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휘
1. 개요
避諱
과거 동아시아에서 사람을 부를 때 본명을 직접 부르지 않고 돌려 부르는 관습을 말한다.
기휘(忌諱)라고도 한다. 휘(諱)는 본래 '꺼릴 휘'인데, 언령과 관련된 옛 관습에서 함부로 부르기를 '''꺼리는''' 군주 등의 이름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피휘는 '휘(이름)를 피하다'로 옮길 수 있다. 문장에서 임금이나 높은 이의 이름자가 나타나면 삼가는 뜻을 표하기 위해 뜻이 통하는 다른 글자로 대체하거나 획의 일부를 생략하는 것이다. 굳이 적어야 하는 곳에는 성휘(姓諱, 성과 이름)라고만 적는다.
이런 관습이 생겨난 것은 사람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예에 어긋난다고 여겼던 한자문화권의 인식 때문으로, 자나 호와 같이 별명을 붙여 부르던 풍습(실명경피속實名敬避俗)이나 부모나 조상의 이름을 언급할 때 '홍길동'이라 하지 않고 '홍, 길 자, 동 자'라고 조심해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풍습은 가톨릭이 한국에 전래되던 초기에 세례명이 자나 호처럼 여겨져 가톨릭의 전래를 돕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독립운동가 안중근을 주로 도마 안중근이라 부르는데 도마(多默)는 세례명 토마스의 음차다.
동아시아인들은 이 관습 때문에 일반적으로 군주나 자기 조상의 이름에 쓰인 글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초기에는 글자만 피하고 음은 같거나 비슷한 한자를 골랐으나 후대에 가면서 음이 같은 한자도 기휘에 걸려 사용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로 인해서 백성들이 불편해 했는데, 그래서 조선시대 왕자들은 일반적으로 흔하게 사용하지 않는 희귀 한자를 이름으로 썼다.[1] 실제로 '세(世)' 같은 흔한 글자가 피휘의 대상이 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는지는 하단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관습은 중국 주위의 유교(한자)문화권에 전파되었고[2] 오랫동안 기본상식 수준으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현대에도 한국과 중국에서는 보통 자식과 부모나 조상과 후손은 이름에 같은 한자를 넣지 않는다.[3] 심하면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이름을 피휘하기도 하며, 심지어 조선 시대에는 처가 어르신들 중 자기 이름에 들어간 한자를 쓰는 분이 있다면 사위가 장가를 들자마자 개명하기도 했다. 물론 요즘에는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는다.
유교문화권이라고 반드시 지켰던 것도 아니다. 중국도 이런 관습이 생기기 전, 주나라가 세워지기 이전 시대의 군주는 이름을 그대로 불렀다. 예를 들어 상(은)나라의 왕들이 그렇다. 한국에서도 유교문화가 정착되기 이전에는 부여온조 온조왕, 김내물 내물 마립간 같이 시호가 없이 이름 + 왕 형태로 기록된 임금이 꽤 많다. 그리고 이미 피휘의 관습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조선시대에도 태종이 이름인 이방원(李芳遠)에 들어가는 한자가 실생활에서 매우 자주 쓰이는 글자인데도 태종 스스로가 이름을 개명하지 않았고, 민간에서도 이 글자들을 피휘하지 않았다.[4] 다만 이런 사례는 일반화하기 어려운 특이한 경우이다.
일본에는 통자(通字)라고 해서 특정 글자를 한 집안의 이름자에 대대로 넣는 관습이 있었다. 예를 들어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름에서 '이에(家)'자를 대대로 이름에 사용하곤 했다. 정착하지는 못했지만 피휘의 관습을 몰랐던 건 아니었다. 조선에서 일본의 국서에 중종의 휘인 역(懌)이 있다고 항의하자 크로스 카운터로 조선의 국서가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휘인 미츠(光)를 사용했다고 따지기도 했다.
중국과 거리가 가까운 몽골에서도 피휘는 낯선 관습이었다. 예를 들어 칭기즈 칸의 이름 테무진은 원래 아버지 예수게이가 쓰러트린 적장의 이름인데, 그걸 새로 태어난 아들에게 붙인 것이다. 그리고 칭기즈 칸 본인도 자기를 특별히 높이지 말라고 해서, 부하와 형제들, 그리고 백성들에게 몽골의 왕중왕인 자기한테 그냥 이름으로 부르라고 했다. 황제나 왕의 이름을 면전에서 직접 불렀다간 불경죄로 삼족이 멸해지는 한국이나 중국과 대비되는 상당히 이질적인 부분이다.
이는 정주민들의 땅을 정복하고 그 관습을 받아들인 게 아닌 이상, 몽골 같은 유목민 국가들이 기본적으로 혈통 상으로나 귀족, 평민, 왕족을 구분했을 뿐, 복식이나, 거주하는 환경 면에서 그렇게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역시 유목 생활을 주로 했던 여진족은[5] , 금나라 건국 직후에도 한동안 황제와 귀족들이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며, 황제가 변변한 황궁도 없이 (정주민들 시각에서) 허름한 텐트에 살면서 집무를 본다던가, 황제가 국고에 함부로 손댔다는 이유로 곤장까지 맞는 등, 옛날부터 유교 문화권에 속하여 살아왔던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에게는 경악할 만한 일이 꽤 벌어졌다. 금세종 때에나, 점차적으로 피휘와 같은 유교적인 요소들이 자리잡았다.
유럽 지역에서는 오히려 부모나 조상의 이름을 자식이 물려받는 것을 선호한다.[6] 신약성경에서도 세례자 요한의 이름을 짓는데 조상 중 요한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의견을 표시하는 친척들이 묘사될 정도였다. 그래서 군주의 이름을 백성이 그대로 쓰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워낙 동명이인 군주가 많다보니 구분을 위해서 '아무개 몇 세' 등으로 표기한다. 미들네임이란 방식이 생겨난 이유도 마찬가지. 왕비나 왕자비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레이스 켈리나 메건 마클같은 결혼 전 본명에 크게 민감해하지 않는다.[7]
스페인에는 '''Jesús'''라는 이름도 흔하며[8]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이슬람교-유대교의 유명인 이름에서 따온 유수프, 이사, 무함마드 같은 이름도 흔하게 쓴다.[9] 예수의 이름은 그 신이 인간이 거리낌 없이 다가갈 수 있게 인간이 되어 그 이름도 거리낌 없이 부르는 거고, 무함마드라는 이름은 유일신의 대리자의 이름이어서 허용되는 것.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런 대리자들의 이름을 쓸 때도 조심해야 하며 이름 가지고 말장난을 한다든지 하면 안 된다. 이게 논란을 일으킨 게 개그콘서트의 단명 코너인 억수르였다.[10] '''심지어 자신들을 학살했던 정복자의 이름도 인명으로 쓴다.''' 한니발이나 아틸라[11] , 혹은 티무르 등이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서양 및 중앙아시아에서도 피하는 이름들이 있다.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서 신에게는 피휘가 적용되었다. 야훼를 직접 발음하거나 글로 씀은 불경하다 생각해서 모음을 생략하고 적었는데, 당시 히브리어는 모음을 생략해도 무슨 의미인지 파악이 가능하여 별 문제가 없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아예 야훼의 실제 발음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아브라함 계통 종교의 신의 원래 이름은 사라지고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세계로 퍼지면서 신을 의미하는 고유명사를 야훼의 번역어로 쓰게 되었다.[12] 마찬가지로 고대 중동의 신앙 바알은 주인이라는 뜻으로, 신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기 위해 부르던 말이었다. 또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도 포트니아 테론같은 위대한 여신 및 남신들은 풍요를 내리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자연 그 자체를 운용하는 존재로서 재앙도 관장하기에 일부러 다른 이름으로 부르곤 했다. 가장 유명한 예시로는 에리니에스가 있다.
서양에서도 현직 국왕의 공식 칭호에서 이름을 직접 일컫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엘리자베스 2세는 공식 경칭이 '''Her Majesty The Queen'''이지 '''Her Majesty Queen Elizabeth II'''가 아니다. 반대로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재위 중엔 His Majesty The King으로 불리다가 퇴위하자마자 His Majesty King Juan Carlos (of Spain)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His Majesty The King (of Spain)은 후임인 아들 펠리페 6세가 계승했다.
2. 유형
- 국휘(國諱)는 군주의 이름을 피하는 것이다. 보통 황제는 7대 위, 왕은 5대 위의 지배자까지 그 이름을 피했다. 근데 밑에서 보이는 몇몇 사례들을 보면 일반적으론 해당왕조가 망할 때까지 피휘가 지속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던 듯 하다.
- 가휘(家諱)는 집안 조상의 이름을 피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고려 말 학자 이제현은 작제건-용건(왕륭)-왕건으로 이어지는 고려 개국 당시 왕실 가문의 이름 물려받기를 상당히 기이하게 여겼다.
가휘만이 현대까지도 꽤 남아있는데, 전근대에 비해서는 많이 사라졌지만 보통은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이름에 들어가는 글자는 자식이 쓰지 않고, 엄격한 집안 같은 경우는 증조부나 고조부까지도 피휘의 대상이 된다.[13] 발음이 같은 것까지는 봐 주는 것 같다.
- 성인휘(聖人諱)는 성인의 이름을 피하는 것을 뜻한다. 대표적인 예가 공자의 이름이다.
- 원휘(怨諱)는 원수지간인 사람의 이름을 피하는 것을 뜻한다.
피휘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로 나뉜다. 피휘한 글자는 대개 어느 한자든 음을 그대로 읽지 않았다.
- 결자(缺字)
피휘할 한자를 통째로 생략한다. 이 경우 피휘할 자리를 아예 공백으로 남겨 버리거나 아니면 공백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삭제한다. 대표적으로 이것이 정착된 예가 관(세)음보살로 당태종 이세민의 세(世)를 뺀 것이 관습적으로 남은 것이다. 또 <수서>에서는 왕세충(王世忠)의 이름을 王□忠이라고 쓰고 왕충으로 읽었다.
- 결획(缺劃)
앞의 결자와는 달리 피휘할 한자를 생략하지 않고 그냥 쓰되, 해당 한자에서 일부 획을 빼고 쓴다. 주로 마지막 획을 빼지만, 마지막 획을 빼서 다른 글자와 헷갈린다면 가장 헷갈리지 않을 획을 골라서 뺀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에 旦(아침 단) 자는 마지막 획(一)을 빼면 日과 형태가 같아져서 헷갈리므로 마지막 획은 그대로 남기는 대신 日 안의 가운데 가로획을 빼서 口 + 一, 즉, '므'의 형태로 적었다.[14] 태조 이성계가 개명한 이단이라는 이름의 피휘 때문이다.[15] 강희자전 원본에도 이런 결획된 글자가 몇 개 있다. 예를 들어, 강희제의 이름으로 쓰인 玄과 燁은 마지막 획을 빼서 𤣥과 𤍞으로 변형시킨 형태가 수록되어 있다.
