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혈
1. 개요
買血/賣血, selling blood
혈액을 사고 파는 행위. 전자(買血)는 수혈받기 위해 피를 산다는 뜻이고, 후자(賣血)는 자기 몸의 피를 뽑아 판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매혈이라고 하면 후자를 말한다.
2. 한국의 매혈
미국의 헌혈제도를 모델로 도입된 헌혈은, 도입초기에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1950년대 이래로 헌혈에 대한 인식이 미약했던시절이었기에 주로 매혈로 혈액을 충당했으며 당시에 헌혈을 하면 받을수 있는 금액이 끼니 몇번을 때우고도 남는 돈이었던지라 유용한 급전이나 용돈, 학비마련 수단이 되어왔다. 좋은면만 있는것은 아니고 매혈 자체가 돈이 되다보니 깡패나 부랑자들이 먼저 피를 뽑겟다며 행패를 부리거나 매혈자에게 삥을 뜯는 소란이 일기도 했다고 사실 헌혈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생겨나게 된 것은 4.19 혁명때로 부상자들의 피를 제때제때 수혈해준것이 시초였다. 그러나 경제사정이 하루아침에 달라진것은 아니었음으로 그 이후로 생계형 매혈은 성행했다. 그러나 1964년 라이샤워 사건을 계기로 관주도의 매혈 제도 개혁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으로 널리 알려진 에드윈 라이샤워는 1964년 주일 미국대사로 재직하던 중 19세의 일본인 조현병 환자의 칼에 찔리는 중상을 입게 되었다. 급히 병원으로 이송된 라이샤워 대사는 수혈을 받게 되었고, 직후 라이샤워가 "이제 제 몸에도 일본인의 피가 흐르게 되었습니다."라는 농담을 던지기도. 문제는 그 일본인의 피 덕분에 간염에 걸리게 된 것(...)이었다.# 라이샤워에게 감동했던 일본에서는 예상치 못한 사태에 호들갑스러운 일본식 사죄와 반성이 줄을 이었으며, 동시에 이 문제를 매혈자들, 특히 부랑아와 가난한 이들의 탓으로 돌리는 전형적인 희생양 현상과 매혈제도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유심히 지켜보던 한국 관료들에 의해서 매혈 제도에 대한 검토가 시작되었다.
1967년 보건사회부의 초안을 기초로 1970년 혈액관리법이 제정되게 되었다. 국가기록원에서도 이 법률의 배경 중 하나로 "직업적 매혈을 하고 있는 공혈자들의 건강문제의 심각성"을 지목하기도 할 정도로 매혈은 진지하게 고려된 문제였다.# 그러나 이 법률에는 아직 매혈 금지조항이 들어가진 않았는데, 매혈비가 (당시 기준으로)꽤 비쌌던 시절이었던지라 매혈이 아직까지도 서민층들에게 유용한 급전마련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에서 매혈금지법을 통과시킨다는것은 급전마련수단 하나를 없애겠다는 말과 비슷했기에 민심이반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정책은 3선 개헌을 만지작거리던 박정희에겐 그리 썩 달가운 정책이 아닐 수 밖에 없었다. 혈액값이 인상되기라도 하면 몰려드는 사람을 막기 위해 병원 문을 걸어잠그던 시절#이기도 했으니...
