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황

 


성명
김석황(金錫璜)
일명
김윤황(金潤璜), 김석황(金錫潢)
생몰
1894년 2월 28일 ~ 1950년 6월 30일
본관
김해 김씨#
출생지
황해도 봉산군 동선면 선령리#
사망지
서울특별시 서울형무소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독립운동
2.2. 장덕수 암살사건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독립운동


김석황은 1894년 2월 28일 황해도 봉산군 동선면 선령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배웠고 십대 때 일본으로 유학해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했다. 1919년 2월 와세다 대학 재학 중 서춘, 최팔용 등과 함께 2.8 독립 선언에 가담해 문서 작성 및 동지 확보, 격문 살포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가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가 훈방 조치되었다. 이후 상하이로 망명해 바오강리(宝康里)에 주소를 두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했다.
김석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냈고 뒤이어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국내로 들어와 경향 각지를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했다. 그리고 1919년 7월에 상하이로 돌아와 임시의정원 황해도대의원에 선출되어 입법활동을 전개했고, 또 대한민국청년단 서무부장을 맡았으며, 8월엔 기관지 <독립신문> 창간에 필요한 자금 마련에 착수했고 본인도 600원을 기부했다.
1919년 9월, 김석황은 임시사료편찬회에 참여해 안창호를 총재로 모시고 이광수, 김병조, 김두봉, 김붕준 등과 함께 사료편찬, 발간활동을 했고 '한국독립운동사'와 한일관계사료집' 4권 편찬에 관여했다. 또한 10월에 국내로 재잠입해 김창빈(金昌彬), 안기영(安基永), 김인수(金仁洙)에게 독립신문 자금 모집의 신임장을 교부하고 군자금을 모집했으며, 독립신문 평남지국장에 박순도(朴順道)를 임명했다.
1919년 11월, 김석황은 최일(崔日)로부터 독립운동 자금 2,000원을 제공받고 고향인 봉산 지역을 조사한 뒤 다시 상해로 건너갔다. 이후 1920년 1월 김구, 김순애, 손정도 등과 함께 항일 무장단체인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한 뒤 다시 국내로 잠입해 평양의 기홀 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인 것으로 위장하고 황중극(黃中極), 홍석운 등 10여 명을 병원으로 불러 의용단 지단을 조직했다.
이후 1920년 5월 하순 국내에서 군자금 1,000원을 확보한 뒤 상하이로 돌아왔고, 김성근(金聲根)이 조직한 구국모험단(救國冒險團)을 의용단에 가입시켰으며, 그들이 제조한 폭탄을 동년 6월 임득산(林得山)에게 휴대시켜 안동의 이륭양행(怡隆洋行)을 거쳐 국내 각 지단으로 송달했다. 또한 광복군 총영의 결사대를 맡아 국내로 재차 파견되어 동지들에게 폭탄을 전달해 평양경찰부 등에 폭탄을 던지게 했다.
그러나 1920년 7월 그가 상하이로부터 국내 지단원에게 부친 편지가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고 말았다. 일본 경찰은 상하이에 있는 밀정을 통해 그의 행방을 추적하게 했고, 9월 4일 그가 상하이를 출발해 만주 봉천(奉天)으로 간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9월 16일, 김석황은 탑만촌의 한국인 가옥에서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고 격투 끝에 체포되었다. 이후 그해 12월 2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김석황은 석방 후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다가 기회를 틈타 조선을 탈출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돌아왔고, 1944년 비밀 파견원을 맡아 국내에 잠입해 대한광복군의 조선 진입 때 호응할 준비에 착수했다.
1945년 8.15 광복이 도래한 후, 김석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핵심 당인 한국독립당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고, 뒤이어 국민의회 동원부장, 대한보국의용대장 등을 역임했다. 김구모스크바 3상회의에 반발해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945년 12월 30일에 결성된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 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2.2. 장덕수 암살사건


1947년 12월 2일, 한국민주당 대표 겸 동아일보 사장 장덕수가 박광옥, 배희범에게 암살당했다. 경찰은 장덕수 암살 사건의 배후로 김석황을 지목했고, 김석황은 한달간 도피했다. 그러다가 1948년 1월 16일, 수도청장 장택상은 김석황을 긴급 체포하고 기자들 앞에서 특별 담화를 발표했다.

