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페
Скопј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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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어, 세르보크로아티아어: Скопје / Skopje (스코폐)
알바니아어: Shkupi (슈쿠피)
라틴어: Scupi (스쿠피)
동유럽 발칸 반도에 위치한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의 수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시절에도 마케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였으며 1991년 9월 8일 이후에는 신생 독립국의 수도로서 북마케도니아의 경제, 정치, 문화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인구는 50만이 넘으며 북마케도니아인이 인구의 2/3을, 알바니아인이 20%를 차지한다.
도시의 이름은 철자대로 쓰면 스코'''폐'''지만, 국립국어원에서는 스코'''페'''를 표준으로 정하고 있다.# 현재 마케도니아어의 정해진 표기법은 없지만, 다만 다른 슬라브어인 세르보크로아티아어#나 체코어#, 러시아어# 표기법을 보면 자음에 '예'가 결합될 경우에는 '예'가 아닌 '에'라고 적도록 되어 있는데, 'Скопје'를 '스코페'라고 적는 표기도 이를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국어에서도 '자음 + ㅖ'는 [자음 + ㅔ]로 발음되는 경우가 많고 이것이 허용 발음으로도 인정된다는 점을 반영한 듯.
사람이 산 흔적 자체는 BC 4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나 실질적인 스코페의 설립 시기는 기원전 4세기 '스쿠피'라는 도시명이 역사에 기록되면서부터이다. 로마 제국 시대를 거치면서 그리스인, 로마인이 모여 사는 국제 도시로 번성하기 시작하던 스코페는 395년 테오도시우스 대제 사망 이후 동로마 제국의 지방 도시로 편입되게 된다. 그러나 518년에 발생한 '''규모 M 7.5, 최대진도 12(XII)급''' 의 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완전 파괴되어버렸다. 그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에 의해 복구된다. 7세기 이후 슬라브족이 발칸 반도로 넘어오기 시작하면서 다른 발칸 반도 지역과 함께 스코페도 슬라브화되고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시의 인종적 구성의 뿌리가 된다. 그러나 슬라브화 이후 스코페는 여러 차례 불가리아 왕국, 세르비아 제국 등 인접 국가들의 침입을 받으면서 주인이 여러번 바뀌게 되는데 그중 주목할 만한 역사적 사실은 세르비아 제국의 건국자인 스테판 두샨이 1346년 이곳에서 대관식을 치르면서 수도로 정한 것이 있겠다. 그러나 세르비아 제국 수도로서의 그 영화도 잠시,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무섭게 세력을 뻗쳐나가며 동로마 제국을 위협하던 오스만 제국이 발칸 반도에 진출하면서 스코페도 1392년 오스만 제국의 수중에 떨어지게 된다.
오스만 제국 시대를 거치면서 스코페는 17세기 경제적으로 번영했지만 종교적으로는 정교회를 비롯한 기독교가 탄압을 받고 인구 구성 면에서도 기독교를 믿는 슬라브족 자리를 이슬람으로 개종한 보슈냐크인, 알바니아인, 터키인, 세파르드 유대인이 대신 채우게 된다. 이 시기 세워진 터키식 건축물들은 이후 스코페의 구시가를 이루게 된다. 1683년 빈에서의 패배 이후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스코페도 경제적으로 퇴락하게 되고 제국이 본격적으로 몰락의 길에 접어들게 된 19세기에 이르면 스코페를 비롯한 북마케도니아 지방에서도 불가리아인을 중심으로 슬라브 민족주의 열풍이 거세게 불게 된다. 이후 1908년 청년 투르크당의 봉기에 이어 1912년 발칸 전쟁이 일어나자 아직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 놓여있던 스코페도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개전 18일이 지난 1912년 10월 26일 세르비아군이 스코페에 입성하고 세르비아 왕국이 북마케도니아 지방을 합병함으로서 스코페는 500여년 만에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다. 세르비아의 스코페 합병 이후 세르비아가 대다수의 터키인들을 추방하여 스코페는 300여년 만에 또 한번 중대한 인구 구성 변화를 맞이하고 북마케도니아인, 알바니아인이 시의 인구 대부분을 구성하게 된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설립되면서 스코페는 다시 한번 경제 중흥을 맞이하지만 제 2차 세계대전 와중에 유고슬라비아가 나치 독일의 침공을 받으면서 스코페에 살던 유대인들이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죽음을 맞게 되는 비극이 벌어진다. 그러나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유격대가 나치 독일을 몰아내면서 스코페는 나치로부터 해방되고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성립되면서 마케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가 된다.
유고슬라비아 시절이던 1963년 7월 26일 스코페에 또다시 '''규모 M 6.9, 최대진도 10(X)'''의 대규모 지진이 일어나면서 1000여명이 사망하고 시가지의 80 퍼센트가 완파되는 대참사가 일어난다. 이후 시가지가 현대적인 건축 양식으로 재건되면서 스코페는 일부 구시가지를 제외하고 예전의 모습을 거의 잃어버리게 된다.
1991년 9월 8일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유고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스코페는 신생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고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리스-마케도니아 분쟁에서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북마케도니아 정부에서 스코페에 동상을 대규모로 건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시 중심가에는 거대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세워져 있을 정도. 그러나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정부가 동상 건립에 열을 올리고 실제로 시가지 내에 동상이 지나치게 많다. 이 때문에 북마케도니아 사회 일각에서는 어려운 경제 상황에 정부가 쓸데 없는 일을 벌이고 있다고 비판하는 상황이다.
