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제(전한)

 


<colbgcolor=#a11><colcolor=#ece5b6> '''전한 초대 황제'''
'''太祖 高皇帝 |''' '''태조 고황제'''

'''묘호'''
'''태조(太祖)'''
'''시호'''
고황제(高皇帝)
'''출생'''
기원전 247년[1]
패현(沛縣) 풍읍(豊邑) 중양리(中陽里)
'''사망'''
기원전 195년 5월 28일
전한 장안(長安) 장락궁(長樂宮)
'''능묘'''
장릉(長陵)
'''국적'''
초(楚) → 진(秦) → 후초(後楚) → 전한(前漢)
'''재위'''
'''한나라 국왕'''
기원전 206년 2월[2] ~ 기원전 202년 2월 23일[3] (4년)
'''한나라의 황제'''
기원전 202년 2월 23일 ~ 기원전 195년 5월 28일[4]
음력 기원전 202년 2월 3일 ~ 기원전 195년 4월 25일
7년 3개월 5일 / 2,65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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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劉)
''''''
방(邦)
''''''
계(季)
'''부모'''
부친 유태공, 모친 소령황후
'''황후'''
고황후 여씨

1. 개요
2. 출생과 외모
4. 가정
5. 평가
5.1. 군사적 능력
5.2. 정치적 능력
5.3. 용인술
5.4. 인간적인 면모
5.5. 총평
6. 기타
8.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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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통일왕조한나라의 초대 황제. 이름은 유방()이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평민 출신 황제로, 기존의 지배층이었던 제후나 귀족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피지배층에서 황제라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진(秦)나라 말기의 대혼란에서 세력을 일으켜, 초한대전에서 압도적인 최대의 호적수이자 숙적이던 항우(項羽)를 이기고 승리를 거두어 천하를 차지하였다.
이후 각지의 반란을 평정하고 이성왕(異姓王)들을 숙청하여 대제국 한나라의 기틀을 닦았다. '''특히 한(漢)족, 하나의 중국과 같은 오늘날까지 엄존하고 있는 중국의 국가적 문화 정체성을 만들어낸 왕조의 창시자로서 중국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황제는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했으나 완벽히 하나로 묶어내는 것에는 실패했고, 한고제는 이를 이뤄냈다. 또한 이후 중국에 분열기가 찾아왔어도 그때마다 통일 국가의 대의명분을 제공해줬다. 따라서 오늘날 중국, 혹은 한족의 실질적 시조(중시조) 정도 되는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헌원황제로 대표되는 삼황오제가 있고 역사적 실증으로만 따져도 상나라 등 한고제보다 까마득한 윗대가 있지만, 후세에 통일된 중국과 중화문명의 큰 기반을 제공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중국인들이 자신들을 '''한족(漢族)'''이라고 칭하는 것만 봐도 충분히 '중시조'라 부를 만한 사람이다.
워낙 파격적인 행동이 많고 질기게 살아남고 버틴 타입이라 인물에 대한 호불호가 꽤 극단적으로 갈리는 탓에 이를 배경으로 하는 초한지 소설 등에서는 라이벌인 항우나 부하인 한신 등에 비해 인기가 아주 높은 편은 아니지만, 최후의 승자로서 가지는 역사적 입지와 비중은 가장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5]
주로 한고조(漢高祖)라는 표현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정식 표현은 아니다. 유방의 묘호는 '''태조'''이며 시호는 고황제다. 다만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 고조라는 표현이 나와서 그것이 유방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칭호로 굳어진 것. 정확히 말하자면 고조는 시호인 고황제의 존칭인 것이다.

2. 출생과 외모


유방은 초나라 출신으로서 패현(沛縣) 풍읍(豊邑)[6] 중양리(中陽里)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은 원래는 송나라 땅이었으나 유방이 태어나기 3~40여년 전인 기원전 286년 송나라가 망하면서 초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부친은 태공(太公)이었고 어머니는 유온(劉媼)이었는데 태공이나 온은 남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호칭에 지나지 않았다고 사기집해나 사기색은 등의 주석서에서 일관되게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유태공과 유온을 현대어로 풀이하자면 그저 유씨댁 어르신, 유씨댁 안주인 정도의 의미로 유방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진짜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찾을 수가 없다.
사실 이는 부모뿐만 아니라 유방 본인도 마찬가지인데, 사기나 한서(漢書)에서는 아예 유방(劉邦)이라는 이름을 '''언급하는 대목이 없다'''. 그저 성이 유씨이고 자(字)가 계(季)라고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유방이라는 이름이 언급되는 것은 후한[7]의 학자 순열(荀悅)의 한기(漢紀)에서부터인데, 후세 학자들이 《사기》, 《한서》에 주석하면서 한 인용으로, 발굴된 유물 자료들로써 대체로 옳다고 간주한다. 물론 다른 이야기를 하는 설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관점으로는 유방이 어렸을 당시에는 유계라는 호칭으로 통하다가, 즉위한 후 유방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유방 본인에게 '방' 이라는 이름은 일생 동안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본인으로서도 착 감기지 않는 이름이었을 것이라는 소리.
그런데 유방의 형제를 살펴보면 이 이름이 형제 간의 서열, 순서를 간편하게 나타내는 백중숙계(伯仲叔季)를 붙여서 지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유방의 형들로 유백(劉伯)과 유중(劉仲)이 언급되는것을 보면 '유계' 라는 호칭이 어째서 생겼는지는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8] 이렇게 보면 유방은 본래 개별적인 이름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고, 그저 '유씨네 막내'정도로 통용될 수 있는 유계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형 유중은 유희(劉喜)라는 휘가 알려져 있고, 동생 유교(劉交)는 아예 자인 유(游)로는 거의 기록되지 않아 모든 사람의 휘가 불명확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백중숙계가 대충 지은 이름 같아 보이지만 그게 정식 자나 이름인 예가 꽤 있어 그 유계라는 이름이 개별적인 이름일 가능성은 다분하다. 더욱이 유교가 유학자로, 특히 시경에 능한 인물이었음을 감안하면 집안 사람들 중에 이름이 아예 없는 인물이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기도 하고.[9]
유방의 출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유방의 어머니인 유온이 연못가 근처에서 쉬다가 문득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神)을 만났다고 한다. 그때 뇌성벽력이 치고 하늘이 시커멓게 변했는데, 근처에 있던 태공이 그 모습을 보자 유온의 배 위쪽에 교룡(蛟龍)이 떠있었고, 유온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 사람이 유방이었다.
유방은 외모에 대해서도 융준용안(隆準龍眼)[10], 용안미수염(容顔美鬚髥)과 같은 식으로 용과 연결이 자주 되는 편인데 이러한 과정에서 나온 전설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유방의 외모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 대로 콧날이 높고 이마는 넒어 용의 얼굴을 닮았으며, 수염이 아주 그럴 듯해서 멋있었다고 한다. 또한 왼쪽 넓적다리에는 72개의 반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많은 반점의 숫자야 '비범한 인물' 에 대한 묘사에서 자주 나오는 특징 중에 하나고, 용의 얼굴을 닮았다지만 사람 얼굴을 보고 연상시키는 동물이야 모두 다른 법이니 일단 알 수 있는 사실은 콧날이 높으며 이마는 넒고 수염이 꽤 멋있었다는 정도다.
그리고 좀 뒤의 이야기지만, 유방은 정장(亭長)의 벼슬을 하고 나서부터는 자기 밑의 부하를 설(薛, 산동선 등현縢縣) 땅으로 보내 죽피관(竹皮冠, 대나무 껍질로 만든 관冠)을 만들어 오게 하여 외출 할 때는 무조건 이를 쓰고 다녔는데, 허세를 위한 용도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훗날 황제가 되고 나서도 이 죽피관은 계속 착용하고 다녔다고 한다. 대체로 유방의 초상화에서는 넒은 이마, 콧날, 죽피관이 강조되는 편이다.

