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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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 불가리아의 상당 부분 ('''북'''트라키아), 터키의 유럽 부분 ('''동'''트라키아[1] : 이스탄불과 에디르네 일대), 그리스 동북부('''서'''트라키아) 일대를 포함하는 역사적 지명.
고대 그리스,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 불가리아,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다루면 많이 등장하는 지명 중 하나이다.
주요 도시로는 '''이스탄불'''(콘스탄티노폴리스/비잔티움)을 필두로, 에디르네(아드리아노폴리스/하드리아노폴리스), 세르디카 (불가리아의 수도인 소피아), 필리포폴리스 (불가리아의 플로브디브) 등이 있다.
2. 명칭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했던 '''트라키아인들이 사는 땅'''이라는 의미로 뭉뚱그려 사용되었고, 로마제국이 설치한 트리키아주가 지금의 트리키아 권역과 비슷한 위치를 가리켰다.
터키에서는 동트라키아를 루멜리(Rumeli, 구 오스만 제국령 유럽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루멜리아(Rumelia) 라고도 하는데, (옛) '로마 땅' 이란 뜻이다. 아나톨리아도 오랫동안 동로마 땅이었는데 유럽 쪽에만 이런 용법이 생긴 이유는, 아무래도 '''수도(콘스탄티노폴리스)'''가 유럽 쪽에 있다는 게 큰 데다가, 또 튀르크족 입장에서는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아나톨리아에 뿌리박아 동쪽 내륙 → 중앙 내륙 → 서쪽 해안 식으로 점점, 하지만 확실하게 뻗어오면서 아나톨리아를 '''튀르크화, 내지(본토)화'''[2] 시킨 다음 유럽으로 넘어갈 기회를 보다가 '''1350년대''' 다르다넬스 해협 변의 갈리폴리[3] 가 지진이 나면서 동로마의 통제력이 떨어지자 그제서야 다르다넬스를 넘어 유럽으로 진출하였기 때문이다.
3. 역사
3.1. 고중세
트라키아인[4] 들은 흑해 북쪽에서 이주해온 것으로 여겨지며 그리스인들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었다. 전통적으로 호전적이고 야만스런 민족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오랜 기간 동안 부족국가 체제를 유지했으며 기원전 5세기 말엽에 오드뤼사이 왕국을 설립했지만 그리스인들에게 촌동네 취급을 당한 건 마찬가지였다.[5]
트라케[6]
의 왕으로 테레스의 아들인 오드뤼사이족 시탈케스는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알렉산드로스의 아들인 페르딕카스와 트라케 지방의 칼키디케인들을 공격하러 출병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키디데스 지음/ 천병희 번역/ 218쪽
시탈케스는 오드뤼사이족을 위시하여 바다에 이르기까지 하이모스 산과 로도페 산 사이에서 자신의 지배를 받는 트라케인들을 동원했고, 다음에는 하이모스 산 저쪽의 게타이족과 이스트로스강(도나우강 하류) 이쪽의 흑해와 헬레스폰토스 해협 쪽에 치우쳐 사는 다른 부족을 동원했다. 게타이족과 이 지역에 사는 다른 부족은 스키타이족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모두 기마 궁수여서 무장하는 방법도 스키타이족과 같다. 그는 산속의 트라케 부족도 다수 소집했는데, 디오이족이라 부르는 독립된 이들 부족은 단검으로 무장하고, 대개 로도페 산 주위에 살고 있다. 그중 더러는 용병으로 고용되고, 더러는 지원병으로 참가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키디데스 지음/ 천병희 번역/ 219쪽
행군하는 내내 그(시탈케스)는 병으로 죽은 경우 말고는 군사를 한 명도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군대는 많은 독립된 트라케인들이 약탈을 바라고 자진하여 합류하는 바람에 수가 늘어났다. 그래서 그의 병력은 모두 15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 중 대부분은 보병이고, 3분의 1 정도가 기병이었다. 기병은 대부분 오드뤼사이족이고, 게타이족이 그 다음으로 많았다. 보병 가운데 가장 호전적인 부대는 자진하여 로도페 산에서 내려온 독립된 검객들이었다. 다른 부대는 혼성부대로, 주로 수가 많은 것으로 겁을 주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키디데스 지음/ 천병희 번역/ 221쪽
마케도니아인들은 보병으로는 그들(트라케군)에게 대항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내륙의 동맹국들에서 기병대를 증원부대로 내보내, 수적으로 열세인데도 기회가 날 때마다 트라케군을 공격했다. 그리고 그들이 공격하는 곳에서는 아무도 대항하지 못했다. 그들은 훌륭한 기병인 데다 흉갑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몇 배나 많은 적군을 상대할 때는 위험한 전술이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매번 엄청난 수의 적군에 에워싸이는 것을 보았다. 마침내 그들은 적은 수로 많은 수와 맞서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공격을 포기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키디데스 지음/ 천병희 번역/ 223쪽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가 대부분의 트라키아 영토를 점령했으며, 오드뤼사이 왕국은 명맥만 간신히 유지했다. 