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맥 전투

 

'''양맥 전투
梁貊戰鬪'''

'''1차 전투 시기'''
244년 8월
'''2차 전투 시기'''
259년 12월
'''장소'''
고구려, 양맥[1]
'''원인'''
공손연 멸망 이후, 고구려위(魏)의 관계 악화.
'''교전국'''
고구려

'''1차 전투 지휘관'''
'''동천왕'''
'''관구검'''
'''2차 전투 지휘관'''
'''중천왕'''
'''울지해'''
'''1차 전투 병력'''
20,000 명
10,000 명
'''2차 전투 병력'''
5,000 명
병력 규모 불명
'''1차 전투 피해'''
피해 규모 불명
3,000여 명 사상
'''2차 전투 피해'''
피해 규모 불명
8,000여 명 전사
'''결과'''
고구려군 승리
'''1차 전투 영향'''
동천왕관구검, 비류수에서 재결전.
'''2차 전투 영향'''
13년전 비류수 전투 설욕.
1. 개요
2. 1차 양맥 전투
3. 2차 양맥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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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위나라간의 전쟁 중 양맥에서 벌어진 2차례 전투를 말한다. 첫번째 교전은 동천왕 대에, 두번째 교전은 15년 후인 중천왕때 발생했다.
[image]
▲고구려의 개마무사

2. 1차 양맥 전투


다시 병사를 이끌어 양맥(梁貊) 골짜기에서 싸워, 또 이겨 3천여 명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又引兵再戰於梁貊之谷 又敗之 斬獲三千餘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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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17권 고구려본기 제5 동천왕}}}
244년 8월, 관구검이 1만의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에 쳐들어오자 이에 맞서 2만의 보병과 기병을 동원해 양맥 계곡에서 위군 3천여명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 후... 이와 관련된 내용은 비류수 전투 항목 참조.

3. 2차 양맥 전투


12년(서기 259) 겨울 12월, 위나라 장수 울지해(尉遲楷)【이름(楷)이 장릉(長陵)[2]

이름에 저촉된다.】가 병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임금이 정예 기병 5천 명을 선발하여 양맥(梁貊)의 골짜기에서 싸워 이기고, 8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十二年 冬十二月 魏將尉遲楷【名犯長陵諱】將兵來伐 王簡精騎五千 戰於梁貊之谷 敗之 斬首八千餘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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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17권 고구려본기 제5 중천왕}}}
동천왕이 비류수 전투에서 대패하고 수도가 불타버린 굴욕을 겪은 지 약 13년 후, 위나라의 울지해가 다시금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의 강역에 쳐들어왔다. 이에 중천왕이 친히 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양맥에서 맞붙어 적군 8천여명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뒀다. 10년 전 아버지가 당했던 치욕적인 패배를 단단히 복수한 셈.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이 동천왕이 위나라와 싸울 때 기병을 『삼국사기』는 '''철기(鐵騎)'''라고 명기했지만, 중천왕이 위나라와 싸울 때의 기병은 '''정예기병(精騎)'''이라고 표현한다는 것. 짐작건데 중천왕은 동천왕 때의 참패를 복기하고 위나라가 방진으로 나올 때의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는가 추정할 수 있겠다. 즉, 방진이 고구려의 중장 철기병을 막는데는 효율적이지만, 기동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이용해 먼저 경기병이 위나라의 방진을 측면에서 치고 빠지는 전술로 혼란에 빠뜨린 다음 중장 철기병이 정면으로 돌격해서 방진을 격파하고 궤멸시키는 전술을 쓴 듯하다. 이런 복합 기병들이라 경기병이나 철기병이 아닌 정예기병이라 표현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
[1] 위치는 불명으로, 현재 중국 요양시 태자하 상류 또는 중국 요녕성 번시 시에 위치한 오녀산성의 서측 혼강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2] 고려 인종묘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