3. 생애




4. 가정


고제는 8남 1녀를 두었는데, 여덟 아들의 어머니가 모두 다르다.

5. 평가


한고조 유방의 다양한 모습들
아랫사람을 돌보고 이끄는 타고난 리더 기질,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도 공황에 빠지지 않는 두둑한 배짱, 베풀 땐 화끈하게 베풀 줄 아는 배포, 한두 번 같이 행동한 사람의 됨됨이를 파악할 줄 아는 눈, 쓴소리를 들을 줄 아는 열린 귀,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사로운 감정의 문제가 있어도 실익을 잊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죽기 직전에 여후랑 나눈 말만 봐도 유방이 자기 부하가 뭘 할 줄 알고 뭘 못하는 지 훤히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좋은 발상을 떠올리는 능력이나 타인의 간언을 듣고 본인이 사리판단을 하는 능력이 뛰어나진 않지만, 더 설득력 있는 말을 들으면 금세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수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대표적으로 역이기의 제안을 듣고는 좋다고 여기다가 장량이 젓가락을 8개나 부수면서 하나하나 따져가며 잘못을 논하니 금세 수긍했던 일이 있다. 정치 감각 면에서는,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모략가적인 면모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신릉군 일화에 감명을 받고 그 이후부터 의협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그게 뜻하지 않게 명분상으로 많은 이점을 가져다 주었고 조언자의 말들을 귀담아 들을 줄 알았다는 게 크고, 본인이 딱히 무언가 실익을 노린 일은 나중에 가서야 조금씩 생겼다. 태자 폐위 시도 때의 막무가내식 행동을 보면 딱히 정치적인 음모 쪽으로는 그렇게 재능이 없었다.
유방에 대한 고전 문학 작품들과 그 문학 작품의 영향으로 유방을 능력이 없고 무식하며, 욕심만 많은 인물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군사적인 능력은 다른 장수들의 방해만 되는 수준이며, 판세를 읽는 능력도 부족하고 그저 운만 좋아서 천하를 얻은 인물이라는 인식이다. 또한 호쾌하고 남자다운 면모가 있는 항우에 비해 부당하게 토사구팽이라는 누명을 씌워 비열하고 추악한 인물처럼 여기는 사례가 흔하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초한지 소설 등에서 퍼진 부분이 대부분이며, 실제 사기나 한서, 자치통감 등의 기록으로 살펴본 유방은 결코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고 오히려 덕이 있는 군주라는 이미지가 있었으며 인기도 매우 높았다. 애초에 소설 속의 모습에서도 모순이 있는 게, 이미 유방에게는 군사적이나 정치적으로 스승이 될 만한 인재도 많고 실제 경험도 충분하고도 남았다. 게다가 유방은 다른 건 몰라도 실패와 조언을 수용하고 개선하는 자세만큼은 중국사의 수많은 군주들 중에서도 최고라 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런 조건을 갖추고도 군사적 능력이나 정치적 판단력이 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묘사에 넘어가지 않고 자세히 보면 뭔가 이상하단 점을 이미 느낄 법한 부분.
또한 초한전쟁 내내 그 무섭다는 항우와 직접 맞짱을 뜬 인물은 유방뿐이며, 영포, 팽월, 한신을 제외하면 유방보다 많은 활약을 한 무장이 없고, 사실 영포팽월은 고제보다 군사적 능력이 더 낫다고 볼 정도는 아니다. 훗날 삼국지연의유비에게 덧씌워진 이미지는 딱 (능력치와 급한 성격을 제외한)유방의 그것이다. 덕분에 유비 역시도 본인의 능력이 엄청나게 저평가되었다.
거기다가, 사람들이 남자답다고 여기는 항우는 실제론 크게 베풀어야 할 때 아까워하는 쪼잔한 소인배였고 그로 인해 무수한 실책을 저지르며 몰락했다. 원래 항우 밑에 있다가 유방에게 망명한 한신과 진평도 항우는 소인배라고 공통적으로 평했고, 현대 이전에도 항우의 행적을 따져본 많은 학자들은 보통 항우를 까지 유방을 까는 일은 잘 없다. 오히려 '남자답고 대범하다'는 평가는 포용력이 넓은 유방에게 더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해 사사로운 것에 휘둘리지 않고 숙일 때 숙일 줄 아는 태도가 오히려 유방의 평가를 낮추는데 일조했다는게 아이러니..

5.1. 군사적 능력


황제(유방)는 이미 나이가 들어 노쇠해져 싸움을 싫어하니 틀림없이 직접 출전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휘하의 장수를 보낼 터. 내가 두려워하는 자가 둘 있으니 오직 회음후 한신팽월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이미 죽었으므로 남은 장군 중에는 내가 두려워할 만한 사람은 없다.

회남왕 영포, 반란을 일으킬 때 장수들에게 한 호언장담으로 유방의 군사적 능력이 결코 무능력하지 않고 그 나머지 장군들(번쾌, 조참, 역상 등)을 능가하는 상당한 수준임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사실 이 말대로 유방은 처음에는 태자에게 장수들을 딸려 보내 영포를 치게 할 생각이었으나 여후가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말리는 바람에 유방이 직접 나서서 영포의 난을 진압하였다.

