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태

 



陳泰
(? ~ 260)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
2.2. 강유의 1차 북벌
2.3. 강유의 2.5차 북벌
2.4. 강유의 3차 북벌
2.5. 강유의 4차 북벌
2.6. 사마소의 양신
2.7. 조모 시해 사건
2.8. 죽음
3. 미디어 믹스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무장. 자는 현백(玄伯). 영천군 허창 사람. 진군의 아들이자 순욱의 외손자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집안 배경뿐만 아니라 능력과 인품도 출중했던 엘리트로 출사 후 승승장구하여 병주자사, 진위장군, 흉노중랑장 등을 역임했다. 관대하고 균형감 있는 통치로 수완을 발휘해 흉노인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부전자전이라고 아버지처럼 매우 강직하고 청렴한 인물이었다. 가문이 가문이었던지라 여기저기서 선물이 많이 들어왔었는데 이를 손대지 않고 발신자만 기록해 둔 다음, 상서로 승진하여 낙양에 돌아오자 이를 모두 다 돌려보냈다.

2.2. 강유의 1차 북벌


249년, 강유를 중심으로 촉군이 옹주로 침공해오자 정서장군 곽회는 당시 옹주자사, 분위장군였던 진태와 더불어 적을 제어할 방법을 상의한다. 진태는 촉군이 의지하는 국성(촉군이 국산에 쌓은 두 개의 성)은 험한 산에 의지하고 견고하게 지어져 직접 공격하기는 어려우나 물자 수송이 어렵고 물 공급도 미비하니 국성의 보급을 끊자는 계책을 낸다.
진태는 서질등애 등을 인솔하여 국성을 포위하고 성내의 군량과 물 보급을 끊었다. 성을 지키던 구안(句安)과 이흠(李歆) 등은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틴다.
강유가 국성을 구원하러 오기 위해 우두산에서 나와서 진태와 서로 대치했는데 진태는 군사들에게 보루를 견고하게 하고 적과 싸우지 말도록 했다. 그리고선 곽회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주소로 진군하게하여 강유의 퇴로를 끊도록 했다. 이 계책은 성공하여 강유는 도주하였고, 구원을 받지 못한 국성의 구안과 이흠은 결국 위군에 투항한다.

2.3. 강유의 2.5차 북벌


삼국지연의에서는 진태가 강유의 2차 북벌에서도 대응하는데 이는 허구이다.
강유전에 따르면 253년 여름, 강유가 수만 명을 이끌고 석영으로 출병하여 동정을 거쳐 남안(南安)을 포위한다. 옹주자사 진태가 포위를 풀기 위해 낙문(洛門)에 도착하였고 강유는 군량이 다하여 퇴각한다.
이것이 강유의 2.5차 북벌로 공식적인 북벌로는 카운트하지 않는다. 강유의 3차 북벌은 따로 있다.

2.4. 강유의 3차 북벌


254년 6월에 농서를 공격해 들어온 강유는 10월, 대 촉한용 정예 기병대가 포함된 정촉호군을 격파하고 지휘관인 서질의 목을 베는 데 성공한다. 강유가 승세를 타 항복시킨 곳이 많았고 적도현, 하관현, 임도현의 세 현의 많은 성들을 함락시킨다. 그리고 옹주자사 진태가 도착하기 전 퇴각한다.

2.5. 강유의 4차 북벌


곽회 사후에 진태는 정서장군, 가절도독옹양제군사가 되어 옹주와 양주의 군권을 관할하며 촉군의 공격을 막게 된다.
255년, 옹주자사 왕경에게서 촉이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기산, 금성, 석영 쪽으로 공격해올 것이라는 보고를 받은 그는 촉군 전력이 삼분해도 좋을 만큼 강하지 않다고 판단, 반드시 한 방향으로만 주력을 투입할 것이라 예상한다. 그래서 왕경에게는 농서로 통하는 길을 지키게 하고 상규에는 등애를 주둔시킨 후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진창으로 향하여 진로가 명백해지는 대로 촉군을 함께 협격하기로 했다.
그런데 왕경은 강유에게 참패하여 패잔병을 이끌고 적도성으로 들어갔고 강유군은 적도성을 포위한다. 등애, 호분 등은 승세를 탄 촉군과의 전투를 피해 적도를 내어주고 농우와 관중의 수비를 강화한 후 반격으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진태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고 강유가 승기를 타서 더 진군한다면 사태가 훨씬 심각해질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강유의 군대가 무장을 가볍게 하기 위해 물자나 병기를 얼마 데려가지 않은 점을 상기시키며 적도성이 버티는 동안 조속히 공격하면 강유는 퇴각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견해를 내었다.
진태는 평소 전쟁에 관한 일은 과장이 쉽게된다며 간략하게 보고했다. 진태는 표를 올려 군사들을 급히 적도성으로 달려가게 했다. 이 전투의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은 조정의 신하들의 견해는 적도성이 함락될 것은 뻔하고 강유가 농우를 멸망시킬 수 있다며 부정적이었다. 차라리 대군이 사방에서 모이길 기다린 후에 강유를 공격해야 한다고 의견을 내었다.
사마소만은 견해가 달랐고 갑자기 강유를 디스(?)한다.

