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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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한의 제5대 황제. 시호는 문황제(文皇帝). 휘는 항(恆). 한고조 유방의 넷째 아들이자 혜제의 이복동생이다. 어머니는 고황후 박씨.[1] 정실부인은 문제가 즉위하기 전에 사망했는데, 어째서인지 그녀를 황후로 추존하지 않았다. 문제의 황후로 유명한 효문황후 두씨는 원래 후궁이었는데 후에 정실부인이 된 경우다.
대나라 왕을 자칭한 진희의 난이 진압된 후 대나라 왕에 봉해졌다. 나중에 여후가 자결한 동생 조 공왕(趙共王) 유회(劉恢)를 대신해 조나라 왕으로 삼으려 했지만 거절했다.[2] 여후가 죽자 여씨 일가를 몰아내고 중신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 원래 고조의 서장자인 제도혜왕 유비의 장자 제왕(齊王) 유양(劉襄)이 유력한 계승자였으나, 주발과 진평 및 종실들은 외가에 별 문제가 없고, 사람됨이 모나지 않았던 대왕을 선택하였다. 문제는 이후 유비가 여후의 딸 노원공주에게 내어준 성양군을 유양의 동생인 주허후(朱虛侯) 유장에게 넘겨주고 왕에 봉하는 것으로 보상을 끝낸다.
2. 문경지치: 피폐해진 나라를 일으키다.
문제는 당시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초한전쟁과 현재 진행형이던 흉노와의 대립 등으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한나라를 복구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사실 한나라의 번영은 문제 없이 설명되기 힘들 정도로 문제의 공이 크다.''' 특히 문제는 철저할 정도로 검소하고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였으며, 나라의 경제력을 발전시키고 힘을 키웠다. 문제가 실시한 전반적인 정책이 백성들에게 고단한 사업을 자제하고, 도가적인 '무위지치'의 정치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3] 흉노와는 비교적 원만하게 지내면서 수비 위주의 전술로 나가 굳이 큰 전쟁을 벌이지 않았고, 그러는 동안 아들인 경제와 더불어 이른바 '''문경지치'''라 불리우는 정치로 한나라의 힘을 크게 키웠다. 국제 관계에서 저자세로 비칠지 몰라도 싸움을 피하는 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셈.
본인 스스로도 대단히 검소하였고, 큰 건물을 지으려다 그리하려면 황금이 많이 쓰여진다는 것을 알게 되자 포기하였다. 옷도 장식이 없는 검은색 옷을 주로 입었으며 자신의 부인들에게도 사치를 줄일 것을 부탁하였다. 봄이 되면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백성들에게 농업과 누에치기에 힘쓸 것을 부탁하였고, 또한 각 관청에 명해 백성들이 농사지을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지시하고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씨앗과 식량을 대여해주었다. 당시에는 혁신적이게도 국가나 왕의 재산을 필요에 따라 개방하였으며, 상공업을 발달시켜 경제 발전으로 세금이 많이 걷히자 조세를 유방이 정한 15분의 1에서 30분의 1로 절반이나 줄였다.
3. 평가
12월에 조서를 내렸다.
"법이라는 것은 다스리는 올바른 기준이다. 이제 법을 범하여 이미 판결이 나고서 죄 없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까지 이에 연좌시켜서 처자를 잡아들이기에 이르니 짐은 아예 채택하지 않겠다. 그 자식을 잡아들이고, 여러 사람이 연좌되는 율령을 없앤다."
《자치통감》 13권
경제와 더불어 한나라의 국력을 흉노의 위에 올려놓은 장본인으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이자 성군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과서 같은 책에서 언급되는 손자인 무제에 비해 적은 편인데, 이는 문제가 극단적으로 대외사업을 자제하여 후세에 자랑할만한 '''뭔가 크고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지 못한 탓이 크다. 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러한 큰 대외사업은 결국 '''백성들만 죽어나가는 일'''이다. 무제가 멋있고 폼나는 흉노와의 전쟁에 장장 40년간 매달려, 나중에는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수준까지 이어져나가 엄청난 수준의 물자와 인적자원을 소비한 것에 비하면 크게 대조된다.[4]정월, 담당 관원들이 진언해 말했다.
"태자를 일찍 세우는 것은 종묘를 받들어 모시려는 까닭입니다. 청컨대 태자를 세우십시오."
(중략)
황제가 대답했다.
"초왕은 [짐의] 막내 작은아버지로 연세가 높아 천하의 이치를 보고 들은 게 많으며, 국가의 대체적 강령에도 밝소. 또한 오왕은 [짐의] 형으로 은혜롭고 어질며 덕스러운 것을 좋아하오. 회남왕은 [짐의] 동생으로 덕을 겸비해 짐을 보좌하고 있소. '''이들이 어찌 미리 세운 후계자가 아니겠소!''' 제후왕, 종실, 형제 및 공신 중에 현명한 데다 덕과 의리를 갖춘 자가 많으니, 만약 덕을 갖춘 자를 선발해 짐이 끝마칠 수 없는 일을 돕게 한다면, 이는 사직의 은총이며 천하의 복이라 할 수 있소. 지금 그들을 선발해 등용하지 않고 기어코 내 아들이어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짐이 어질고 덕 있는 자들을 잊고서 제 자식에게만 마음을 두고 천하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오. 짐은 정말 이렇게 하고 싶지 않소."