16일 새벽 4시 10분에 고 장덕수 살해관련범인 김석황(54)은 광주군 중대면 오금리 민병만(閔炳萬, 47) 방에서 수도청 형사 최난수(崔蘭洙) 경위에게 체포되어 방금 수도청에 인치되어 있다. 이 자는 금번 장씨 살해 사건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고, 또 추측컨대 해방 전후 좌우익 요인 살해사건에 관해서도 이 자의 취조에 따라 그 암운이 일소되고 그 배후의 흑수도 법망에 걸려 조선 정계를 명량케 할 것같이 보인다. 경찰로서 가장 관심있게 생각하는 것은 주머니 속에 발견된 일건인데, 이 서한의 내용은 마치 차천자(車天子)식이다. 이 자들의 안중에는 조국도 없고 민족도 없고 단지 일개인의 권리욕에 눈이 뒤집힌 모양으로 대개 범죄는 이와 같은 과대망상증 환자에서 많이 나는 것같다. 이 자들을 소탕치 않으면 좌우를 막론하고 금후 유위한 조선 요인들이 많이 살해될 것이므로 경찰은 이들의 소탕을 목표로 전력을 기울일 방침이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1948년 1월 17일자 기사

이에 테러배후규명대책협의회는 1월 23일에 성명서를 발표했다.

고 장덕수 암살사건 배후인물로 지명수배를 받고 있던 김석황은 1월 16일 국립경찰의 손에 드디어 체포되었다. 우리는 국립경찰의 수훈에 대하여 만강의 사의를 표한다. 경찰당국에서는 하루바삐 이 사건의 진상을 천하에 공포하여 사회의 암운을 일소하여주기 바란다. 우리는 1947년 12월 27일부 하지 중장의 고 장덕수 암살사건에 대한 성명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군사재판으로서 암살범인과 및 배후인물 등을 극형에 처할 것은 물론이어니와 시급히 형을 집행하여 이러한 암살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기를 거듭 요망하는 바이다.

조선일보 1948년 1월 24일자 기사

1948년 3월 2일, 장덕수 암살사건에 관한 제1회 공개재판이 개정되었다. 리만 검사는 장덕수 사건 경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47년 8월 중순경 피고 최중하(崔重夏) 외 수 명은 최중하의 부친이 경영하는 경원호텔에서 회의를 열고 당시 김중목(金重穆)이 가입하고 있던 국민의회에서는 서울서 개최되고 있던 미소공동위원회를 반대하고 또 한국민족대표자대회와 합동을 제창하고 있는 터에 장덕수, 안재홍, 배은희 3명이 미소공동위에 협력을 주장하고 민족대표자대회와 국민의회와의 협동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민족반역자로 규정하고 이를 처치하자는 결의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중목은 자기가 이 자들을 처치하겠다고 자원했고 그 후 최중하가 입원하고 있던 한양병원에서 조선혁명단을 결성하고 조상환, 박광옥, 조화, 배희범 등은 혈서를 배에 붙이고 수류탄과 권총을 들고 태극기 앞에 서서 사진을 찍은 후 이 사진을 그들이 숭배하는 김구에게 보낸 다음 9월 하순 살해계획을 했다. 그러나 도중 마음이 약해진 자가 있어 10월 20일 계획을 변경하고 박광옥, 배희범 두 명이 장씨 살해를 담당했다.