옛날 제갈량은 항상 이러한 뜻을 품고 있었지만, 끝까지 실현할 수 없었소. 이처럼 큰 사업과 계책은 강유에게 맡길만한 일이 아니오.

또한 적도성은 쉽게 함락시키긴 힘드나 식량이 적으니 진태가 신속히 구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진태는 험난한 산을 넘는데 그의 예상대로 강유가 3일 간 복병을 배치해 놓았었다. 진태의 군대는 몰래 행군하여 고성령을 넘고 적도의 동남쪽에 있는 고산 위에서 많은 봉화를 밝히고 북과 호각을 울렸다. 이렇게 진태가 구원병이 온 것을 과시하자 적도성 안의 위군은 사기가 증진되었고 촉군은 적의 구원병이 벌써오니 위군이 미리 계책을 준비했다고 생각하며 두려워했다.[1]
진태의 군대가 갑자기 적도 남쪽에서 나타나자 강유는 일부 군사를 인솔하여 산을 타고 진태의 군사를 습격했으나 이미 고지에 자리잡은 진태에게 이길 수 없어 돌아갔다.
설상가상으로 양주의 위군까지 금성을 지나 적도로 오고 있었고 진태와 왕경이 비밀리에 날짜를 정하고 함께 강유의 퇴로를 막으려고 하자 이 계획을 들은 강유군은 즉시 퇴각했다. 구원받은 왕경은 "식량은 열흘분도 못 남았습니다. 만일 때에 이르러 구원병이 오지 않았다면 성을 들어 궤멸해 옹주를 잃게 되었을 것입니다."라며 진태에게 감사해한다.
진태는 지친 옹주군을 후방으로 돌리고 건실한 병사들을 전방으로 교체했다. 또한 성과 보루를 수리하도록 하고 자신은 상규로 돌아갔다.
사마소는 다음과 같은 말로 진태를 칭찬한다.

진현백은 침착하고 용감하며 과단성을 갖추어 방백의 중책을 맡았다. 공략당할 성을 구원하면서 병사들의 증원을 요구하지도 않고 사건을 보고하는 것도 드물었으니 반드시 적을 조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진태는 사마소에게 큰 신임을 받게된다.

2.6. 사마소의 양신


후에 진태는 승진하여 상서우복야가 되었고, 관리 선발을 관장하며 시중관록대부의 관직이 더해졌다. 이전처럼 전선의 지휘관이 아닌 중앙 조정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오나라의 손준이 침공하자 진태는 진남장군과 가절도독회북제군사로 삼아지고 군사들을 지휘했다. 손준이 퇴각하자 진태 또한 군사를 돌아가게 했고 좌복야로 전임되었다.
제갈탄이 수춘에서 난을 일으켰을 때도 진태는 사마소를 따라 군사를 통솔했다.
사마사, 사마소, 무해 모두 진태와 좋은 관계였는데 사마소가 무해에게 진태와 아버지인 진군을 비교하면 어떻냐고 묻자 무해는 국가의 위엄과 교화를 펼치는 것은 진태가 진군만 못하지만 통솔력을 가지고 간략하게 해 공을 세워 일을 완성하는 것에서는 진태가 진군보다 뛰어나다고 했다. 즉 아버지인 진군이 문(文) 측면에서 위에 도움이 되었다면 그는 무(武) 측면에서 공헌한 셈이다.