사람들이 유방에 대해 가장 크게 저평가를 하는 부분이 바로 군사적 능력이다. 이상하게도 보통 유방은 군사면에서는 무능하고 졸렬한 지휘관으로 인식되는 편이다. 이것은 불세출의 천재 지휘관인 한신과, 중국사 최강의 무용을 자랑하는 항우가 비교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우라는, 동시대 존재한 휘황찬란한 군재의 광채에 대비되어 상대적으로 어두워보일 뿐, 산적 두목으로 시작해 10년도 지나지 않아서 전중국의 지배자가 된 유방의 위업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것이다.
이런 인식은 유방에 대해서 군사적 지휘관보다는 정치적 지도자, 즉 장수가 아닌 왕으로서의 이미지를 일종의 선입견으로 가진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방은 분명히 '''반진연합군의 장수'''로서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했으며, 항량이나 초의제 등 연합군의 수뇌들에게도 그 장수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총애 받았고, 항량 사후에는 사실상 항우와 더불어 반진 연합군의 양대 에이스 장수였다. 자기 심기에 거슬리면 포로든 민초든 부하든 상관이든 주군이든 다 죽여버리고 본 항우가 홍문연이라는 무리수까지 두면서도 유방을 죽이는데 눈치를 보고, 벽지라지만 왕작을 줄 수밖에 없던 까닭도 결국 진나라 토벌전에서 유방이 장수로서 거둔 전공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항우조차 말이다![11]
실제 역사 기록에서 유방은 거병 후 대부분의 전투에서 직접 군대를 지휘했으며, 그 대부분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조참, 번쾌주발 등의 초반 행적을 살펴보면 이들은 전투에서 앞장 서 싸우는 정도였으며, 실제 군을 이끈건 유방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신은 팽성 전투 이후로 마지막 해하 전투에서 선봉에 서기 전까지 항우와 전쟁터에서 만난 적이 없다. 사실 그 정도가 아니라 초한 전쟁 내내 항우와 직접 맞싸움을 한 사람은 유방밖에 없다.[12]
오히려 주발, 번쾌, 관영등이 (대군의 소수 별동대 정도가 아닌) 단독으로 '군단' 을 이끌고 다닌 시기는 초한전쟁 때보다도 한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반란 진압' 을 하던 시기에 더 많았다. 그나마도 영포한왕 신, 장도 등 가장 강력한 제후왕들은 대부분 유방의 친정으로 격파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초한쟁패 당시 유방의 부하로서, 단독으로 전황을 바꿀만한 군단장 급의 위치에서 움직인 사람은 '''한신'''밖에 없다. 한신의 공적은 유방의 영향력과는 완전히 별개의 영역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그러나 이런 (본래 부하였으나 별도 세력으로 변신한) 한신이나 팽월, 영포 등의 '포섭 세력'이 아닌 유방의 부하들의 전공은 모두 '유방의 영향력' 아래서 거둔 전공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실 한신의 군대는 대부분 유방이 준 것이고 한신 본인도 유방의 부하장수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그런데도 왕이 될 수 있었던 건 해하 전투 직전 한신이 딜을 걸었기 때문.) 팽월도 자주 부하 장수를 보내서 도왔다. 영포도 유방의 도움으로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으니 실제로는 이 세 사람도 결코 독립적이었던 것이 아니고 유방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13]
따라서 유방은 거병 초창기부터 황제가 되어 천하를 통일하고 난 뒤에 이르기까지, '''당대 가장 풍부한 전투 지휘 경험을 가진 사령관 중에 한 명'''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정식으로 군인이 되어 병법을 익힌 것은 아니지만, 밑바닥 동네 패싸움을 이끄는 술집 형님으로 시작해서 망탕산에서 들고 일어나 봉기하여 패현을 점거하고 크고 작은 공성전, 수성전, 야전을 두루 겪었다. 따져보면 단순히 참전 수준이 아니라 사령관으로서 지휘한 전투 중 제대로 기록된 것만 30~40번은 너끈히 되는 수준.
유방은 패현에서부터 대규모 전투는 아닐지언정 계속해서 전투를 치르며 그 대부분을 이겼고 한번은 항우와 함께 장한까지 격파해보였다. 동아전투에서 패배하고 물러나던 장한이 추격해오는 유방과 항우에게 한번 반격을 시도해봤지만 또 졌다. 장한 등장 이후 진군의 태세가 바로잡히자 사방에서 봉기군이 패주하는 와중이고 장량도 유방이 항량에게 귀의한 후 잠깐 떠나서 병력을 이끌고 성을 점거해봤지만 얼마 못 버티고 격퇴당해서 다시 유방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었으니, 조금 과장해서 그때만큼은 유방 이상의 실적을 증명한 장수는 없었다. 항우랑 붙기만 하면 도망친다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건 상대가 항우였기 때문이고, 누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방이 참여한 전투는 '''큰 전투만 70회, 작은 전투는 40회'''에 달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승리하지 못한 전투에서도 아군이 크게 피해를 입은 적은 없었으며 계속해서 다음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상태가 유지되었다. 또한 항우랑 붙을 때를 제외하면 유방의 패전은 대부분 공성전이다. 즉 패배했던 전투라고 해봐야 공성에 실패해서 물러나는 식이었다.
악전고투하던 형양-성고 전역에서도, 한신이 북벌을 수행하는 동안 유방 스스로 최전선에서 항우를 붙잡아놓고 관중이라는 든든한 뒷배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한신이 군 지휘권을 잡자마자 두각을 나타낸 불세출의 천재라면, 유방은 작은 규모의 군사부터 차근차근 지휘하며 역전의 경험을 쌓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항우와의 교전에서는 최후의 해하 전투를 제외하면 유방은 항우를 상대로 이긴 적이 없다시피 하지만, 당대 최강의 군사를 이끌던 동양사 최강의 인간흉기이자 모랄빵 제조기 항우에게 진 걸 가지고 유방이 못났다고 할 수는 없다. 애초에 당대에 항우랑 겨뤄서 목이 멀쩡히 남아있던 장수가 유방을 제외하면 몇이나 되었는가? 따라서 항우가 이끄는 군대에게 패배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졸렬하고 무능한 지휘관으로 보기는 힘들다. 다시 붙을 때는 노출된 약점을 고쳐놓는 치밀함도 보였다.
다만 유방 인생 최대의 대패인 팽성대전은 그의 군재상의 심각한 결점을 드러낸 부분이기도 하다. 보통 유방을 변호하고자 제후 연합군이라는 정체성으로 인한 지휘권 혼란, 지도부의 방심 등 특수한 당시의 상황을 문제로 들기도 하지만, 결국 이 문제를 방치하거나 심화한 것이 유방 본인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지휘체계를 바로잡고 군의 기강을 제대로 정비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군사적 능력이다.''' 적어도 '방심했다'는 걸 유방을 변호할 구실로 거론하는 건 매우 구차한 것이다. 전장에서 방심을 하는 것 자체가 군사적 무능이니까. 왕이자 총사령관인 유방 자신이 철저한 태도를 보였다면 다른 지도부도 눈치를 봐서라도 대놓고 방종하지 못했을 텐데, 유방 본인이 솔선수범하여 음주가무를 벌이며 놀아제낌으로써 항우의 직격탄에 그대로 날아가버린 건 백번 따져도 유방에게 어마어마한 실책이 있다.
그러나 팽성대전으로 한차례 혼이 나면서 항우의 위력과 자신의 결점을 제대로 실감한 유방은, 이후 다시는 이러한 약점을 내보이지 않고 대전략에 있어서도 보다 용의주도해진다. 군사를 그냥 뭉치면 장땡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전역의 확대와 군사 배치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것이다. 막판 벌어진 해하 전투는 제후 연합이라는 정체성은 팽성 때와 비슷했고, 한신의 늑장으로 군정비에는 오히려 더 어려운 조건인데다, 팽성 점령으로 항우의 파멸이 가시화되어 방심하기 더욱 쉬운 상태였음에도 한군은 앞에서의 약점을 보이지 않았다. 선봉과 중군 사이의 빠른 연락과 연계, 30만 대군의 원활한 전술적 움직임, 관영을 중심으로 한 기민하고 집요한 추격 등 해하 전투는 항우라는 거대한 적을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얕보지 않았다.