정부에서는 100% 무상 헌혈이 1981년 달성됐다고 주장하지만 혈액은 1990년대 말까지도 거래되고 있었다. 1975년 고재필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은 “혈액 한 병이 위스키 한 병보다 싸서야 말이 되느냐”며 혈액 320㏄ 한 병값을 3500원에서 1만원으로 거의 세 배 인상했는데[1] , 이 가격은 90년대 초반까지 등락을 거듭하며 이어지게 된다. 1980년대 중반기까지는 매혈이 급전마련이나 비상금 마련수단으로 나름대로 유용했던 금액이었지만 물가가 나날히 올랐기 때문에 그 가치는 점점 떨어졌고 서울올림픽 이후로는 혈액가격이 직장인들에게 푼돈 수준으로 줄어들 정도로 가치가 (상대적으로)하락하면서 저소득자를 제외한[2] 나머지 계층에서 매혈률이 크게 줄어 주로 학생이나 백수같은 사람들이 매혈하게 되었다. 헌혈하면서 받는 돈의 가치가 줄었다고는 했지만 학생이나 백수들에게는 나름대로 짭짤한 금액이었기 때문이었다. 헌혈을 하는 사람 가운데서 10대와 20대의 비율이 압도적이게 된것도 이때부터의 일이다. [3][4] 이는 당연히 언론에 의해 사회 문제로 보도되었으며, 1999년 개정 혈액관리법에 매혈 금지 조항이 도입되면서야 완전한 매혈 금지가 정착하게 되었다. 결국 경제 성장 덕분에 매혈의 반대급부가 상대적으로 보잘 것 없어진 후에야 매혈의 법적 금지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매혈이 법적으로 금지된 이후로도 헌혈률이 썩 높지 않다보니 이전과 같이 대놓고 현금을 주는 방식은 아니더라도 청소년들을 상대로 편법적으로 문화상품권을 보상품을 주는 경우가 있어 용돈이 고픈 청소년들 중에는 문화상품권을 받기 위해 헌혈을 하는 경우가 많아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와 비교해 본다면 애교에 불과한 수준이고, 오늘날 헌혈은 부족함이 문제라면 문제이지 매혈은 이미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1. 매혈 제도 부활 가능성
WHO를 비롯한 여러 국제기구들의 노력 끝에 현재는 헌혈 제도만을 시행하는 국가가 가족헌혈 또는 매혈 제도를 인정하는 국가보다 그 수가 많아졌다.[5] 더 나아가 국제기구들은 가까운 미래에는 모든 국가에서 헌혈만으로 100%의 혈액을 수급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정하고 매혈제도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대세를 거스르면서까지 매혈 제도가 한국에서 부활할 가능성은 그리 크진 않다.
그러나 민감한 주제이긴 하지만 한국을 포함해 여러 나라에서 매혈 제도의 부활에 대한 여론이 생기기도 한다.[6] 혈액의 완전 헌혈 수급이 수십년동안 지속되면서 매혈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혈액을 제공하는 사람에게도 정당한 가치를 지불해야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수십년 전에는 동네 각 의원에서 중구난방으로 이루어지는 매혈이 위생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큰 문제였지만 선진화되고 중앙화된 현 의료시스템에서는 매혈로 수급되는 혈액도 체계적이고 명확하게 관리가 가능하며, 혈액제공자의 건강상태를 미리 확실히 체크할 수 있기 때문에 예전의 상황을 대입하기 어려운 지금은 매혈을 통한 혈액수급으로도 충분히 안전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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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우 헌혈로 수급되는 혈액의 70%에 가까운 양이 학생[7] 들과 군인[8] 들에게서 뽑아낸 혈액이라는 점은 과연 순수한 봉사와 기부의 의미로 혈액이 수급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9] 거기에 더해 인구절벽 현상으로 젊은이들의 수가 가파르게 줄어들면서 학생 수가 적어지고, 전방에 말라리아가 퍼지면서 군인들에게 헌혈을 받기도 어려워진[10] 암울한 상황. 수술 등 혈액제제가 간절하게 필요해지는 고령자의 인구비중은 계속해서 늘어나만가는 상황에서 헌혈만을 통한 혈액수급에는 분명한 한계가 오는 때가 올 것이 불보듯 뻔하기 때문에 더욱 매혈을 통한 절대적인 혈액수급량 증가의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한국은 의료활동에 필요한 필수 혈액수급량마저 십수년째 바닥을 기고 있는 만큼 헌혈만으로는 수급하지 못한 의료용 혈액은 외국에서 사오는 방식으로 보충하기 때문에 연간 약 700억의 세금이 혈액을 수입하는데 소모되고 있다.[11] 자국민에게는 헌혈의 희생정신을 강요하며 매혈을 금지하고, 국제적으로는 피를 돈주고 사오는 우스운 꼴이 벌어지고 있는 것. 의료용으로 필요한 혈액마저 부족하다보니, 당연히 의료연구목적으로 필요한 혈액은 우선순위가 밀리게 되고 그로 인해 과학발전에도 발목을 잡히고 있다.
그리고 헌혈 자체도 엄밀히 말하면 공짜로 기부받는 혈액이 아니다. 헌혈자들의 순수 자발적인 기부에만 의존하면 혈액 수급량이 바닥을 칠 것은 뻔하고, 혈액제공자를 강제로 끌어올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헌혈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사용되는 비용 또한 만만치 않은 세금이 들어간다. 헌혈시 지급되는 기념품을 포함해 유명 연예인을 활용하는 마케팅, 좋은 입지에 있으므로 드는 헌혈센터의 비싼 임대료 등 매년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지만 이 돈이 매혈처럼 직접적으로 혈액제공자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경제적 효율은 극히 떨어지기 마련. 그래서 상기된 것처럼 한국은 학생들과 군인들의 피로 현 헌혈시스템이 유지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순수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헌혈도 분명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결국 헌혈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세금이 돌고 도는 과정에서 소비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니 '그럴 바에야 돈을 달라'는 소리가 안 나오는 게 이상한 형편이다.
