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의 눈물
전상국의 단편소설
1980년 발표된 소설로 서술자 '이유대'의 시점에서 문제아 '최기표'에게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최기표는 1년을 유급하여 '재수파'라는 패거리를 이끄는 문제아로 임시반장이 되었다는 이유로 '이유대'를 린치한다. 담임 선생은 기표 패거리를 해체하고 기표를 몰락시키기 위한 계략을 꾸미고, 이유대의 친한 친구 '임형우'가 반장을 맡게 된다.
임형우 역시 기표 일당에게 '쓸데없이 간섭한다'라는 이유[1] 로 린치를 당하지만, 그는 이유대와 달리 최기표에게 대항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한다. 그 방법이란 다름아닌 기표가 둘러쓰고 있는 '우상'의 껍데기를 벗겨 버리는 것이다.
형우는 담임과 협력해서 기표의 뒷조사에 착수하고, 그의 불우한 가정 형편을 알아낸다. 그리고 그들은 기표가 무서운 맹수가 아니라 사실은 불우한 학생이었으며, 도움을 바라는 가련한 친구라는 식으로 모금운동까지 하며 새로운 이미지를 덧씌운다. 이것은 기표가 누리고 있던 절대권력을 빼앗는 동시에 그를 반에서 고립시키려는 책략이었다.
매혈까지 해서 돈을 바치게 하며 재수파를 착취하던 기표의 행동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고생하는 기표를 도우려던 친구들의 도움으로 미화되고, 그 외 기표가 벌였던 갖은 악행들은 파묻혀 버린다. 이 이야기는 신문에 퍼져 나가고 급기야 영화로까지 만들어질 조짐을 보이게 된다.
이런 공세에 기표는 통제할 수 없는 무서운 놈에서 불쌍한 놈으로 인식이 바뀌게 되고, 기표는 결국 무력해진다. 그는 보통의 아이들, 혹은 그보다도 더욱 약한 모습을 보이며 점점 위축되다가, 마지막에는 "'''무섭다. 나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라는 내용의 짤막한 편지를 남기고 실종된다. 그리고 담임은 "영화사 직원하고 내일 만나야 하는데 이 망할 새끼가......"라며 신경질을 내며 이야기는 끝난다.
작중 기표라는 인물이 원시적이고 난폭한 악을 상징한다면, 그와 상반되는 인물인 담임선생과 형우는 악을 물리치기 위해 또다른 종류의 악이 된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작중 기표에 대한 서술을 보면 그가 지니고 있는 악성이 특별한 가정 형편에서 비롯되었다거나 불우한 환경 때문이라거나 하는 부분은 전혀 없다.[2] 그는 내내 통제될 수 없는 악성의 소유자로 존재하며, 반대로 괴롭힘을 당하는 학우들은 괴로워하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수동적으로 그의 군림을 받아들인다. 비슷한 내용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보다도 훨씬 더 수동적으로, 주변인들의 모습을 비춰 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실제로 기표가 완전히 몰락했을 때 더욱 강하게 부각되어, 보이지 않는 여론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무서운 힘이 될 수 있는가를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데에 일조하고 있다. 형우와 담임은 주먹이 아닌 언론과 선동을 이용하여 기존의 '악'인 기표를 쓰러뜨리지만, 그들 또한 새로운 종류의 '악'이 된 셈이다.
기표와의 차이라면 기표는 주변 사람들을 억압하고 괴롭히며 군림했지만, 담임과 형우는 주변 사람들을 '이용'하여 기표를 쓰러뜨렸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이하의 서술은 독자의 입장에서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는 독자연구에 의한 주관적인 감상평이다. 문학 비평이 대개 그러하지만 이와는 전혀 다른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하므로 감안하면서 읽을 것.
기표는 작중 내내 일종의 '필요악'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기표의 갖가지 악행을 묘사하면서도 작가는 사실을 건조하게 서술할 뿐 도덕적인 판단을 최대한 절제한 문체를 구사하고 있다. 이는 작가 자신이 기표에 대해 선악 판단을 보류하고 있으며, 기표가 마치 일종의 천재지변이나 맹수처럼 '다뤄질 수 없는 존재'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납득시키고 있기 때문이라 보인다.
반면 담임과 형우가 기표를 압박하는 장면은 상당히 공을 들여 묘사하고 앞부분과 달리 부정적인 묘사, 서술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는 작가 자신이 담임이나 형우 같은 존재들은 기표보다도 훨씬 더 무서운 악이며, 그런 악에 의해 기표가 몰락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3] 더불어 학급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기표가 아이들 사이에 '''타고난 야수'''로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기표가 '''미약한 짐승'''으로 쪼그라든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으로서 부정적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과연 기표가 몰락한 것이 정말로 부정적인 일인가를 생각하면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애초에 어떠한 악을 놓고 더 큰 악을 옆에 가져다 놓는다 하여 그 악성이 순화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기표 역시 그대로 놓아 두어서 마땅할 존재는 결코 아니다.