- 대자(代字)
피휘할 한자를 아예 생략해버리는 결자와는 달리 피휘할 한자가 빠진 자리에 해당 글자와 뜻이 같거나 뜻이 비슷한 별도의 한자를 쓴다. 연(淵)개소문을 천(泉)개소문으로 쓰거나[16] , 문무왕(文武王)을 문호왕(文虎王)으로 쓰거나[17] , 당나라 판본 사기(수초본)에서 세가(世家)를 계가(係家)로 쓴 예[18] 등이 있다. 주석서인 사기색은의 경우는 계가(系家)로 적었다.
- 몇몇 고유 명사의 경우 피휘를 위해 아예 새로운 이름을 짓는 경우도 있었다.
- 글자의 전체를 피한다.(예: 한나라 문제의 이름 유항[劉恆][19] 를 피휘하려고 같은 의미를 갖는 常 자로 대체, 기주의 항산[恆山]을 상산[常山]으로 바꾸었다. 그 유명한 '상산 조자룡'의 출신지인 그 상산 맞다. 또 한나라 경제의 이름이 유계[劉啓]였기 때문에 계칩[啓蟄]을 경칩[驚蟄]으로 바꾸었다. 단, 일본은 지금도 계칩이라 한다. 일본에서 계[啓]와 경[驚]의 발음과 같아서 그런 듯.)
- 글자의 일부도 피한다. (예: 진시황의 이름 정[政]자의 일부인 正을 피하려고 정월[正月]을 단월[端月]로 바꾸었지만 진나라가 통일 후 15년밖에 가질 않아서 오늘날도 그냥 정월로 쓴다.)
- 휘의 소리를 피한다. (예: 당나라의 국성인 리[李]와 소리가 같은 리[鯉]가 뜻하는 '잉어'를 글로 쓰지 못하게 하였다. 그 때문에 잉어는 리[鯉] 대신 적선공[赤鮮公: 붉은 물고기님]이라는 존칭으로 불렸다.)
- 모양이 비슷한 글자를 피하는 경우도 있다.(예: 황[皇]자와 죄[辠]자의 모양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죄[辠]를 죄[罪]로 바꾸기도 하였다.)
- 마지막으로 성인의 말씀, 선대왕이 쓴 글, 옥편 등 피휘를 하지 못 할 경우, 피휘는 하지 못하더라도 음만이라도 바꾸어 읽었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에 旦 자를 피휘하지 못한다면 같은 뜻의 朝의 발음인 됴로 발음했다. 공자의 이름인 丘를 부득이 유교 경전 등에서 읽게 된다면[20] 실제로 발음하지 않고 모(某)라고 발음했다. 공자 자신은 생존 당시에 某가 아니라 丘의 발음을 그대로 읽었겠지만 후세 사람들이 감히 따라 읽지 못하고 회피한 것이다. 공자 외에도 주요 성현들이라든지 기타 읽기가 곤란한 제왕이나 부모의 이름 등도 모(某)라고 읽곤 했다.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현대의 읍읍과 같다.
3. 사례
3.1. 중국
- 대표적인 사례는 한고조 유방(劉邦)의 사례. '방(邦)'은 나라를 뜻하는 의미의 한자로 널리 사용되었는데, 유방이 황제가 되면서 '방(邦)'은 사용이 금지되고 비슷하게 나라를 뜻하는 의미의 한자이지만 그때까지는 왕이 거하는 도성을 뜻하는 의미로 더 많이 쓰였던 '국(國)'이 나라를 뜻하는 한자로 쓰이게 된다. 중국의 최고위 관직이었던 상방(相邦)은 바로 이 때문에 상국(相國)으로 바뀌었다.
- '장(莊)'씨는 후한 명제의 이름이 장(莊)이기 때문에 '엄(嚴)'씨로 성을 갈아야 했다. 후한 때 편찬된 《한서》에 나오는 거의 모든 엄씨는 사실 장씨다. 고구려사 덕후라면 왕망 시절에 잠깐 나오는 엄우(嚴尤)란 신나라 장수를 본 적이 있을 텐데, 그 사람이 사실 장우(莊尤)다.
- 삼국지의 인물들의 이름 중 비(備)ㆍ견(堅)ㆍ조(操)ㆍ우(羽)ㆍ의(懿)가 피휘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해당 왕조가 존속할 때만 피휘된 다른 사람들과 달리 '우(羽)'의 경우 해당인이 후대에 황제(관성대제)를 넘어 신(神)으로 추대되면서 이후 중국 후대 왕조의 황제들이 이름을 겹치지 않게 하기 위해 자기들 스스로 피휘를 했다고 한다. 중국인들이 관우를 굳이 운장, 관공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 당나라도 피휘로 유명하다.
- 위진남북조시대에 불교가 전파되면서 불교 용어를 한자로 번역할 때 보살 중 아발로키테슈바라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로 번역했는데, 훗날 이것이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세(世) 자와 겹친다는 이유로 세를 떼버리고 관음보살로 부르던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다.[21] 문제는 이놈의 세(世) 자가 생활 필수 한자 중 하나라서 당나라 시기 대부분을 이 세(世) 자를 피휘하느라 고생했다. 이세민의 부하 장군 이세적은 스스로 이름의 세 자를 빼서 이적으로 개명했고,[22] 사기의 분류 중 하나의 세가(世家, 제후국의 기록)는 당나라 시대 판본에 한해 계가(係家)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세는 대부분 계나 대代로 교정되어 피휘가 사라진 뒤 세대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 그리고 베트남에서는 이 두 글자를 한 글자로 압축한 쯔놈 문자 𠁀(⿱世代)와 𫢫(⿱代世)[23] 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연(淵)은 당나라의 고조 이연(李淵)의 이름과 같기에 당나라 측 사료에는 피휘대자(避諱代字)를 따라 비슷한 뜻의 한자로 바꾸어 천개소문(泉蓋蘇文)으로 기록했다. 그래서 현존하는 당대를 기록한 모든 사료에는 연개소문이 '천개소문'으로 기록되어있다.[24] 따라서 삼국사기에서도 천개소문전[25] 이라 하며 독립운동가 박은식도 천개소문이라 불렀다.
-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연의 아버지이자 이세민의 할아버지 이병(李昞)[26] 때문에 십간(十干)의 하나인 병(丙)을 경(景)으로 바꾸어야 했다. 거기에 이세민의 증조할아버지이자 이병의 아버지 이호(李虎)[27] 때문에 호(虎)를 무(武)로 바꿔야 했는데, 예를 들면 관문의 하나인 호뢰관은 무뢰관으로 변경되었다.[28] 왜냐면 국가적 차원의 피휘는 추존황제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 당나라에서 자주 쓰던 한자를 피휘하느라 애먹인 또 다른 예로 당고종 이치(李治)가 있다. 이때부터 다스릴 치(治)는 다스릴 리(理)로 변경해야 했다.[29][30]
- 후한 시기 지역의 명사를 추천받아 관직을 수여하는 제도의 본래 명칭은 수재(秀才)였으나 공교롭게도 후한의 건국자인 광무제의 이름이 유수(劉秀)였으므로 명칭을 무재(茂才)로 바꾸어 쓰기도 했다.
- 송나라 때 중국에서는 도교의 신 중 하나인 현천상제(玄天上帝)[31] 의 玄자가 송나라 황실의 시조 조현랑의 이름자 중 하나라고 현천상제를 진무대제(眞武大帝)로 개명하고 현무 또한 진무(眞武)라고 불렀다. 당나라 현종도 여기에 걸려 묘호 대신 시호인 명황(明皇)이라고 불렀다. 현종을 가리켜 '당명황'이라고도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서 시작한 것. 웃긴 게 남의 이름(?)을 멋대로 바꾸어 놓았으면서 송나라는 북방민족들의 위협에 시달린다고 북방의 안정화와 국태민안을 위해 현천상제를 관방도교의 제사 대상 중 하나로 놓았다.[32] 송 휘종 항목에 나오는 휘종 어필 천자문 이미지를 보면 '천지현황(天地玄黃)'을 '천지원황'(天地元黃)으로 표기했는데 이것도 玄을 피휘한 것. 또 휘종은 용(龍), 천(天), 군(君), 옥(玉), 제(帝), 상(上), 성(聖), 황(皇) 같은 한자를 자신을 포함한 황제들을 일컫는 용례 외에는 일반적인 언어생활에서 사용하지 못하도록 정하기도 했다.
- 요나라 시절엔 여진족의 한자어인 女眞(女真)을 여직(女直)으로 바꿔 부르기도 했는데, 요나라 흥종의 한명(漢名: 한족식 이름)인 종진(宗眞)의 이름을 피휘하기 위해서였다. 황제 이름 때문에 민족명을 다르게 표기한 사례.
- 관직명도 피휘에 걸린 사례가 있다. 주나라의 제후국 송나라는 본래 주나라의 관제를 본받아 사공(司空)이란 관직을 두고 있었는데, 송무공의 이름이 사공이라 이 관직을 사성으로 바꾸었다. 당태종 이세민은 6부의 민부(民部)를 호부(戶部)로 고쳐버렸고, 이후로 조선의 6조에도 이것이 적용되어 호조라는 단어가 나오게 되었다.
- 관직명과 조상의 이름이 겹친 사례로 당나라 대시인 이하는 아버지의 이름인 이진숙(李晉肅)과 진사(進士)의 발음이 겹친다는 이유로 진사시 응시도 못 하고 탈락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 피휘가 원인이라기보다는 이하의 재능을 시기한 문인들이 붙인 구실에 가까웠다. 당시 유명한 문인이었던 한유는 이를 보고 '아버지의 이름 때문에 진사시를 치지 못한다면, 아버지 이름이 인(仁)인 자는 사람(人)이기를 포기해야 되는 거냐'며 디스했다.