2.7. 조모 시해 사건


진태전에 주석으로 달린 간보의 진기에 따르면 260년, 황제 조모가 살해당했을 때에는 진태와 사마부 두 명만 조모를 추모했다. [2]
간보의 진기에 따르면 사마소가 조정의 신하들을 불러 그 대책을 논의했는데 태상 진태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의 외숙[3] 순의에게 그를 불러 참석 여부를 알아보게 했다. 진태가 말하길 "세상의 논자들은 저를 외숙께 견주고 있습니다만 지금은 외숙께서 저만 못합니다."라고 했다. 이는 자신의 외숙부이자 순욱의 아들인 순의가 사마소 편을 들자 "'''외숙부는 나보다 못난 인간이 되었다.'''"라며 한탄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제와 내외 친족들이 모두 그에게 참석하라고 강요하자 눈물을 흘리면서 조정으로 들어갔다. 민심 이반을 우려한 사마소는 밀실에서 진태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소'라고 물었다. 이에 진태는 '가충을 처형하는게 그나마 천하에 사과하는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가충은 사마소의 밀명을 받고 성제를 시켜 조모를 시해했으니 사마소에게 가충을 죽이라는 것은 "네가 잘못했음"이라고 인정하라는 것과 똑같은 말이었다. 그 서슬 퍼런 상황에서 사마소의 편을 들지 않았던 것이다. 사마소도 크게 찔렸는지 진태에게 "그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겠소?"라고 물었다. 그러나 진태는 "'''그 이상은 있지만''' 그 이하의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라고 타협을 거절했다.
진태전에 주석으로 달린 위씨춘추에 따르면 조모가 죽자 사마부와 상서좌복야[4] 진태는 그의 시신 앞에서 드러누우며 곡을 애달프게 했다. 이 모습을 사마소가 보고 자기도 같이 옆에서 같이 곡을 하며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라고 말한다. 여기서는 좀 더 직설적으로 "가충을 참한다면 '''오히려 자신의 떳떳함을 지킬 수는 있을 것입니다.'''"라고 한다. 사마소가 다른 방법은 없냐고 하자 진태는 "저에게 다시 그 다음 말을 하게 하시렵니까?"라고 말하고선 피를 토하고 죽었다.
세설신어에 인용된 한진춘추에 따르면 사마소가 황제의 시해 소식을 듣고 몸을 땅에 내던지면서 "천하 사람들이 나를 어찌보겠는가"라고 말한 후 백관을 불러 이 일을 논의했는데 진태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내가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묻자 진태가 "그동안 공이 몇대에 걸쳐서 공로를 드높였는데 '''이제 황제를 시해했으니''' 속히 가충을 죽이면 오히려 자신의 떳떳함을 지킬 수 있을겁니다."라고 대답한다. 이에 사마소가 "공려(가충)을 죽일순 없으니 다른 계책을 생각해달라."라고 하자 진태가 대갈일성으로 "오직 그 이상의 방법만 있을 뿐이니 그것 외엔 권해드릴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고 집에 돌아와서 자결했다고 한다.
공통된 기록에서 진태는 가충을 처벌하지 않을거면 그 이상의 방법밖엔 없다고 철저하게 선을 긋는다. 여기서 가충 처형 이상의 방법이라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 '''사마소의 목숨 뿐이라는 의미다.''' 사마씨의 양신이라고 여겨졌던 그가 사마씨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리자 결국엔 사마씨와 완전히 척을 저버리게 된 것이다. 이 일로 원한을 가졌을 가충은 둘째치고 사실 사마소부터가 그동안 자신의 양신이었다고 하여 이런 얘기를 듣고도 그냥 넘어갈 사람(진태보다 훨씬 온건한 말을 했다가 결국 일족이 풍비박산난 등애의 예를 봐도 그렇듯.)은 아니었고, 사마소가 가충을 처벌하지 않아 그 책임을 회피함으로서 진태의 운명도 조위 왕조의 운명과 함께 결정되었다.[5]
아버지 진군이 한을 버리고 위를 세우고 진태 본인은 사실상의 위의 멸망에 목숨을 함께 한 셈인데, 이는 한을 끝까지 보위하다 죽은 외조부 순욱과 위를 버리고 진의 건국에 앞장선 그의 아들 순의의 행적과 흥미로운 대비를 보인다. 에 충성한 진군/진태 부자와 를 배척한 순욱/순의 부자, 혹은 망국에 피를 토한 아버지 순욱/아들 진태와 망국에 앞장선 아버지 진군/아들 순의. 이들 두 쌍, 네 부자의 모습은 후한말부터 수나라의 통일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사회붕괴 상황에서 당대 지식인들이 처한 아노미상태와 그 해결과정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국가관 및 가치관[6]의 대립 양태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비슷하게 진태가 가충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고 그 다음은 없다라고 하자 사마소가 다시 묻지 않았다고 했다.
배송지는 진태는 태상이 아닌데 간보는 진태가 태상이라고 적었으니 이상하고 손성이 진태의 말을 고쳤으나 조금 나아진 것 뿐이라고 했다. 또한 손성은 다르게 들은 것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면서 스스로 의미를 판가름하여 고쳐서 내용이 더 나빠졌다고 손성의 태도를 비판했다.
박물기에 따르면 진식-진기-진군-진태 네 세대는 모두 조정에서 명성이 높았으나 덕이 점차 줄어들었고 당시 사람이 말하길 그들은 서로 자기 아버지에게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2.8. 죽음