다소 관점의 차이는 존재할 수 있지만, 대체적으로 타인을 괴롭히고 억압하는 자가 '''그냥 원래 그런 존재이므로''' 자연스럽게 인정되어야 한다는 판단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표와 재수파가 범한 각종 범죄들 - '''폭력, 갈취, 미성년자 집단 성폭행(!)'''[4] - 을 무시하고 넘어간다는 시각은, 사회와 질서와 도덕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로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5] 학교 폭력이 성행하고 자살자가 속출하는 현대사회를 생각하면 더더욱, 기표는 용인되어선 안 될 존재라 할 수 있다.
또한 기표는 타인에게 마음대로 자유를 빼앗으며 범죄마저 저지르게 해 왔으면서, 막상 자신이 정신적 폭력의 대상이 되어 구석으로 몰리자 졸렬하게 변하여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고 울부짖는데, 이는 자신만을 소중히 여기고 타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싸이코패스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원시적 폭력의 무서움을 조금이라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이런 기표를 가엾게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통쾌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6]
이 소설에서 나오는 최기표와 그를 중심으로 묶인 재수파라는 비행 청소년 집단은, 우리의 윤리적 감정 하에서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악'이 맞다. 그러나, 그들이 악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담임선생과 형우에 의해 몰락하고 조리돌림 당하는 것을 감정적으로는 통쾌해할 수 있겠지만, 통쾌하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으로 올바른 행위인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이는 최기표와 재수파의 악성이 그 악성과 충돌한 담임선생과 형우의 악성을 희석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이고, 좀 더 조야하지만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나쁜 놈 둘이 싸웠으면 이긴놈도 나쁜 놈, 진 놈도 나쁜 놈'이지, 굳이 한 쪽을 억지로 착한 놈이라고 만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고등학교이며, 학교는 지식을 가르치는 것 이외에도 '''바른 인성을 교육'''할 것이라는 의무가 있다. 따라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담임선생은 최기표와 재수파에게도 그들을 '올바른 심성을 가진 사람'으로 교육할 의무가 부여되지만, 작중에서 드러나는 '우상화 과정'은 단순히 재수파 집단을 그들이 기대하지도, 원하지도 않았던 우상의 허울을 강제적으로 씌움으로서 그들을 심적으로 위축시키고 조리돌림할 뿐이다. 이 시점에서 재수파들이 다른 학생들을 상대로 폭력을 휘두르고 공포를 불어넣던 것은 중단되기는 했다. 그것은 단지 그들이 휘두르던 폭력을 종결시키고 재수파들을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아넣었을 뿐, 이들이 진정으로 교화되고 감화된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최기표 일당이 '''뉘우치고 반성한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소설의 측면에서, '담임의 헌신적인 지도로 인해 최기표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개과천선했다'라는 스토리가 되면 지극히 뻔한 이야기로서 소설적으로는 밋밋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이렇게 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나오는 담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최기표를 찾기는 커녕 영화사 직원과 이야기할 생각만 하는 점에서 이 사건을 통해 잇속만 챙기려는 인물임이 드러난다.
여기서,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언급할 수 있다. 두 소설은 학교를 소재로 '강력한 힘을 가진 비행 학생과 이에 억압당하는 다른 학생'이라는 요소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나오는 엄석대와, 우상의 눈물에 나오는 최기표와 재수파는 그러한 점에서는 유사한 캐릭터이다. 그리고 결말에서는 공적인 권위(6학년의 새 담임교사 김 선생 / 최기표의 담임과 반장 형우)에 의해 몰락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이문열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새 담임교사 김 선생은, 엄석대가 어떠한 잘못을 저질렀는지 공개적으로 꾸짖고, 다른 학생들이 이에 저항하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한다. 비록 엄석대는 이에 순응하지 않고 학교를 도망나감으로서 반성하고 뉘우치게 하는데는 실패하지만, 다른 학생들이나마 엄석대에게 순응하고 복종하던 굴레를 끊게 하였다는 의의는 있다.[7] 비록 김 선생이라는 인물이 마냥 좋은 인물이 아니라 여러 비판점을 시사하기는 하지만, <우상의 눈물>에 등장하는 담임에 비하면 그나마 정석적이고 납득 가능한 교육을 시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비교해볼 만한 또 다른 소설은 시계태엽 오렌지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알렉스 드라지'는, 최기표보다 더한 문제아[8] 로 볼 수 있다. <시계태엽 오렌지> 작내에서, 알렉스는 분명히 용납할 수 없는 큰 범죄를 저지른 죄인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알렉스가 루도비코 요법을 강제적으로 당하고 완전히 폐인이 되는 것을 긍정적으로 그려내지 않는다. 만약, 이 소설을 '흉악범에게 국가가 통쾌한 복수를 하는 이야기'로 이해한다면, 작가가 원래 말하려고 하는 메시지와 상당히 동떨어진 해석일 것이다.
