르보펜은 크비슬링이 정부를 구성하게 허락했다. 2월 1일 아케르스후스 성에서 크비슬링은 정식으로 노르웨이의 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내에는 노르웨이 국민정부(이하 크비슬링 정권)가 수립되었고, 노르웨이 자치 정부의 총리로 임명된 비드쿤 크비슬링은 적극적으로 나치에 협력했다. 노르웨이 청년들을 독일군에 보냈으며, 반항적인 인사를 숙청하고, 노르웨이의 유대인들은 나치에 넘겨주어 노르웨이에 있는 유대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1942년 9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조사에 따르면, 노르웨이 국민의 '''95%'''가 크비슬링에 반대한다고 나왔다. 노르웨인 민중은 크비슬링과 독일에 저항하기 시작했고 곳곳에서 독일에 항거하는 테러가 벌어지자 나치의 노르웨이 주재 국가판무관이었던 요제프 테르보펜은 크비슬링으론 안되겠다고 판단, 크비슬링을 통치 행위에서 배제하고 노르웨이 주둔군 사령관 팔켄호르스트와 함께 노르웨이를 직접 통치했다. 이때부터 노르웨이의 경찰력은 무력화되고 게슈타포들이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크비슬링은 히틀러에게 권력을 더 달라고 징징대긴 했으나 그 이후로도 여전히 독일에 충실히 협력했다. 하지만 이는 크비슬링에 대한 적대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1943년 8월 군나르 에일리프센이란 형사가 크비슬링 정부의 노동법을 위반한 두 여자를 체포하길 거부하여 8월 9일 체포되었다. 테르보펜이 이 형사에 대한 처벌을 요구, 만약 노르웨이 정부가 나서지 않는다면 자신의 군대가 나설 것이라고 위협했다. 크비슬링은 8월 14일 1902년 군법을 소급 확장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려 경찰에게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도록 법을 고쳤고 에일리프센을 인민법정에 세운 후 처형했다. 이렇게 파시즘적 독재를 펼친 크비슬링에 대해 전 노르웨이는 분노하였다.

2.4. 몰락과 죽음


"내가 한 일이 진정 반역이라면, 조국을 위해 신께 기도하겠습니다. 노르웨이의 젊은이들이 나처럼 반역자가 되기를! 그렇지만 감옥에는 가지 않기를!"

1945년 9월 7일, 크비슬링의 최후 진술.

이후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이 밀려나고 노르망디에서 연합군이 상륙하는데도 크비슬링은 히틀러에게 전보를 보내 독일에 대한 충성을 재확인했고 독일의 신무기가 전세를 뒤집을 것이란 망상에 빠져 살았다. 크비슬링 본인은 권력을 모두 잃고 신비주의 사상에 빠져 고향에 돌아가 목사를 하고 싶다고 중얼거리는 수준이었다. 결국 독일이 완전히 몰락하자 크비슬링은 노르웨이 레지스탕스 세력과 협상, 1945년 5월 8일 평화적인 권력 이양에 대해 합의했으나 이 합의는 바로 깨졌고 크비슬링 정권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와 덩달아 멸망한다. 권력을 잃은 크비슬링은 5월 9일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크비슬링은 5월 26일 예심법정에 회부되었고 1940년 4월 9일의 불법 권력 취득, 군대에 대한 불법 해산에 대한 1902년 군민법 상의 반역죄, 전쟁 중 적에게 협력하여 형법 86항을 위반한 죄, 불법으로 헌법을 정지시킨 것에 대한 형법 98항 국가질서 파괴 행위, 에일리프센에 대한 불법 처형 죄로 회부되었다.
크비슬링은 4주에 걸쳐 60쪽에 달하는 반박문을 작성해서 제출했다. 그는 자신이 독일의 공습을 사전에 알지 못했고 군대 해산은 부득이한 조치였으며 자신은 노르웨이의 독립을 지키려고 노력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가 1939년에 히틀러와 만났던 것, 1940년 4월 독일군과 접촉했던 것 등이 그가 간첩이라는 주요한 혐의로 해석되었다. 그가 필히 독일에 군사기밀을 넘겼고 독일이 그것을 바탕으로 공습했을 것이란 것이었다. 거기에 뉘른베르크 재판에 회부된 독일 각료들의 증언이 나오자 노르웨이 검찰은 이를 추가적인 증거로 채택했다. 평소에 매우 비사교적이고 과묵한 것으로 유명했던 크비슬링은 재판정에서 전에 없이 자신의 역사와 철학에 대해서 토해내면서 끝까지 무죄를 강변했고 자신이 독일에 협력한 것은 독일이 건설할 유럽연방에서의 노르웨이의 위치를 사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다. [3]

"저는 바이킹의 무덤들이 있는 곳에서 <성서>에서 나온 이야기와 오래된 무용담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오랜 전통을 지닌 가문에서 태어나 늘 가문에 대한 자긍심과 민족적 책임감을 가지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비요르손과 입센 역시 저와 같은 가문으로, 제게는 무척 친숙한 사람들입니다. 크비슬링이라는 이름의 기원은 외래어가 아니라 고대 북유럽인의 이름으로, 왕족의 한 분파입니다. 이름의 첫 글자인 Q는 고대 룬 문자로 보호를 의미합니다.[4]