초한전쟁의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항우의 발목을 잡고 중원에서 버틴 것은 유방이다. 항우가 패배한 건 정치적인 실책으로 인해 유방과 팽월이 앞뒤에서 자리를 잡고 무한 소모전을 벌이는 걸 막지 못해 끝내 돌파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이것은 단순히 정치적인 문제만이 아니고 유방의 군사적 성과기도 하다. 군사적 능력 하나로 광활한 중국 대륙을 2년만에 제패한 항우가 유방을 상대로는 그와 비슷한 기간 동안 변변한 전략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건 그만큼 유방의 수비능력이 탁월했음을 보여준다. 항우에게 연패하고 살았던 것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성고 2차 함락 때 팽월의 교란에 호응해 반격을 가한 후로 유방은 항우의 공격에 한번도 뚫린 적이 없다. 공성전에서 성을 빼앗기지 않은 쪽이 패배했다는 말을 듣고 함락시키지 못한 쪽이 이겼다고 하는 것도 사실 약간 이상한 얘기.
어쨌든 이미 광무 대치 시점에서 항우는 인질극이나 저격 등의 기책을 시도하는 등 초조한 심경을 드러내고 있었고, 용저가 한신에게 격파당하자 그간의 원한을 누르고 땅을 반으로 뗀 뒤 끝내자는 말에 승낙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는, 항우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반쯤 항복에 가까운 결정까지 내렸다. 유방의 뒤에는 소하가 있었고 항우의 뒤에는 약탈에 대한 복수심을 기른 백성들이 있었다.
요컨대 한신, 팽월 등이 망치에 해당한다면 유방은 전쟁 중 모루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바꿔 말하면 유방은 초한 대전의 한나라 진영에서 가장 위험한 역할을 맡은 것이다. 중간부터는 자기 쪽에서 팽월에게 군사를 지원하거나 한신을 제어하기 위해[14] 무장 중 으뜸이었던 관영, 조참등을 북방 전선에 내어주는 등의 결정은 대단한 배짱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한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난 뒤 벌어진 여러 차례의 반란을 제압한 인물이 유방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개국 초기의 반란들은 상당히 위험하기 마련인데 유방은 이 반란들을 수차례 제압했다. 그중 영포 같은 인물은 거록대전 당시 눈부신 공을 세우기도 하는 등 당대에도 이름이 높은 지휘관이었고 '경포의 용병이 뛰어나 백성들이 두려워한다(布善用兵, 民素畏之)', '천하의 명장으로서, 전투에 뛰어나다(黥布, 天下猛将也, 善用兵)', '제후들 가운데 공은 으뜸(功冠諸侯)' 이라는 것이 《사기》에 기록된 경포에 대한 평가다. 그러나 그는 유방 상대로는 수차례 전투 끝에 탈탈 털려 100명만 데리고 도망가다 죽임을 당할 정도로 철저히 패배하고 말았다. 직접 전투를 진두지휘하는 일이 많았기에 전장에서 부상을 입은 적도 있는데, 광무 대치 때는 항우의 죄상을 열거하다가 쇠뇌를 가슴에 정통으로 맞아 죽을 위기에 처했었고, 경포의 반란을 진압하던 와중에도 화살에 맞아서 결국은 이 부상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죽음을 맞는다. 경포는 한군에 있는 사람 중에선 한신, 팽월, 유방 빼곤 다 자기 상대가 안 된다고 말했으며, 유방은 유방대로 시황제가 천하를 정벌할 때도 스스로 나서지는 않았는데 유방이 자꾸 친정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못 미더워서 그러는 것이냐고 주설이란 신하가 울면서 매달려도 친정을 계속하면서 암묵적으로 이 말을 인정했다. 내외적으로 대부분의 장수들보다는 유방이 한 수 위로 평가받았던 셈.[15]
아주 단순히 말해서, 유방은 분명한 군사적 능력 및 업적을 보유했다. 옹치 때문에 풍읍을 잃어버리나 오히려 진승을 쫓아온 진나라 군대를 박살내서 성과 사람들을 빼앗아 세력을 불린 일화나, 일찍이 거록 대전에서 항우군의 선봉을 맡으며 군사적 역량을 인정받은 영포나 진나라 최후의 보루였던 장한까지 격파됐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유방의 군사적 능력은 무능과는 거리가 멀다. 군사적 역량이 있었으니 중국사를 넘어 세계사 최고의 소드마스터이자 돌격대장인 항우의 공격을 무식하게 정면으로 받고도 그정도 버틴것이지, 다른 인물들은 항우 앞에선 그저 광탈당하기 바빴다. 그리고 한신이야 역대급 군사 천재이니 한신만 못하다는 건 비판이라 하기 어렵다.
하지만 백등산 포위전은 유방의 흑역사임에 분명하다. 사실 유방은 이미 더 적은 숫자의 항우의 정예 기병대에게 더 큰 대패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래도 한신 등이 전략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항우의 발을 묶었으니 군사적 능력이 바보는 아니다. 또한 전투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유방이 아무 생각도 없이 포위에 말려든 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유방은 여러 차례 흉노의 상황을 살피면서 신중한 면모를 보였는데, 기만책으로 이를 속여낸 묵돌의 기민함을 칭찬해야 할 것이다. 물론 묵돌, 한신, 항우 모두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장수들이기는 하나 이것으로 유방이 매우 뛰어난 수준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16] 비슷한 경우였던 항량이나 용저가 그자리에서 붙잡혀서 죽은 것을 생각하면 사실 굴욕적이긴 해도 군대가 몰살당하거나 유방이 포로가 되는 최악의 결과는 어떻게 피하기는 했다.
대전략의 개념이 없던 항우에 비해 유방은 중요한 순간마다 자신의 생각보다 더 옳은 전략을 제시하는 전략가가 있으면 지체없이 그에 따라, 항우가 자신만 쫒아다니는 틈을 타 한신을 파견해 하북을 평정케 했고, 영포를 회유하고 유가와 노관으로 하여금 팽월을 지원케 함으로서 항우를 고립무원 상태로 만들었다. 유방은 본인이 형양, 성고 등지에 버티고 있으면서도 한신장이, 팽월, 영포, 소하 등 제후들과 부하들을 독자세력화해 드넓은 중국땅 전체를 활용했던 반면 항우용저 정도를 제외하면 부하들을 단독으로 파견하는 일이 없었다. 그나마 용저도 유수 전투에서 참패한다. 항우라는 독보적 원톱이 존재했던 초군과 유방이 아니더라도 역대급 지휘관들이 존재했던 한군의 차이라고 볼 수 있는데, 유방은 이러한 지휘관들을 지원하여 전쟁의 범위를 항우 혼자서는 감당 불가능한 스케일까지 확장시킴으로써 초나라의 대응역량을 고갈시켰다. 팽월이나 영포 등은 자신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사실상의 별도세력이었음에도 이들을 잠시나마 이끄는 데 성공했다는 점, 또 이들 모두 항우가 일찍이 밑에 두었거나 적어도 포섭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유방의 역량이 어느 지점에서 돋보이는지 알 수 있다.
정리하면 현령시절부터 특유의 배짱과 함께 여러 소소한 전투를 직접 거치고, 실패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여러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 들으며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쌓인 짬밥은 웬만한 지휘관과 견주어도 결코 밀리지 않는 군사적 역량을 갖추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이는 탁월한 참모들과 제장들의 공이 유방의 공으로 흘러들어간 결과이기도 하겠으나, 군주이자 총사령관으로서 모든 패배에 궁극적인 책임이 있고 승리의 영광 또한 결정자인 유방에게 돌아가는 것이 문제되지는 않는다 할 것이다. 물론 팽성대전이나 백등산 포위전에서 한군이 보인 굴욕을 유방의 군사적 실책의 결과가 아니라고 하는 것 역시 공정하지 못하지만, 결국 이거저거 더해 보면 과보다는 공이 월등히 많다. 유방이 궁궐 안에서 명령만 내린 임금도 아니며, 그의 탁월한 참모와 제장들 역시 처음부터 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님을 생각하면 더더욱.
이러한 전략적 식견은 정치적인 부분과 연계가 되기에, 유방의 정치적 능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5.2. 정치적 능력