분명히 최기표는 용납할 수 없는 존재가 맞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용납할 수 없는 존재를 퇴치하는 데 어떠한 방법이라도 허용되고 정당화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이다. 이탈리아 마피아는 사회적으로 암적인 범죄 집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무차별적으로 진압한 파시스트당을 '사회악을 징벌한 정의'로 긍정적으로 볼 수 있을까?[9]
이 관점에 따라 이 소설의 주제를 압축하자면, '어떤 악이 있을때, 그 악을 다른 악으로 억누르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보면 기표와 그 일당의 악성이 딱히 도덕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고 그저 건조하게 묘사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표 일당의 악은 이 소설의 주제가 아니라,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제공된 '전제'이기 때문이다. 즉, 기표 일당이 악이라는 것은 독자 누구나 다 알지만[10] 그 악에 대해 단죄하는 것이 이 소설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한된 분량 속에서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를 다 설명할수는 없기에 어떤 부분은 '만약 이런 악이 있다고 치자' 라고 전제로써 제공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 여기서 기표 일당의 악을 비판하기 위해 형우와 담임선생의 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포기한다면... 그건 그냥 전혀 다른 소설이 되는 것이고, 두 악에 대해 동시에 설명하고 비판하려면 두 개의 주제의식을 설명하기 위한 두 편의 소설이 필요해질 것이다. 이 관점에 따라 보면 위의 문제제기에 대하여 형표와 담임선생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주어진 배경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소설 전체를 보는 시각의 균형을 잃은 것이 아니냐는 반문이 가능할 것이다[11] .
더불어, 기표를 제압하고 그 성정을 뿌리뽑기 위해 담임과 형우가 사용한 방법이 동일한 형태의 원시적 폭력이 아니라 교활하고 치밀하게 계획된 지능적 올가미라는 것도 주목할 만 하다. 사회를 어지럽히고 타인을 괴롭히는 악한을 말살하는 방법이 꼭 악한과 똑같은 폭력일 필요가 없음은, 원시적 폭력이 범죄로서 분류되는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다. 기표를 '경외'와 '두려움'의 대상에서 '동정'과 '연민'의 대상으로 끌어내려 버리는 두 사람의 작전은, 악행을 행하는 독재자의 허상을 어떻게 깨부숴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말해 주고 있다.[12]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 볼 만한 점은, 이 소설의 윤리관은 아나키즘적 윤리관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물론 작가 자신의 윤리관이 어떠한지는 알 수 없고, 소설의 주제의식을 봤을 때 그렇다는 이야기지만. 아나키즘적 윤리관으로 보면 '개인의 원시적 폭력'과 '조직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중에서 더 위험한 것은 조직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이다. 개인의 원시적 폭력은 쉽게 식별 가능하고 제제할 수 있는[13] 악행이지만 조직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은 그것이 폭력임을 식별하기도 어렵고, 제제하기도 어렵기 때문. 반면, 개인의 원시적 폭력이 대부분 범죄로 규정되는 것과는 달리, 조직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은 상황에 따라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확립하기 위한 필요악적 요소로 규정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14] 결국 이 소설의 해석에 대한 입장 차이는 어떤 폭력을 더 위험하고 무서운 폭력으로 간주하느냐, 또한 사회적 규범에 의한 폭력을 어느 수준까지 인정할 것이냐의 차이에 의해 탄생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한편, '독자 관점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와 그 반론에 대해서 이와 같은 여담 또한 제기될 수 있다. 상기한 문단에서는 '독자 관점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를,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정당한가' 내지는 '독자층의 연령대에 매인 편파적인 해석'이라고 말하지만, 과연 현실에서의 학교폭력 대응, 그리고 청소년 범죄에 대한 대응이 이 소설에서 '담임선생'이 저지르는 행위보다 나은지이다.
뉴스를 조금만 뒤져 봐도 학교폭력이 발생했는데 가해자를 쉴드치고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는 학교들의 행태가 넘쳐나는 상황, 그리고 각종 청소년의 흉악범죄가 더 많이 보도되는 형국에서 현실과 이 소설을 비교해 보면 오히려 '비윤리적인 대응책'인 이 학교 담임선생과 임형우의 대응이 '현실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절로 하게 만든다.