결론적으로 혈액수급의 방법에서 헌혈만이 유일한 상황에서는 필연적으로 비효율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 밖에 없으며, 혈액은 그 특수성[12] 때문에 더욱 효율의 필요성이 부각되는 품목이다.[13] 그리고 그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세금을 내는 납세자들과 혈액제제가 절실한 환자들이 돌려받고 있기 때문에 매혈의 부활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2.2. 매혈 제도의 부작용
헌혈을 통해 공급받은 혈액은 매혈에 비해 굉장히 저렴한 가격으로 채집할 수 있어 최종적으로 환자의 금전적 부담이 크게 줄어든다. 그러나 매혈은 혈액공급자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하기 때문에 혈액제제 가격의 상승은 피할 수 없는 문제다.[14] 현재 한국의 혈액제제 가격은 세계적으로도 굉장히 저렴한 편에 속해서 환자의 부담이 거의 없다시피한 나라인데,[15] 매혈 제도가 부활한다면 이 가격을 유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백혈병을 위시한 지속적인 수혈이 필요한 환자들이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과거에는 과도하게 매혈을 하다가 몸이 축나거나, 심하면 사망한 사람도 간혹 있었다. 특히 1980년대 중반 이전에 매혈비가 당시 소득기준으로 비싸서 비교적 손쉽게 돈을 벌수있다는 점때문에 3일에 1번씩만 피를 뽑을수 있다는 규정을 어기고 하루에 몇차례씩 피를 뽑는 경우도 간혹 있었기에 그랬다,
매혈 그 자체의 문제는 아니고 피를 뽑은 후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아 발생한 문제이긴 하지만, 1978년에는 한 30대 청년이 매혈을 통해 번 돈으로 그 날 저녁 포장마차에서 술을 사마셨다가 그대로 즉사하는 사건도 있었다. 적십자사에서도 안내해주는 사항이지만 채혈한 날은 금주다.[16] 헌혈 전후로 헌혈자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고 채취하는 혈액량까지 제한하는 현대의 헌혈 제도 하에서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 일이다.
또 매혈이 중구난방으로 이루어져 위생에 신경쓰지 않는다면 에이즈같은 같은 혈액을 매개로 전염되는 전염병이 발생할 수 있다. 한국같은 선진국에서는 병원체계가 제대로 잡혀있어 1회용 채혈도구가 법적으로 의무화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할 일은 적지만, 피를 구매하는 쪽이 시간과 원가를 절감하기 위해서 채혈도구를 1회용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큰 문제가 된다.[17][18]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리처드 티트머스 (Richard Titmuss)의 주장을 인용하여 미국에서는 혈액은행으로 인해 헌혈[19] 량이 급감했다는 주장과 그것이 틀렸다는 반박을 실은 바 있다.
