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전한)

 

1. 전한의 인물 1
1.1. 소개
1.2. 생애
2. 전한의 인물 2


1. 전한의 인물 1




'''전한의 대왕(代王)'''
유중

'''유비'''

오왕 책봉
'''전한의 오왕(吳王)'''
신규 책봉

'''유비'''

작위 폐지
劉濞(현대 중국어: 류피(liúpì), 한대 중국어: 르우페이스[lɨu.pʰeis])
기원전 216년 ~ 기원전 154년

1.1. 소개


전한의 황족.
(B.C.215 ~ B.C.154)
오왕 유비(吳王劉濞)가 바로 이 사람으로, 오늘날에는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킨 사람으로 유명하다.
한고조의 조카로 초한쟁패기 당시에 공을 세워 훗날 오나라의 제후왕에 봉해졌다. 이후 소금과 구리가 생산되는 오나라 땅의 경제적 이점을 살려 당시에 가장 강력한 제후왕이자 황실의 원로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한경제조조의 봉토삭감 정책에 반발하여 다른 제후왕들과 더불어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켰다가 죽었다.

1.2. 생애


한고제 유방의 작은형 유중의 아들, 즉 유방의 조카이다. 아버지 유중은 대왕(代王)으로 봉해졌으나 흉노의 침입을 받고 낙양으로 달아나 그 벌로 합양후로 격하됐다. 유비는 아버지의 실책을 만회하기 위하여 여러 곳에서 용맹하게 싸운 끝에 장사문왕[1] 오신의 추천을 받고 오왕에 책봉되어 약 40여 년 동안 장기 재위했다. 이때 유방이 유비에게 '네가 반란의 상이라더라?'라고 하더니, 난리가 나는건 50년 뒤라고 했으니 네가 그럴 리는 없을 거라며 등을 토닥여줬고, 유비도 결코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하는데, 오초칠국의 난의 원인이 자신의 뻘짓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감추고 유비가 원래 그럴 놈이었다고 몰아가기 위해 한경제가 지어낸 일화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한문제 때 당시 유비의 세자 유현이 장안에 입궁하여 문제의 태자였던 유계와 술을 마시고 육박을 두며 놀았다. 그런데 이때 유계가 한 수만 물려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유현은 계속 거절하였고 이에 울컥한 유계는 홧김에 육박판을 내던졌는데 그게 '''하필이면 정통으로 머리에 맞으면서''' 유현이 비명횡사하고 만다. 물론 유계 역시 죽일 의도가 전혀 없었던지라 일이 이리되자 기겁하며 사과를 했고 몹시 미안해했지만 이때부터 유비는 병을 핑계대며 입궁하지 않고 조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래도 문제는 아들의 잘못이었던 만큼 화를 내거나 벌을 주지 않고, 대인배스럽게 오히려 사촌형 유비가 나이가 들었다며 궤장을 하사했다.[2]
사실 오왕 유비가 빡친 데는 결정적인 한황실의 실책이 있었는데, 사망한 세자 유현의 시신을 장례도 안 치르고 관에 넣어서 유비한테 보내버린 것이었다. 사실 생판 남이었다면 고향에 시신을 보내주는 것은 엄청난 예우였지만 세자 유현은 한문제의 5촌 조카로 엄연히 황족이었다. 따라서 엄밀히 따지자면 사망한 장소이자, 본가(?)가 위치한 장안에서 장례를 치러줬어도 되는 것이었다. 아들이 5촌 조카한테 살해당한 것도 슬프고, 하필이면 살해범인 5촌 조카가 황태자라서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미쳐버릴 오왕 유비는 자신의 아들이 같은 일족 취급조차 받지 못했다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 수도 있다. 결국 이런 실망감과 상실감에 오왕 유비는 한황실과 거리를 두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문제가 죽고 원수였던 태자 유계가 황제(한경제)로 즉위했다. 안그래도 아들의 원수였기에 평소부터 경제를 좋게 볼 리가 없었는데, 경제가 '''조조''' 를 앞세워 제후들로부터 땅을 빼앗으려 하자 다른 제후국들과 손을 잡고 난을 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오초칠국의 난. 그러나 휘하 장군들의 말을 듣지 않아서 유리한 상황에서도 병력을 말아먹고 대패해 동월로 도망쳤으나, 동월은 오히려 그를 죽이고 목을 베어 한나라로 보냈고 그의 태자 유구는 민월로 도망쳤다.