유방의 정치적인 능력은 당대 모든 사람을 통틀어서도 가장 고단수라고 평가받는다. 적어도 거시적인 식견이 눈꼽만큼도 없던 항우에 비해 유방은 몇 배나 앞선 인물이었다.
행적을 살펴보면 단 2년 동안 경구, 항량, 의제로 라인을 갈아타며 그들 모두에게서 최대한의 실리를 뽑아내 제3세력으로 독립했으며, 비교적 늦게 합류한 항량의 기의군에서도 유방은 금세 주동적인 위치에 놓인 주요 인물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항우가 관중을 점령하러 갈 때 초나라 의제의 신하들이 항우가 너무 난폭하다면서 그의 대항마 위치에 놓았을 정도로 유방은 의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렇다고 또 유방이 그들에게 신의없게 굴었던 적은 한번도 없다. 부하로 있었을 때는 나름 성실하게 섬겼고 해야 할 일도 제대로 한 편이었고 갈아타게 된 것도 유방의 책임은 아니었다. 원래 풍읍에서 배신당하고 살기 위해 경구를 섬기러 찾아갔는데 그 사이 경구가 항량에게 망해서 항량을 섬기게 되었고 그러다 항량이 의제를 옹립하면서 의제의 신하가 되었던 것.
또한 이를 바탕으로 군사력을 모아 함양에 입성 한 후에 백성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 하면서 민심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는데, 이는 신안대학살 후 함양에 입성하고 온갖 만행과 행패를 부려 민심을 잃어버린 항우의 태도와 대조되는 부분이다. 이후 관중은 유방의 지배 영역이 되는데, 진나라 사람들이 '''약탈을 금하고 가혹했던 법을 없애고 항복한 마지막 왕 영자영에게 조용히 여생을 누리게 자비를 베푼 유방과, 병사로 나선 진나라 젊은이들을 학살하고 영자영을 참살하며 궁궐을 노략질하던 항우 중 누가 이기기를 바랐을지는''' 너무나도 뻔하다. 실제 진나라 백성들에게 이세황제에 대한 반감과는 별개로 영씨 황족들에 대한 지지는 상당히 높아서 진승과 오광은 진시황의 장남인 부소를 자칭했고, 조고도 이세황제를 제거한 뒤에도 반발 때문에 자영을 황제로 세워야 할 정도로 영씨 황족들에 대한 지지는 확고했다. 이런 외국인에 대한 태도 차이는 오예가 이끄는 오월이나 파촉의 판순만 일곱씨족 등 소위 오랑캐 소리를 들었던 이민족들 상당수가 유방을 지지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또한 살해된 의제를 추모하는 부분이나 팽성 대전 패배 후 바로 영포에게 연락을 취해 그를 회유하고, 팽월과는 계속해서 연락을 취하며 노관 등을 보내 지원을 하는 부분에서 보이듯이 기본적으로 유방은 항우보다 큰 그림을 그릴 줄 알았다.
또한 주로 비판하는 토사구팽도 실제로는 유방이 능동적으로 숙청을 한 적도 별로 없는데다 오히려 어지간하면 용서를 빌면 관대하게 용서해 주고, 심지어 '''반역을 일으키는 공신을 때려잡은 것'''까지 있었던 것을 죄다 싸잡아 토사구팽으로 왜곡한 결과다. 사실 유방 본인이 부하를 의심한 적은 많고, 팽월처럼 억울하다고 볼 수 있는 사례가 없진 않으나, 몇 번이나 자신을 기만해서 사방에 밉보일 짓을 골라 가며 한 한신이나 대놓고 반역을 저지른 영포 같은 자를 해치웠다고 토사구팽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당장 유방 본인도 초가 임명한 제후왕으로 있다가 힘을 길러 천하를 얻은 인물이다. 언제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자리를 탐낼지 모르니, 유방이 자신 같은 불온분자(…)를 견제하지 않는다는 게 더 이상할 노릇이다. 그리고 정 제거하더라도 주로 책임자와 그 가족들이 제거되는 정도에서 끝나 사건의 파장도 적은 편이었다. 재미있는 비교지만 유방과 비슷하게 미천한 출신에서 통일 왕조의 황제 자리에 오른 주원장의 경우 3족도 모자라 9족을 멸한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유방과는 비교도 안 되게 공신들에게 가혹했다. 게다가 유방은 한신을 견제하고 실권을 빼앗기는 했지만 회음후 자리를 준 이후로는 더 이상 건드리진 않았다. 사실상 한신을 죽인 건 여후다. 팽월도 먼저 손을 댄 게 아니라 반역자라고 죽이라는 이야기가 나와서 죽인 거고. 그리고 정 죽인 것도 제후왕 뿐이며, 그런게 아닌 사람은 의심이야 하긴 했지만 적어도 유방이 죽을 때 까지는 잘 먹고 잘 살았다.
또한 설령 유방이 정말 토사구팽을 주도했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당시에는 기나긴 난세 끝에 간신히 백성들에게 평화가 찾아왔던 터라 권신들이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가 된 이상 그들을 위해 다시 난세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당장 무지렁뱅이 출신인 부하들이 '''서로 자신의 공이 크다며 왕궁에서 서로 칼부림'''을 해서 기둥에 칼자국이 남았을 정도니 말 다했다. 이후 유방이 살아 생전 가장 증오했던 인물인 옹치를 제후로 세웠고 숙손통을 정식으로 황제의 스승으로 임명하여 예를 세우면서 그나마 줄어들었다. 결과적으로 제후왕의 궐기는 개국 후 한참을 지난 한경제 시절에나 오초칠국의 난으로 표면화 되었으며, 이를 제압함으로서 전한은 군현 제도를 확립했고 이후 고대의 초강대국으로 발돋음 할 수 있었다. 똑같이 동성제후를 왕으로 봉한 주나라도 세대가 지나면서 같은 가문이라는 동질감이 사라져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한 건데, 주나라와는 달리 통제가 잘 되었던 것.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조선 초기때도 태종 권신 및 외척을 모조리 척살해 버린 덕에, 그 다음 왕인 세종이 태종이 만든 강력한 왕권을 토대로 치세를 펼칠 수 있었다. 당장 세조가 공신들을 쳐내지 않았다가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자.
유방의 토사구팽에 대한 비판은 사실 '400년간 이어져 내려온 통일 왕조 한 제국'이 기정 사실이 된 현재의 시선이 반영된 부분이 없잖아 있다. 유방 생전의 한나라는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완성된 통일제국인지 확신할 수 없는 단계였다. 중국을 통일했던 진 제국만 해도 시황제 때부터 이미 붕괴 수순을 밟고 있었고, 고작 몇 년 정도라 무시당하는 것이긴 해도 항우를 필두로 한 초나라 역시 분명히 중원의 종주국으로 군림했으며, 바지 사장이었지만 유방 자신도 모시던 전 중국의 천자 초의제도 있었던 것이 극히 최근의 일이다. 그러니 유방이 항우를 이기고 통일 한나라를 열었다고는 하나, '''그 '유방의 한나라'가 안정된 통일 왕조를 이룩할 것인지, 진이나 초처럼 계속되는 군웅할거의 전국시대 속 일시적인 통일 후 역사에서 사라질 것인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고, 유방 자신도 제국의 개조로 길이 남을지 진 왕조 3대나 초 의제의 전철을 밟을 것인지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 즉 유방 시절의 한 왕조는 아직 춘추 전국시대의 연장에서, 쉼표로 끝날 것인가 확실한 마침표를 찍을 것인가의 기로에 놓여있는 상황이었고, 유방이 행한 '내부 숙청'은 춘추 전국시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한나라만의 새로운 장(章)을 여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장 진승 오광만 해도 제대로 기틀도 세우지 않고 왕을 칭했다가 순식간에 세력이 와해되었다. 항우는 기껏 통일한 중원을 다시 나누어야 하는 상황에서 나름대로 정치적 계산을 해본 게 크게 실패하여 그 여파가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왔다.
또한 미앙궁 축조 등에 대해 비판적이던 모습에서 보듯이 사치만 부리면서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던 편. 유방은 '난 지금 세금이 너무 높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한 후 실제로 죽을 때까지 세금을 줄이려고 했고, 요역을 굉장히 싫어해서 건수만 생기면 가족 단위로 면제권을 뿌렸다. 전후 안정책으로, 아이 낳은 사람은 2년간 모든 요역 금지라는 정책을 내놓기도 했다.
그리고 솔직히 사마천은 역사적인 탐관오리를 대부분 한나라 때 인물로 뽑을 정도로 한나라에 대한 비판적인 성격이 강해서 한고조의 장점보다 단점이 부각된 점도 있을 수 있다. 다음은 한나라의 사서인데, 토사구팽에 능하다는 이미지와 다르게 일개 병사들까지 챙겨주는 모습이다. 심지어 저 사례만 있는 것도 아니고 권력자가 하층민들까지 저렇게까지 챙겨주는 건 역사적으로도 흔하지 않은 경우이며 이런 처사 덕분인지 후에 여씨가 권력을 잡았어도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는 판국에 기를 쓰고 유씨 편에 붙은 사람들이 많았다.

