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영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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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중국 춘추시대 위(衛)나라의 제31대 군주. 위양공의 아들. 위출공의 할아버지. 위후장공의 아버지. 공자(孔子)에게 악평을 들을 정도로 암군이다.
2. 생애
위 양공 9년(기원전 535년), 아버지 위 양공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서 위나라의 군주가 되었다.[1]
위 영공 원년(기원전 534년), 그는 7살의 나이로 즉위식을 거행했다.
위 영공 4년(기원전 530년), 위 영공이 진경공(晉頃公)의 즉위를 축하했다. 그런데 작위가 후작으로 같기 때문에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2]
위 영공 5년(기원전 529년) 진(晉)나라, 노나라, 송(宋)나라, 정나라 등과 평구에서 회맹했다.
위 영공 12년(기원전 522년), 제표(齊豹), 북궁희(北宮喜), 저사포(褚師圃), 공자 조(公子 朝)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위 영공의 형 집을 죽이고 위 영공은 피난했다.
위 영공 13년(기원전 521년), 위 영공이 돌아오니 공자 조는 송나라에 구원을 요청해 무리들을 안심시켰다.
위 영공 17년~위 영공 19년(기원전 517년 ~ 기원전 515년), 2차례 북궁희는 제후들과 회맹했다. 이때 반란이 평정되었다.
위 영공 30년(기원전 504년), 진(晉)나라, 노나라, 송나라, 채나라의 제후들과 회맹했다. 위 영공이 사람을 보내 주왕의 신하인 강홍에게 축하 의사를 보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권력을 안정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위 영공 32년(기원전 502년), 양호(陽虎)가 진(晉)나라를 치면서 길을 위나라에 빌려 달라하니 위영공이 크게 노해 미자하를 보내 습격하게 했다. 공숙 문자가 간하니 위 영공은 미자하를 불러들였다.
위 영공 33년(기원전 501년), 사람을 보내 제경공(齊景公)과 짜고, 위나라의 행인 북궁결 등의 북궁씨(北宮氏) 세력을 약하게 했다.
위 영공 34년(기원전 500년), 진(晉)나라와 사타에서 회맹했는데, 그 내용이 굴욕적이었는지라 성하의 욕이라고 했다.
위 영공 35년(기원전 499년), 위 영공이 중모(中牟)를 쳤다.
위 영공 36년(기원전 498년), 진(晉)나라가 위나라의 수도를 포위했다. 위 영공은 굳게 지키면서 나가 싸우지 않았다. 진군이 물러나자 위나라는 사타에서 강화를 했다.
위 영공 40년(기원전 494년), 위 영공은 공숙 술, 조양, 북궁결, 태자 괴외(太子 蒯聵), 공맹 구(公孟彄) 등을 몰아냈다.
위 영공 41년(기원전 493년), 위 영공이 죽었다. 공자 영(公子 郢)이 끝내 거절하자 결국 남자(南子)는 괴외의 아들인 첩(輒)을 세우니 그가 바로 위 출공이다.
3. 여담
공자와 동시대 사람이라 그런지 위나라 군주들 가운데서는 남아있는 일화가 많은 편. 거의 전부, 아니 몽땅 안습한 것들 뿐이라는게 문제지만, 공자에게 진법(陣法)[3] 을 물었다가 까인 적[4] 도 있고, 좀 후대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한비자에 수록된 망국지음이나 여도지죄 등에도 주연으로 등장한다. 항목을 확인하면 알겠지만 전부 까이는 역할이다.
[1] 출생의 비밀에 대해서는 위양공 문서 참조.[2] 춘추에서 위 영공이 최초로 까이는 기록이다.[3] 전쟁터에서 진치는 법.[4] 심지어 논어에서는 이 일화가 한 챕터의 서두에 위치하기 때문에, 챕터의 첫 문장에서 챕터 이름을 따오는 전통에 따라 논어의 15번째 챕터 이름은 '''위영공편'''이다. 챕터 내내 위영공이 등장하는건 서두의 그 한 장면 밖에 없는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