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술
宇文述
546년 ~ 617년
1. 개요
북주와 수나라의 장수. 자는 백통(伯通). 우문성(宇文盛)의 아들.
우리나라에서는 살수대첩에서 대판 깨지고 수나라 군대를 말아먹은 장수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 우문술은 수양제의 즉위 이전부터 함께한 '''최측근''' 중 한 명이자 사돈지간일 정도로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2. 생애
대군 무천 사람이다. 본래 성씨는 파야두(破野頭)로 선비족 사람인 우문일두귀(宇文逸豆歸)의 노복이었다가 그 주인을 따라서 성을 우문(宇文)[1] 으로 고쳤다.
북주 무제 때 아버지 우문성의 군공으로 관직에 임명되었으며, 그 자신도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행군총관이 되어 상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울지형(尉遲迥)[2] 을 진압해 상주국에 임명되었다.
581년, 우위대장군이 되어서 진(陳)나라 정벌에 참여하였고, 진나라가 멸망한 후인 589년에는 진의 오주자사 소환이 저항하자 원계 · 장묵언 등과 함께 그를 공격해 장안으로 압송하게 한 뒤에 참수했다.
수양제가 태자가 되기 전부터 친해 가까이 두고 싶어해 상주했는데, 우문술은 수주자사에 임명되었다. 수 양제를 위해 태자 양용을 폐위시키기 위해서 수문제의 생각을 옮길 수 있는 사람은 양소 뿐이라 양소의 아우였던 양약을 만나 도모할 것을 건의하였다.
우문술은 양약을 초청해서 양광이 보물을 주었다고 하면서 그에게 유세했으며, 양약은 양소에게 양광을 지지하도록 상의하고 양소가 양광이 태자의 재목이라 하면서 양광이 태자에 책봉될 수 있게 되었다. 604년에 수 문제를 시해할 때 궁중의 통제권을 가졌고 수 양제가 즉위하자 좌위 대장군에 임명되면서 허국공에 봉해졌다.
우문술은 평소에 예부 시랑 허선심을 증오했는데, 수 양제가 즉위하면서 백관들이 축하할 때 허선심이 수 문제가 죽은 것을 들어 나라에 큰 상을 입었으니 축하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했다가 우문술이 이를 가지고 어사에게 탄핵해 허선심을 좌천시키게 했다.
6명의 신하들과 함께 인재를 선발하는 임무에 관장하게 되어 당시 사람들은 이를 선조칠귀라 불렀으며, 608년에는 배구가 철륵에게 토욕혼을 공격하도록 하자 서평으로 도주한 모용복윤이 서평의 경계에서 항복을 요청했다. 이에 우문술은 서평에서 출발해 임강성에 도착했지만 토욕혼이 우문술의 군세가 강한 것을 보고 감히 항복하지 못하고 도망갔는데, 우문술은 추격해 만두, 적수 두 성을 함락하면서 3천여 명을 죽이고 왕공 이하 200명, 남녀 4천 명을 붙잡았다.
612년에 고구려 원정에 참가해 부여도로 출발해서 노하, 회원 두 진에서부터 보급을 했으며, 우문술은 양식이 떨어지자 돌아가려고 했지만 우중문의 재촉으로 어쩔 수 없이 강을 건너 을지문덕을 추격했다. 을지문덕은 우문술의 군사가 굶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알고 피곤하게 하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싸우면서 매번 도주했으며, 우문술은 하루에 일곱 번 싸워서 모두 이기자 승리할 것을 믿고 전진해서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서 산을 이용해 진지를 만들었다.
을지문덕이 사신을 파견해 거짓으로 항복을 요청하자 우문술은 병사들이 피곤한 데다가 평양성은 함락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그 말을 듣고 돌아가면서 방진을 이루면서 행군했는데, 고구려의 군사로부터 사면에서 공격을 받았다. 가을 7월 24일에 살수에 도착해서 절반을 건너다가 고구려 군사의 공격을 받아 30만 5천 명 중에서 2700명만 남을 정도로 큰 패배를 했으며, 이 일로 인해 수 양제가 화나서 우문술은 쇠사슬에 묶였다.
