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타(남월)

 


'''남월의 역대 군주'''
구낙 1대 안양왕 촉반

'''초대 무황제 조타'''

2대 문황제 조말
[image]
'''시호'''
무왕(武王), 무제(武帝)[1]
''''''
조(趙)
''''''
타(佗)
'''베트남식 이름'''
찌에우 다(Triệu Đà)
'''생몰 년도'''
기원전 260(?)[2]년 ~ 기원전 139년
'''재위 년도'''
기원전 207년 ~ 기원전 139년
1. 개요
2. 생애
3. 평가


1. 개요


남월의 초대 군주. 시호는 무왕(武王). 위타(尉佗)라는 이칭이 있다. 본래는 진나라의 장군으로서 현재 중국 남부 지방과 베트남 북부 지방을 원정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러나 모국인 진나라가 망하자 베트남 지역의 구낙을 정리하고 아예 왕국을 세웠다. 100세 전후로 장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체로 한국사위만과 비슷하게 원래는 중국 출신이지만[3] 토착민과 연합하여 국가를 수립, 각각 베트남사와 한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위만은 국가를 세운 것이 아니라 빼앗은 것에 가깝지만. 여담으로 후한 말기에 활약한 촉나라 장수 조운(趙雲)과 같은 지방인 상산군 진정현 출신이다.

2. 생애


진나라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세력을 넓혔는데, 광둥(廣東)과 광시(廣西) 지방으로 진출하여 진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이 때 이 곳에 파견된 인물이 진나라 장수 남해군위(南海郡尉) 임오(任囂)와 그 부관인 용천현령(龍川縣令) 조타(趙佗)였다. 그러나 진시황이 죽고, 그 뒤를 이은 이세황제의 폭정으로 인해서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임오와 조타는 진나라로 부터 독립을 꾀하였다. 도중에 병을 얻은 임오는 임종하기 직전에 조타를 불러서 유언을 남기고 남해군위의 직무를 대행하는 조서를 주었다. 임오가 얼마 뒤에 사망하자, 조타는 곧바로 횡포(橫浦), 양산(陽山), 황계관(湟谿關)에서 격문을 돌렸고, 진나라가 임명한 관리들을 오지 못하게 하였다. 조타는 계림군과 상군을 비롯한 남방 3군을 통합해서 남월왕으로 칭하였다. 비로소 남월이 건국되었다.
참고로 (越)이라는 단어는 당시 중국 남쪽의 월족 혹은 월나라에서 따온 것이다. 당시에 중국 남부 해안 지방의 민족을 중국에서는 주로 월이라고 불렀다. 월나라 항목 참조. 베트남의 역사서에 의하면 조타는 현지인과 같이 상투를 틀고 있었다고 한다.[4]
기원전 206년, 조타가 남월을 건국하여 기틀을 잡고 있을 때 중원에는 유방(劉邦)에 의해서 전한(前漢)이 건국되었다.
기원전 196년, 한고조 유방은 육가(陸賈)를 남월로 파견하여 조타를 남월왕(南越王)으로 책봉하고 사실상 독립을 인정해주었다.[5] 그런데 이때 조타가 장난끼가 동했는지 육가에게 한신, 조참, 소하 그리고 유방과 자신을 비교하며 어떻냐고 물었는데 앞의 세 사람 때는 조타가 낫다고 말해주던 육가가 유방이 나오니 급정색해서 당신이 어떻게 비교가 되겠냐고 쏘아붙였다. 이에 조타는 허허 웃으면서 "내가 중원에서 안 살아서 이 정도인 거지 초한대전에 끼었으면 유방보다 못했을라고"라고 받아친 뒤 아는 거 많고 말빨 좋은 육가와 술친구가 되어 몇 달간 수다 떨며 진탕 마셨다고 한다. 왠지 역이기와 유방을 연상시키는 일화. 육가가 돌아갈 땐 "남월엔 순 무식한 녀석들 뿐이었는데 선생이 계실 땐 늘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소.'라면서 2천 금이나 되는 재물도 주어서 혜제 사후에 육가는 이것으로 떵떵거리며 살았다.
한동안은 별 일 없이 지내다가, 고황후(高皇后) 5년인 기원전 182년 여후가 남월과의 철기 교역을 금지하면서 한나라와 남월은 대립관계에 들어갔고, 조타는 이를 두고 장사국의 음모라 주장하면서 스스로 무제(武帝)라 칭하고 장사국을 수차례 약탈했다. 몇년이 지나도록 중앙의 대처가 미비하자 기원전 180년부터 조타의 공격은 아예 인근 지역에 대한 침략 전쟁으로 발전하면서 더욱 과감해졌고, 그제서야 여후가 파견한 한나라 군대는 습기와 전염병 때문에 싸움 한번 해보지 못했다. 이 때 조타는 베트남 북부 지역에 위치한 국가인 어우락(甌駱)을 정복했다.
기원전 179년, 여후가 사망하자 한나라 측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후 문제가 황제로 즉위하였고, 한나라 내부를 안정시키면서 남월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이 황제로 즉위한 사실을 알렸다. 시무 등의 장수는 남월과 동이에 대한 정벌을 주장했으나, 문제는 '''"그대들은 날 세운 게 부끄럽지 않은 모양이지만''' 짐은 황제로서 제대로 정치를 하지 못할까봐 늘 두렵소."라는 왠지 의미심장한 말로 물리치고는 남월과 다시 화해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조타의 부모 무덤이 진정(眞定)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수묘인을 두었고, 매년 제사를 지내면서 조타의 사촌형제들에게 관직을 주는 등 신경쓰는 것을 조타에게 보여주었다.
문제는 육가를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삼아서 남월로 사신을 보내, 조타가 자립하여 멋대로 황제로 칭하고, 한 번도 천자에게 사신을 보내지 않는 것을 꾸짖으라고 하였다. 그렇게 육가가 남월에 도착하자, 친분이 있던 조타는 천자에게 상서를 올려서 사죄를 청하는 행동을 보이는데, 앞으로는 한나라의 번신(藩臣)이 되어서 천자에게 꾸준히 조공할 것을 다짐하였다고 한다. 이에 육가는 장안으로 돌아가 문제에게 이 일을 보고했고, 문제가 크게 기뻐했다.
경제가 재위할 때에 조타는 봄과 가을에 두차례에 걸쳐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황제를 알현할 때에 신(臣)이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조타는 한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천자를 알현할 때만 왕으로 칭했지, 남월 내부에서는 황제를 칭하였다. 즉, 외왕내제 체제였다.
기원전 139년, 조타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서 손자 조말이 왕위를 이었다. 베트남의 사서인 《대월사기전서》에서는 사망할 당시에 그의 나이가 121세나 되었다고 전한다.[6]