- 도시명이 피휘에 걸린 사례가 있는데, 과거 손오의 수도이기도 했던 건업(建業)은 서진의 마지막 황제 사마업(司馬業)과 이름이 겹친다는 이유로 동진이 세워진 직후 건강(建康)으로 개칭되었다. 사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사마업이 즉위하자마자 피휘가 이뤄졌어야겠지만, 사마업이 재위한 짧은 기간은 영가의 난으로 인해 황제 본인의 목숨도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의 이름에 신경 쓸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 공자의 이름인 구(丘)는 공자가 성인으로 대우받으면서 점차 피휘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그래서 丘의 대용자로 邱, 또는 坵가 생겨나서 쓰이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피휘를 하긴 했다는 시늉을 내는 정도라고 볼 수 있다. 당나라 이연의 아버지 이병(李昞) 때문에 昞뿐만 아니라 丙까지 피휘해서 경(景)으로 쓰게 했던 원칙을 적용한다면 邱나 坵로 써도 발음은 여전히 '구'이고 글자 안에 丘도 구성요소로 들어가있으니 丘를 邱, 또는 坵로 쓰는 것도 불경이고 똑같이 '구'라고 발음하는 것도 불경이었을 텐데 그렇게까지 엄격하게 하진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실제로 丘는 황제의 이름만큼은 엄격히 피휘하지는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씨 등에서 丘를 그냥 쓰기도 했다.[37]
- 청대에는 옹정제가 1725년에 칙명을 내려 丘 자는 유가 경전에 있는 것만 남기고 피휘하도록 했다. 그래서 丘씨는 강제로 邱씨로 변경됐고 지명에 있던 丘는 다른 글자로 바꾸도록 했다. 그리고 邱를 그대로 읽으면 공자의 이름 丘를 그대로 발음하게 되는 문제가 생기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해 원래 발음대로 읽지 못 하게 했다. 그래서 丘/邱의 관화 발음인 치우(qiū)[33] 를 그대로 읽지 못 하고 대신 운미(韻尾) 부분을 생략한 치(qī)[34] 로 읽게 바꿨다.[35]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세워진 직후인 1912년에는 추펑자(丘鳳甲)이라는 사람이 邱씨를 丘씨로 되돌리자는 주장을 했는데, 그 이유는 공자 시대에는 피휘하는 습관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丘를 邱로 바꿔 쓸 이유가 없다는 것. 그래서 일부는 丘씨로 되돌아갔고 일부는 그냥 邱씨를 유지하게 되면서 구분이 생겼다가 중화인민공화국 시대에 들어서면서 중국 본토에서는 간체가 정식 문자가 되자 다시 丘씨와 邱씨는 다시 통합되었다. 간체를 만들 때 원칙 중 하나가 비슷한 글자는 한 글자로 통일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청나라 때와는 반대로 邱와 坵는 丘로 강제통합되었다. 하지만 성을 강제로 갈아버리면 심리적 반발이 생기는 게 당연한 일. 법적으로는 丘로 바뀌었어도 사적으로는 邱를 쓴다든지 하는 일도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중국은 규정을 완화해 1988년에 邱 자를 간체의 일부로 추가하되 성씨에만 한정해 쓰도록 했다.# 그래서 지금은 다시 법적으로 丘씨와 邱씨의 구분이 생겨난 상태.[36]
- 이것은 단지 왕족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일반 사대부 집안에서도 유행한 관습이라 종종 한자를 새로 만들어 이름을 지었다. 한자라는 문자체계의 '열린 집합'이라는 특성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한자의 글자 수는 수만 자에 달하고 이 중에선 유니코드에 아직 수록되지 못한 글자도 당연히 많다.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후 가장 먼저 한 조치 중 하나가 한자 새로 만들어 이름 짓기를 금지한 것이었다.
한국은 인명용 한자로 등록된 한자만이 호적에 올리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게 시행되기 시작한 것은 1991년으로, 피휘 철폐 목적으로 나온 정책이라기보다는 행정망 전산화와 맞물려 모든 한자를 넣을 기술이 안 되어 완성형 코드에 들어있는 한자만 쓰게 만든 것이다. 시행 초기에는 2700자로 정말 적었고, 그 후 조금씩 늘어나 2013년 현재 5000여 자까지 늘어났다. 지금은 유니코드의 도입으로 이런 문제가 크게 완화되었고, 10만 자를 수용할 수 있는 인명용 한자 DB를 구축해서 사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더불어 인명용 한자 사용을 강제하는 조항도 없앨 예정이라고.#[38][39]
- 군주의 이름을 온 나라에서 피휘하는 풍습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군주가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칠 수 있었다. 그래서 왕조에서는 백성들을 위해 군주가 이름을 갈아버리거나, 왕자들의 이름을 지을 때는 외자로, 되도록 흔히 쓰이지 않는 한자로 짓기도 했다.
- 수나라의 이루겸(伊婁謙)은 왕겸(王謙)을 평정한 후에 역적의 이름과 같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주로 자를 칭하게 되어 이루언공(伊婁彦恭)이라 했다.
3.1.1. 문자의 옥
중국에서는 추가로 피휘를 정치적으로 이용, 불용문자를 사용한 정적을 제거하는 사례도 빈번히 있었다. 이것을 필화, 혹은 '''문자의 옥'''이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사례가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 청나라의 옹정제가 일으킨 피바람. 정말 글자 하나 잘못 써서 목이 날아간 예라고 보면 된다.
- 주원장은 억지가 좀 심했다. 그가 젊을 때 잠시 중이 된 일이 있었는데 주원장은 이것을 수치로 여겨 자기 앞에서 일절 옛날 일을 꺼내지 못 하게 하고, 승려 생활 때 머리를 깎은 것 때문에 '빛날 광(光)', '대머리 독(禿)' 자를 쓰거나 '승려 승(僧)' 자와 그것과 발음이 같은 '생(生)' 자를 쓰는 행위, 반란군 출신이란 의미의 '적(賊)'과 발음이 비슷한 '칙(則)' 자를 쓰는 행위를 무조건 처벌했다. 이건 정말 몇 개만 예로 든 거다. 이 글자를 안 써도 온갖 억지해석과 파자놀이로 없는 죄를 만들어 엄청나게 죽였다.[40]
- 글자 사용이 꼬투리 잡혀 대규모로 사람들이 죽어나간 청나라의 필화는 문자의 옥에 자세히 설명되어있다.
3.2. 한국
삼국시대엔 피휘란 먼 서쪽 중국에서 전래된 생소한 예법이었다. 고조선, 부여는 자료가 부족하나 남아있는 기록들은 왕의 이름을 그대로 부르고 있으며, 삼국시대에도 고구려와 백제, 신라, 가야는 초기 군주를 대부분 그냥 이름으로 불렀다. 추모왕, 온조왕, 혁거세 거서간, 수로왕, 사마왕, 창왕 등이 있다. 발해 역시 내부에서 피휘를 사용했다는 자료가 없다.
3.2.1. 신라
한국사에서 자국 군주[41] 에 대한 피휘의 관습이 드러나는 건 신라 때부터로, 삼국사기를 보면 제32대 효소왕의 이름 김이홍(理洪)에 이(理) 자가 들어간다는 이유로 효소왕이 즉위한 692년에 좌리방부(左理方府, 형법 및 법률 담당, 651년 설치)와 우리방부(右理方府, 형법 및 법률 담당, 667년 설치)를 각기 좌의방부(左議方府)와 우의방부(右議方府)로 개칭한 기록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다른 사례를 보면 피휘제도의 원조인 중국 본토나 훗날 고려시대 등과 비교하면 아직 적응이 덜 됐는지, 필요성을 덜 느꼈는지 몰라도 피휘를 철저하게 적용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효소왕의 뒤를 이은 성덕왕은 존호가 그냥 자신의 이름이었다. 먼 후손 원성왕도 존호를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썼다.
사실 중국과 교류를 시작하기 전에 세운 고대국가가 그대로 쭉 이어진 신라는 피휘를 철저히 적용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신라 초중기 수십 명의 왕들의 이름은 한자가 한반도에 제대로 정착하지 않았던 시절부터 부르던 것으로, 이후 시대처럼 한자의 뜻을 감안해서 지은 게 아니라 단지 신라의 고대 한국어 고유어 이름을 비슷한 음의 한자로 옮겨 쓴 것 뿐이었고, 한국어가 들리는 대로 해당 음의 한자를 가져다 쓰는데다가 현대 한국어와 달리 향찰처럼 훈독도 그때그때 섞어 썼기 때문에 이름의 한자 표기가 당시에도 고정되어있지도 않았다.
예를 들어 지증왕의 이름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포항 냉수리 신라비 등에 지대로(智大路) / 지도로(智度路) / 지철로(智哲老) 등 여러 방식으로 남아있다. 이 사례처럼 로(路 혹은 老), 지(智, 고대 신라에서 음차표기에 자주 사용한 한자다) 같은 한자가 들어간 말들을 일일이 다 안 쓰면 실생활에 쓸 수 있는 글자가 너무 없어지기 때문이다. 조선처럼 실생활에 잘 안 쓰는 한자로 개명할 수도 없는 것이 피휘라는 개념을 의식하기 시작한 건 통일신라 이후인데, 이미 전대 수백년 왕들의 이름글자를 전부 고치는 것은 설령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자국 왕 이름에 대해서는 좀 느슨하게 적용하더라도 당나라에서는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제도였기에 당나라에서 시행하는 피휘는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나당동맹 때문에 진덕여왕 대부터 당나라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간 이후로는 더했다. 예를 들어 간지의 하나인 병(丙)은 문무왕릉비에 경(景)으로 적혀있다. 이에 대해서는 중국의 사례 단락에 설명되어있다. 다만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중국의 피휘를 챙기지 않아서 신라 국내 제작 문화재임을 알 수 있었듯, 중국인이 읽어볼 가능성이 낮은 국내용 문서에서는 신경쓰지 않은 듯 하다.
3.2.2. 고려
- 국가적 차원에서 군주의 이름을 일일이 다 피휘하는 관례는 고려 때부터 시행되었다. 국왕 이름을 국가적으로 피휘하는 관례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한 고려 시대에는 자비심이 없었는지 륭(隆)[46] ㆍ건(建)[47] ㆍ무(武)[48] ㆍ요(堯)[49] ㆍ치(治)[50] 등 자주 쓰이는 한자가 고려조 멸망까지 봉인당했다. 따라서 륭(隆)은 풍(豊), 건(建)은 립(立), 무(武)는 호(虎)[51] , 요(堯)는 고(高), 치(治)는 理(리), 창(昌)은 녕(寧)으로[52] 바꿔 써야 했다. 그래서 고려시대 문헌에는 무(武)자를 모두 범 호(虎)로 바꾸어 무반(武班)이 호반(虎班)으로, 무장(武將)이 호장(虎將)으로 표기되었다.[53] 이것은 현대에도 영향을 미쳐서 지금까지도 武의 훈음이 '호반(虎班) 무'라고 한다.[54] 태조, 성종의 경우는 같은 뜻을 가진 다른 한자로 대체한 것이고, 혜종의 경우는 용맹한 동물이라는 의미에서 연계하여 '호' 자를 '무' 자의 대체자로 사용했던 것이다.