「諸侯子在關中者,復之十二歲,其歸者半之。民前或相聚保山澤,不書名數,今天下已定,令各歸其縣,復故爵田宅,吏以文法教訓辨告,勿笞辱。民以飢餓自賣為人奴婢者,皆免為庶人。軍吏卒會赦,其亡罪而亡爵及不滿大夫者,皆賜爵為大夫。故大夫以上賜爵各一級,其七大夫以上,皆令食邑,非七大夫以下,皆復其身及戶,勿事。」又曰:「七大夫、公乘以上,皆高爵也。諸侯子及從軍歸者,甚多高爵,吾數詔吏先與田宅,及所當求於吏者,亟與。爵或人君,上所尊禮,久立吏前,曾不為決,甚亡謂也。異日秦民爵公大夫以上,令丞與亢禮。今吾於爵非輕也,吏獨安取此!且法以有功勞行田宅,今小吏未嘗從軍者多滿,而有功者顧不得,背公立私,守尉長吏教訓甚不善。其令諸吏善遇高爵,稱吾意。且廉問,有不如吾詔者,以重論之。」

제후의 자식으로 관중에 있는 이는 12년간 요역을 면하게 하고, 돌아간 자는 그 반만 면하게 하라. 백성들이 이전에 난을 피해 혹 산이나 못에 모여 살며 목숨을 보존하다 호적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이제 천하는 이미 안정되었으니, 영을 내려 각자 제가 살던 현(縣)으로 돌아가게 하고, 옛 작위(爵)와 전택(田宅)을 돌려주며, 관리들은 법조문으로 그들을 깨우쳐 알려주어 자신을 욕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백성들이 굶주림 때문에 스스로를 팔아 남의 노비가 된 자는 모두 면(免)하여 서인으로 삼아라.