3. 평가


현 베트남의 국명이 남월에서 유래된 만큼, 베트남에선 전통적으로 위인으로 여겨지는 인물로 조타를 기리는 사당이 많이 세워졌고 현대 들어와서도 역사적인 인물로 평가되지만, 한편으로는 중국계 인물로서 베트남인들을 복속시켰다는 점 때문에, 베트남 내에서는 명군인지 침략자인지를 놓고 베트남 현지 역사학자들이나 역덕들 사이에서 논쟁거리가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7] 하지만 황제를 칭했다는 점이나 현지세력들을 추스리는데 많은 힘을 기울였던 것을 보면, 남월을 한나라와는 별개의 독자성을 추구했던 국가로 만들려고 했던 점은 사실로 보이고, 역대 베트남 왕조들도 이러한 조타를 본받았기 때문에 어찌됐든 베트남에서 조타가 갖는 영향력이 크다는 점만큼은 부정하기 어려워보인다.[8] 또한 중국내에서 동북공정과 비슷하게 조타의 남월을 중국의 지방정부라고 칭하는 사이비 사학가들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적인 차원에서 조타를 마냥 폄하하기도 어렵다. 다만 광둥성에서도 걸물은 걸물이라는 평을 들으며 사당이 많이 세워져있기는 하다.
[1] 베트남어로는 각각 부 부옹(Vũ Vương), 부 데(Vũ Đế).[2] 사망시 121세였다는 '대월사기전서'의 기록에서 역산.[3] 다만 위만은 '조선 사람'이었다는 설도 있다. [4] 마찬가지로 위만조선의 건국자 위만도 조선으로 넘어갈 때 조선인처럼 상투를 틀고 있었다고 전한다.[5] 물론 이때도 조타가 사신에 대한 예의를 갖추지 않자 육가가 으름장을 놓기도 했는데, 자세한 건 항목 참조.[6] 진시황이 사망한 기원전 210년 이전부터 관직을 지내온 것을 보면, 진시황 사망 당시 조타의 나이가 20세 전후였다고 하더라도 최소 90세 이상은 살았던 것이 된다. 정말로 121세까지 살았느냐 하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매우 장수한 셈이다.[7] 베트남어로 Triệu Đà라고 검색해보면 조타가 베트남의 독자성을 추구한 명군이냐 아니면 침략자냐라는 명제가 메인에 올라올 정도다.[8] 유럽으로 치면 러시아 류리크 왕조의 시조인 류리크와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류리크는 비록 북게르만계 이민족인 바랴그인이었지만 그의 동슬라브족 지배는 훗날 동슬라브계 강대국인 러시아가 탄생하는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