그들의 우상화 수작에 의해서 (적어도 작중의 묘사에 의하면) 그전까지는 온갖 비행을 저지르던[15] 재수파 일당이 완전히 위축되고, 그들이 어떠한 행패도 부리지 못하게 만들었고 그들 밑에서 공포를 느끼던 학생들은 더 이상 재수파가 무섭지 않은 대상이 되었다. 현실에서는 정말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학교 교사가 정말로 탁월하다고 칭찬을 받을 것이다. 피해자층 또한 그런 일을 자행한 교사에게 고마워하면 고마워하지 적어도 원망하거나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작가의 의도에 반하는 형태의 '독자 관점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가 제기되는 원인은 이 소설에 비해 영 좋지 못한 현실에서의 학교폭력*청소년범죄 대응에 있으므로, 무조건적으로 작가의 입장에서 독자 관점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의 학교폭력*청소년범죄 대응에 비해 이런 '조직적*구조적 폭력으로써 정당화되지 못할 담임의 행태'가 목적 측면에서 괜찮은 결과물을 냈음을 인정하고 반성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16] 따라서 담임과 형우의 '정당화되지 못할 엄연한 폭력 행위'의 아웃풋은 건전한 면학분위기 조성이기 때문에, 원인(즉 담임과 형우의 인성 등)은 모르는데 결과적인 아웃풋은 적어도 기표들의 악행과 동등한 악으로 여겨지기에는 선량하다고 봐 주는 게 타당하다.][17]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스토리가 유사하여 자주 비교된다. 하지만 유명도와는 별개로 우상의 눈물이 먼저 나왔고, 이문열이 워낙 여러 방면으로 악명이 높다보니 베낀거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대상을 수상했던 1987년 이상문학상에 '''우상의 눈물의 작가인 전상국도 다른 소설을 출품해 우수작을 수상'''한 바 있다. 작가 본인이 표절이라고 생각했다면 이 시점에서 그냥 넘어갔을 리 없으므로 사실상 낭설이라 보는 게 옳다고 하겠다. 그냥 어중간한 수준이라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기 싫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학교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진의 독재와 몰락이라는 소재는 현실에서 얼마든지 있는 것이므로 그것만 보고 베꼈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다. 무엇보다도 최기표와 엄석대는 캐릭터가 매우 많이 다르다.
제 7차 교육과정 중학교 3학년 국어책에 이 책이 다뤄졌다. 자세히 말하자면 본문이 실린 것은 아니고 이 책을 읽은 학생들의 느낌이 2~3줄씩 총 3개가 실렸다. 그런데 중학교 3학년이라 이 글의 속 내용을 이해 못 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내용에 대한 느낌을 적어놓았다. "문제아를 포용한다."든지 "사랑과 이해에 기초를 두지 않는 선도는 선도가 아니다."라고 생각한다든지...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던 예수의 말을 실천했다든지... 속 내용을 알고 읽으면 그저 헛웃음만 나온다. 사실 사회 경험이 부족한 학생이라면 이 소설의 내용을 이렇게 수박 겉핥기 수준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교사나 참고서에 따라서는 전체적인 내용을 설명하면서 진짜 숨겨진 교훈들까지 설명하기도 했다.
1. 개요
1980년 발표된 소설로 서술자 '이유대'의 시점에서 문제아 '최기표'에게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최기표는 1년을 유급하여 '재수파'라는 패거리를 이끄는 문제아로 임시반장이 되었다는 이유로 '이유대'를 린치한다. 담임 선생은 기표 패거리를 해체하고 기표를 몰락시키기 위한 계략을 꾸미고, 이유대의 친한 친구 '임형우'가 반장을 맡게 된다.
임형우 역시 기표 일당에게 '쓸데없이 간섭한다'라는 이유[1] 로 린치를 당하지만, 그는 이유대와 달리 최기표에게 대항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한다. 그 방법이란 다름아닌 기표가 둘러쓰고 있는 '우상'의 껍데기를 벗겨 버리는 것이다.
형우는 담임과 협력해서 기표의 뒷조사에 착수하고, 그의 불우한 가정 형편을 알아낸다. 그리고 그들은 기표가 무서운 맹수가 아니라 사실은 불우한 학생이었으며, 도움을 바라는 가련한 친구라는 식으로 모금운동까지 하며 새로운 이미지를 덧씌운다. 이것은 기표가 누리고 있던 절대권력을 빼앗는 동시에 그를 반에서 고립시키려는 책략이었다.
매혈까지 해서 돈을 바치게 하며 재수파를 착취하던 기표의 행동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고생하는 기표를 도우려던 친구들의 도움으로 미화되고, 그 외 기표가 벌였던 갖은 악행들은 파묻혀 버린다. 이 이야기는 신문에 퍼져 나가고 급기야 영화로까지 만들어질 조짐을 보이게 된다.
이런 공세에 기표는 통제할 수 없는 무서운 놈에서 불쌍한 놈으로 인식이 바뀌게 되고, 기표는 결국 무력해진다. 그는 보통의 아이들, 혹은 그보다도 더욱 약한 모습을 보이며 점점 위축되다가, 마지막에는 "'''무섭다. 나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라는 내용의 짤막한 편지를 남기고 실종된다. 그리고 담임은 "영화사 직원하고 내일 만나야 하는데 이 망할 새끼가......"라며 신경질을 내며 이야기는 끝난다.