3. 해외의 경우
미국의 헌혈제도는 아직 매혈을 인정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판사가 벌금을 못내면 매혈을 하라는 판결을 내려 가끔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한다.# 헌혈카드라는 포인트카드를 만들어주고 헌혈을 할 때마다 거기에 포인트를 지급해주는데, 일반 카드처럼 대부분의 상점에서 물건을 사는데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사들인 혈액은 미국 내 의료활동에 쓰이지만 한국같이 혈액이 부족한 나라에 돈 받고 수출하기도 한다. 대체로 1주일에 2회씩 헌혈할수있도록 되어있다. 참고로 매혈을 하면 회당 30달러씩 받을수있도록 되어있고 매주 2회씩 할수있도록 되어있는데 일반적인 미국 직장인들 입장에서야 푼돈이지만 빈민층이나 학생들에게는 꽤나 짭짤한 부수입원이다. 그러나 문제점이 없는것은 아니라서 수혈자들에 대한 모니터링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서 마약중독자같은 사람들도 피를 뽑아쓰다보니 한창 에이즈가 성행했을때 미국인들의 피가 캐나다로 수출되었다가 3만명 가량이 간염이나 에이즈에 걸리는 흑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법적으로 매혈이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한국과 마찬가지로 헌혈시에 기념품이나 현금처럼 쓸 수 있는 포인트를 제공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 보상이 나라마다 편차가 심하기 때문에 사실상 매혈이라고 봐야 할 정도로 보상이 큰 국가들도 존재한다. 개도국에서는 아직도 합법 또는 암암리에 성행한다고 하며, 중국에서는 2000년대 초반까지 돈벌이용 매혈이 성행했다. 여기까지는 1980년대 이전의 남한과는 큰 차이가 없지만 중앙정부에서 서방기업들에게 피를 파는것을 용인하고 허난 성같은 일부 지방에서 해당 지방정부에 의해서 돈벌이용 매혈이 권장되었다는것이 큰 차이점이었다. 지방정부 입장에서는 수수료 및 혈액원에서 받는 세금으로 세수를 확충할수있었고, 주민들은 몇분의 아픔만 감수한다면 편하게 돈을 벌수있었으니 원원이었던 셈이었다.(참고로 1990년대 기준으로 한번 채혈할때마다 50위안을 받았는데 당시 중국의 급여수준이 수백위안 정도였다는것을 감안한다면 꽤 큰 돈이었다.) 그러나 돈벌이에 치중한 나머지 혈액원에 대한 감사가 대충대충 이루워지는 경우가 허다했고 채혈비용 절감을 위해 주사바늘을 돌려쓰는 등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매혈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결국 마을 전체에 에이즈가 퍼져서 주민 전체가 에이즈를 앓는 사건이 보고되면서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으며 1996년도에 매혈을 금지하고 혈액원들 대다수를 폐쇄했지만[20] 그럼에도 매혈로 얻는 수익이 당대 중국 소득 기준으로 적지 않다보니 2000년대 후반까지도 매혈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존재했었다. 북한에서는 현금으로 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쓸만한 물자를 주기 때문에 1980년대 중반 이전의 남한처럼 서민층들의 유용한 용돈벌이 수단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4. 창작물에서의 매혈
신체 일부를 팔아 입에 풀칠한다는 안습한 상황 중에서 직접적인 장기매매보다는 그나마 위험성[21] 이 적기 때문에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등장인물의 궁핍한 생활상의 요소로 등장하기도 한다. 조정권의 시 '매혈자들'이 이를 잘 묘사하고 있다.
한국 단편소설인 우상의 눈물에도 매혈 이야기가 등장하여 등장인물인 최기표가 매혈까지 종용하여 돈을 갖다 바치게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그들은 제각기 얼어붙은 몸으로 찾아와 병원 침대에서
한 삼십 분 정도 누워 있다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선지국 집으로 몰려왔다
사골뼈 대신 공업용 쇼팅 기름을 쓴
이백원짜리 국밥을
바닥까지 긁어 먹었다.
개중에는 아편을 사듯 소주 반 병을 시켜 먹고 의자 뒤로 스르르 주저앉아 못 일어나는 이도 있었다
적십자병원 뒤 靈泉(영천)시장
말바위산이 올려다보이던 어둠침침한 밥집에서
서로 등 돌리고
서로의 밥에다 가래침을 뱉는 그 바닥.
갈 곳 없는 심연 속을 그들은 걸어 내려갔다
제각기 몸을 등잔으로 삼고 어두움 속으로.
육신에 가둬놓은 영혼의 어둠이 견딜 수 없이
몸을 누르고 눈을 봉할 때
그들은 다시 와서 피를 뽑았다.
- 조정권, <매혈자들>
백동호의 소설 실미도에서도 실미도 부대원 중에서 원래는 공사판에서 일하던 인부였지만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피를 팔던 어떤 훈련병의 이야기가 나온다. 피가 묽어질 정도로 뽑아대자 환영받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실미도 요원으로 입대하게 된다.
중국에는 아예 매혈을 중심소재로 다룬 소설 허삼관 매혈기도 있다. 제목대로 허삼관이 피를 파는 이야기.
