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경(삼국지)
1. 王經
(? ~ 260년)
1.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자는 언위(彦緯). 기주 청하군 출신.
서진을 세운 사마염의 아버지 사마소에게 대항했기 때문에 서진 시대에 진수가 쓴 《정사 삼국지》 〈위서〉에는 그의 열전이 없다. 그래서 그의 일대기는 정사 삼국지 삼소제기, 제하후조전, 진서위노전, 방기전과 배송지 주석으로 인용된 《한진춘추》, 《위진세어》, 《진제공찬》 등에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1.2. 생애
1.2.1. 초기 생애
본래 농민이었음에도 기주에 이름을 떨쳐 동향인 최림에게 발탁되었다가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을 때 이상한 일이 있어 관로에게 점을 봐달라고 했는데, 과연 그의 말대로 강하태수로 임명되어 다시 관직으로 돌아가게 된다. 강하태수가 되면서 조상이 비단을 주고 오나라와 장사하도록 명령했는데, 왕경은 관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이 일을 이야기했다가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어머니에게 매 50대를 맞았고 이 일을 안 조상이 왕경에게 다시는 죄를 주지 않았다.
그가 처음으로 군수가 되자 왕경의 어머니는
하지만 어머니의 기대와는 다르게 왕경은 계속 승진해 두 개의 자사로를 지냈다가 사례교위까지 승진한다.너는 농민의 아들로서 지금 2천 석을 받는 군수의 자리에 임명되었다. 재물이 지나치게 많으면 좋지 않으니, 너는 여기서 멈출 수 있어야 한다.
1.2.2. 강유의 4차 북벌
255년 8월 2일에 옹주자사를 지낼 때 진태에게 강유와 하후패가 세 갈래의 군사를 나눠 침공한다고 보고하는데, 진태는 그들의 군사가 합치기를 기다려 적도에서 싸우라고 하니 조서에서 그와 싸웠으나 크게 패해 수만명의 병사를 잃고[1] 적도성에서 포위당한 것을 진태와 등애의 도움으로 겨우 벗어난다.
그리고 왕경은 "식량은 열흘분도 못 남았습니다. 만일 때에 이르러 구원병이 오지 않았다면 성을 들어 궤멸해 옹주를 잃게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감사의 말을 나타냈으며, 다른 위나라 장수들이 그들을 쫓아낸 뒤에 사람들이 이걸로 강유가 다시 올 수 없을 것이라고 하자 등애가 "왕경이 너무 크게 패해서 다시 올 것이다."라고 하니 과연 등애의 말대로 강유는 다시 공격했다.
1.2.3. 사마소 시군
감로 연간(256 ~ 260년)에 상서로 승진했으며, 260년 5월에 조모가 왕경, 왕업, 왕침을 불러 노란 비단에 쓴 조서를 보여주면서 사마소를 죽일 것을 꾀하니 왕경은 너무 무모하다고 말리나 조모는 오히려 죽어도 한이 없다며 자신의 뜻을 밝힌다. 왕업과 왕침은 그 계획을 듣고 왕경을 설득해 함께 사마소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려고 하나 왕경이 거부하니 그대로 사마소에게 보고해서 조모는 전사하고 왕경 또한 태후의 조서에 따라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정위에 넘겨져 반역죄로 처형된다. 곽태후가 사마소의 강압으로 내린 조서에서 조모가 태후를 치려고 하다 죽은 것으로 조작됐으니 이걸 도운 것으로 같이 조작된 꼴인 왕경이 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사로잡힐 때 예전에 어머니가 자신에게 했던 자중할 줄 알아야한다는 조언을 기억해내 어머니에게 사과했다.
어림에 따르면 나중에 상서가 되어 위나라를 도우면서 진나라에 불충하여 체포당하자, 눈물을 흘리면서 어머니와 이별하며 말했다.
어머니는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 없이 그에게 말했다.한스럽게도 지난 날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가 오늘과 같은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보면 알겠지만 정사에서 왕경만 죽고 왕경의 어머니는 죽었단 언급이 없다. 하지만 왕경의 일족도 같이 체포되었고, 역모죄는 삼족이 멸해지므로 어머니도 함께 죽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왕경의 모친은 이와같이 현명하면서도 기개가 있는 여장부였던 것으로 묘사된다.너는 자식으로서 효도하고 신하로서 충성했으니, 무슨 저버린 일이 있겠느냐!
연의에선 이 부분이 더욱 드라마틱하게 묘사한다.