2. 간단 분석
작중 기표라는 인물이 원시적이고 난폭한 악을 상징한다면, 그와 상반되는 인물인 담임선생과 형우는 악을 물리치기 위해 또다른 종류의 악이 된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작중 기표에 대한 서술을 보면 그가 지니고 있는 악성이 특별한 가정 형편에서 비롯되었다거나 불우한 환경 때문이라거나 하는 부분은 전혀 없다.[2] 그는 내내 통제될 수 없는 악성의 소유자로 존재하며, 반대로 괴롭힘을 당하는 학우들은 괴로워하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수동적으로 그의 군림을 받아들인다. 비슷한 내용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보다도 훨씬 더 수동적으로, 주변인들의 모습을 비춰 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실제로 기표가 완전히 몰락했을 때 더욱 강하게 부각되어, 보이지 않는 여론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무서운 힘이 될 수 있는가를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데에 일조하고 있다. 형우와 담임은 주먹이 아닌 언론과 선동을 이용하여 기존의 '악'인 기표를 쓰러뜨리지만, 그들 또한 새로운 종류의 '악'이 된 셈이다.
기표와의 차이라면 기표는 주변 사람들을 억압하고 괴롭히며 군림했지만, 담임과 형우는 주변 사람들을 '이용'하여 기표를 쓰러뜨렸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3. 독자 관점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
이하의 서술은 독자의 입장에서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는 독자연구에 의한 주관적인 감상평이다. 문학 비평이 대개 그러하지만 이와는 전혀 다른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하므로 감안하면서 읽을 것.
기표는 작중 내내 일종의 '필요악'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기표의 갖가지 악행을 묘사하면서도 작가는 사실을 건조하게 서술할 뿐 도덕적인 판단을 최대한 절제한 문체를 구사하고 있다. 이는 작가 자신이 기표에 대해 선악 판단을 보류하고 있으며, 기표가 마치 일종의 천재지변이나 맹수처럼 '다뤄질 수 없는 존재'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납득시키고 있기 때문이라 보인다.
반면 담임과 형우가 기표를 압박하는 장면은 상당히 공을 들여 묘사하고 앞부분과 달리 부정적인 묘사, 서술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는 작가 자신이 담임이나 형우 같은 존재들은 기표보다도 훨씬 더 무서운 악이며, 그런 악에 의해 기표가 몰락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3] 더불어 학급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기표가 아이들 사이에 '''타고난 야수'''로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기표가 '''미약한 짐승'''으로 쪼그라든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으로서 부정적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과연 기표가 몰락한 것이 정말로 부정적인 일인가를 생각하면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애초에 어떠한 악을 놓고 더 큰 악을 옆에 가져다 놓는다 하여 그 악성이 순화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기표 역시 그대로 놓아 두어서 마땅할 존재는 결코 아니다.
다소 관점의 차이는 존재할 수 있지만, 대체적으로 타인을 괴롭히고 억압하는 자가 '''그냥 원래 그런 존재이므로''' 자연스럽게 인정되어야 한다는 판단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표와 재수파가 범한 각종 범죄들 - '''폭력, 갈취, 미성년자 집단 성폭행(!)'''[4] - 을 무시하고 넘어간다는 시각은, 사회와 질서와 도덕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로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5] 학교 폭력이 성행하고 자살자가 속출하는 현대사회를 생각하면 더더욱, 기표는 용인되어선 안 될 존재라 할 수 있다.
또한 기표는 타인에게 마음대로 자유를 빼앗으며 범죄마저 저지르게 해 왔으면서, 막상 자신이 정신적 폭력의 대상이 되어 구석으로 몰리자 졸렬하게 변하여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고 울부짖는데, 이는 자신만을 소중히 여기고 타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싸이코패스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원시적 폭력의 무서움을 조금이라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이런 기표를 가엾게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통쾌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6]
3.1. 이에 대한 반론
이 소설에서 나오는 최기표와 그를 중심으로 묶인 재수파라는 비행 청소년 집단은, 우리의 윤리적 감정 하에서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악'이 맞다. 그러나, 그들이 악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담임선생과 형우에 의해 몰락하고 조리돌림 당하는 것을 감정적으로는 통쾌해할 수 있겠지만, 통쾌하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으로 올바른 행위인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이는 최기표와 재수파의 악성이 그 악성과 충돌한 담임선생과 형우의 악성을 희석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이고, 좀 더 조야하지만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나쁜 놈 둘이 싸웠으면 이긴놈도 나쁜 놈, 진 놈도 나쁜 놈'이지, 굳이 한 쪽을 억지로 착한 놈이라고 만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고등학교이며, 학교는 지식을 가르치는 것 이외에도 '''바른 인성을 교육'''할 것이라는 의무가 있다. 따라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담임선생은 최기표와 재수파에게도 그들을 '올바른 심성을 가진 사람'으로 교육할 의무가 부여되지만, 작중에서 드러나는 '우상화 과정'은 단순히 재수파 집단을 그들이 기대하지도, 원하지도 않았던 우상의 허울을 강제적으로 씌움으로서 그들을 심적으로 위축시키고 조리돌림할 뿐이다. 이 시점에서 재수파들이 다른 학생들을 상대로 폭력을 휘두르고 공포를 불어넣던 것은 중단되기는 했다. 그것은 단지 그들이 휘두르던 폭력을 종결시키고 재수파들을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아넣었을 뿐, 이들이 진정으로 교화되고 감화된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최기표 일당이 '''뉘우치고 반성한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소설의 측면에서, '담임의 헌신적인 지도로 인해 최기표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개과천선했다'라는 스토리가 되면 지극히 뻔한 이야기로서 소설적으로는 밋밋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이렇게 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나오는 담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최기표를 찾기는 커녕 영화사 직원과 이야기할 생각만 하는 점에서 이 사건을 통해 잇속만 챙기려는 인물임이 드러난다.