2. 전한의 인물 2



'''전한의 제왕(齊王)'''
(신규 책봉)

'''유비'''

유양(劉襄)
劉肥(현대 중국어: 류페이(liúfèi), 한대 중국어: 르우부이[lɨu.bʉi])
? ~ 기원전 189
전한의 황족으로 고제 유방의 서장남이다. 유방이 여후와 만나기 전에 교제하던 조씨(曹氏)의 아들[3]이며, 위에 언급된 유비와는 사촌지간이다.
제왕(齊王)에 봉해졌는데 유비가 입궁하여 혜제를 뵐 때 혜제가 형이라는 이유로 상석을 양보해주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 주었다. 이걸 보고 빡친 여후는 유비를 독살하려고 유비의 앞에 짐주를 따른 뒤 유비에게 원샷하면서 자신의 만수무강을 빌라고 했는데, 이를 눈치챈 혜제가 갑자기 일어나서 굳이 그 술잔을 들었다. 기겁한 여후는 바로 달려들어 손으로 잔을 쳐서 엎어버렸고, 그게 짐주였다는 걸 알아챈 유비는 장안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심복과 의논하여 성양군을 여후의 딸 노원공주에게 영지로 주었다. 다행히 여후가 기뻐하며 유비에 대한 미움을 거두었다. 군 하나와 목숨을 바꾼 셈이다.
여후보다 먼저 죽어서 도혜왕(悼惠王)이란 시호를 받았고, 장남 애왕(哀王) 유양이 제나라를 계승했다. 여후가 죽자 유양은 동생인 유장 등과 함께 난을 일으켜 여씨 일족을 제거하고 고제의 넷째 아들 유항(劉恆)을 새 황제로 세웠다. 사실 유양은 고제의 장남의 장남이었므로 황제 후보에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리긴 했는데, 그의 외가인 사씨(駟氏)의 위세가 커 제2의 여씨 정권이 탄생할 것이라는 이유로 기각되고 다른 인물이 황제가 되었다(유양과 유장은 현실을 조용히 받아들였지만, 내심 원통했던 건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사망한다).[4]
그다지 오래 살았다고 하기 어렵지만, 아들을 무려 13명이나 두었다. 그러나 대부분 후손을 오래 전하지는 못했다. 장남 유양의 혈통은 아들 제문왕(齊文王) 유칙(劉則)이 후사 없이 죽어 끝나고, 3남인 제북왕(濟北王) 유흥거(劉興居)가 기원전 178년의 모반으로 망했으며, 무려 일곱 아들의 집안이 오초칠국의 난에 연루돼 아작났다. 그리고 유칙 대신 제왕이 된 8남 효왕(孝王) 유장려(劉將閭)는 난에 가담하려다가 후회하고 음독 자살한다. 이리하여 아들 13명 중 9명의 후손이 일찍 폐문됐음에도, 열째인 치천의왕(菑川懿王) 유지(劉志)와 유장의 아들인 성양공왕(城陽共王) 유희(劉喜)는 아들을 14명이나 두었으며 전한이 끝날 때까지 왕위를 후손에게 전했다. 유장려에게도 아들이 12명이나 있었는데, 장남은 일찍 절손되었으나 10남인 모평공후(牟平共侯) 유설(劉渫)의 후손으로 유총(劉寵)삼국지에도 나오는 조카 유대(劉岱)·유요(劉繇) 형제가 있다.


[1] 구 형산왕.[2] 안석과 지팡이를 말하며 황제나 왕이 나이 많은 신하에게 내리는 최고의 예우다. 여기서 안석은 앉아서 정사를 돌볼 수 있도록 만든 편안한 의자를 말한다.[3] 약 100년 뒤 위청의 부모들과 곽거병의 부모들도 이렇게 아이를 가지고도 결혼하지 않고 다른 남자 여자 만나서 잘 산다.[4] 이 과정에는 유양의 업보도 좀 있는데, 거병하는 과정에서 이웃 제후인 낭야왕(琅邪王) 유택(劉澤)을 속여서 억류하고 낭야의 군대를 뺏은 것. 낭야는 원래 제나라의 영토였는데, 여후가 여씨들을 왕으로 세우는 데 찬동한 유택에게 준 것이었다. 유택은 유양에게 '나도 유씨인데 당신을 방해하겠는가? 나를 장안으로 보내주면 당신을 황제로 추대하겠다'고 해서 풀려났으나 장안에 가서는 유양이 황제가 되지 못하도록 뒷공작을 펼쳤다(…). 나중에 문제는 낭야는 제나라에 도로 넘겨주고 유택은 연왕(燕王)으로 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