부대의 관리나 사병 가운데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작위가 없는 자나 제 5급인 대부 작위가 없는 자에게는 일률적으로 대부 작위를 하사한다. 원래 대부 작위를 가진 자나 이보다 더 높은 작위를 가진 자에게는 일률적으로 원래 작위보다 한등급 높은 작위를 하사한다. 또 7급인 공대부 작위를 가지는 자는 일률적으로 식량 및 토지를 받는 대우를 누릴 수 있다. 공대부 이하의 작위를 가지는 자와 친척은 모두 요역에 복무하지 않을 특권을 누릴 수 있다.

공대부와 8급인 공승 이상의 작위는 모두 고급 작위에 해당한다. 그러나 나를 따라서 천하를 탈취한 사람은 고급 작위를 가질 수 있다. 나는 수차례 휘하의 관리들에게 우선적으로 이 사람들에게 토지와 가옥을 나눠 줘야 한다고 명령했다. 고급 군작과 식량 및 봉록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은 사실 우리의 존중과 예우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많은 관리들은 그들에게 누려야 할 대우를 해주지 않고 있다. 이는 참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진나라가 통치하고 있었을때, 공대부 이상의 작위를 가졌던 사람은 현령과 같은 지위를 누릴 수 있다.

한서 고제기

더구나 정치적으로 사람 뽑는 것도 보자면 항우는 겉보기에는 예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을 공경하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있어서 핵심 인물인 용저종리말 등마저 눈물을 흘리며 범증에게 항왕[17]은 우리를 높이 사고 있지 않다고 말할 정도였으며 한신 같은 인물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18] 그에 반하여 유방은 겉으로는 사람들을 가소롭게 대하는 것[19] 같으나 실제로는 유학자들처럼 자기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이나 심지어 옹치 같은 자신이 혐오하는 부류의 사람들까지 인정하여 주는 모습을 보여준다.[20] 더구나 그는 사회 하층민들의 조언이라도 옳은 것 같으면 따르거나 한신처럼 사회적 위상이 비참한 처지에 있어도 무시하지 않고 기용했다. 유방은 항우와는 다르게 자기한테 직언이나 욕을 퍼붓는 사람들도 내치지 않았고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를 잘하는 편이었으며 유방에게 숙청 당한 사람들은 거의 자신이 그런 상황을 자처한 경우[21]가 많았다. 대체로 그의 정치를 평하자면 오는 사람도, 가는 사람도, 갔다가 도로 다시 오는 사람도 막지 않은 정치[22]를 펼쳤다.
또 한고제는 주위 사람들과 함께 얻은 재물과 권력을 골고루 나눌줄 아는 사람이었다. 한고제가 천하를 얻은 이유를 고기와 왕릉더러 얘기해 보라고 했을때 한고제 스스로는 서한삼걸을 잘 써서라고 했지만 왕릉 같이 유방의 부하들의 평가는 '유방은 오만무례하긴 해도 무얼 얻으면 그걸 나눠 주는 법을 안다. 반면에 항우는 뭘 나눠주는 법이 없다. 그래서 졌다.' 라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최소한 '폐하는 오만하고 사람을 업신여기는데 항우는 그래도 성격은 어질어서 사람 사랑 할 줄은 안다.' 라고 까지 했는데 단순히 유방을 추켜세우려고 하는 소리는 아니다. 위나라 공자 출신 서위왕 위표가 유방을 배신한 이유가 "유방은 너무 욕을 많이 해댄다. 위 아래도 없고 사람을 무슨 개나 소라도 되는 양 욕을 해대니 견딜 수가 없다." 였을 정도니 사서에 기록될 정도로 무례한 성정은 사실인듯 하다.
실제로 팽성 전투 이후 항우는 자기 본진이 한번 털렸다는 것 때문인지 거둔 보화와 금은을 언제나 진중에 같이 가지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우희 역시 비슷한 경우. 그런데 그 시점부터 부하들의 불만이 솔솔 새나오기 시작한다. 항우가 이들 측근보다 항씨들에게 더 높은 작위를 준 것도 문제겠지만 저렇게 보물을 잔뜩 쌓아 끌고다니면서 또 부하들에게 인색했던 것 역시 불만의 원인 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인다.
진평 역시 고기, 왕릉과 비슷한 말을 한다. 유방이 항우와는 달리 따르는 이들에게는 걸맞는 보상을 줬기 때문에, 혼란기에 많은 인재를 수하에 두고 충성을 받을 수 있었다. 최측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일개 병사로 시작했더라도 '고참병' 들 역시 많은 이득을 보았다. 전쟁 통에 살던 곳을 잃어버린 유랑민들을 다시 터전으로 돌려보내고 혼란 중에 노비가 된 사람들에게 노비 해방령을 내려 자유를 주며 부하들 중에서 딱히 결격 사유가 없는 자들에게는 일괄적으로 모두 대부 작위를 주고, 원래가 대부 작위 이상인 사람들은 일률적으로 한 단계 높은 작위를 주었다. 공대부 이상이 되면 역시 일괄적으로 식량 및 토지를 나눠 주었고, 그들의 친척들에게 요역을 지우지 않는 특권을 내렸다.
공대부 이상이면 유방의 부하들 중에서도 한가닥 하는 인물들이고 유방은 그런 인물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관리들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이 사람들에게 토지와 가옥을 줘야 한다." 고 수차례 명령했고, 이게 잘 되지 않는듯 하자 직접적으로 전국에 포고하는 조서를 내려 "이런 점을 잘 시정하라." 고 특별 당부를 내렸다. 유방이 가장 신경을 쓴 부분 중에 하나라고도 할 수 있다. 현대 사람들이 가진 '유방은 탐욕스럽다' 는 이미지와는 좀 다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유방은 분명 오만무례하고, 건방지고, 예절이 없다는 이미지를 당장 그 시대 사람들부터 가졌지만, 최소한 그 시절 사람들은 유방에게 충성을 바치면 그에 적합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라고 여겼다.
후대와 달리 초한전쟁기에는 절대적 충성은 없었다. 소하와 조참은 대놓고 유방이 지기라도 했으면 반란죄를 덤터기씌울 생각이었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전한 개국공신 중 충신의 대명사로 통하는 진평과 주발조차 실제로는 여씨에게 붙어서 여후에게 장안 정권을 앞장서서 팔아치웠다가 유씨 제후왕들의 대규모 봉기로 장안이 포위당하자 그제서야 여씨들을 배신하고 유씨 정권에 다시 붙은 박쥐들이다.(...) 이 시기에는 유방이 자신들에게 이익을 줄 것을 생각하며 손익계산 끝내고 그를 따랐고, 유방은 그들을 만족시켜 주었기 때문에 인재를 포섭하고 그들을 열심히 싸우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유방의 면모와 대비되어 '항우는 쪼잔하다' 는 인식도 있었을 것이다. 토사구팽이라도 하지만 팽월, 한신, 경포 이런 부류의 몇명을 빼면 유방을 따른 사람들은 유방에게 얻은 위치를 가지고 잘 살았다. 이렇게 보면, '욕심 많고 냉혹한 유방의 숙청을 통한, 부하들과의 일방적인 관계' 는 아니고 서로 기브 앤 테이크를 했다 보면 되겠다. 돌이켜보면 유방은 정말 진중에 금은이 쌓일 틈도 없이 모략에든 상참에든 마구 써댔다. 바로 범증 죽이는 모략만 해도 진평에게 금 수천 근을 내려서 모략을 꾸미는 것을 도왔고, 경포를 설득할 때도 엄청난 물자를 예물로 바쳤다고 한다. 정치를 잘한다는 말은 곧 분배를 잘한다란 얘기와도 같다. 임금과 신하가 잘 나눠먹어야 문제가 없는것인데 한고제는 그것을 해냈다.