여기서,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언급할 수 있다. 두 소설은 학교를 소재로 '강력한 힘을 가진 비행 학생과 이에 억압당하는 다른 학생'이라는 요소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나오는 엄석대와, 우상의 눈물에 나오는 최기표와 재수파는 그러한 점에서는 유사한 캐릭터이다. 그리고 결말에서는 공적인 권위(6학년의 새 담임교사 김 선생 / 최기표의 담임과 반장 형우)에 의해 몰락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이문열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새 담임교사 김 선생은, 엄석대가 어떠한 잘못을 저질렀는지 공개적으로 꾸짖고, 다른 학생들이 이에 저항하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한다. 비록 엄석대는 이에 순응하지 않고 학교를 도망나감으로서 반성하고 뉘우치게 하는데는 실패하지만, 다른 학생들이나마 엄석대에게 순응하고 복종하던 굴레를 끊게 하였다는 의의는 있다.[7] 비록 김 선생이라는 인물이 마냥 좋은 인물이 아니라 여러 비판점을 시사하기는 하지만, <우상의 눈물>에 등장하는 담임에 비하면 그나마 정석적이고 납득 가능한 교육을 시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비교해볼 만한 또 다른 소설은 시계태엽 오렌지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알렉스 드라지'는, 최기표보다 더한 문제아[8] 로 볼 수 있다. <시계태엽 오렌지> 작내에서, 알렉스는 분명히 용납할 수 없는 큰 범죄를 저지른 죄인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알렉스가 루도비코 요법을 강제적으로 당하고 완전히 폐인이 되는 것을 긍정적으로 그려내지 않는다. 만약, 이 소설을 '흉악범에게 국가가 통쾌한 복수를 하는 이야기'로 이해한다면, 작가가 원래 말하려고 하는 메시지와 상당히 동떨어진 해석일 것이다.
분명히 최기표는 용납할 수 없는 존재가 맞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용납할 수 없는 존재를 퇴치하는 데 어떠한 방법이라도 허용되고 정당화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이다. 이탈리아 마피아는 사회적으로 암적인 범죄 집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무차별적으로 진압한 파시스트당을 '사회악을 징벌한 정의'로 긍정적으로 볼 수 있을까?[9]
이 관점에 따라 이 소설의 주제를 압축하자면, '어떤 악이 있을때, 그 악을 다른 악으로 억누르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보면 기표와 그 일당의 악성이 딱히 도덕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고 그저 건조하게 묘사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표 일당의 악은 이 소설의 주제가 아니라,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제공된 '전제'이기 때문이다. 즉, 기표 일당이 악이라는 것은 독자 누구나 다 알지만[10] 그 악에 대해 단죄하는 것이 이 소설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한된 분량 속에서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를 다 설명할수는 없기에 어떤 부분은 '만약 이런 악이 있다고 치자' 라고 전제로써 제공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 여기서 기표 일당의 악을 비판하기 위해 형우와 담임선생의 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포기한다면... 그건 그냥 전혀 다른 소설이 되는 것이고, 두 악에 대해 동시에 설명하고 비판하려면 두 개의 주제의식을 설명하기 위한 두 편의 소설이 필요해질 것이다. 이 관점에 따라 보면 위의 문제제기에 대하여 형표와 담임선생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주어진 배경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소설 전체를 보는 시각의 균형을 잃은 것이 아니냐는 반문이 가능할 것이다[11] .