알렉산드로스 3세를 거쳐 그의 사후 장군 리시마코스가 트라키아의 태수로 임명된 후, 트라키아 왕국을 세워 디아도코이 시대의 주요 국가로 활약했다. 하지만 리시마코스가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켈트족들이 들어와 이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트라키아 왕국은 1대로 단명하고 말았다. 트라키아인의 오드뤼사이 왕국은 그 후로도 지속되다가 기원전 2세기 중반에 로마 공화정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왔으며, AD 46년에 완전히 로마에 흡수되었다.트라케인들은 시내로 쳐들어가 집과 신전을 약탈하고 늙고 어림을 가리지 않고 주민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이든 여자든 만나는 족족 모두 죽였고, 짐을 나르는 가축과 다른 생명체도 보이는 족족 죽였다. 이들 트라케인은 두려워할 것이 없을 때는 야만족 중에서도 가장 피에 굶주린 부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때 사방이 아비규환이고 온갖 형태의 죽음이 널브러져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곳에서 가장 큰 학교로 쳐들어가 막 교실에 들어간 아이들을 모조리 도륙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겪은 어떤 재앙보다 더 크고 더 갑작스럽고 더 무시무시한 재앙이 온 도시를 덮쳤다. 퇴각할 때 트라케인들은 질서정연했는데, 그들은 먼저 공격해오는 테바이 기병대에 맞서 갑자기 달려나갔다가 밀집대형을 이루고 후퇴하는 트라케 특유의 작전을 펼침으로써 자신들을 잘 지켜냈던 것이다. 그래서 이 과정에서 죽은 자들은 많지 않았지만, 상당수가 약탈하려고 시내에 남아 있다가 잡혀 죽었다. 트라케인들은 1300명 중에서 모두 250명이 죽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키디데스 지음/ 천병희 번역/ 602쪽
고대 트라키아인들은 그리스와 접하면서 많은 영향을 서로 주고받았으며 신화적으로도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다키아인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도 여겨지는데, 다키아인들 자체가 트라키아와 분리되기 이전 같은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민족인 것으로 여겨지며 실제 기록이나 발굴되는 유물 등지에서 서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이유인지 여기 출신인 스파르타쿠스도 트라키아 촌놈으로 많이 지칭됐고, 그 이후에도 로마 공화정 말기에서 제정 시대까지 오랫동안 검투사, 전사, 기병 등 무인의 산실[7] 로 유명했다.
참고로 스파르타쿠스가 죽은 기원전 71년에서 '''300년'''이나 지난 시대인 군인 황제 시대 때에도 황제인 막시미누스 트라쿠스(230년대) 시대에도 트라키아와 트라키아인은 여전히 촌구석과 촌놈 취급을 받았다. 200여 년 더 지나서 동로마 초기의 황제인 레오 1세 트라키안도 있는데, 저 때의 '트라키아'는 이미 수도권인 만큼 비하의 의미는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역으로 되짚어 보면 아직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중세 시대의 인구 50만 되고 그런 으리으리하고 짱짱한 위세를 갖추지는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더 나중의 동로마 황제들도 아르메니아인, 이사우(브)리아인, 프리기아인 등의 출신지명이 특징으로 잡혀 별명으로 붙어 있는데, 이들은 수도권(콘스탄티노폴리스와 마르마라 해 연안 지역) 및 동로마의 핵심지(앞의 수도권+에게 해 연안의 그리스와 소아시아 서부)와 거리가 다소 있는 지방들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 이래로 일약 신 '''수도권'''이 되면서 그런지 몰라도, 동로마 제국 시대엔 그런 무인의 산실+촌동네 이미지는 아나톨리아의 내륙 테마들로 옮겨간다. 트라키아인은 그리스어를 쓰지만 5세기 들어 슬라브인들이 남하하면서 슬라브인들에게 동화되었으며 불가르족, 남슬라브족과 함께 현대 불가리아인의 3대 조상 중 하나로 꼽힌다.
3.2. 근현대
동로마 제국의 치하 이후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았으며 투르크 제국의 쇠퇴 이후 1차 발칸 전쟁으로 불가리아가 서트라키아랑 동트라키아를 에디르네[8] 까지 에노스-미디아선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만 남기고 다 차지했다가 2차 발칸전쟁에서 패배하여 터키가 다시 에디르네를 빼앗았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군편이 된 그리스가 승리하여 불가리아로부터 서트라키아까지, 투르크에게서 콘스탄티노폴리스만 빼고 동트라키아까지 트라키아를 대부분 다 회복했으나 그리스-터키 전쟁으로 에브로스(메리치)강을 경계로 에디르네 및 동트라키아를 터키에게 뺏기고 서트라키아만 수복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선 추축국인 불가리아가 다시 서트라키아를 점령하였지만 종전으로 전쟁 이전의 국경으로 되돌아가 트라키아는 그리스, 터키, 불가리아 간에 각각 분할되어 현대에 이르게 된다. 오늘날의 터키령 동트라키아는 유럽 최후의 중동 문화권으로 남아있는 상황이다.[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