저는 이러한 배경에서,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슴에 품으며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처칠의 노르웨이 침공 시도는 아직 증명되지 않은 사안이었고 크비슬링 본인의 건강이 크게 나빠서 제대로 된 발언을 하지 못했으며 그가 쿠데타 시도, 독일정부와의 접촉 등에서 한 발언은 크게 불리하게 적용되었음에도 그는 재판이 잘 되었다고 착각했다. 크비슬링에 대한 증오와 적대는 엄청나서 크비슬링의 경호원들은 만약 정부가 그를 사형시키지 않으면 자신들이 그를 죽이겠다고 외치고 있을 정도였다. 이러다가 참모본부 장군 할보르 한손, 빌헬름 울만, 노르웨이 군 최고 사령관 오토 루게 등이 전쟁 전의 크비슬링에 관한 유리한 증언을 하자 결국 크비슬링이 정신병에 걸려 독일에 협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검사 결과 정상으로 드러났다. 크비슬링에겐 9월 10일 사형이 선고되었고 크비슬링은 항소했다. 크비슬링은 10월 9일 대법원에서 다시 연설했다.

"원한다면 사형선고를 내려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노르웨이 국민 전체가 살인죄를 짊어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사형이나 징역을 선고받을 만한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친척이 걱정되고, 노르웨이 국민이 걱정돼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10월 13일 항소는 기각되었고 크비슬링은 자신의 우주주의 이론을 요약한 글을 집필하고 성경을 읽으며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크비슬링은 마지막으로 국왕에게 편지를 보내 사형이 불법이라 주장했으나 10월 23일 노르웨이 왕실은 특별사면같은 것은 없을 것이라고 싸늘하게 답변했다. 10월 23일 저녁 7시, 교도소의 목사가 찾아와 자정에 사형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크비슬링은 마지막으로 아내를 보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거부되었다. 사형은 덴마크 경찰청장의 비행기가 연착되어서 2시로 연기되었고 목사가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을 읽어주었다. 크비슬링은 눈가리개를 씌우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으나 변호사가 규정상 안된다고 거절했다. 10월 24일 새벽 2시 40분, 총살대가 배치되었고 크비슬링은 끝까지 무죄를 외치다가 총살되었다. 크비슬링 정부의 핵심인사 25명 또한 사형당했다. 그러나 당시 노르웨이에서는 사형을 집행할 때 총살형이 없었는데 크비슬링의 재판 때문에 다시 총살형을 부활시킨 것을 두고 몇몇 사람들은 재판의 공정성에 대해서 비판하기도 했다.

3. 여담


  • 이 사람의 성인 "크비슬링"이 모국인 노르웨이 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수출되어 배신자, 반역자를 뜻하는 단어로 쓰이기에 이르렀다. 그 시초는 1940년 4월 9일 타임스의 기사로, 그가 몰락하기 전부터였다.[5] 또 다른 사례로는 "베를린을 방문한 비드쿤 크비슬링"이라는 제목의 풍자 만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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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드쿤 크비슬링 : 총통 각하, 제가 크비슬링입니다.'''

'''히틀러 : 그럼 이름은 뭔가?'''

비드쿤 크비슬링은 자기 이름을 말했는데, 히틀러는 저 말을 "반역자"라는 말로 알아들었다는 만평이다.
  • 노르웨이에서는 적군을 도와서 부역을 한 노르웨이 사람들을 크비슬링이라고 부른다.
  • 크비슬링이 만든 국민연합당의 상징이 원 안에 십자가가 들어간 일명 '태양십자'(solkors)였기 때문에, 현대에도 노르웨이에는 'solkors'란 단어는 'hakekors'의 동의어로 통한다.
  • 비트쿤 크비슬링이 독재자 자리에 있을 때 크비슬링과 친하게 지내려고 노르웨이의 매국노들이 그에게 많은 뇌물을 보냈지만 그는 그렇게까지 사치스럽게 살지는 않았다고 한다.
  • 그가 아내와 함께 살았던 오슬로 외곽의 큰 저택은 홀로코스트와 소수 종교 연구를 위한 노르웨이 센터로 바뀌어 사용되고 있다.

4. 매체에서


  • 하츠 오브 아이언 시리즈에서 스칸디나비아 지역에 추축국의 괴뢰국을 세우거나 노르웨이에서 파시스트 정당이 집권하면 이 사람이 국가 원수로 등장하는데 이놈은 능력치가 심히 구리다.
  • 세계대전Z에서 좀비의 흉내를 내는 인간을 두고 퀴즐링이라고 부르는데, 어원은 당연히 이 사람.

5. 둘러보기



[1] 한국에서는 영어식 발음으로 "비드군 퀴슬링"이라고 적기도 한다.[2] 극초기에는 이랬지만, 반유대주의 친나치 성향을 드러낸 이후 반기독교 성향으로 선회했다.[3] 검찰은 이 시도 자체가 유죄라고 보았다.[4] 사족으로 그의 주장과 달리 룬 문자에는 공식적으로 'Q'에 해당하는 글자가 없다.[5] 멀리 볼 것 없이 영어부터 매국노는 quisling이라고 한다. 그 밖에 스웨덴어, 네덜란드어 등에도 수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