- 고려 3대 임금인 정종의 휘 요는 '요임금 요(堯)'였기 때문에 삼국유사에 기술된 단군신화 기사에서는 '요 임금과 같은 때'라는 뜻인 '여요동시(如堯同時)'를 '여고동시(如高同時)'라고 썼다. 高가 堯와 운이 같기 때문에 대체하는 글자로 선택된 것이다. 이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엄청난 행동이다. 자국 왕명의 피휘를 위해 중국의 유교 성인이자 천자의 이름을 날려버린 것이다. 고려 성리학의 선구자인 이제현도 이 피휘를 지켰다. 조선시대의 유학자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 또한 신라 30대 왕 문무왕은 혜종의 '무'를 피해 '문호왕(文虎王)'으로,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성종의 휘 '치'를 피해 자리통감(資理通鑑)으로 표기되었다.[42]
- 수창궁(壽昌宮)은 창왕의 재위기간 동안 일시적으로 그의 휘 '창'을 피해 수녕궁(壽寧宮)으로 불렸다. 창왕과 그 아버지 우왕은 이성계 일파에 의해 신돈의 손자와 아들로 몰려 왕에서 폐위된 뒤(폐가입진廢假立眞)[43] , 왕이었던 사실 자체가 무효화됐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우왕과 창왕은 하루 아침에 왕족을 참칭해 왕위를 찬탈한 대역죄인으로 몰렸으니[44] 昌을 寧으로 고치는 피휘는 당연히 즉시 중단되었고[45] , 그래서 조선시대까지 가지 않고 바로 그 뒤를 이은 공양왕 때 수녕궁이 수창궁으로 원상 복구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 궁은 조선시대에도 수창궁으로 불렸다. 창녕군의 경우 하필 한자가 昌寧이라 이 피휘에 의하면 녕녕(寧寧)군이 되는 문제가 있는데, 현종 때 밀양에 복속되었던 상태고 창왕의 재위 기간이 길지 않이 큰 문제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 고려 시대의 경산(慶山)은 1310년 이전까지는 장산(章山)이었는데 충선왕이 즉위하자 충선왕의 휘 장(璋)과 비슷한 글자를 피하기 위해 장산을 경산으로 고쳤다. 그 상태로 백여년간 쓰이다가, 고려의 피휘를 지킬 필요가 없어진 조선시대에도 그냥 놔둬서 지금까지 경산시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경산시에는 경산초등학교, 경산중학교 외에도 장산초등학교, 장산중학교가 따로 있다. 다만 경산고등학교는 있지만 장산고등학교는 없다.
- 다만 별무반(別武班)의 사례나 고려 중, 후기 꽤나 자주 쓰이는 무반(武班)이라는 단어를 볼때 고려 중, 후기로 갈수록 선대 왕들의 이름에 대한 피휘 규정이 느슨해졌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로 국역 고려사에서 무반(武班) 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총 50여개의 기사가 검색되는데 해당 글자가 검색되는 첫 시작이 의종 때의 기사로 주로 고려 중, 후기에 많이 검색된다.
3.2.3. 조선
- 조선 시대에는 왕족의 이름을 지을 때 일부러 백성들의 언어체계를 흐트리지 않기 위해 잘 안 쓰는 글자, 혹은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지었기에 웬만해서는 자동으로 피휘가 되었고, 쿠데타를 통해 왕이 되거나 직계가 끊겨 방계로 왕위를 얻은 왕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다.[63] 하지만 이렇게 조심한다고 하더라도 사람 일이라는 게 그리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만은 아니어서 과거 시험 등에서 혹시라도 왕의 이름을 사용했다간 당장 낙방에 곤장까지 덤으로 안겨주었다. 참고로 당대의 운서나 자전, 경서들은 성인의 말씀이기에 문장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지만 피휘 글자들에 따로 테두리를 쳐서 주의토록 되어있았다. 읽을 때도 모(某)로 바꿔 읽거나(논어에 나오는 丘를 모조리 某로 발음했던 예) 뜻이 같은 다른 한자의 발음으로 대체하거나 했다. 조선시대에 경서에 단旦[태조의 개명한 휘]이란 글자가 나오면, 뜻이 같은 다른 문자 朝를 따라 됴[조]로 읽었다.
- 조선시대에는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어서 아주 자주 쓰이는 성(成)자와 계(桂)가 조선 망할 때까지 금기시될 뻔했지만 본인이 말년에 이름을 단(旦)으로 개명했고, 아들 정종도 방과(芳果)라는 이름자가 성(成)자 못지 않게 쓰이는 한자라서 경(曔)으로 개명했다.[55] 이때 '아차(阿且)'와 '아단(阿旦)'이라고 병립되어 쓰이던 지명이 그냥 아차산으로만 태조의 휘를 피휘해 쓰이게 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 예외적으로 태종의 경우는 지명에 많이 쓰이는 꽃다울 '방(芳)'과 생활 필수 한자 중 하나인 멀 '원(遠)'인데 죽을 때까지 이름이 이방원이었다. 개명? 그런 거 없다. 그래도 실록에 멀 '원'이나 '방'이 그럭저럭 쓰이는 걸 보아[56] 많이 통제는 하지 않았나 보다. 애초에 피휘에 대한 규정이 나와있는 예기 단궁(檀弓) 하(下)편에는 공자의 어머니인 징재의 예를 들면서 이름이 두 글자인 경우 그 중 한 글자만 쓰는 것은 휘하지 않는다(二名不偏諱, 夫子之母名徵在, 言在不稱徵, 言徵不稱在)고 했다.[57] 즉, 피휘 규정을 얼마나 엄격하게 적용할 것이냐는 그때 그때 정하기 나름이었던 것. 심하게 피휘할 때는 발음이 같고 글자 모양이 비슷해도 금지하기도 하지만,[58] 이런 구절은 일부러 왕의 이름을 고치지 않으면서 피휘의 불편도 초래하지 않을 근거가 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냥 이방원이 피휘를 널널하게 적용한 거고 당나라 이세민은 빡빡하게 적용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 흔하지 않은 이름을 골라 썼어도 겹친 사례도 있으니, 조선 문종의 휘는 '옥이름 향(珦)'이라서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았지만 문제는 고려말의 유학자 안향과 같았다는 것. 이 때문에 조선 시대 유학자들은 왕이 우선하느냐 유가의 성현을 우선하느냐를 두고 골머리를 앓았고, 결국 왕을 우선한다는 결론이 나자 그 후 문헌에서는 안향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안유(安裕)라는 초명을 쓰거나, 안향(安向)이라는 표기로 쓰거나, 그것도 곤란하면 호인 '회헌'을 주로 사용했다.
- 조선 선조는 즉위할 때 명종의 아들로 입적되면서 명종의 친아들 순회세자의 이름에 맞추어 개명했는데 하필이면 당시 대신 이준경이 추천한 휘 중에서 정종의 휘인 '曔'이 후보로 들어가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건 국휘에도 걸리고 가휘에도 걸리는 사례이므로 당연히 꺼려졌어야 하는 일일 텐데도 어째서인지 당대에 이걸로 문제가 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정종이 당대에는 시호도 없이 그냥 명이 내려준 공정왕이라 불리는 등 제대로 된 왕 취급을 받지 못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 그 외에는 단종의 휘 홍위(弘暐)의 홍 자가 자주 쓰이는 편인 글자이지만 단종의 경우 재위기간이 고작 3년 1개월여인 데다 복위되기까지 250년가량을 노산군으로 왕 취급 못 받았으니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듯하다.[59]
- 영조의 이름은 이금(李昑)인데 밝을 금(昑)자는 백성들이 일상 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였다.[60] 그래서 영조는 자신의 휘를 40여 년 동안 알리지 않았다.##
- 정조는 피휘 때문에 이름의 발음을 아예 바꿔버렸다. 원래 정조의 이름은 '이산(李祘)'으로, 이 때문에 평안북도의 이산(理山)이란 고을 이름이 초산(楚山)으로 개명당했다. 그러다 결국 '祘'의 발음 자체를 '셩'(현대 한국어 한자음대로 규칙적으로 옮기면 '성')으로 바꾸게 된다.[61] 이후 순조대에 선대의 휘를 범할 수 없다 하여 함경남도의 이성(利城)이란 고을 이름도 이원(利原)으로 바뀌게 된다.
- 심지어 중국 황제의 이름을 피휘한 경우도 있다. 경복궁을 복원할 때 청나라 고종(高宗) 건륭제의 휘 홍력(弘曆)을 피하여 홍례문(弘禮門)의 이름을 흥례문(興禮門)이라고 바꿨다. 이건 어쩔 수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 흥례문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문이라 조선에 온 청나라 사신들의 눈에 잘 띄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62] 근데 청나라에 대한 종속이 끝난 뒤에는 홍례문으로 원상 복구시킬 법도 한데, 정치적 혼란기였고 대한제국 시기에는 경복궁이 활용되지 않아서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는지 대한제국이 망할 때까지 흥례문으로 남았다. 그래서 현재도 흥례문이라는 피휘된 명칭이 유지되고 있다.
- 대구광역시 동구 각산동은 본래 쇠뿔 모양의 바위가 있었다고 하여 소바우 또는 우암곡이라고 불렸으나, 구한말인 1907년에 이 곳에 현감으로 부임한 송헌면(宋憲冕)이 자기 조상인 우암 송시열의 호와 지명이 같다는 이유로 피휘하여 소 우(牛)의 뿔 각(角)과 바위 암(岩)의 산 산(山)을 따 와서 각산동으로 지명을 고쳤다고 한다.
3.2.4. 대한민국
당연히 현대 대한민국에선 공식적으로 피휘를 강제하는 문화는 없어졌지만, 오랫동안 존재했던 관습이므로 그 흔적은 남아있다. 예를 들면 본인과 동격이거나 아랫사람을 상대로는 이름을 그대로 부르지만, 더 높은 어른이나 직장 상사일수록 이름이 아닌 호칭, 혹은 성씨+호칭으로 부르는 것이 있다. 혹은 아랫사람이라도 직장 등 좀 더 격을 차려야 하는 상황에서 이름보다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이 있다.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은 상대를 좀 격이 낮게 대한다는 은연중의 인식이 남아있는 셈이다.
기업회장의 이름도 기업에 근무하는 사원에게는 피휘의 대상이 된다. #
대한민국에서도 제5공화국 시절에는 TV에서 '순자'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비천한 역을 하거나 악역으로 묘사하는 것이 내부규칙으로 금지되었다. 피휘도 피휘지만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고다 이순신의 사례처럼 본래 TV 같은 대중매체는 원래 유명인의 이름을 차용할 때 조심스럽지만 순자라는 이름은 당시 기준으로는 너무 흔해서 이러한 규칙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수였다.
피휘 관습으로 인해 전근대 왕정이 끝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도 한동안 시설물이나 단체에 사람 이름을 붙일 때 본명을 그대로 붙이는 것을 피했다. 따라서 이병철의 호암미술관처럼 본명 대신 호를 사용하거나 육영재단(육영수), 정수장학회(박정희, 육영수)처럼 이름의 일부만 사용했다. 생각해보면 오늘날의 유명 시설물인 세종로, 충무로, 세종특별자치시 같은 예도 본명이 아니다. 21세기가 되어서야 이런 관습이 깨지고 김대중컨벤션센터, 박정희체육관처럼 본명을 붙인 시설물이 등장했다. 특히 김대중은 후광(後廣)이라는 호가 있음에도 본명을 사용한 시설물이 생긴 것으로 보아 공식적인 자리에서 본명을 꺼리는 한국의 관습은 점차 약해져가는 추세라고 볼 수 있다.