얼마 후 동일한 해인 260년에 사망하였다. 사공으로 추증되고 목후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진태가 가충을 죽여야 한다며 사마씨 정권을 비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기에, 사마씨가 진태를 은밀히 제거했거나 진태가 자살한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 많다. 진태의 죽은 시점이 워낙 절묘한 데다가 전해지는 기록들도 그걸 뒷받침하고 있다. (당장 위에 나와 있는 위씨춘추에도 사마소가 책임을 회피하려하자 울분을 토하다 죽었다고 나온다.)

3. 미디어 믹스



3.1.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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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회 부장으로 등장하여 60권에서 촉과 대치한다.

3.2. 삼국지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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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삼국지
삼국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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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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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4
코에이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문무(文武)를 겸비한 만능 무장. 보통 그가 등장하는 유비 사후인 후기 시나리오에서는 진태만한 인재를 찾아보기 힘들다.[7] 통솔력과 지력은 80대 중반을 넘기고 다른 능력치도 70대를 찍는 만능형. 군사 통솔이나 내정 양쪽에서 골고루 일할 수 있다. 삼국지 2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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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변화가 심한데, 삼국지 6에서의 인물 일러스트는 거의 악몽 수준. 삼국지 5의 일러스트를 그대로 가져다가 16비트화 시키려는 도중에 작업 시간이 부족했는지 완전 발로 그린 게 티가 날 정도로 조악하기 짝이 없다.
삼국지 7에서는 일러스트가 '젊고 능력있는 장군'으로 나왔다. 그러나 이 일러스트는 8탄까지 우려먹고 개성이 없다.
삼국지 9에서는 삭아보이고 어색한 일러스트로 나왔다. 능력치는 통솔력 87/무력 78/지력 87/정치력 77로 A급 장수. 병법도 분투, 돌파, 연사, 정란, 투석, 조영, 교사를 가지고 있다. 후반기에 찾기 힘든 인재. 흠이라면 모략계나 책략계 병법이 없고 숙련도만 있기 때문에 수련을 보내지 않으면 87의 지력을 직접 써먹기는 좋지 않다는 것. PK라면 어차피 진태의 능력도 출중하니까 한두 번쯤 진태에게 발탁 장수를 돌려다가 병법 연마를 해보는 것도 좋다. 전병법 특기이기도 해서 발탁 장수랑 사이좋게 상위 병법도 마스터할 수 있다.
삼국지 10에서는 일러스트가 유일하게 수염을 달고 나왔고 제법 간지난다. 능력치는 통솔력 85/무력 73/지력 85/정치력 75/매력 75로 뭐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A급 캐릭. 능력치 총합 393은 모든 장수를 통틀어서도 원소와 동급인 공동 25위이며, 특기는 15개에(기술, 징병, 화시, 일제, 진정, 은밀, 반목, 유인, 지리, 회복, 위압, 반박, 군사, 명사, 간첩) 군사, 명사 특기를 모두 가지고 있다.
삼국지 11의 일러스트는 다시 '젊고 능력있는 장군'의 이미지를 아주 철철 뿜어낸다. 능력치는 통솔력 84/무력 73/지력 86/정치력 78/매력 77[8]으로 여전히 좋지만 특기가 잉여인 정묘. 그래도 창병 S 등, 병종 적성이 나쁘지 않다는 것이 위안이다.
