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다 고조
1. 개요
시오다 고조(塩田剛三, 1915.9.9 - 1994.7.17)
아이키도 유파 중 하나인 요신칸(養神館)[1] 의 1대 관장, 일명 '불세출의 달인(不世出の達人)'
시오다 고조는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몸이 약했으므로 유도를 3단까지 수련하였고 같은 기간에 검도도 수련하였다. 1932년에 학교 교장의 소개로 우에시바 모리헤이(植芝盛平)의 연무를 보았는데, 사기라고 생각해서 우에시바에게 달려들었지만 바로 반격 당해 머리부터 벽에 처박히는 신세가 됐다.[2] 이에 시오다는 크게 충격을 받고 우에시바의 내제자[3] 가 되어 8년간 집중적으로 수련하였다.
1955년에 그의 아버지가 수련한 유도관의 이름을 따서 요신칸 아이키도를 설립하였다. 다만 이 과정에서 우에시바 모리헤이와 그의 아들인 기쇼마루와 충분한 논의가 없었기에 문제가 있었다. 이에 대하여 시오다 고조는 유명 무술잡지 <Black Belt>와 인터뷰를 하면서, 당시에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농업에 종사[4] 하고 있었고, 아들인 기쇼마루도 회사의 직장인[5] 이었기에 본인이 도장을 설립하였다고 설명했다. 당시 아이키도 본부 도장 관련인들이 생계를 꾸리기도 바쁘니 자신이 도장을 설립하였다는 의미다. 비록 요신칸 아이키도가 우에시바로부터 독립하였더라도 시오다 고조 스스로가 우에시바의 제자로서 아이키도의 주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인식하였기에 마찰은 없었다. 1961년에는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시오다 고조에게 9단을 주기도 하였다.
1957년에 시오다 고조는 도쿄 경시청을 위하여 아이키도 전수생 코스(専修生コース)를 개발하였고, 이를 계기로 요신칸 아이키도는 일본 경시청 무도로 지정되었다.1973년에는 미국에 수제자를 보내어 요신칸 아이키도를 전파하였다.
시오다 고조가 창립한 요신칸 아이키도는 코테가에시(小手返し)에서도 당신기(当て身)가 먼저 들어가는 등, [6] 술기의 분류와, 지도 방식, 형(形)이 아이키도와 많이 다르다.[7] 그렇다고 대동류 합기유술로 아주 회귀한 건 아니고, 현재의 아이키도와는 유술에 대한 접근 방식이 다르다고 보면 된다. [8]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이와마로 은거한 무렵에 현재의 아이키도 스타일로 크게 변했는데,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초기 제자인 시오다 고조는 은거 전 스타일을 따르고, 그 스타일이 대동류이기 때문이다. [9]
2. 여담
- 로버트 케네디의 보디가드와 힘겨루기를 했는데 보디가드는 거미가 땅에 눌린 양 꼼짝하지 못했다.[10] 이에 케네디는 "경호원이 제게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 하더군요. 하지만 아침을 먹었으면 이겼을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더군요."라고 평을 남겼다.
- 유도귀신 기무라 마사히코의 타쿠쇼쿠대학 선배이다. 시오다는 기무라와 팔씨름을 했는데 세 번 중 두 번을 이겼다.
- 몸다루기를 체득하기 위해 8년 동안 금붕어의 움직임을 연구했다.
- 프로 전적이 있는 격투가 이와쿠라 쓰요시[11] 는 시오다 고조를 사기꾼으로 여겨 공격했다가 역으로 당해서 왼쪽 어깨에 중상을 입었다. 이와쿠라가 1류 파이터인건 아니지만 일단은 전통 무술가가 현대 격투가를 실전에서 쓰러트린 흔치 않은 예라고 하겠다.
- 앞의 일화들에서도 알 수 있지만 외모와는 달리 젊은 시절부터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는데, 신주쿠(新宿)에서 시비가 붙어 30명 이상인 집단과 난투를 벌인 적이 있다고 한다.