12월 2일 장씨가 친구와 저녁을 같이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두 명은 이 날 장씨 자택에 방문하여 먼저 배희범이 권총을 네 번이나 당겼으나 불발이어ㅓ서 박광옥이 다시 곤총 2발을 쏘니 이것이 명중되어 장씨는 사망한 것이다. 그리고 공범 중 2명은 아직 체포되지 않아 현재 공판을 받고 있는 것은 10명이고 최근 1월 16일에 체포된 김석황의 주머니에서는 김구씨에게 보내는 변지가 발견되어 증거로써 제출될 것이다.

(중략)

본 논고에 의하여 10명의 피고가 음모에 참가하여 장덕수를 암살한 후 법에 의하여 그 행동을 중지하기까지의 경과에 대한 피고들의 자백한 사실로 설명하였다. 또 본 논고에 의하여 공모자의 행위에 관한 법률상의 문제가 상세히 토의되었으므로 귀 위원회는 이와 같은 성질의 사건에 있어 직접 증거보다 사정증거가 긴요한 만큼 사정증거는 왜곡하지 못할 것이다. 특히 일□도당은 극비로 되어 있다. 그 공모자 중 한 사람이라도 누설하거나 행동하지 않는 이상 그 존재를 알 길이 없으며 충고할 수도 없게 되어 있다.

본 사건에 있어 일매의 대부분은 피고이며 나머지 소수인은 불문에 붙여 있다. 논고증거의 대부분은 전범죄에 관련이 있어 후일에 취급할 것을 부언한다. 또 본 논고에 의하여 귀 위원회에 요청하는 것은 피고중 조중하 박중덕은 처음 모사할 때 공모에서 탈퇴한 만큼 살해가 아니라고 공모 명세에서 진술한 것을 부언한다. 본 논고에 의하여 귀 위원회에 특히 희망하는 것은 본 사건이 중대하다는 걸 알아주는 것이다. 장덕수 박사가 정치적인 신념으로 인하여 급서한 1947년 12월2일은 참으로 슬픈 날이다. 전세계는 이 사건의 突發로 인하여 놀랐다. 여러분에게 제시한 증거를 참작하여 정당한 판결을 내리는 것이 여러분의 의무인 줄 압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8년 3월 3일자 기사

이후 경찰은 3월 8일 제5회 공판에서 김석황이 미군조사기관에서 진술한 내용을 공개했다.

본인은 국민의회 동원부장이다. 중국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대한임시정부 주석인 김구 선생을 친히 1년 동안 모신 일이 있다. 귀국 후는 별로 가깝지 않았으며 1947년 11월 31일 민대, 국의 합동문제로 찾아갔었다. 본인은 장덕수를 살해한 박광옥을 모른다. 장씨 살해 문제에 관해서는 신일준(申一俊)으로부터 1947년 7월 경에 민족반역자를 숙청해야 한다는 말 가운데 장덕수, 배은희, 안재홍을 죽여야 한다고 들었으나 말렸다. 그 후 신씨는 김중목이 적임자라고 말했다. 며칠 후 김구 선생을 찾았을 때 이런 말을 했더니 이놈들은 나쁜 놈이야라고 말씀하셨다. 이때 본인은 이 말이 장덕수를 죽이라는 직접 명령은 아니라 원하시고 있다는 것으로 알고 신씨, 김씨에게 말했다. 그 후 살해 계획을 김구 선생께 알렸더니 "아 그런가"라고만 하셨다. 본인의 주머니 속의 편지는 누구라고 이름은 안 썼으나 인편이 있으면 김구씨에게 보내려고 한 것이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8년 3월 9일자 기사

3월 12일, 김구가 재판에 증인 신분으로 출석했다. 그의 증언 내용은 <동아일보> 3월 13일자와 14일자에 실렸는데, 그 중 사건 연루에 관한 문답은 다음과 같다.

문: 작년 여름에 장덕수 씨가 선생을 방문하고 미소공위에 대한 의향을 달리 해달라는 부탁 내지 의논을 한 적이 없소?

답: 기억할 수 없소. 친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소.

문: 그때의 장덕수 씨의 미소공위에 대한 의견은 어떠했소?

답: 모르겠소.

