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비어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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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飛御天歌
1. 개요
2. 판본
3. 내용
4. 본문
5. 기타


1. 개요


보물 제1463호.
조선 초기 세종 27년(1445) 편찬되어 세종 29년(1447)에 발간된 악장·서사시다. 세종대왕훈민정음[1]을 창제한 뒤 훈민정음을 시험하기 위해 권제와 정인지, 안지 등에게 맡겨 펴낸 책이다. 따라서 '''훈민정음으로 쓰인 최초의 책'''[2]이자, 한글 반포 이전에 지은 유일한 한글 작품. 제목은 '용(임금)이 날아올라 하늘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조선 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선전하고 찬양하는 내용인데, 국문 가사 - 한역가 - 한문 주석으로 구성된다.
훈민정음과 함께 교과서에 실렸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용비어천가 정도는 본 일이 있다. 문제는 그게 용비어천가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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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비어천가 2장은 1만 원권 지폐 도안에도 사용되었는데 앞면의 일월오봉도 위에 있다.
노래가사로 창작되었으니만큼 실제로 '봉래의'라는 이름으로 곡과 안무를 더해서 궁중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한문 가사와 중세 한국어 가사를 함께 부르는데, 이 중 '치화평'이 중세 한국어 가사로 부르는 부분에 해당한다.


2. 판본


1447년에 발간한 초간 초쇄본은 현재까지 권1, 2의 1책만 남아있다.
이후 16세기에 초간본을 찍은 목판으로 다시 찍은 판본이 전하나 이 초간 후쇄본은 불에 타 가장자리가 보이지 않는 부분도 있다. 자획과 방점이 마멸되고 노랫말 장 차례가 임의로 변개된 부분이 있긴 하나, 10권 5책이 온전하여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뒤 초간본의 판식을 따러 여러 번 중간본이 나왔다. 제1차 중간본은 광해군 4년(1612)에 초간본을 판하로 복각한 것이고, 제2차 중간본은 효종 10년(1659)에 새로운 판하를 써서 중간한 것이며, 제3차 중간본은 영조 41년(1765)에 제2차 중간본의 책판 중에서 훼손된 것만을 보각하여 간행한 것이다.
이 밖에도 초간본의 판식과는 다르나 세종실록에 실린 실록본과 용비어천가에 수록된 한시와 그 한시를 국역한 용비어천가 약본이 남아 있다.

3. 내용


:ᄒᆡᆼ도ᇰ·륙료ᇰ·이ᄂᆞᄅᆞ·샤:일:마다天·복·이시·니。

해동륙룡이 나시어서, 일마다 천복이시니,

:공셔ᇰ·이同또ᇰ·ᄒᆞ시·니

옛 성인이 하신 일들과 부절을 합친것처럼 꼭맞으시니.

불·휘기·픈남·ᄀᆞᆫᄇᆞᄅᆞ·매아·니:뮐·ᄊᆡ。곶:됴·코여·름·하ᄂᆞ·니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흔들려 꽃이 좋아지고 열매가 많아지니

:ᄉᆡ·미기·픈·므·른·ᄀᆞᄆᆞ·래아·니그·츨·ᄊᆡ。:내·히이·러바·ᄅᆞ·래·가ᄂᆞ·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아니그쳐서, 내[川]가 되어 바다에 가노니.

용비어천가 1장, 2장[3]

다른건 몰라도 뿌리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이 어쩌고 하는 구절은 다들 안다. 교과서 및 여러 매체에 자주 나오는데, 용비어천가의 노래 중 유일하게 비유와 상징 등 문학적 구성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그저 사실을 열거한 것이라고 할 만큼 투박하다.
각 장은 대체로 중국의 고사가 나오고, 그 고사와 비슷한 세종 선조들의 일화가 나온다. 그래서 중국의 고사 중에서 오랑캐를 피해 기산으로 올라간 고공단보, 주나라를 세운 주무왕, 유비, 당태종, 송태조, 남송을 멸망시킨 몽골재상 백안(바린 바얀) 등 슈퍼스타들이 등장하고, 이들의 행적에 비교되는 세종 조상들의 고사를 나란히 배치했다.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역사가 짧은[4] 조선왕조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내용. 첫장에 해동육룡이란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 태조(太祖), 태종(太宗)이다.[5] 세종대왕의 6대조 할아버지까지 찬양하는 글. 한글이 얼마나 우리말을 잘 표현할 수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 용비어천가에서 조선왕조를 찬양하는 내용을 빌려 써보았다.
그리고 '''정종은 빠졌다'''. 이 시기는 정종이 공정왕의 시호를 받고 제대로 왕 대우를 못 받던 때라 그렇다. 거기에 세종의 6대조다 보니 정종은 빠질 수밖에.[6]
덤으로 2장만이 순우리말로 된 하나뿐인 장이란 자습서도 꽤 있는데, 30장, 67장, 68장도 순우리말로 된 장이다.
67장은 1장, 2장, 4장, 48장, 결사인 125장과 함께 특히 많이 언급되는 장이다. 더구나 그 내용도 바이얀의 일화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다룬 장이라서 정도전이 지은 제례악인 정동방곡과도 연결되어서 그 중요도가 높다. 이를 모름은 용비어천가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4. 본문



