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인천강지곡

 


[image]
[image] '''대한민국 국보 제320호'''
'''월인천강지곡 권상'''
月印千江之曲 卷上


'''소재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 (운중동, 한국학중앙연구원)
'''분류'''
기록유산 / 전적류 / 활자본 / 금속활자본
'''수량/시설'''
1책(71장)
'''지정연도'''
2017년 1월 2일
'''제작시기'''
1447년(세종 29)경
1. 개요
2. 내용
3. 여담
4. 바깥고리
5. 국보 제320호

[clearfix]

1. 개요


月印千江之曲. 제목을 해석하면 '즈믄[1] 가람 비추는 달의 노래'이다.
조선의 4대 왕인 세종대왕수양대군이 지은 석보상절을 본 후, 각 구절마다 찬가찬송의 형식으로 직접 지은 500여수의 송시들을 첨한 장편 한글 찬불가. 상중하 3권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상권 뿐이다.
현재 한국학 중앙 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으며[2], 대한민국 국보 제320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내용


세종 28년인 1446년에 소헌왕후가 사망하자 어머니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수양대군[3]은 죽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스스로 불교 서적을 공부한 후 한글로 석보를 지어 모친의 영전에 바친다.
이를 본 세종이 수양대군에게 이 석보를 개인적인 작품을 넘어 모든 이가 볼 수 있게 완성하라는 명을 내리자, 고승 신미와 함께 다른 불경들 또한 모두 완독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한글 불경 언해서를 완성하니 이것이 석보상절이다.
세종 29년인 1447년에 세종이 완성된 석보상절을 읽어본 후 그 내용과 완성도, 작품성에 크게 감동하여 석보상절의 각 구절마다 그에 대한 찬가를 직접 지었다. 현재 남아있는 월인천강지곡 권상에 수록된 찬가는 총 194곡이고, 수년 후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합철하여 세조대에 발간한 월인석보에 나오는 찬가의 수는 총 440곡이다. 상중하 전체로는 모두 580여곡의 찬가를 세종이 직접 지어 수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글로 표기된 작품으로 한글 창제 극초기의 국어학 연구와 출판 인쇄사를 연구하는 데에는 용비어천가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역대 최고의 자료로 여겨지고 있다. 이에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되었다.
위에서도 나와 있듯이 현존하는 월인천강지곡은 상권 하나 뿐으로 총 194곡만이 남아 있으나, 훗날 세조가 월인천강지곡의 내용을 합철하여 우리 나라 불교계 제일의 강창문학(講唱文學)으로 손꼽히는 월인석보를 펴낸 관계로 거의 대부분의 내용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3. 여담


  • 가사는 남아있었으나 음정은 전수되지 않았는데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곡을 붙인 버전이 나왔다.
가사는 월인천강지곡 기2곡의 내용이다. 전미선 배우의 유작이기도 한 작품에서 공교롭게도 '진혼곡'으로 재생되어 슬픔을 더했다.
> 《가사 해석》
> 세존의 일(평생 하신 일)을 여쭈려고 하니 / 만리 밖의(우리나라에서) 일이시나 / 눈에 보는 듯이 여기시옵소서 / 세존의 말씀을 여쭈려고 하니 / 천 년 전의 말씀이시나 / 귀에 듣는 듯이 여기시옵소서
  • 월인천강지곡 안에 세종의 정실부인이었던 소헌황후에 대한 비밀 메시지가 숨어있다는 해석이 있다.[4] 월인천강지곡 '기이'편에 '''(부인은)~눈에 보이는 듯 생각하소서, 귀에 들리는 듯 생각하고서" 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것이 소헌황후를 향한 메시지라는 해석이다.
소헌황후는 시아버지인 태종에 의해 친정이 멸문의 화를 입었다. 당시 세종은 군권을 쥐고 있던 태종에 맞서 처가의 멸문을 수수방관할 수 밖에 없었음을 안타까워했으며, 이후 소헌황후도 폐위하라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세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한다. 소헌황후가 승하한 후 세종은 창덕궁 곁에 불당을 세우려 했으나 대소신료들이 강하게 반발하였으나 '나는 어진 임금이 아니니 불당 하나 쯤 지을 수 있는 거 아니냐?' 라며 건설을 강행하기도 하였다.

4. 바깥고리



5. 국보 제320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이 그의 아내인 소헌 왕후의 공덕을 빌기 위하여 직접 지은 찬불가이다. 훈민정음 창제이후 가장 빠른 시기에 짓고 활자로 간행한 점에서 한글 창제 후 초기의 국어학 연구와 출판 인쇄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비록 3분의 1 정도만 남은 零本이나 이 책이 갖는 국어학적, 내지 출판 인쇄사적 가치는 매우 높다는 점에서 국보로 승격할 가치가 있다.


[1] '1000'이라는 뜻[2] 소유자는 주식회사 미래엔.[3] 소헌왕후는 피접을 나갔던 수양대군의 사저에서 죽었다.[4] 당연히 정설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