그러나 우문술은 평소에 수양제의 총애를 입어 죽이지 않는 대신에 관직에서 박탈되어 백성이 되었으며, 613년 2월에는 수 양제가 조서를 내려 전쟁에서 패한 것은 그의 죄가 아니라 군리들이 물자를 늦게 지급한 것이 문제라고 해서 우문술은 관직, 작위가 복구되었다가 얼마 후에는 개부의동삼사를 더했다.
613년에도 고구려 원정에 참가해 여름 4월 29일에 우문술은 양의신과 함께 평양으로 향하게 되었는데, 양현감의 반란, 곡사정의 투항 등으로 인해 수나라군이 퇴각을 하게 되었다. 우문술은 양현감을 진압하는 전투에 참전했으며, 이후 좌위솔이 되었다. 당시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천자가 된다면서 이씨를 모두 죽일 것을 권고받은 수 양제가 이혼의 조카인 이민이[3] 그 이름이 도참에 맞다고 의심해 그를 죽이려 했는데, 이민은 두려워해 이혼, 이선형과 함께 사사로이 대화를 나눴고 우문술은 이 사실을 수 양제에게 참소했다. 이에 명을 받아 조사하면서 이민의 처 우문아영을 유혹해 표문을 올리게 했다. 그래서 이민을 천자로 삼는다는 무고를 하면서 그 종족 32명을 죽게 했으며, 삼종 형제 이상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변방으로 유배를 보내게 하고 몇 개월 후에 우문아영을 독살했다.
616년에 가까운 신하에게 도적에 관해 묻자 우문술은 점차 적어진다면서 10분이 1이 될 수 없다고 했으며, 강도에서 새로 용주를 만들어 완성해 동도로 보내자 우문술은 수양제에게 강도에 행차하기를 권했다. 허공공의 작위를 가졌다.
수서에는 강도에서 겨울 10월에 사망했다고 나오나, 묘지명에 따르면 강도에서 617년 9월 21일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들은 운명이 갈라졌는데, 장남 우문화급(宇文化及)은 양제를 시해하고, 차남 우문지급(宇文智及)은 형을 도왔으나, 결국 두건덕에게 격파되어 참수되었다. 반면 막내 아들인 우문사급(宇文士及)은 당나라에 출사하여 중신이 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
그가 등장한 사극과 대중매체에서 제일 유명하고 알려진 작품은 당연 대하드라마 수나라 사람들이라 할정도의 사극인 연개소문뿐이다. 극중에서는 야인시대의 장택상으로 유명한 배우 임혁주 분이다. 우복야 양소의 천거로 조정과 군부 전반에 등장하였다. 처음에는 양량,고경등과 함께 고구려 원정에 동참했지만 실패하고 이후 좌천되어 황문시랑 배구 등과 함께 밀려있었지만 작중에서는 수양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물론 양소의 영향력을 배제할순 없다. 그를 군부의 수장급 위치인 좌위솔로 만들어 준 사람이 양소였다. 하지만 양소의 제안을 거절하고 양광의 편에 붙어버리면서 양소가 죽는 걸 방관한 셈이다. 이후 수양제의 신임을 얻으며 황제와 사돈지간으로 양소 이후 수나라의 신료들을 대표하게 된다. 이는 2부에서 이세적과 같다고 할수 있다. 비록 장형에 의해 밀무역을 하던 아들들이 종으로 떨어졌긴 하지만, 장형이 황제에게 끊임없이 간언하는 바람에 지쳐버린 양광이 장형을 내치게 되면서 양광을 옹립시킨 공신들 중에서 최후까지 남은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나 고구려 원정에서 마지막 까지 이기지 못하고 패배한 뒤 그는 병사하고 만다. 죽는 순간에 자신은 제국의 몰락을 보지 않고 죽으니 다행이다. 라고 말한뒤 우문화급에게 비록 폭군이지만 수양제에 대한 충절을 거두지 말라고 말하고 사망한다. 이후 그의 아들들이 수양제를 죽이면서 그렇게 1부는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