3.2. 추정되는 작가의 윤리관
더불어, 기표를 제압하고 그 성정을 뿌리뽑기 위해 담임과 형우가 사용한 방법이 동일한 형태의 원시적 폭력이 아니라 교활하고 치밀하게 계획된 지능적 올가미라는 것도 주목할 만 하다. 사회를 어지럽히고 타인을 괴롭히는 악한을 말살하는 방법이 꼭 악한과 똑같은 폭력일 필요가 없음은, 원시적 폭력이 범죄로서 분류되는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다. 기표를 '경외'와 '두려움'의 대상에서 '동정'과 '연민'의 대상으로 끌어내려 버리는 두 사람의 작전은, 악행을 행하는 독재자의 허상을 어떻게 깨부숴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말해 주고 있다.[12]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 볼 만한 점은, 이 소설의 윤리관은 아나키즘적 윤리관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물론 작가 자신의 윤리관이 어떠한지는 알 수 없고, 소설의 주제의식을 봤을 때 그렇다는 이야기지만. 아나키즘적 윤리관으로 보면 '개인의 원시적 폭력'과 '조직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중에서 더 위험한 것은 조직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이다. 개인의 원시적 폭력은 쉽게 식별 가능하고 제제할 수 있는[13] 악행이지만 조직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은 그것이 폭력임을 식별하기도 어렵고, 제제하기도 어렵기 때문. 반면, 개인의 원시적 폭력이 대부분 범죄로 규정되는 것과는 달리, 조직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은 상황에 따라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확립하기 위한 필요악적 요소로 규정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14] 결국 이 소설의 해석에 대한 입장 차이는 어떤 폭력을 더 위험하고 무서운 폭력으로 간주하느냐, 또한 사회적 규범에 의한 폭력을 어느 수준까지 인정할 것이냐의 차이에 의해 탄생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3.3. 현실에 대한 대입
한편, '독자 관점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와 그 반론에 대해서 이와 같은 여담 또한 제기될 수 있다. 상기한 문단에서는 '독자 관점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를,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정당한가' 내지는 '독자층의 연령대에 매인 편파적인 해석'이라고 말하지만, 과연 현실에서의 학교폭력 대응, 그리고 청소년 범죄에 대한 대응이 이 소설에서 '담임선생'이 저지르는 행위보다 나은지이다.
뉴스를 조금만 뒤져 봐도 학교폭력이 발생했는데 가해자를 쉴드치고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는 학교들의 행태가 넘쳐나는 상황, 그리고 각종 청소년의 흉악범죄가 더 많이 보도되는 형국에서 현실과 이 소설을 비교해 보면 오히려 '비윤리적인 대응책'인 이 학교 담임선생과 임형우의 대응이 '현실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절로 하게 만든다.
그들의 우상화 수작에 의해서 (적어도 작중의 묘사에 의하면) 그전까지는 온갖 비행을 저지르던[15] 재수파 일당이 완전히 위축되고, 그들이 어떠한 행패도 부리지 못하게 만들었고 그들 밑에서 공포를 느끼던 학생들은 더 이상 재수파가 무섭지 않은 대상이 되었다. 현실에서는 정말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학교 교사가 정말로 탁월하다고 칭찬을 받을 것이다. 피해자층 또한 그런 일을 자행한 교사에게 고마워하면 고마워하지 적어도 원망하거나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작가의 의도에 반하는 형태의 '독자 관점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가 제기되는 원인은 이 소설에 비해 영 좋지 못한 현실에서의 학교폭력*청소년범죄 대응에 있으므로, 무조건적으로 작가의 입장에서 독자 관점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의 학교폭력*청소년범죄 대응에 비해 이런 '조직적*구조적 폭력으로써 정당화되지 못할 담임의 행태'가 목적 측면에서 괜찮은 결과물을 냈음을 인정하고 반성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16] 따라서 담임과 형우의 '정당화되지 못할 엄연한 폭력 행위'의 아웃풋은 건전한 면학분위기 조성이기 때문에, 원인(즉 담임과 형우의 인성 등)은 모르는데 결과적인 아웃풋은 적어도 기표들의 악행과 동등한 악으로 여겨지기에는 선량하다고 봐 주는 게 타당하다.][17]
4. 기타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스토리가 유사하여 자주 비교된다. 하지만 유명도와는 별개로 우상의 눈물이 먼저 나왔고, 이문열이 워낙 여러 방면으로 악명이 높다보니 베낀거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대상을 수상했던 1987년 이상문학상에 '''우상의 눈물의 작가인 전상국도 다른 소설을 출품해 우수작을 수상'''한 바 있다. 작가 본인이 표절이라고 생각했다면 이 시점에서 그냥 넘어갔을 리 없으므로 사실상 낭설이라 보는 게 옳다고 하겠다. 그냥 어중간한 수준이라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기 싫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학교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진의 독재와 몰락이라는 소재는 현실에서 얼마든지 있는 것이므로 그것만 보고 베꼈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다. 무엇보다도 최기표와 엄석대는 캐릭터가 매우 많이 다르다.