삼국지 12의 일러스트는 육항과 같이 실망스러운 일러스트로 나왔다. 자세히 보면 말을 타고 고삐를 쥔 채 왼손을 가슴에 올리고 있다. 게다가 전법도 육항과 같다. 능력치는 무력이 77로 올라갔고 매력이 삭제된 것을 제외하면 삼국지 11 때와 같다. 하지만 전법이 매우 쓸 만한 궁군강사이기 때문에 후반기 위나라 무장 중 A급 이상의 화력을 자랑한다. 전법이 궁군강사이고 군사 특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대촉전선을 지키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던 곽회와 같다.
삼국지 13에서의 전법은 범위 내 방어 +3, 사기 +1, 사기 유지의 철벽지휘로 가성비가 매우 좋다. 능력치는 삼국지 12 때와 같고 아쉽게도 중신 특성은 없다. 전수특기는 훈련. 병과 적성은 모두 A. 보유 특기는 상업 2/ 문화 1/ 훈련 6/ 순찰 5/ 신속 6/ 분전 2/ 공성 3/ 견수 6의 만능 무장. 단, 등장 시기가 늦어 영웅집결 외에는 보기 힘든 장수 중 한 명이다. 물론 사실 시나리오로 그쯤되면 성에 5명 채우기도 벅찬 수준으로 인재 수가 막장이고 A급 무장도 거의 남지 않는 상황이라 활용도는 굉장히 높은 편이다.
삼국지 14에서는 일러스트가 10때 처럼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돌아왔으며 능력치는 통솔 84, 무력 73, 지력 86, 정치 78, 매력 77로 전작에 비해 무력이 4 하락했다. 개성은 산전, 침착, 해제, 명성, 주의는 왕도, 정책은 군제개혁 Lv 4, 진형은 어린, 학익, 장사, 충차, 전법은 분전, 격려, 업화, 진정, 충차, 친애무장은 등애, 부하, 사마사, 사마소, 순의, 혐오무장은 없다. 이번 작 영웅집결에서는 같이 강유의 북벌을 막았던 동지였던 등애와 한솥밥을 먹고 있다. 내정에서는 점령을 빠르게 해 주는 명성 특기가 있고 능력치가 고루 높아 지역담당관으로 아주 쓸만하며, 전장에서는 업화를 가지고 있고 지력이 높은 편이라서 괜찮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 작품에서도 S급은 아니지만 전투, 내정 모두 A급으로는 활용이 가능한 장수. 사실 시나리오에서 등장 시기나, 영웅집결에서 등애 본인 외에는 쓸 만한 장수가 없는 등애군임을 감안하면 위상은 더더욱 높아진다. 여담으로 진등과 같은 성을 가진 무장 중에서 통솔력, 매력이 제일 높다.

3.3.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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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는 김태영.
연의에서는 등애전 첫 전투 출진 가능하고 그 외엔 강유전 등에서 적으로 가끔 등장한다.
도독 중 유이하게 일치단결과 책략 모방 특성을 둘 다 가지고 있다.[9] 그 본인도 책략 딜러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책략 위주의 공격대에서 메인 서포터 역할을 맡았다. 특히나 가장 유행을 탔을 때는 폭풍기 메타 시절이었는데, 일치단결로 아군 책딜러의 정신력을 올려줌과 동시에 본인도 무귀보도나 삼황보도(도성)를 들고 책략 모방으로 폭풍을 복사할 수 있다는 점 덕분에 마딜 메타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서브딜러 중 하나였다.
폭풍 너프 이후로는 한동안 섬멸전에서는 사장되었지만 그 대신 사신 청룡전의 메인 서포터 겸 딜러로 사용된다. 일치단결로 아군 전원의 정신력을 21% 올려주고 본인도 책략 모방으로 구원군, 대각성 등을 자유롭게 구사하면서 플레이에 안정성을 줄 수 있다. 추후 이 역할은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책략 명중률이 더 높은 왕전과 책략 피해량이 더 높은 창평군에게 이어진다.
2020년 기준 경쟁전에서는 6성 전포인 낙구와 피해감소 보패를 맞춘 귀면문 진태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책략모방으로 풍수사의 버프도 돌리고 각종 피해감소와 일치단결을 통한 스탯 버프의 시너지로 무지막지 한 귀면문 탱킹을 하면서 붙어있는 아군들도 일치단결 버프로 순발력 상승을 통한 선공권을 가져와서 유리하게 플래이 하는 것. 상위호환인 왕전에 비해 진태의 코스트는 18로 왕전보다 5 코스트가 낮아서 덱 꾸리기 한결 수월하여 대체 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카운터로는 사마의 풍룡 미사일 등이 사용된다.