- 노년이 되어서는 그 성질이 많이 죽었는지, 아이키도에서 가장 강한 기술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자신을 죽이러 온 사람과 친구가 되는 것'이라고 대답하거나, '사람이 사람을 이길 수 있는 무술이 필요한 시대는 끝났으며, 그런 인간은 자신이 마지막이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또한 아이키도 연무를 할 때도 간결하고 강하게 제압하던 젊을 때와 달리 노년에는 다소 과장된 동작들을 많이 보여 주었다.
- 나무위키 한정으로 시오다 고조가 극우 정치단체 흑룡회와 관련되었다는 서술이 많은데, 영어와 일본어 자료를 찾아보아도 시오다 고조가 정치 활동을 하였다는 증언이나 자료는 없다.[12]
3. 연무
위 영상 첫 머리에 쇼와 53년이라고 나오는데 서기 1978년이다.
4. 대중매체에서
그래플러 바키에서 시부카와 고키의 모티브가 되었다...라기보다는 사실상 거의 동일인물 수준으로 묘사된다. 실제 시오다도 155cm, 46kg 단신에도 불구하고 그 실력으로 인해 '불세출의 달인',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1] 양신관[2] 역사는 반복된다. 이 사건으로 부터 약 40년 후, 시오다 고조도 이와쿠라 츠요시라는 프로 격투가에게 사기꾼으로 의심당해 연무 중 공격을 받았다. 불 같은 성격으로 유명한 시오다 고조는 바로 반격하여 이와쿠라의 왼쪽 어깨를 박살내 버렸다(...)[3] 스승과 함께 거주하면서 수련하는 제자로 단순히 특정 시간에만 수련하는 제자와는 다르다.[4] 이와마 은거 당시 영친왕의 하사금으로 아이키도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우에시바는 긴 시간 동안 무농일여(武農一如:무술과 농사는 같다)의 기치를 내세우며 농사에 전념하고 있었다.[5] 증권회사에 다니고 있었다.[6] 요신칸 아이키도에서는 코테가에시뿐만 아니라, 모든 술기에 당신기의 형을 취하도록 훈련한다.[7] 심지어 술기를 아이키도처럼 一教, 二教가 아니라, 대동류 합기유술처럼 一條, 二條(혹은 ヶ条)라고 부른다.[8] 취소선이 있지만, 이것이 농담이 아닌 것이...어차피 사람의 신체를 다루는 것은 결국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이다.[9] 술기의 호칭만 보더라도, 아이키도에서 조(條)에서 교(教)로 바뀐 것은 2대 기쇼마루 도주 때부터이다.[10]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baki&no=46395[11] https://www.youtube.com/watch?v=IZgAGK93ncE 신비주의 컨셉으로 아이키도의 이름을 걸고 도장 운영하던 야나기 류켄이라는 사기꾼을 박살낸 것으로 유명한 무술인이다. 하지만 이와쿠라 쓰요시가 인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다. 시합이 끝난 뒤 류켄이 고통스러워하자 그의 상태를 살피고는 관객들한테 빨리 119 좀 불러 달라고 다급히 소리치기도 했다. 처음부터 류켄은 전문 무도인이라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으며 스님 출신에 그저 상업 종교인이자 방송인일 뿐이다. 운영하는 대동류 합기도 도장도 사실 종교단체적인 성격이 강하고... 이와쿠라 쓰요시 자신도 이건 그냥 야나기 류켄이 약한거고 아이키도 자체가 약하다는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12] Robert twigger의 넌픽션소설인 Angry white pajamas에서 나오는 내용으로, 요신칸의 합숙훈련에 참가했을 당시에 들었던 도장 내부의 루머가 바로 시오다 고조 관장과 그의 아버지가 흑룡회 출신이라는 것. 정작 시오다 고조 관장은 정치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서술 또한 나오는 만큼 걸러 듣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