5. 기타


오늘날 한국에는 정권 찬양물을 빗대어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방송이나 신문에서 지나치게 현 대통령을 칭찬하거나 현 정권을 옹호하려고 하는 홍보물이 나타나면 "또 용비어천가 쓴다.", 혹은 "노비어천가", "MB어천가", "비어천가", "문비어천가" 하면서 까는 게 보편화되었다. 전제군주제인 조선 때 만들어진 작품인 만큼, 민주주의 국가인 오늘날 한국에서 무언가를 용비어천가와 비교한다면 '민주주의 사회를 역행한 전제 군주정에서나 볼 수 있는 무언가'라는 뜻도 내포한다.
하지만 용비어천가는 왕이 갖추어야 할 덕목도 말하고 있다. 이를테면 125조에는 경천근민(敬天勤民)[7]이라는 말이 있다. 중국의 제왕들과 태조 이성계를 비교하는 노래 2줄로 구성된 용비어천가는 110장~125장에서 결국 패왕적 위업을 달성하든 유교적 업적을 달성하든 본 목적이 무엇이었냐는 것을 묻고, 경천애민을 잊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8]끝나는데, 성경전도서와 매우 흡사한 면이 있다. "우리 조상님들이 이렇게 고생고생하시면서 집안을 보존하고 일으키셨으므로 오늘날의 왕업이 있게 되었으니 후세 왕들은 부디 선왕이 창업하실 때의 초심을 잊지 말아달라"는 당부에 가깝다. 이러한 점을 볼 때 정권 찬양물을 용비어천가에 빗대는 것은 오히려 용비어천가에 대한 실례라고도 할 수 있다.
다른 곳에서 찾아온 사람을 뜻하는 ''의 문헌상 첫 용례가 이 문헌에 등장한다.
사극 뿌리 깊은 나무육룡이 나르샤의 제목이 이를 인용한 것이다.
한떄 청소년들이 사용하는 은어에서 동의보감을 이용해 나온 "동의? 어 보감"을 응용하여 "용비? 어 천가" 로 쓰였지만 현재는 사장되었다.
[1] 훈민정음은 세종 26년(1446)에 반포됐다.[2] 두 번째는 부처의 은덕을 찬양하는 월인천강지곡으로 세종 29년(1447)에 편찬되었다.[3] 전문은 위키문헌으로.[4] 세종은 조선 4대 임금이다. 2대 정종과 3대 태종이 형제이므로 세종은 세대로는 겨우 3번째이다.[5] 태조 위부턴 당연히 이성계가 왕이 된 뒤 추증되었다.[6] 다만 공식적으로는 태종이 정종의 양자로서 세자가 된 다음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6대조에 포함시켜도 아무 문제가 없긴 하다. 다만 이렇게 되면 목조를 빼거나 7대조로 바꿔야 했겠지만 말이다. 물론 동북면으로 거점을 옮긴 사람이 목조인지라 목조를 제외시키기는 불가능했을 테고, 중국 황제들도 6대조까지 추존하지 7대조까지 추존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7]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위하여 부지런히 일함.[8] 님금하, 아ᄅᆞ쇼셔. 낙수(洛水)예 산행(山行) 가 이셔 하나빌 미드니ᅌᅵᆺ가(임금이여, 부디 기억하소서. 낙수에 사냥 가 있으면서 할아버지만 믿고 있겠습니까).=하나라 우왕의 손자인 태강왕처럼 정사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