제 7차 교육과정 중학교 3학년 국어책에 이 책이 다뤄졌다. 자세히 말하자면 본문이 실린 것은 아니고 이 책을 읽은 학생들의 느낌이 2~3줄씩 총 3개가 실렸다. 그런데 중학교 3학년이라 이 글의 속 내용을 이해 못 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내용에 대한 느낌을 적어놓았다. "문제아를 포용한다."든지 "사랑과 이해에 기초를 두지 않는 선도는 선도가 아니다."라고 생각한다든지...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던 예수의 말을 실천했다든지... 속 내용을 알고 읽으면 그저 헛웃음만 나온다. 사실 사회 경험이 부족한 학생이라면 이 소설의 내용을 이렇게 수박 겉핥기 수준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교사나 참고서에 따라서는 전체적인 내용을 설명하면서 진짜 숨겨진 교훈들까지 설명하기도 했다.
[1] 중간 고사 때 형우가 다른 우등생을 포함한 기표에게 컨닝 페이퍼를 주는데,이것이 기표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기 때문.[2] 다만 몇몇 단편적인 행각들을 통해 불우한 가정 환경을 추론할 수 있다:재수파들에게 힘으로 돈 상납 강요하기, 채플 시간에 교실에 남아서 몇몇 친구들 점심 먹튀하기...[3] 작중 "신이 매우 거북하게 생각하는 악마란 바로 네가 말한 놈처럼 착함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그런 순수한 악마지. 그러한 순수한 악마만이 신을 돋보이게 하기 때문에 신은 마음속으로 괴로운 거야. 그렇기 때문에 신은 결코 악마를 영원히 추방하지 않아. 항상 곁에 두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일에 그것을 이용할 뿐이야. " 라는 말이 나온다.[4] 작중에서 대놓고 기표와 재수파가 캠핑을 하던 여자아이를 결딴 냈다고 서술된다.[5] 가령 기표가 원래 그런 악성을 지닌 자라고 크게 납득한다고 해도, 그렇다면 그는 감옥이나 정신병원에 들어가야 할 인간일 뿐 악성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 일반적인 도덕성을 선천적으로 갖추지 못한 사이코패스로 분류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6]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어느 정도 그 힘을 온존한 채 학교를 뛰쳐나간 엄석대와 달리, 기표는 위엄도 힘도 완전히 몰락하고 그 품성까지 형편없이 쪼그라든 채 잠적한다. 그야말로 이빨에 발톱까지 다 빠지고 힘줄마저 끊어진 짐승처럼 재기불능이 된 셈.[7]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소설에서, 엄석대가 학교를 뛰쳐나간 후 한동안 이전 급우들을 습격하고 린치하는데, 담임은 이에 대해 엄석대에게 맞설 것을 지속적으로 종용하고, 결국 몇몇 학생들이 엄석대와 맞서 싸웠다는 것이 언급되어, 일부분이나마 엄석대가 다른 학생들을 짓누르던 그릇된 권위가 '자발적으로' 청산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8] 그나마 최기표의 행위는 평범한 비행 청소년의 범주에 든다고 볼 수 있으나, 알렉스는 살인이나 강간까지 저지르는, 성인 기준에서도 중범죄자이다.[9] 이탈리아 마피아가 가장 위축되고 통제되던 시기가 바로 파시스트정권 시기였다. [10] 기표 일당의 악은 구조화되고 지능적인 은폐된 악이 아니라, 야만적이고 노골적인 원시적 악이기에 이것이 악임을 알기 위해서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11] 그리고, 위와 같은 독해에 대하여 '독자의 특성이 반영된 독해' 라고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학생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형우와 담임의 구조적으로 은폐되고 추상화된 폭력보다는 학교 폭력이 훨씬 실감나는 현실적 악으로 읽히기에, 그 쪽에 시선이 집중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12] 과거로는 히틀러, 현재에는 카다피에 이르기까지 독재자들이 사용하는 방식은 언제나 비슷하여, 공포와 경외가 바로 그 핵심이다.[13] 한 사람이 아무리 싸움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여러 사람이 함께 덤비거나 지쳐있거나 자는 틈을 노리면 도리 없다.[14] 이 소설이 쓰여진 시기가 1980년, 독재정권 치하라는 점도 감안해야한다.[15] 다시 강조하자면 단순한 폭력과 갈취는 기본이고 '''미성년자 성폭행도 했다!'''[16] 사실 학교에서 공부를 강요하는 것 자체는 학교 자체가 교육기관이라서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낙오자를 애써 인간취급 안하려는 건 악하지만 기표들이 핍박당한 건 그것 때문이라기 보다는 학교폭력배여서 그런 것이다.[17] 이와 같이 결과만 가지고 판단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우상의 눈물 담임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김 선생보다 더 정석적인 훈육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가해자의 완전몰락만을 완수하고 피해자는 터치하지 않은''' 전자에 비해 후자는 부당하게도 '''피해자까지 싸잡아서 가해자랑 동등한 급으로 처벌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