또 TV 뉴스에서는 현직 대통령의 발언 장면이 담긴 영상을 보여줄 때 발언 내용만 자막에 표시할 뿐 이름과 직함은 절대로 표기하지 않는다. 이는 방송계에서 일종의 불문율이라서 모든 방송사에서 똑같이 적용되며, 임기 시작 시부터 임기 종료 시까지 계속된다. 예를 들어 문재인 대통령의 경우 2017년 5월 9일까지는 '문재인 /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라고 표기했고, 5월 10일 아침 8시 9분까지는 '문재인 / 대통령 당선인'이라고 표기했지만 8시 9분 공식적으로 당선이 확정되고 임기가 시작된 이후에는 이름, 직함 없이 발언만 자막으로 보여준다. 반면 박근혜, 이명박 등 전직 대통령은 각자의 이름과 함께 '전 대통령'이라는 직함이 자막으로 표기된다. 다만 뉴스가 아닌 시사 프로그램에서 현직 대통령의 발언이 인용되는 경우에는 쓰기도 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피휘라고는 할 수 없으나, 연예계에서도 종종 이름이 같거나 비슷할 경우 예명을 만들어서 활동하는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자리잡은 유명 연예인의 동명이인이 나중에 예명을 만들어 데뷔한다. 이는 피휘의 의미라기보단 자신의 이미지가 이미 활동 중인 유명인에 의해 묻히게 될 것을 우려하는 의미가 더 강할 것이다.
- 배우 김수로가 대표적인데, 그의 본명은 김상중이다.
- 남자 배우 강하늘의 본명은 김하늘[64] 이다.
- 배우 한가인의 본명은 김현주인데 먼저 데뷔한 선배 여배우 김현주와 이름이 겹치는 것을 우려해 한가인이란 예명으로 데뷔를 했다.
- 홍수아의 본명은 홍근영이다. 데뷔 초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배우 문근영이 자신보다 먼저 데뷔했고 워낙 유명해지는 바람에 홍수아란 예명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 신민아의 본명은 양민아인데, 막 데뷔했을 당시 햄버거 CF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선배 연기자 양미라와 비슷하게 들릴까봐 예명을 저리 지었다고... 데뷔 초에는 본명으로 활동하다가 곧 신민아로 바꿨다.
- 윤형빈의 본명은 윤성호였는데 하필 선배 개그맨 중에 빡구로 유명한 윤성호가 있어 지금도 윤형빈으로 활동하고 있다.
- 하림의 본명은 최현우인데, 이 무렵 가수 이현우가 유명했기 때문에 최하림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하림으로 활동하고 있다.
- 배우 수현의 본명은 김수현이지만 또 다른 배우 김수현과 이름이 겹쳐 성을 뺀 수현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한다.
3.2.5. 북한
공화국은 간판으로만 걸어두고 사실상 전제군주제처럼 돌아가는 '''북한에서는 당연히 주민들이 '일성'과 '정일'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다. 만약 김씨가 아니라 다른 성이라고 해도 저 이름들은 일반인의 사용이 아예 금기시되고 있다. 또한 김일성의 본명인 '성주'도 불가.''' 1970년대부터 그런 이름을 쓰는 사람들은 강제로 개명하도록 했고, 새로 태어나는 아기에게도 지어줄 수 없다.
북한의 3대 세습 바람은 이 풍습에도 예외가 아니라 2010년 초에는 전국적으로 성이 김씨인지 여부를 불문하고 '정은'이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개명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고 한다. 한자가 다른 동명이인이라도 얄짤없다.# 게다가 이것도 기가 막힌 일인데, 아예 정은과 발음이 비슷한 '정훈', '정운' 같은 유사한 이름에 대해서도 개명을 요구한다고 한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설주'라는 이름도 사용 불가능하다.
더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북한 주민들은 자식의 생일과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이나 사망일이 같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 때 태어나거나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면 이를 피하기 위해 출생신고를 할 때 원래보다 더 늦게 태어났다고 하고, 비슷한 시기에 사망하면 원래보다 더 늦게 사망했다고 신고한다는 것. 길면 한 달 가량이고. 이 작자들은 피휘를 넘어서 독재자의 생일까지 가리는, 동서고금에도 없었던 전대미문의 풍습을 창조했다.
그런데 상기에 나온 거처럼 피휘를 하는 문화권은 원래는 부모자식간에도 피휘를 하는데, 김정일은 아들들에게 자신과 같은 正을 넣어 이름을 지어 자신들은 피휘의 관습을 안 지키면서 주민들에게는 지키라고 강요하고 있다. 김정일의 이런 작명법은 오히려 일본식 통자(通字) 개념에 가까운데, 김정은에게 정통성을 실어주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는 하지만,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김일성의 아들들인 김정일과 김평일, 김영일, 김만일 역시 이와 같은 사례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김일성이 日을 쓰는 데 반해 그의 아들들은 一을 쓴다.[65] 김정일 역시 본래는 一을 썼지만 '김일성의 정통 후계자'임을 내세우기 위해 日로 개명했다.#
피휘와는 다른 개념이지만, 북한에서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통치자의 이름은 다른 글자들보다 굵고 큰 글씨로 쓰도록 되어 있다.[66] 컴퓨터나 스마트폰 등에서는 글씨 크기는 다르게 조절하기 힘드니 이건 포기하더라도 굵기라도 다르게 처리하기 위해 특별한 기술적 조치를 취한다. 북한에서 만들어진 많은 폰트들은 유니코드의 PUA 영역에 보통 글씨보다 굵게 처리된 '김ㆍ일ㆍ성ㆍ김ㆍ정ㆍ일ㆍ김ㆍ정ㆍ은'을 할당해 넣었다.[67] 북한의 IME도 김씨 3대의 이름이 입력되는 걸 감지해서 자동으로 굵게 처리된 글리프로 치환한다고 한다.
이외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칭호가 한동안 장군이었던 탓에(내각 수상 김일성장군 식으로) 정작 북한군 내의 장군들을 장군이라 칭하지 않고 '장령'이라 칭하기도 한다. 칭호에 대한 피휘인 셈.[68]
3.3. 일본
일본에는 조상의 특정 글자를 자손의 이름에 사용하는 통자(通字)라는 관례가 있어서 중국이나 한국 같은 엄격한 피휘는 도입되지 못 했다. 높으신 분이나 주군의 휘를 하사받는 편휘(偏諱)라는 관습도 있었다.[69]
하지만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어서 천황이나 권신의 이름에서 통자가 아닌 글자를 바꾸게 하여 지명이 변경되거나 성씨가 바뀌는 예가 있기는 했다고 한다.
- 예를 들어 천평승보 9년(757년) 5월, 천황과 황후의 이름,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와 그 아들 후히토의 이름을 쓰는 것이 금지된 이래로 카바네인 오비토(首)와 후히토(史)를 전부 히토(毗登)로 피휘했다.
- 히타치노쿠니 시라카베노코오리(白壁郡)는 코닌 덴노의 휘와 겹쳐서 마카베노코오리(眞壁郡)로, 이요노쿠니(伊豫國) 카미노노코오리(神野郡)는 사가 덴노의 휘와 같아 니히위노코오리(新居郡)로, 5세기 전반부터 유서 깊은 씨족인 오오토모 씨(大伴氏)는 준나 덴노의 휘와 겹쳐 토모(伴)로 성을 피휘했다. 대표적인 인물로 헤이안 시대의 공경으로 응천문의 변에 휘말려 실각한 토모노 요시오(伴善男)가 있다. 본명은 오오토모노 요시오.
- 이런 용법은 겐지모노가타리에도 영향을 끼쳐서 귀인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관위명이나 거주지 등으로 상대를 호칭했다.
또한 일본에는 유식자 읽기(有職読み)라고 해서 '훈독으로 읽어야 할 인물의 이름을 음독함[71] 으로써 경의를 나타내는 습관이 있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근거 없는 낭설이다(참조: ja.wikipedia.org/wiki/有職読み). 실제로 옛 일본에서 원래 훈독인 인명을 음독한 케이스가 일부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일반적이지 않은 몇몇 특수한 사례에 불과했으며, 이것이 반드시 존경의 의미를 나타낸다고도 단언할 수 없다. 예를 들어 徳川慶喜는 훈독으로 도쿠가와 요시노부로 읽지만 정적들이 경멸의 의미를 담아 음독인 도쿠가와 '케이키'로 읽은 예가 있다.
에도 시대에는 ○○우지(氏)라고 해서 무가에서는 상대방의 성씨 뒤에 붙여서 존경을 나타내는 표시로 피휘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노지(○の字)라고 해서 이름 시작 글자에 붙여서 이름 전체는 부르지 않되 상대를 친근하게 혹은 정중하게 부르는 방법도 사용했다. 예를 들면 망나니 장군의 주인공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잠행 시에 토쿠다 신노스케라는 가명을 썼는데, 극중 등장인물 중에서 요시무네와 평소 친하지만 그의 정체를 모르는 하층민들이 '신노지'라는 형태로 친근하게 부르는 모습이 묘사된다.
피휘와는 별 관련이 없지만 일본의 연호는 앞의 이니셜을 따서 쓰기도 하기 때문에 내각에서 새 연호를 정할 때에는 최대한 이니셜 알파벳이 겹치지 않도록 일부러 안배를 한다. 실제로 일본의 개화기였던 메이지 시대(M) 이후, 다이쇼(T)-쇼와(S)-헤이세이(H)-레이와(R)까지 모든 연호의 이니셜 알파벳이 서로 달랐다.
3.4. 베트남
[image]
응우옌 왕조 때의 피휘 사례.
베트남 역시 베트남 황제의 이름에 대해 피휘를 했다. 위 그림에서 綿 → 白의 가운데 가로선을 삭제한 綿, 宗 → 示 맨 위의 가로선을 삭제한 宗은 획 하나를 삭제한 예이고(결획), 任 → 壬은 부수를 제외한 나머지를 쓴 예(결획의 일종, 대자로도 볼 수 있다), 時 → 辰은 비슷한 뜻을 가진 글자로 대자(代字)한 예[72] , 明 → 朙(囧+月)은 옛 글자로 고친 것[73] , 昭 → (昭에서 日이 들어갈 부분만 삭제한 글자)[74] 는 부수 부분을 공백으로 비워놓은 예(결획의 일종)이다.
베트남에서는 피휘를 위해 해당 글자의 발음을 비슷한 다른 것으로 바꾸어 읽도록 조처하기도 했는데, 아예 그게 굳어져서 현재까지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베트남어에서 利는 lợi라고 읽는데 본래 발음대로 읽으면 lì라고 읽어야 했던 모양이다. 이것은 후 레 왕조(後黎) 태조 黎利의 이름을 그대로 부르지 않기 위해 利의 발음을 바꿔 lợi로 읽게 한 것이다. 그러다가 이제는 利 자체의 발음이 완전히 바뀐 채로 정착되어 오늘날 黎利 본인의 이름을 부를 때도 바뀐 발음으로 읽는다고 한다. 즉, 본래 발음에 가까운 '레리'가 아니라 '레러이'로 읽는다는 뜻이다.
다른 한자문화권 국가처럼 이름자를 피휘한 사례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베트남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실록인 응우옌 왕조의 『대남식록(大南寔錄)』[75] 이 당시 황제였던 민 망(明命, Minh Mang)황제의 황후의 이름이었던 호씨실(胡氏實)의 '실(實)' 자를 피휘하여 '실록'이 아닌 '식록'이라는 제목으로 편찬된 일을 들 수 있다.