(중략)

문: 장 씨가 선생을 찾을 때 미소공위 참가에 대하여 불가하다고 한 말을 한 일이 있소?

답: 기억이 없소.

문: 장 씨의 공위 참가에 대하여 다른 사람에게 불가하다고 말한 일이 있소?

답: 직접 본인을 대하고는 모르겠으나 점잖은 체면에 어찌 그러겠소.

문: 그러면 그 말을 김석황에게도 한 일이 없다는 말이오?

답: 없소.

문: 김석황 하고 만나 토의한 일이 있소?

답: 없소.

문: 보통 담화 중에 미소공위 참가가 좀 나쁘지 않으냐, 처치를 해야 좋지 않으냐는 말을 한 일이 있소?

답: 없소.

문: 작년 8, 9월경에 김석황 조상항 손정수 신일준 4명이 선생을 찾아 “김석황에게 장덕수를 처치하라는 말을 했느냐?”라는 질문을 한 일이 있소?

답: 없소.

문: 확실하오?

답: 확실합니다.

문: 어째 선생은 다른 질문에는 기억이 없다고 말하고 이 질문에는 똑 잘라서 확실히 없다고 단언을 하시오?

답: 사람을 죽이라는 것은 중대사이니 확실치 않을 수가 있소?

문: 선생이 죽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겠지마는 "제거"하라는 말을 쓴 일은 없소?

답: 안 썼소. 어찌 그 사람 하나를 제거하라고 하겠소?

문: 작년에 미소공위 참가한 사람에 대해서 “제거”한다든지 “좋지 못한 사람”이라든지 그런 말을 한 일 있소?

답: 없소.

(중략)

문:김석황에게 (장덕수 등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린 일이 있소?

답: 허허, 내게 무슨 권리가 있길래 그런 명령을 하겠소.

문: 권리 유무가 아니라 지시한 점이 없소?

답: 없소.

문:(청년들이 태극기 앞에서 수류탄을 양손에 들고 혈서를 배에 붙인 사진을 보이며) 이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까?

답:이런 혈서는 많으니까요.

문: 수류탄을 들고 찍은 사진이 있습니까?

답: 윤봉길이나 이봉창 등의 사진이 있지요.

문:그들의 사진은 기억합니까?

답: 네.

문: 그 사진은 기억하면서 이 사진은 기억이 없소?

답: 없소.

(중략)

문:김석황에게 장, 배 등 4씨를 좋지 못하다든지 독립방해자라고 한 말이 없단 말이오?

답:기억이 아니라 나의 본심이 그렇소.

문:선생의 제자가 말하기를 선생의 명령이라 하는데?

답: 그러기에 누구의 모략이지요.

문:그러면 누구의 모략이요?

답: 말 못하겠소. 여러 사람과 단체의 이름이 내 입에서 나올 터이니.

문: 재언하면 김석황이 선생을 가리켜 거짓말을 했단 말이오?

답: 그렇소. 거짓말을 아니치 못할 환경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만들었겠지요.

문: 그러면 무슨 환경에서 그 사람이 그렇게?

답: 내 눈으로는 보지 못하였으나 내가 들으니 경찰에서 고문을 한다고 들었소.

문: 그것은 확실히 보고 한 말이요, 짐작으로 한 말이요?

답: 내 눈으로 고문하는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고문했다는 소문을 들었소.

문: 고문 운운에 대해서는 증거를 확립시키든지 그렇지 못할진대 곧 취소하든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택하시요.

답: 그런 말을 누구 누구한테서 들었다고 지적해 말할 수는 없지만 가령 모모 신문도 봤고 또 피고의 진술내용도 보니 도대체 불순한 점이 있소. 그런 점을 보아서 생각컨대 스스로 그런 느낌이 듭니다.

문: 그러면 고문했다는 확증은 없지요?

답: 그렇소.

문: 직접 어떤 특수한 개인한테서 정보를 들었소?

답: 그렇게 똑바로 지적할 수 있는 기억은 없으나 경찰에서 몽둥이로 피의자를 때린다는 말은 많이 들었소.