5. 관련 문서
[1] 1975년 기준으로는 꽤 큰 돈이었다. 말단 공무원 급여가 5만원대 정도였던 시절이니 2019년 물가로 치면 매혈 한번 하면 20여만원 정도 벌던 수준에 가까웠다. 이러니 당시 매혈이 편하게 돈 벌수있는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잠깐의 아픔만 감수하면 공사판에서 하루종일 일하는것보다도 더 벌수있었으니.[2] 1988년 기준으로 최저시급받는 노동자는 11만 4천원, 7천원, 1989년 기준으로 14만 4000원 받았으니 아직까지도 매혈이 상당한 가치가 있었다.[3] 90년대 초반에 매혈을 했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매혈 한 번당 5000~10000원 정도를 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오락실에서 게임 1판하는데 100원, 아이스크림 하나 사먹는데 200원 정도, 만화잡지 한 권 사는데 1500원 들었던 시절이니 학비까지 마련했다던 1980년대 이전 수준은 아니지만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꽤 짭짤한 용돈벌이 수단이었던 셈이다. [4] 1993년 통계로는 혈액원 혈액 공급자의 38%가 현역군인, 26%가 학생이었다고 한다. 다만 서울에서는 학생들의 용돈벌이용 헌혈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학부모들이 헌혈에 대해 걱정하면서 학교에 항의전화를 걸어서였다고.[5] 헌혈 국가는 약 60여개국으로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포함되어있고 나머지 40여개국은 현재까지도 매혈제도가 존재한다.[6] 헌혈을 완전히 대체하는 개념이 아니라 매혈과 헌혈이 공존하는 방향이다.[7] 약 3~4시간의 봉사활동시간으로 퉁쳐준다. [8] 초코파이와 작업을 빼주는 시간으로 퉁쳐준다. [9] 매년 학생들이 방학에 들어가는 12~1월, 7~8월은 전국에 혈액수급 비상이 걸린다. 헌혈의 집마다 기념품을 1+1로 주는 행사를 하거나 직접 군부대를 방문해 헌혈을 유도하는 횟수도 늘어난다.[10] 당연하지만 군부대는 전방 지역에 몰려있다. 혈장 헌혈은 가능하지만 문제는 군부대에 방문하는 헌혈 차량으로는 혈장 헌혈이 불가능하다.[11] 대부분 미국에서 수입되는 혈액이다. 미국은 헌혈을 표방한 매혈에 가까울 정도로 헌혈시 보상이 상당하기 때문에 혈액수급률이 매우 높은 편에 속한다.[12] 인공적으로 생산이 불가.[13] 아직까지는 공장생산이 불가능하여 사람에게만 채집할 수 있는데, 그 중요성은 생명을 살린다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반면 다른 장기기증과 달리 단순 채집만으로는 제공자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도 않는다. 대신 한번 채취한 혈액은 안전목적상 사용되지 않으면 몇 주 내로 파기해야 하므로 지속적으로 + 일정량 이상의 안정적인 수급이 필요하다.[14] 예를 들어 매혈을 통해 매혈자에게 10만원을 지급한다고하면, 혈액제제 제작 및 유통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수혈을 받는 환자와 건강보험이 그 10만원+@를 부담해야한다.[15] 혈액제제 값이 얼마나 싼지 국내외에서 수혈을 너무 남발한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까지 나올 정도다. 수혈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도 수술의 안정성을 위해 일단 수혈을 준비하고 보는 경우도 많다.[16] 상처가 미미할 뿐 헌혈 또한 출혈과 동일하게 피를 잃는 것이다. 몸에 당연히 일정량의 무리가 가며, 헌혈한 당일은 전체 혈액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평소와 같은 양의 술을 마셔도 혈중 알콜농도가 더 급격하게 상승한다. 헌혈을 한 상태에서 평소에 만취할 정도의 양을 마셨다면 혼수 상태에 이르거나 호흡 정지가 올 수도 있다. 위의 예시는 사실상 호흡 정지 사례.[17] 실제로 냉전시기에 서양의 제약회사들이 의약품 생산을 위한 혈액을 얻기 위해 중국에서 매혈을 했는데, 비용 절감을 위해 주삿바늘 돌려쓰기를 하다가 집단 에이즈 감염 사태로까지 번지기도 했다. 이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지기도 했다.[18]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는 병원 등의 지정된 장소에서만 피를 뽑은 다음 증서를 받고 매혈자와 수익을 분배하는 제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매혈 방식을 체계화 시키는 것.[19] 혈액량 전체가 아니다.[20] 다만 이때 내부고발자는 중국에서 에이즈와 c형간염같은 질병의 확산을 막는데 큰 공헌을 했지만 씁쓸하게도 해당 지방관청 직원들에 의해 지역경제를 파괴시켰다면서 왕따를 당했고 결국 버티지 못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하며, 자신의 고발내용을 바탕으로 연극을 만들기까지 했지만 공안에 의해 외국에 치부를 알리지 말라는 압박까지 받았다고 한다. 어쨌든 2019년에 작고했다. [21] 건강의 위험성과 금전적으로 떼일 위험성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