3.5. 번외: 기록 말살 차원의 피휘
군주나 웃어른, 성현의 이름을 피한다는 의미와는 전혀 다르게 매국노나 범죄자 등 악인의 이름을 기피하느라 피휘 아닌 피휘가 되는 일도 있다.[76] 현대에는 거의 영향력이 없는 군주의 피휘와 달리 흉악 범죄자 한 명이 매스컴이라도 탔다가는 동명이인들의 개명 신청이 법원에 몰리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이런 관습은 유교문화권뿐만 아니라 구미권에도 존재한다.
- 완용은 이완용의 악명을 생각하면 동명이인이 없을 것 같지만 진짜로 자식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준 부모가 있다. 그것도 '이'씨가. '이완용'이란 이름 때문에 곤욕을 겪은 동명이인들.
- 중국에서는 인명으로 '회(檜)' 자를 쓰는 것을 기피하는데, 희대의 간신 진회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 서양으로 가면 아돌프가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만 해도 아돌프란 이름은 꽤 흔했으나 종전 이후 태어난 세대에서 이 이름을 찾기는 매우 힘들어졌다. 아직 생존 중인 2차 대전 이전에 태어난 노인들 중에는 지금도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이 꽤 있는 편이다. 그 이후 세대부터는 돌프 등으로 대체. 미국은 자식들의 이름을 이상하게 짓는 것도 아동학대로 간주될 수 있을 만큼 아동인권에 민감한 곳인데[77] , 아이 이름을 저렇게 지었다가 '아돌프'는 물론이고 다른 자식들의 양육권까지 박탈당한 사례가 있다. 다만 이 경우는 단지 아돌프란 이름을 써서가 아니라 '아돌프 히틀러'라고 대놓고 지어서 그런 케이스이다.[78]
- 조선에는 연산군대의 내시 김처선(金處善)의 예가 있다. 김처선은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까지 6대를 오랫동안 섬겨 연산군의 신임이 매우 두터웠으나 두 팔, 다리가 잘리는 상황에서도 충언을 계속해 결국 연산군이 활로 쏘아 죽인 대단한 의지의 인물이었다. 연산군은 총애하던 김처선의 배신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삼족을 멸하고[79] 그의 고향의 등급을 깎아내리며 특히 '처(處)'가 들어가는 말은 사용을 금지하기까지 한다. 이쯤 되면 기록말살형과 다를 바 없다. 문제는 저 '처' 자가 무척이나 흔하게 쓰이는 자였다는 것이다. 연산군도 잘 췄다는 '춤추다 집에 왔더니 다리가 네 개더라' 하는 그 처용가의 처용무에도 들어가는 글자다. 처용무는 이때 풍두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24절기 중 하나인 처서도 조서로 고쳐졌다. 권절이라는 사람이 처 자를 과거 시험 답안에 썼다가 낙방[80] 먹었는데 이건 대단한 축에도 못 들고, 사인 성몽정이 상소문에 이 글자를 썼다가 고문을 당해 죽을 뻔했다가 처 자 사용 금지령이 하달되기 전에 작성한 사실이 확인되어 무죄방면으로 간신히 살아난 일도 있을 정도다. 연산군의 이 금제는 거의 황제에 가까운 절대군주의 포스를 보이나, 결국엔 미친 짓이었기에 당연히 그가 폐위된 후 없어졌다.
- 영국에서도 스티븐 왕, 존 왕은 나라를 막장으로 몰아넣은 암군으로 인식되어 그 후 스티븐, 존은 일반인의 이름으로는 쓰이더라도 왕의 이름으로는 쓰이지 않게 되었다. 리처드도 리처드 2세까지는 잘 쓰였는데, 리처드 3세가 하도 악명이 높아서 그 뒤로 쓰는 왕이 없어졌다. 찰스도 불운하거나 평판이 안 좋아(찰스 1세, 찰스 2세, 그리고 자칭 찰스 3세[81] ) 찰스 왕세자가 즉위하게 되면 찰스 3세가 아니라 그의 다른 이름을 써서 조지 7세가 될 것[82] 이라는 예측이 있다. 이처럼 왕자 시절에 대표로 쓰던 이름을 국왕 즉위 후에 버리고 이전 국왕의 이름과 동일하게 바꿔 부르는 전례는 이미 여러 번 있었다.[83] 또한 '조지'는 하노버 왕조 이래 영국 국왕의 이름으로 애용돼 왔다. 찰스 왕세자의 외할아버지인 선대 국왕의 이름도 조지이다. 따라서 찰스 왕세자가 조지 7세로 즉위할 것이라는 예상은 무리한 예측이 아니다. 다만 요즘은 찰스 2세에 대한 평가는 꽤 좋아진 편이고, 찰스 1세도 예전만큼 평이 안좋은건 아니라서 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에서는 황태자의 이름을 알렉세이라고 짓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표트르 대제가 '없애 버린' 황태자 이름이 알렉세이였기 때문[84] 이다. 덕분에 알렉세이 2세는 나오지않았다.
4. 역설적 도움
피휘는 서지학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한자문화권 내 고문헌의 출간연대가 불분명할 때 이전시대 판본과 비교해 다른 글자로 대체되었거나 완전히 칸을 비워둔 글자를 분석, 출간연대를 알아내는 근거로 쓰인다. 때문에 저작연대를 올리려 하는 위서(僞書)를 적발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 괴철(蒯徹)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에서 '괴통(蒯通)'으로 나오는데, 이는 한무제의 이름이 '유철'(劉徹)이라서 '철' 자를 피휘해 괴철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85] 이 덕분에 사기가 실제로 한 무제 때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한나라 때 운용된 작위 체계인 이십등작 중 최상위[86] 가 '철후(徹侯)'였는데, 무제 이후 '열후(列侯)'[87] 또는 '통후(通侯)'로 표기된다. 따라서 표기를 보면 무제 이전에 내려진 작위와 무제 이후에 내려진 작위를 구분 할 수 있다.
- 조운의 고향으로 유명한 기주 항산(恆山/恒山), 은나라 주왕의 서형 미자계(微子啓), 24절기 중 하나인 계칩(啓蟄), 하 우왕의 아들 계왕(啓王), 춘추시대 말기 제나라의 권신 전항(田恆/田恒) 등은 각각 상산(常山)[88] , 미자개(微子開), 경칩(驚蟄), 개왕(開王), 전상(田常) 등으로 바꿨는데, 모두 한 문제의 이름 유항(劉恒), 한 경제의 이름 유계(劉啓)를 피휘한 것이다. 그리고 달에 산다는 전설 속의 선녀 이름인 항아(姮娥)가 상아(嫦娥)로 바뀐 것도 한 문제 때의 일인데, 姮이 恒과 비슷하니 피휘하기 위해 姮의 亘 부분을 恒과 뜻이 통하는 常으로 교체했기 때문이다.
- 그 외에도 사기에는 담(談)을 동(同), 희(喜/僖)를 희(釐)로 바꿔 썼는데, 이것은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과 사마천의 할아버지 사마희(司馬喜)의 이름을 피휘한 것이다.
- 세가(世家)가 계가(係家)로 기재된 역사책이 발견될 경우 후대의 위서가 아니라면 당나라 때 필사됐거나 간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세가를 계가로 바꾼 왕조는 당나라 밖에 없다. 물론 태종 이세민의 이름자를 피휘한 것이다. 이세민은 피휘를 정말 빡빡하게 적용시켰다. 원래 이름이 2글자(성까지 3글자 이상)이면 이름 중 1글자만 쓴 건 피휘로 안 보는데, 이세민은 권력이 워낙 대단한 인물이라서 그딴 규정 씹었다. 世와 民자가 얼마나 많이 쓰이는 지 생각해보라. 당나라 200여년 내내 이세민 피휘한다고 중국인들이 엄청 고생했다.
- 이외에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국적을 밝히는 데에도 도움이 됐는데 당시 측천무후가 제작한 측천문자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중국에선 당나라의 불경이라고 주장했지만 문제는 당시 측천무후 시기에 제작된 문서에서 측천무후의 휘인 조(照)자가 버젓이 들어갔다. 이 덕분에 최소한 당나라에서 제작된 불경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외에도 종이의 성분이나 활자의 서체가 8세기 신라의 것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 다만 반대로 이 피휘 때문에 제작 시기를 알아내기 힘든 경우도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가 대표적인 예시. 피휘로 인해 제작시기가 고려시대인지 조선시대인지 불분명한 경우이다.
5. 대중문화에서
- 만화 《지옥선생 누베》에서 관련 에피소드가 한 번 등장한 적이 있다. 여기서는 등장인물 중 하나인 쿄코의 휘를 친구 미키가 알아내서[89] 쿄코를 조종하다가 결국 누베가 나서서 기억을 지우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에피소드의 말미에 등장하는 나레이션이 '여러분의 부모님도 휘를 통해서 여러분을 컨트롤하고 있을지도…'
- '대한왕국'이 등장하는 대체역사소설 라이트 노벨 《개와 공주》에서는 피휘가 힘들어짐에 따라 아예 이름을 공표하지 않고 가족끼리만 쓰고, 공식석상에는 명칭만 부르는 것으로 해결했다. 왕족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다.
- 대체역사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에선 조선이 대마도를 정벌한 후 조선에 볼모로 끌려온 대마도주 종재성의 장남 종의성이 아버지의 이름을 피휘하지 않았다며 강제로 종성순이란 이름으로 개명된다. 이는 통자가 들어간 원래 이름에 애착이 있던 종성순이 조선 임금에게 앙심을 품는 원인이 된다.
-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가장 무서운 마법사 볼드모트도 해리 포터 정도의 최강실력자 아니고서는 그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요즘 젊은이들은 피휘는 몰라도 볼트모트는 알 정도로 가장 유명한 피휘에 속한다.
- 원신의 바위의 신 모락스는, 그를 섬기는 리월에선 신앙심과 존경심이 매우 높아 암왕제군(巖王帝君. 영어론 Rex Lapis 혹은 Lord of Geo)으로 피휘한다. 간략히 부를땐 제군. 작중에선 리월사람들 입장에선 반신론적인 관점을 가진 각청도 제군이라 호칭한다.