문: 독립지도자인 선생으로서 일개 풍문을 가지고 그런 말을 했단 말이오?

답: 풍문이라도 번번히 들었으니까 말입니다.

(후략)

다음날 김구는 재차 공판에 출석했다. 공판정은 방청객으로 초만원을 이뤘고, 심문이 차차로 고조에 달한 때문인지 법정의 공기는 처음부터 다소 험악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듯했으며, 심문석에 오른 김구의 얼굴도 긴장된 빛을 보였다. 이윽고 오전 9시 10분 검사로부터 심문이 개시되었다.

토요일에 계속하여 심문하겠소. 피의자들의 진술서 가운데 있는 진술에 대하여 증인은 모략이라 생각한다고 하였는데 그 모략이란 무엇이오?

그러자 김구가 항의했다.

내가 법정에 나온 것은 국제 예의를 존중하여 증인으로 출정한 것이지 심문에 있어 마치 죄인이나 피고와 같이 취급을 하니, 죄인으로 취급을 할 터이거든 기소를 하라.

이후 검사와 김구는 말다툼을 벌였다.

검사: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것은 증인이 죄가 있어서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요?

김구: 나는 그런 사실을 모르니까 어찌 대답을 할 수 있는가. 대답을 거절한 것은 장덕수 씨를 죽인 것에 대하여 내가 관련을 하고 있는 것처럼 꾸미는 것이므로 안 한 것이다.

검사: 검사가 질문을 한 것을 대답함으로써 스스로 증인이 죄에 접촉하게 되는 때문인가?

김구: 나는 사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관계가 없는 것을 어찌 대답을 한단 말인가.

(5분간 휴정)

검사: 피고인 다섯 사람의 진술서에 적힌 진술을 증인이 모략이라 하였는데 모략이라 함은 무엇이오?

김구: 말을 못하겠다.

그때, 피고석에 앉아있던 박광옥이 돌연 일어나 고함을 질렀다.

이것은 완전한 모략이다! 법정에 태극기를 걸어라!

이에 경관이 달려와 박광옥을 끌고 증인석으로 들어갔고, 증인석으로부터 싸우는 소리와 우는 소리가 요란히 일어나 방청석을 아연케 했다. 얼마 후, 방청석에서 "이제부터 조선 3천만은 다 죽는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났고 증인석으로부터 "죄 없는 사람을 왜 그러는가!"라는 고함이 울러퍼졌다. 이로 인해 재판이 장시간 중단되었다가 10시 15분에 다시 심문을 개시했다. 그 후 판사가 김구에게 물었다.

애국자의 한 사람으로써 장덕수씨를 생각하였는가?

김구가 답했다.

국내에 들어와서 장씨를 애국자라고 말하였는데, 사실 나는 그동안 장씨가 애국자 노릇을 못했는지 했는지 모르며 조사해볼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서울신문> 1946년 1월 23일자에 게재된 김구의 서울신문 출범 1주년 축하글에는 장덕수를 비난하는 대목이 있었다.

친일분자로 지목을 받는 자 중에서 일찍이 왜적 이상으로 왜국을 위하여 충견노릇을 한 무리는 감히 대두도 하지 못하며 혹 그 정상이 비교적 경한 무리로도 자숙하는 부분도 없지 아니하나 그러나 소위 황국의 성전을 위하여 글장이나 쓰고 연설쯤 한 것은 문제도 되지 아니한다고 하면서 도리어 발호하는 무리를 대할 때에는 구역이 나지 아니 할 수 없다.

이후 김구는 더 이상 공판에 참석하지 않았고, 재판부는 여론의 악화를 우려해 김구를 무혐의로 처리했다. 반면 박광옥과 배희범은 사형이 선고되었고, 김석황 등 한국 독립당 간부들은 종신형에 처해졌다. 그러다가 6.25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6월 30일, 김석황은 박광옥, 배희범과 함께 사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김석황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