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해
尉遲楷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위나라의 장수.
244년에 위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해 수도인 환도성까지 함락당할 위기에 빠졌다가 246년에 역습을 받고 물러났는데, 259년에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다가 중천왕이 정예 기병 5천을 골라 양맥 골짜기에서 대결을 펼쳤고 끝내 8천여 명의 병력을 잃고 퇴각했다.
삼국사기에는 울지로 기록되어 있는데, 하필 인종의 이름이 해(楷)였기에 피휘한 것이었으며, 주석으로는 울지해의 이름이 인종의 묘호를 뜻하는 장릉(長陵)으로 지칭해서 이름을 범했다는 내용을 통해 삼국사기가 인종 사후에 판각되었음을 보여준다.
울지해의 성씨인 울지씨는 선비족의 성씨으로 울지씨는 남북조시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북위의 유력 부족으로 크게 두각을 드러냈다.
대표적인 인물로 북주 태조 우문태의 사위 울지형[1] 북제 정벌에서 활약한 울지근, 당태종의 공신으로 활약한 울지경덕이 있다.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이 관련이 있다는 설도 있다.
그 이전에는 한나라 때 서역 지방에 있었던 국가인 우전국(于闐國)이 있었는데, 우전국의 귀족들 중에서 울지씨를 사용한 귀족이 있어서[2] , 남북조시대 이전 시대인 한나라 시대와 삼국시대부터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尉의 음은 위, 울 둘인데, 사람의 성에는 울로 발음을 하므로 위지는 틀린 표기다.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위나라의 장수.
244년에 위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해 수도인 환도성까지 함락당할 위기에 빠졌다가 246년에 역습을 받고 물러났는데, 259년에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다가 중천왕이 정예 기병 5천을 골라 양맥 골짜기에서 대결을 펼쳤고 끝내 8천여 명의 병력을 잃고 퇴각했다.
삼국사기에는 울지로 기록되어 있는데, 하필 인종의 이름이 해(楷)였기에 피휘한 것이었으며, 주석으로는 울지해의 이름이 인종의 묘호를 뜻하는 장릉(長陵)으로 지칭해서 이름을 범했다는 내용을 통해 삼국사기가 인종 사후에 판각되었음을 보여준다.
울지해의 성씨인 울지씨는 선비족의 성씨으로 울지씨는 남북조시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북위의 유력 부족으로 크게 두각을 드러냈다.
대표적인 인물로 북주 태조 우문태의 사위 울지형[1] 북제 정벌에서 활약한 울지근, 당태종의 공신으로 활약한 울지경덕이 있다.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이 관련이 있다는 설도 있다.
그 이전에는 한나라 때 서역 지방에 있었던 국가인 우전국(于闐國)이 있었는데, 우전국의 귀족들 중에서 울지씨를 사용한 귀족이 있어서[2] , 남북조시대 이전 시대인 한나라 시대와 삼국시대부터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尉의 음은 위, 울 둘인데, 사람의 성에는 울로 발음을 하므로 위지는 틀린 표기다.
[1] 나중에 양견의 권력찬탈에 반대하여 업군에서 반란을 일으켜 초전에 우중문을 격파하는 등, 활약했지만 결국 고경, 우문술에게 진압되고 만다.[2] 임동석 교수가 번역한 백가성(百家姓)이라는 책의 울지씨 항목의 해설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