[1] 그뿐만 아니라 세종-이도 정조-이산 등 피휘의 대상이 되는 글자 수를 줄이기 위해 이름이 외자인 경우가 대부분이였다.[2] 아래 일본의 사례에도 나오듯 유교문화권이라고 반드시 지키게 된 것은 아니었다.[3] 항렬자를 정할 때 오행, 천간 등의 법칙에 따라 대표 한자/부수를 순환시키는 이유에 피휘도 있다. 가까운 선조의 이름과 글자가 겹치는 것을 자연스럽게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4] 단, 이는 방(芳) 자와 원(遠) 자를 따로 사용하는 경우에만 해당되었다. 만약 이 한자들을 조합하여 '방원 (芳遠)'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지면 피휘를 해야 했는데, 이런 단어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실제로도 사례가 없었다.[5] 다만 금나라를 건국하기 훨씬 이전부터 여진족은 순수한 유목민이 아닌 반농반목을 하는 농경민이 된 상태였고, 청나라 건국 직전에는 아예 완전한 농경민이 되었다.[6] 영미권 이름에 종종 붙는 Jr.(주니어)는 대부분 아버지의 이름을 아들이 그대로 물려받았을 때 부자의 구별을 위해 붙이는 것이다. 2세와 같은 의미이다. 1세는 Sr.(시니어)라고 한다.[7] 물론 서양에서도 공식 행사에서는 생전의 그레이스 켈리보고 Princess consort of Monaco라고 했지 본명을 대놓고 쓰면 무례하다는 취급을 받았다. 비석도 마찬가지.[8] 읽는 방법은 '예수'가 아니라 현지화되어 헤수스 정도로 읽는다. 두 번째 음절에 강세가 있다.[9] 다만 아브라함교 계통의 종교에서도 그들이 믿는 '''유일신의 이름을 직접 일컫는 것은 금기'''된다. 당장 정교회와 가톨릭에서는 YHWH라고 성경에 표기된 것을 말할 때 '주(님)'라고 피휘해서 부른다. '주님'은 나의 목자, '주' 예수 그리스도 등. 자세한 내용은 야훼 참조.[10] 억수르(송준근)의 아들(정해철)의 이름을 무함마드를 변형한 무엄하다드라고 했는데 식겁한 중동 전문가들이 이런 장난을 치면 매우 위험하다고 지적해서 그냥 '아들'로 부르게 되었다. 하지만 어차피 억수르 자체가 아랍에미리트의 유력 정치인이자 기업인인 셰이크 만수르 빈 자예드 알 나얀을 희화화한 거라 논란이 많았고 결국 위험 부담이 컸기 때문인지 인기에도 불구하고 단명 코너가 되고 말았다.[11] 헝가리에서 비교적 흔하게 쓰이는 남자 이름이다.[12] 지금도 이러한 문화의 영향으로 서양의 독실한 가톨릭 및 개신교 신자들 앞에서 OMG라고 감탄사를 내뱉는 것은 상당한 실례이다. 실제로 이러한 표현을 그들 앞에서 썼다가는 정색하는 표정을 짓거나 지적하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며, 서양 영상매체에서도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OMG 대신에 "oh my gosh."나 "oh my goodness."라는 감탄사를 쓰는 경우가 많다.[13] 일단 항렬에 따라 금수목화토로 돌아가는 돌림자는 당연히 못 쓰는 것이고, 남는 한 글자만 피하면 되는 것이므로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14] 대부분은 아침 조(朝)로 바꿔 썼고(밑에 나올 대자代字의 방법), 대자가 곤란할 때만 이런 식으로 결획을 했다.[15] 이성계가 바꾼 이름이 하필 이단인 것은 旦이 '조선'의 朝와 의미가 통하기 때문이다. 조선을 세운 사람이니 조선과 관련 있는 글자로 이름을 바꾼 것.[16] 당 고조의 휘인 연(淵)을 피휘[17] 고려 혜종의 휘인 무(武)를 피휘[18] 당 태종의 휘인 세민(世民)의 세(世)를 피휘[19] 恆은 이체자인 恒으로 쓰기도 한다.[20] 고전 한문 문법에서 자신의 이름을 자기 자신을 낮추는 1인칭 대명사로 쓰기도 했다. 한문에서 자기 이름을 주어로 사용하는 것은 현대 한국어에서 자기 자신을 낮추는 1인칭 대명사 '저'를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뉘앙스를 풍기는 것이다. 그래서 유교 경전에서 공자의 이름자인 丘(구)가 등장하는 때는 대개 공자가 신분이 높은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말한 것을 경전 내에 직접 인용해놓은 것이다.[21] 카메라로 유명한 일본의 캐논 사의 이름도 '관음'의 일본식 발음에서 유래한 것이다. 해당 문서 참고.[22] 그는 이전에도 성명을 고친 바 있다. 본래 성명은 서세적이었는데 당나라 건국의 공로를 인정 받아서 황제의 성씨를 하사 받았기 때문에 이세적으로 개명됐다. 이후 이 이름을 다시 이적으로 고친 것.[23] 둘은 같은 글자이며 đời로 읽힌다.[24] 연개소문의 성씨가 연씨라는 설은 18세기에 이르러 국학자 안정복이 저서인 동사강목에서 처음 주장한 것으로, 안정복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고구려의 대신인 연정토가 신라에 투항했다'는 기록과 '통고(通攷)와 신당서에 정토는 소문(개소문)의 아우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사실 연개소문의 성은 연씨였으나 그 이름이 당고조 이연(李淵)의 이름과 글씨가 겹치므로 당나라 사람들이 피휘해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오늘날 한국사학계에선 거의 정설로 인정받아 지금은 개소문의 성을 연씨로 표기한다.[25] 삼국사기가 신라가 편찬한 구 삼국사를 참조했는데도 천개소문이라 칭한 것을 보면 아마도 신라에서도 본이름을 몰랐던 것이거나 김부식이 <구당서>, <신당서>를 참조했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26] 추존황제로 세조.[27] 추존황제로 태조.[28] 고려에서는 반대로 무(武)를 호(虎)로 바꿔야 했다. 본 문서의 '한국의 피휘' 단락 참고.[29] 후대인 고려에서도 똑같이 피휘해야 했다. 성종의 이름이 왕치(王治)였기 때문이다.[30] 당나라는 어쩔수가 없는 게, 고조, 태종, 고종 모두 당나라 초기의 인물로, 황족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었고, 그러다 황조를 건설하고 황제가 되었기 때문. 이후에는 흔한 글자가 휘가되는 현상은 어느 정도는 줄긴했지만, 그래도 상용한자들을 휘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31] 현무를 더욱 신격화한 것이다.[32] 송나라는 중국 역사상 북방민족들에게 가장 시달린 나라였다.[33] 현행 외래어표기법대로는 '추'로 적어야 하나 여기서는 그냥 원음에 더 가깝게 치우로 적었다.[34] 현대 표준중국어 발음대로라면 七과 똑같아지지만 당대에는 달랐을 것이다(q 발음이 아니라 c 발음이었음). 과거의 중국어에서는 丘가 '쿄우(kiou)' 정도로 소리 났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운미를 떼면 '쿄'가 되고 이를 구개음화시키면 qio(19세기 중국어에는 jio, qio, xio, yo라는 음절도 존재했는데 이는 웨이드식 표기법을 사용한 당시 문헌에서 확인되며 현대 한어에서는 이 음절의 운모가 üe로 변함.)가 된다.[35] 광동어로 丘는 jau1(야우)라고 읽어서 중고음 溪母에 속하는 다른 글자의 성모와 거리가 있는데, 泣(울 읍)도 jap1(얍)이라고 읽어서 꼭 피휘 때문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애초에 溪母는 광동어로 /k-/, /h-/, /f-/로 혼란이 있었는데, /j-/라는 반모음 성모로 귀결되어서 꼭 피휘처럼 느껴진다.[36] 그 밖에 외국 지명에 들어가는 邱도 그대로 邱로 쓰는 듯하다. 가령 대구는 한국에서 쓰이는 표기 그대로 大邱라고 쓰고 Dàqiū로 읽는다.[37] 조선에서는 대구(大丘)라는 지명이 오랫동안 그냥 쓰이다가 한참 뒤에 대구(大邱)로 변경됐다. 자세한 건 '한국의 피휘' 단락을 참고.[38] 그런데 이 기사에 나오는 미아동 사는 김모씨는 대법원 덕분에 딸의 이름을 잘못 짓는 실수를 막을 수 있었다. 啊는 네이버 옥편에 '사랑할 아'로 잘못 나오는데 이걸 믿고 사랑스러운 딸 이름에 넣어주려던 의도였겠지만 啊에는 '사랑하다'라는 뜻이 없다. 신음소리 같은 감탄사에 쓰이는 글자다. 옛 문헌에도 '좋아하거나 싫을 때 내는 소리'(愛惡聲)이라고 했는데 뒤 두 글자를 떼먹고 愛만 보고 '사랑할 아'라고 잘못 수록되는 바람에 오해를 부른 것이다. 전문적이지 못한 온라인 옥편 하나에 의지하다가는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 되도록이면 중국어 사전을 같이 찾아보자. 실제로 네이버 지식iN에 '啊 이름'이나 '啊 사랑할' 등으로 검색해 보면 네이버 옥편의 '사랑할 아'에 낚여서 신생아 이름에 啊를 넣으려는 사람들을 제법 볼 수 있다. 다만 啊는 2013년에 인명용 한자에 추가되기는 했는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대법원에서도 네이버 옥편의 '사랑할 아'에 낚인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만약 실제로 대법원조차 낚인 거라면, 전문적이지 못한 온라인 옥편 하나가 어디까지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39] 다음 한자사전에는 제대로 나오는 걸로 보아 네이버 쪽의 문제인 듯하다. 啊[40] 서유기의 저팔계(猪八戒)는 원래 주팔계(朱八戒)였다. 하필 팔계의 성씨를 주(朱)로 했던 이유는 돼지를 뜻하는 저(猪)와 발음이 유사하면서 흔히 쓰는 성씨였기 때문이다. 일종의 말장난인 셈. 그런데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황제의 성씨가 주씨가 되니까 감히 돼지를 주씨라고 하기가 꺼려졌다. 돼지에다 황제와 같은 성씨를 붙이는 것은 명 황제를 능멸하는 불경한 행위로 여겨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 자 대신에 원래 의미에 맞는 돼지 저 자로 바꿔 저팔계가 되었다. 성씨는 여러 사람이 쓰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피휘의 대상이 아닌데도 성씨를 피휘한 특이사례다. 그래도 이 경우는 글자만 따졌지 발음까지는 안 따졌다. 만약 당시 주(朱)와 발음이 비슷한 글자도 회피했다면 발음이 유사한 돼지 저(猪)가 아니라 돼지 돈(豚) 같은 발음이 다른 글자로 썼을 텐데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유기에 등장하는 돼지의 성명이 저팔계로 확정되었다. 이는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게 된 후에도 본래의 이름인 주팔계로 돌아오지 않고 그대로 이어졌다. 한족들을 복속시키는 과정에서 엄청난 저항과 군사력 소모가 있었고 완전히 복속시킨 후에도 강압책과 회유책으로 한족들을 다스리는 데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청나라의 만주족이 신경을 못 썼을 뿐더러, 살기 위해 청의 지배에 순응하는 척 연기하는 반청 성향 한족들이 명나라 때의 피휘를 묵시적으로 계속 유지하던 게 한족 문화를 받아들인 만주족에게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기 때문으로 보인다.