3.4. 삼국전투기


아버지 진군이 의 칼 프레드릭슨으로 나와서 그런지, 러셀로 나왔다. 그래서인지 삼국지 6 일러스트와도 꽤 닮았다. 덤으로 존댓말 캐릭터. 거기에 "헤엥~"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런데 고관 전투(3)에서는 그에게 치킨, 등번호 99, '괴물'이란 대사 등 류현진을 나타내는 요소가 추가된 것을 볼 수 있다. 강유의 공세에 맞선 뛰어난 대응은 물론이고 두 캐릭터의 체구의 유사성까지 아울러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정사대로 260년에 갑작스럽게 죽었다고 서술되었는데, 그 전에 가충이 자신의 목을 베라고 사마소에게 진언하는 진태의 말을 엿듣고 분노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래서 앞뒤 정황상 가충이 은밀히 암살한 듯한 느낌을 준다.
[1] 배송지는 촉군은 진태의 구원군이 갑툭튀해서 두려워했다는데 정작 촉군이 복병을 3일이나 배치해놓았는데 구원이 이르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기록된건 이상하다고 본전의 기록을 비판했다.[2] 왕상의 기록을 보면 왕상이 조모의 죽음에 통곡했다고 하며, 왕상의 인물됨을 살펴보았을 때 이러한 기록이 거짓으로 꾸며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런데 어째서 당대에 효덕으로 유명했던 왕상은 언급을 하지않고 진태와 사마부만 추모했다고 기록되었는지 의문이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간단한 이치다. 진태는 목숨을 내놓음으로써 그 충심이 진정임을 증명했다. 사마부는 뒷날보면 가식일 뿐 이지만 어쨌든 조위 마지막 충신이 사마씨에게서 나왔다는 이야기 거리가 되었기에 기억에 강하게 남았다. 반면 '''왕상은 서진 공신이 되어 남은 일생 안락하게 잘먹고 잘 살았다.''' 그러니 그 울음이 어떻게 보였겠는가?[3] 진태가 순의의 사위라는 설도 있는데 이는 구(舅)자가 장인, 시아버지, 외숙이란 뜻을 모두 가져서 오역된 것.[4] 자치통감에서는 위씨춘추의 기록을 따라 당시 진태의 관직을 상서좌복야로 적었다.[5] 단 전해지는 기록을 보면 그의 죽음은 분사나 자살의 느낌도 강하므로 사마소나 가충이 죽였다고 무조건 볼 순 없다. 물론 조모의 시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 사마소인 만큼 사마씨에 대놓고 반한 진태의 운명도 오래가진 못했겠지만...[6] 난세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약간의 수정을 통한 기존질서의 회복, 새 술은 새 부대에, 그런건 모르겠고 자신의 영달 우선. 순욱은 조조를 권신의 반열에 올려서 그 힘으로 후한의 가치를 회복시키고자 했고, 진태도 마찬가지로 권신인 사마씨들에게 협조하면서 조상일파의 폐단을 정리하는데는 동의하되, 꽤 자질이 보이던 조모의 비극적 죽음에는 분개하였다. 진군은 한의 재건으로는 폐단이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 여겼고, 순의는 조위에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것이 목적이었는지 그냥 인성이 글러먹었던 것인지 확실치 않으나 어느쪽이든 간에 세상의 혼란을 잠식시키는데에 관심이 없었다.[7] 무장이 그나마 제일 많은 위의 경우에도 진태보다 무력으로 나은 인재는 열 명이 채 되지 않는 수준이다. 제갈량 사후 시나리오로 가면 장합, 학소 등이 죽고 난 후라 거기서 또 반토막이 난다.[8] 능력치 총합이 398로 곽회와 공동 20위다.[9] 천하일통 패에 왕전이 일치단결과 책략모방을 지닌 도독으로 추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