그 후 상웅은 그를 위해 곡을 하고 옹주자사 시절의 관리 황보안은 사재를 털어 제사를 지내줬다. 이 후 265년에 서진 무제 사마염은 조서를 내려 왕경의 손자를 낭중에 임명했다.
1.3. 미디어 믹스
1.3.1.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시리즈에 등장한다. 삼국지 4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70/61/68/73. 제사, 조영, 매도, 고무를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선 어째 능력치가 만능형이면서 문관쪽에 가깝다. 64/62/67/75/77. 정치는 무난하지만 내정형 특기는 없고 가장 높은 것은 매력인데 후기 시나리오엔 등용할 만한 장수도 거의 없어서 효용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그렇다고 60대 통솔로 전장에서 활약하는 것을 바라는것도 무리. 최림에게 발탁된걸 반영해서 명사 특기가 있다. 전체적으로 특기는 고무, 반목, 명사. 총 3개다.
삼국지 12에선 짤렸다가 PK에서 추가되었는데, 지력이 70대 초반인데도 군사 특기가 있어 비책을 쓸 수 있다. 일러스트는 손을 흔들어 조모를 말리고 있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무지정 순으로 67/63/71/75. 특기는 농업 2, 순찰 1. 전수특기는 농업이며 전법은 기병속공진.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65, 무력 63, 지력 68, 정치 75, 매력 77로 전작에 비해 통솔력이 2, 지력이 3 하락했다. 개성은 명성, 주의는 예교, 정책은 안행강화 Lv 3, 진형은 봉시, 안행, 전법은 제사, 철벽, 진정, 친애무장은 조모, 최림, 혐오무장은 없다.
1.3.2. 진삼국무쌍 시리즈
[image]
진삼국무쌍 블라스트에도 등장했다.
1.3.3. 삼국전투기
삼국전투기에서는 조모가 그라함 에이커로 나옴에 따라 그를 따르던 대릴 더치로 패러디 되었다. 마찬가지로 왕업과 왕침이 같은 그라함의 부하인 하워드 메이슨과 조슈아 에드워드로 나왔는데 이들이 조모를 배신하는 와중에 왕경만 끝까지 조모를 따른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
1.3.4. 84부작 삼국지
81화에서 등장. 정사나 연의에 나온 행적과 같으면서도 묘하게 다르게 나온다. 연기하는 배우가 나이가 많다보니 자연히 왕경도 늙게 나왔으며, 그에 따라 그의 어머니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저 조모의 장례식에서 크게 절을 하고 사마소를 훑어보고는 크게 웃으면서 나가는 것이 전부. 또한 254년의 강유와의 전투 또한 삭제되었다.
2. 王卿
(176 ~ 248)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자는 덕언(德彦).
동래군 황현 사람으로 장잠현의 현장을 지냈고 248년에 73세로 사망했다.
이 인물에 대한 무덤이 1962년에 발견되어 북한에서 1962년에 조사한 바가 있으나 정식 보고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낙랑 지역은 기록상 후한 초기부터 왕씨가 보이는데, 중국의 2 ~ 4세기 서북조선전실묘초보연구라는 논문에 따르면 서북 조선 지역에서 출토된 명문이 기록된 묘의 벽돌에서 왕씨, 한씨, 오씨, 손씨 등의 성씨가 발견된 것을 이야기하면서 평양 대동강 남안에 위치한 낙랑에서 출토된 것에서도 인명이 모두 한인의 성씨이며, 왕씨와 한씨는 낙랑의 한인 호족일 것이라 했다.
한국해양사라는 책에 따르면 3 ~ 4세기 대방군의 남쪽 경계는 예성강이라는 학설이 한국학계에서 일찍이 제시되어 한국, 일본에서 많은 학자들이 이를 추종했는데, 이들의 견해에 따르면 대수는 서흥강, 함자현은 황해도 서흥, 대방은 황해도 봉산 일대, 장잠현은 풍천군 일대로 보았다. 왕경의 무덤 벽돌이 대방태수 장무이의 벽돌, 일민함자왕군 벽돌 등과 함께 이에 대한 증거라 했다.
[1] 10여 년이란 텀이 있기에 어느 정도 물갈이가 됐겠지만 그래도 이때 왕경이 이끄는 옹주방위군은 과거 낙곡대전에서 조상 본대가 위험에 처하자 독자적으로 철군을 감행한 곽회의 현명한 판단으로 운 좋게 보존된 3만의 옹주군과 대략적으로 일치할 것이다. 즉 전임 옹주자사 곽회가 보존한 옹주군을 후임 왕경이 수만명의 전사자가 났다는 강유와의 조수전투를 통해 다 날려먹었을 공산이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