대체로 듣건대 유우씨(有虞氏) 때에는 죄를 지으면 의관에 그림을 그리고 특이한 복장을 입게 해 치욕으로 삼게 했을 뿐인데도 백성들은 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들었다. 무슨 까닭에서 그랬겠는가? 지극하게 잘 다스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법은 육형(肉形)이 셋이나 있어도 간악함이 멈추지 않으니, 그 잘못은 어디에 있는가? 짐의 덕이 각박하고 밝지 못해서가 아니겠는가? 짐은 참으로 스스로 부끄럽다. 교화의 방법이 순수하지 못해 어리석은 백성들이 죄로 빠져드는구나. 『시』에 말하기를 "다정하고 자상한 군자여, 백성의 부모로다."라고 했다. 지금 사람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교화를 베풀지도 않고 형벌을 먼저 가하니, 간혹 잘못을 고쳐 선을 실천하려 해도 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짐은 이 점을 참으로 가련하게 생각하노라. 무릇 형벌이란 사지를 잘라 버리고 피부와 근육을 도려내 죽을 때까지 고통이 그치지 않으니 얼마나 대단히 아프고 괴로우면서도 부덕한 것인가. 어찌 이것이 백성의 부모 된 자의 뜻에 걸맞은 것이겠는가. 육형을 없애도록 하라!
《사기》 효문본기
그렇다고 군사 문제에 깜깜하기만 한 것도 아니라서, 흉노와 전쟁을 벌일 때면 적을 쫓아내는 건 허락하되 역으로 쳐들어가 전쟁을 확대시키는 것은 막았는데, 이 때문에 여러 장군들은 공을 세울 기회가 없다고 아쉬워하기도 했으나 , 세류영이란 말을 만들어내기도 한 장본인인 장군 주아부를 크게 보았고, 그때는 파릇파릇한 애송이이던 이광을 칭찬하여 재능을 발휘하게 하였다.
최후의 유언도 검소함이 그대로 드러나보이는 말이다. "나의 장례는 소박하게 치르라. 묘지를 크게 만들지 마라. 금은보화를 함께 매장하지 마라.[5] 장례기간을 너무 길게 하지 마라. 전국의 백성들과 관리들의 복상은 단 3일만 허락한다. 간소하게 처리하라."
다만 이러한 한문제도 비판이 아예 없는건 아니다. 문제의 언행이 명성을 얻기 위한 가식이라는 주장도 있고,[6] 경제 복구 와중 호족과 대상인 세력들이 불법과 탈법을 통해 자라나는 것에 대해 정책적인 감시와 제재를 하지 않은 채 너무 무위지치적 태도를 보인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그리고 말년에는 뱃사공 출신인 등통이라는 자를 총애해 등통이 굶어죽을 운명이란 점쟁이의 말을 듣고 절대 굶어죽지 않게 하겠다며 등통에게 화폐 주조권을 사사로이 내려주는 실책도 범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주조권은 훗날 경제가 몰수해갔고 등통은 그 예언대로 감금되어 굶어죽었다고 한다.(...)[7]
결론적으로 한문제는 '''모든 군주들이 꿈꾸는 태평성대를 실현한 인물'''로 지금도 평가받고 있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말로 과장은 좀 있겠지만 이시기 백성들은 모두가 부유해져서 땅바닥에 돈이 떨어져도 줍지 않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왕조 초기의 기틀을 다지고 태평성세를 실현했다는 점에서 후대 청나라의 강희제와 비견되기도 한다. [8]
4. 여담
서경잡기에 따르면, 한문제는 모두 아홉필의 준마를 얻었는데, 모두 세상에서 제일가는 명마들이었다고 한다. 말의 이름은 각각 부운(浮雲), 적전(赤電), 절군(絶群), 일표(逸驃), 자연(紫燕), 녹이총(錄離驄), 용자(龍子), 인구(鱗驅), 절진(絶塵)이었다. 이 아홉 필의 말들을 문제는 구일(九逸)이라고 불렀고 말을 모는 사람은 왕량(王良)이라고 불렀다.
황제라는 직위에 있음에도 동생만을 걱정했던 평범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문제에게는 회남왕 유장이라는 이복동생이 있었는데 유장은 자신이 문제와 친밀한 황족임을 바탕으로 교만해져 황실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문제는 유장이 심이기[9] 를 죽였음에도 벌하지 않았으나 유장은 오히려 더욱 교만해지더니 급기야 반란을 획책하다가 발각되었다. 문제는 사형에 해당된다는 문초 결과에도 불구하고 유장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봉국을 빼앗고 촉군으로 유배시켰다. 유장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도중에 굶어 죽었으며 뒤늦게야 죽음이 보고되었고 문제는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며 동생인 유장의 시신을 껴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의 아버지가 창업군주이고 그의 아들이 본인이 쌓은 기반을 통해 업적을 쌓은 훌륭한 명군이며 그의 손자가 무리한 정복 전쟁으로 국력을 낭비해서 전성기를 파괴한 암군이라서 주성왕이랑 비슷하다고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