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장(전한)

 

1. 소개
2. 생애
3. 사후



1. 소개


劉章
기원전 200~177
전한의 황족으로 고제 유방의 손자다. 유방의 서장자인 제나라 도혜왕(悼惠王) 유비(劉肥)의 차남으로, 제 애왕(哀王) 유양(劉襄)의 아우다.

2. 생애


기원전 186년, 제나라 왕인 형을 대신해서 동생 유흥거(劉興居)와 동시에 조정에 입조했다. 이 때 그는 주허후(朱虛侯)에, 유흥거는 동모후(東牟侯)에 봉해졌다. 그는 이 때 여후의 조카였던 여록(呂綠)의 딸을 아내를 맞이하지만 그는 여씨 일문의 전횡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유비는 살아생전 불미스러운 일로 여후에게 찍혀 목숨까지 위협받았었다.[1]
기원전 181년, 유장은 여후로부터 궁중 연회의 간사장에 임명되어 군법에 따라 진행을 지휘하게 되었다. 이 때 유장은 연회의 여흥으로 민요를 구실로 하여 여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씨 일문의 전횡을 성토하였으며, 또한 머지않아 보복하고 여씨 일족을 도륙낼 것이라는 내용의 노래를 불렀다. 또 중도에 연석에서 마음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한 여씨 일족 사람을 베어 죽이고 여후를 향해 '군법에 따라 이를 처형했다'고 당당하게 보고했다. 그러나 여후는 군법에 따라 옳은 일을 한 유장을 비난하지 못했다.[2] 유장은 이 때가 겨우 20세였으며 기개가 있는 사람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게 된다.
기원전 180년 여후가 사망하자 여씨 일족이 난을 일으킬 것을 직감하고, 형 유양에게 밀서를 보냈다. 군사를 이끌고 오면 자신과 흥거가 안에서 내응할테니 황제가 되라는 내용이었다. 이때 장안의 군사는 여산(呂産)과 여록(呂祿)이 가지고 있었는데, 주발·진평 등이 여록의 군사는 속임수를 써 충돌도 없이 넘겨받았지만 여산 쪽은 손을 쓰지 못해서 크게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에 유장은 정원에서 멍때리는(혹은 상황 파악을 못하고 성문 앞에서 서성이던) '''여산을 보자 그 틈을 노려 뒤치기해서 죽였다'''.[3] 여씨 일족을 주살하면서 매우 큰 공을 세운 셈.
본디 유장은 형 유양을 황제로 삼고 자신이 제나라(혹은 조나라) 왕이 되려 했다. 유양은 고제의 장남의 장남이었므로 황제로 옹립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을 진압한 대신들은 유양의 외가인 사씨 일족이 포악하고 장인 사균(駟鈞) 또한 야심가라 하여(즉 그들이 제2의 여씨 일족이 될까봐 두려워) 고제의 넷째 아들 대왕(代王) 유항(劉恆)을 불러 문제로 추대했다. 문제는 기원전 178년에 유장의 아버지 유비가 노원공주에게 헌상했던 성양군을 유장에게 주어 왕으로 봉했다. 유장은 논공행상이 내심 불만이었지만 영지에 부임했다. 그러나 바로 이듬해에 24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시호는 경왕(景王)이며, 그의 아들 공왕(共王) 유희(劉喜)가 성양국을 계승한다.

3. 사후


유장이 죽은 뒤 그의 영토였던 성양 일대에 그를 신으로 모시는 사당이 많이 건립되었다. 그 후 오랫동안 산동 지방에는 신앙이 많이 퍼졌다. 나라 말기 적미군은 이 신앙을 믿는 집단이 많았다. 그래서 유장의 후예 중에서 제비뽑기를 해서 최종적으로 양치기였던 유분자(劉盆子)를 황제로 옹립했다.[4] 그 후 후한 말기에도 신앙은 계속되었지만 제남국상으로 있던 조조가 이 신앙이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보고 사당을 모두 철거하고 제사를 금지했다.
훗날 삼국 시대 때 원소의 명으로 진림이 쓴 조조 토벌 격문에 나오는 '주허후'가 바로 이 사람이다.


[1] 유비가 조정에 입조해서 혜제를 알현했고 혜제는 연회를 열었다. 이 때 혜제는 자신의 형이라고 유비에게 상석을 양보하려고 했는데 이걸 여후가 보고 분노해서 유비를 독살하려고 했다. 그러나 혜제가 막음으로써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유비는 심복의 제안에 따라 자신의 봉지 중에서 성양군을 여후의 딸 노원공주의 봉지로 헌납했다. 이에 여후는 기꺼워했고 유비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2] 황제가 끼고 있던 조 은왕(趙隱王) 여의(如意)도 기어이 죽였던 여후인데 고작 그런 명분 때문에 못 죽였을 리는 없다. 유장의 뒤에 있는 제왕 유양의 군사가 두려워서 굴복한 것이라고 봐야 맞다. 당장 남월왕 조타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되려 칭제에 영토 침탈 등 온갖 굴욕을 당하고도 방법이 없었던 와중이기도 했고.[3] 화장실에 숨어있는 걸 끝까지 쫓아가서 죽였다고 한다. [4] 그 후 유분자는 적미군이 패배한 뒤에 광무제에게 항복했다. 광무제는 유분자를 보호했고 이 후 실명한 그에게 평생 녹봉을 주고 영지를 주어 편안하게 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