알바니아계인 마더 테레사의 고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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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케도니아어, 세르보크로아티아어: Скопје / Skopje (스코폐)
알바니아어: Shkupi (슈쿠피)
라틴어: Scupi (스쿠피)
동유럽 발칸 반도에 위치한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의 수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시절에도 마케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였으며 1991년 9월 8일 이후에는 신생 독립국의 수도로서 북마케도니아의 경제, 정치, 문화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인구는 50만이 넘으며 북마케도니아인이 인구의 2/3을, 알바니아인이 20%를 차지한다.
도시의 이름은 철자대로 쓰면 스코'''폐'''지만, 국립국어원에서는 스코'''페'''를 표준으로 정하고 있다.# 현재 마케도니아어의 정해진 표기법은 없지만, 다만 다른 슬라브어인 세르보크로아티아어#나 체코어#, 러시아어# 표기법을 보면 자음에 '예'가 결합될 경우에는 '예'가 아닌 '에'라고 적도록 되어 있는데, 'Скопје'를 '스코페'라고 적는 표기도 이를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국어에서도 '자음 + ㅖ'는 [자음 + ㅔ]로 발음되는 경우가 많고 이것이 허용 발음으로도 인정된다는 점을 반영한 듯.
2. 역사
사람이 산 흔적 자체는 BC 4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나 실질적인 스코페의 설립 시기는 기원전 4세기 '스쿠피'라는 도시명이 역사에 기록되면서부터이다. 로마 제국 시대를 거치면서 그리스인, 로마인이 모여 사는 국제 도시로 번성하기 시작하던 스코페는 395년 테오도시우스 대제 사망 이후 동로마 제국의 지방 도시로 편입되게 된다. 그러나 518년에 발생한 '''규모 M 7.5, 최대진도 12(XII)급''' 의 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완전 파괴되어버렸다. 그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에 의해 복구된다. 7세기 이후 슬라브족이 발칸 반도로 넘어오기 시작하면서 다른 발칸 반도 지역과 함께 스코페도 슬라브화되고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시의 인종적 구성의 뿌리가 된다. 그러나 슬라브화 이후 스코페는 여러 차례 불가리아 왕국, 세르비아 제국 등 인접 국가들의 침입을 받으면서 주인이 여러번 바뀌게 되는데 그중 주목할 만한 역사적 사실은 세르비아 제국의 건국자인 스테판 두샨이 1346년 이곳에서 대관식을 치르면서 수도로 정한 것이 있겠다. 그러나 세르비아 제국 수도로서의 그 영화도 잠시,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무섭게 세력을 뻗쳐나가며 동로마 제국을 위협하던 오스만 제국이 발칸 반도에 진출하면서 스코페도 1392년 오스만 제국의 수중에 떨어지게 된다.
오스만 제국 시대를 거치면서 스코페는 17세기 경제적으로 번영했지만 종교적으로는 정교회를 비롯한 기독교가 탄압을 받고 인구 구성 면에서도 기독교를 믿는 슬라브족 자리를 이슬람으로 개종한 보슈냐크인, 알바니아인, 터키인, 세파르드 유대인이 대신 채우게 된다. 이 시기 세워진 터키식 건축물들은 이후 스코페의 구시가를 이루게 된다. 1683년 빈에서의 패배 이후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스코페도 경제적으로 퇴락하게 되고 제국이 본격적으로 몰락의 길에 접어들게 된 19세기에 이르면 스코페를 비롯한 북마케도니아 지방에서도 불가리아인을 중심으로 슬라브 민족주의 열풍이 거세게 불게 된다. 이후 1908년 청년 투르크당의 봉기에 이어 1912년 발칸 전쟁이 일어나자 아직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 놓여있던 스코페도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개전 18일이 지난 1912년 10월 26일 세르비아군이 스코페에 입성하고 세르비아 왕국이 북마케도니아 지방을 합병함으로서 스코페는 500여년 만에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다. 세르비아의 스코페 합병 이후 세르비아가 대다수의 터키인들을 추방하여 스코페는 300여년 만에 또 한번 중대한 인구 구성 변화를 맞이하고 북마케도니아인, 알바니아인이 시의 인구 대부분을 구성하게 된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설립되면서 스코페는 다시 한번 경제 중흥을 맞이하지만 제 2차 세계대전 와중에 유고슬라비아가 나치 독일의 침공을 받으면서 스코페에 살던 유대인들이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죽음을 맞게 되는 비극이 벌어진다. 그러나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유격대가 나치 독일을 몰아내면서 스코페는 나치로부터 해방되고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성립되면서 마케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가 된다.
유고슬라비아 시절이던 1963년 7월 26일 스코페에 또다시 '''규모 M 6.9, 최대진도 10(X)'''의 대규모 지진이 일어나면서 1000여명이 사망하고 시가지의 80 퍼센트가 완파되는 대참사가 일어난다. 이후 시가지가 현대적인 건축 양식으로 재건되면서 스코페는 일부 구시가지를 제외하고 예전의 모습을 거의 잃어버리게 된다.
1991년 9월 8일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유고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스코페는 신생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고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3. 여담
그리스-마케도니아 분쟁에서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북마케도니아 정부에서 스코페에 동상을 대규모로 건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시 중심가에는 거대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세워져 있을 정도. 그러나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정부가 동상 건립에 열을 올리고 실제로 시가지 내에 동상이 지나치게 많다. 이 때문에 북마케도니아 사회 일각에서는 어려운 경제 상황에 정부가 쓸데 없는 일을 벌이고 있다고 비판하는 상황이다.
알바니아계인 마더 테레사의 고향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