[41] 중국은 고대부터 피휘를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으므로 삼국시대의 한반도 왕조들은 중국과 교류할 때는 중국의 피휘를 신경써주었다.[42] '중국의 피휘' 단락에서도 설명했듯이 당나라도 治(당 고종의 이름)를 피휘해 理로 바꿨다. 자치통감이 편찬된 북송에서는 이미 왕조가 바뀌어 오래 전에 사라진 治 → 理 교체를 고려에서는 뒤늦게 시행한 셈. 그래서 본국에서는 문제가 없던 자치통감이 바다 건너 고려에서는 강제로 개명당해야 했다.[43] 가짜 (왕씨)를 폐하고 진짜 (왕씨)를 세운다는 뜻.[44] 그래서 고려사에도 반역열전에 수록되는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45] 창왕이 국왕이었을 때는 그의 이름을 피휘하지 않는 것이 역적질이었겠지만, 창왕이 왕위를 찬탈한 역적으로 규정된 이후에는 창왕의 이름을 계속 피휘하는 게 반대로 역적질이 됐을 것이다. 아버지 우왕도 마찬가지고.[46] 고려 세조 왕륭. 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이자 추존왕.[47] 고려 태조 왕건.[48] 고려 혜종 왕무.[49] 고려 정종 왕요.[50] 고려 성종 왕치.[51] 별무반(別武班)의 사례에 미뤄보면 후대로 갈수록 해당 글자에 대한 규정이 느슨해 졌다고 볼 요지도 충분하다.[52] 창왕의 짧은 재위기간에 한해서. 아래에 설명.[53] 위에서 언급한 이호의 경우와 반대다.[54] 무반(武班)이 입는 관복에 호랑이가 수놓여 있었기 때문에 무반을 호반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다만 무반은 호반이라고 부르는데 문반은 학반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이 호반이라는 표현이 고려 때 피휘가 지금까지 남은 것임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55] 게다가 정종의 형제들(나아가 정종과 같은 항렬의 대부분의 전주 이씨 남자들)이 모두 이름에 '방(芳)'이 들어가있으니 정종이 개명하지 않았으면 형제들도 개명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문제가 불거졌을 것이다. 송나라 태조 조광윤(趙匡胤)이 황제가 되자 동생인 태종 조광의(趙匡義)는 이름을 광의(光義)로 바꾸었다. (태종은 즉위 후에 다시 경(炅)으로 개명했다.) [56] 태조실록과 정종실록을 제외하고 나머지 실록에서 꽃다울 방 자는 총 1156회, 멀 원 자는 총 23896회 등장한다. 특히 '원' 자는 태종실록에만 약 200건, 세종실록에는 1200건이 넘게 나오는 걸 보아 각각 단어에 대한 피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방원(芳遠)은 철저하게 피휘되어 실록을 통틀어 총 4회 등장하는데(태종실록 3번, 세종실록 1번), 그 중 한 번은 태종실록 서문에 왕의 휘를 서술하는 부분, 나머지 셋은 상국이었던 명과 주고받은 국서의 내용이다. (상국 앞에서 피휘할 수는 없으니까.)[57] 사실 한나라 때만 해도 중국 이름은 현대와 달리 외자 이름이 두 글자 이름보다 많았다. 가령, 삼국지연의의 등장인물만 살펴봐도 대다수가 외자 이름이다.[58] 피휘 문제는 아니긴 했지만 문자의 옥 중 가장 혹독했던 건륭제 시기에는 회명시집이라는 이름의 시집을 펴낸 사람이 회명의 명이 명나라의 명과 음이 같다며 사형당한 일도 벌어졌다. 단 이는 건륭제기 워낙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아댔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59] 앞서 말한 태종의 예처럼 두 글자 휘면 따로 한 글자는 피휘하지 않아도 되고 또 앞서 설명했듯이 왕의 휘는 통상적으로 5대까지만 피휘하면 되기 때문이다. 황제의 경우는 7대까지. 물론 이 원칙을 무시하고 왕조가 망할 때까지 피휘를 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두 글자 휘라도 한 글자를 피휘하는 경우가 허다했으니(물론 태종 이방원은 예외다) 단종의 휘는 무시되었다고 보면 된다.[60] 반면 현대 한국어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61] 이는 祘과 동자관계에다 대단히 많이 쓰이는 편인 算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정조 당대에 산학산사의 이름이 주학계사로 바뀌었다.[62] 다만 건륭제 재위 기간에 재위했던 정조의 호가 홍재(弘齋)인 사실을 고려하면, 중국의 피휘를 따르는 경우는 외교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경우로 한정되었다고 볼 여지도 충분하다.[63] 예외적인 사례로 인조. 선조가 아껴서 처음부터 외자로 지었다.[64] 2013년 안타깝게 요절한 가수 로티플스카이의 본명도 김하늘이었다.[65]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이고 김일성은 나중에 바꾼 이름이다. 동생인 김영주의 이름으로 미루어 볼 때 '주'가 돌림자인 것으로 보인다.[66] 이것은 이름을 강조하는 것이니 이름을 피하는 피휘와는 반대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오히려 로제타 석 같은 고대 이집트어 문헌에서 신이나 왕의 이름을 나타내는 상형문자 주위에 테두리를 쳐서 강조했던 관행에 비견할 만하다. 즉 북한에서는 방법은 좀 다르지만 고대에나 하던 짓을 하고 있는 셈이다.[67] PUA는 해당 문서의 설명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유니코드에 공식 수록되지 않은 문자를 처리하고자 할 때 이용하는 영역이다. 북한이 굳이 PUA 영역에 해당 글리프들을 수록한 이유는 해당 글리프들을 유니코드 정식 문자로 추가하려다가 유니코드 컨소시엄으로부터 퇴짜를 맞았기 때문이라고 한다.[68] 북에서는 주석, 수령, 원수, 장군이라는 칭호 모두 김일성 김정일만의 것으로 만들어서 영구결번화, 다른 누구에게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실제로 주석 역할인 김정은의 호칭은 국무위원장이다.[69] 에도 막부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요시(吉)'는 5대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가 자신의 이름에서 따서 내려준 글자다.[70] 한국에는 주로 도쿠가와 가문이 통치하던 에도 막부가 알려져 있지만 막부를 만들어 무신들이 정권을 잡기 시작한 것은 사실 1192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세운 가마쿠라 막부가 시초다.[71] 훈독은 한자가 전래되어 보급되기 전부터 일본에 존재하던 말에 비슷한 의미의 한자를 갖다붙인 것으로 발음 자체는 일본 고유어이다. 음독은 해당 한자의 중국 발음과 (당시의 일본인들이 듣기에) 최대한 비슷한 발음을 나타낸 것이다.[72] 辰에 '때'라는 뜻이 있어서 통용하는 것이다. 요즘에는 잘 안 쓰지만 예전에는 시간이나 시각을 '시진(時辰)'이라고 많이 불렀다. 의미가 비슷한 時와 辰을 유사병렬의 형태로 결합해 만든 단어다.[73] 明과 朙은 이체자 관계에 놓여있는 글자들이라 피휘를 엄하게 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당나라 때 昞이 피휘 대상이 되면서 음과 자형이 통하는 丙도 금지시켰던 것처럼 엄격한 규칙을 적용했던 것과 비교된다.[74] 통상적인 부를 소(召) 자와 다른 점은 왼쪽에 日이 들어갈 만한 공간을 비워놓고 오른쪽에 찌그러진 召를 쓴다는 점이다. 여기서 응용해서 昭가 들어간 照(비출 조) 자도 日 부분만 비워놓은 기묘한 형태로 표기했다. 이 문헌은 한자의 뜻을 쯔놈으로 풀이해 놓은 책인데 본문에 照 자에서 日이 들어갈 자리를 비워놓은 글자가 보인다.[75] 응우옌 왕조 시절 베트남의 대내 국호가 대남이었다. 대외 국호는 현재와 같은 월남(越南).[76] 앞에서 말했듯이 휘(諱)는 본래 '꺼릴 휘'인데, 옛 관습에서 군주 등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꺼려져서''' 그 이름을 뜻하기도 한 것이다.[77] 그래서 래퍼 카녜 웨스트의 딸(노스)이라든지 배우 기네스 팰트로의 딸(애플) 같이 셀레브리티들이 자식 이름을 특이하게 지었다는 뉴스가 뜰 때마다 인터넷에서 저게 학대냐 아니냐로 키배가 벌어진다.[78] 그리고 인종주의 사상 그 하나만으로 양육권이 박탈된 것은 아니다. 웰페어에 의존하는 가장이 여러 차례 동거와 재혼을 했는데 가정폭력건이 적발된 경우다. 물론 위험분자인 관계로 미리 찍혀 감시받은 것은 사실이다.[79] 조선에서는 내시가 부인을 얻을 수 있었으니 삼족에 처가도 들어간다. 자식은 당연히 양자를 얻어야 했다. 양자는 주로 본가에서 들였지만 여의치 않으면 처가에서 데려올 수도 있었다. 내시의 양자도 내시가 되어야 했다.[80] 다행히 권절은 3년 후인 정묘년에 재수해서 합격했다. 과거시험은 3년에 한 번씩 친다. 다만 나라의 중대한 경사가 있을 때 수시로 여는 과거시험도 있었다.[81] 자코바이트 참고. 제임스 2세의 손자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일명 Bonnie Prince Charlie)가 찰스 3세를 자칭했다. 국왕을 자칭한 자코바이트 왕위 요구자들이 한두 명도 아닌데 왜 이 사람을 특별히 취급하냐면 이 사람은 말로만 떠든 게 아니라 실제로 왕위를 되찾으려고 망명지 프랑스를 떠나 스코틀랜드에 가서 반란을 일으켰었기 때문이다. 물론 영국 정부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후폭풍이 상당했다. 킬트 등 스코틀랜드 전통 복장이 한 동안 금지되고 God Save the King에 '반란군 스코틀랜드인들' 같은 표현이 들어간 절이 추가되기도 했을 정도(현재는 해당 절을 부르지 않는다).[82] 찰스 왕세자는 성씨를 제외한 풀네임이 찰스 필립 아서 조지이므로 '조지'를 고를 수 있다.[83] 예를 들어 전임 국왕인 조지 6세도 왕자 시절에는 앨버트 왕자로 불렸지만 즉위한 뒤 조지 6세가 되었다. 그는 성씨를 제외한 풀네임이 앨버트 프레더릭 아서 조지였기 때문에 '조지'를 고를 수 있었다.[84]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로마노프문서 참조[85] 하필 徹을 通으로 바꾼 건 뜻이 비슷하기 때문이다.[86] 이십등작 위에 따로 존재했던 제후왕은 제외. 제후왕은 한나라 초기를 제외하고는 유(劉)씨 황족에게만 내리는 게 관례화되었기 때문에 이십등작과 별도로 취급한다.[87] 列이 徹과 운이 같아 대체하는 글자로 선택되었다.[88] 따라서 후한이 멸망할 때까지 상산으로 불린 까닭에 조운이 그 유명한 상산 조자룡이 된 것이다.[89] 쿄코의 부모가 자식의 본명을 숨기고 대외적으로는 일종의 자(子)를 사용하도록 했는데, 미키가 본명을 적은 쪽지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