5.3. 용인술


유방의 능력 중에 가장 큰 능력은 사람을 모으고 쓰는 능력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보통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유방의 인재 운이 좋다." 는 식으로만 이야기를 하는 편이고 유방의 동네인 패현은 영웅 낳는 동네였냐면서 말하곤 한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살아간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능력있는' 유방과 소하가 그렇게 동네의 건달로서, 공무원으로서, 아무런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인생을 살아갔을까? 그런 관점에서 보면 유방 자체가 가능성이 있는 수천만명 중에 운좋게 기회를 얻어 조건이 충족된 한 사람은 아니었을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수천만분의 일의 가능성을 잡고 운이 계속 이어진다 해도 그걸 갈무리하여 성과를 낼 능력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애초에 유방은 기껏해야 동네 청년회장이 되어서 마을 장정들 모아서 패싸움하면서 똥폼이나 잡았던 사람이고 거병했을 때는 진나라의 관직 경력이 있는 소하와 조참 정도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인재라고 할 사람 자체가 없었다. 장량은 원래 일국의 귀족으로서 진시황 암살 기도를 주도할 만큼의 거물이어서 한미한 촌동네 한량인 유방 아래에서 일할 사람도 아니었고 한신은 원래 항우 휘하에 있었다.
그들을 모으고 포용하고 활용한 것은 결국 유방의 능력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에 비하면 초나라 귀족 출신이라서 가문의 지인들만 해도 넘쳐났었고, 범증이라는 모사가 있었으나 그들을 제대로 쓰지 못한 항우는 비교할 수도 없다. 대부분이 깡패 출신인 공신들의 성격이 고분고분했을리도 없었던 게, 이들은 여후의 입으로 "저자들은 성격이 이리처럼 난폭해 양처럼 온순한 태자의 말 같은 건 따르지도 않을 것이니, 저 아이에게 맡길 바에야 아프신 황상께서 마차에 누워있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라는 소리를 들었고 유방도 이 말에 혜제에게 군사를 맡겨보려 했던 것을 관두었다.
이 부분은 유방 본인도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린 바 있다.

고조가 낙양 남궁(南宮)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제후들과 장수들은 짐을 속이지 말고 모두 마음을 이야기해보라.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이 무엇인가? 또 항씨(항우)가 천하를 잃은 까닭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고기(高起)와 왕릉(王陵)이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는 오만하셔서 사람을 업신여기지만 항우는 어질어서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폐하는 사람을 부려 성과 땅을 공략하게 하여 항복시키면 그것을 나누어 주어 천하와 함께 이익을 함께 합니다. 항우는 어질고 유능한 자를 시기하고 질투하여 공을 세우면 해치고 어질면 의심합니다. 싸워 승리해도 그 사람의 공을 인정하지 않고 땅을 얻어도 다른 사람에게 그 이익을 나누어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가 천하를 잃은 까닭입니다."

고조가 말했다.

"공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군막 안에서 계책을 짜서 천 리 밖의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라면 나는 장량만 못하다. 국가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다독거리고, 먹을 것을 공급하되 식량 운송로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내가 소하만 못하다. 백만 대군을 몰아 싸웠다 하면 승리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취하는 것이라면 내가 한신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걸들이다. 내가 이들을 기용할 수 있었고, 이것이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이다. 항우에게는 범증 한 사람 뿐이었는데 그마저 기용하지 못했다. 이것이 그가 내게 붙잡힌 까닭이다."

사기 권8 고조본기(高祖本紀), 5년 5월 기사

그리고 유방의 세력은 몇 번이나 와해될 뻔했음에도 그것을 견디어 냈고, 종국에는 당대 최강의 세력과 힘겨운 맞짱을 거듭한 끝에야 패권을 잡았는데 이러한 고난의 과정을 거치면서 힘든 일은 부하들이 전부 처리해 주고, 유방은 그저 다 된 밥에 숟가락만 얹는 식으로만 일을 진행했다면 항우와 본격 맞짱을 뜨기도 전에 부하 손에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대 봉기군들의 선배였던 진승이 좋은 예이고,[23] 약간 경우가 다르지만 항량은 유방과 항우를 아예 둘 다 거느리고 있었고, 부하들에게서 모반할 기미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부하들이 척척 가져오는 성과에 취해 오만해져서 실수를 하는 바람에 허무하게 사망하기도 했다.
초한전쟁 기간 중에 유방과 유방의 부하들의 활약이 가장 돋보였던 형양과 성고 전역만 봐도 팽성전투에서 유방 본인은 거의 죽었다 살아나고 항우는 전력을 온존하여 물밀듯이 서쪽으로 진군하고 있었으며 제후들은 몇몇 빼고는 유방에게 등을 돌린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걸 우리와 항우의 1:1 구도가 아니라 1대多의 구도로 만들어야 살 수 있다는 대전략을 제시한 장량, 항우의 제후들 중에서도 제일 항우에게 위협이 될 영포를 직접 설득하여 포섭한 수하, 배신자 위표를 처단하고 하북을 평정하여 천하대세를 사실상 결정지은 한신, 항우의 보급로를 끈질기게 괴롭힌 팽월, 항우의 브레인인 범증을 제거한 진평, 함락되는 형양성에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여 유방을 살려낸 기신, 오창의 곡창 지대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향후의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 있게 해준 역이기, 유방이 죽을 힘을 다해 버티는 동안 뒤에서 서포트를 해준 소하 등 수많은 부하들의 활약이 있어서 결국 유방은 최악의 패배를 딛고 전황을 유리하게 역전할 수 있었으며, 이 사람들을 전부 기용하고 그들의 올바른 조언을 받아들여 실행한 것은 바로 유방이다.[24]
유방의 인재 파악 능력은 앞서 나왔던 유언에서도 잘 볼 수 있다.

(여태후가 죽어가는 유방에게 만약 소하조참이 죽는다면 그 후임 재상들을 어떻게 임명하면 좋겠냐고 물어보자)

"왕릉(王陵)으로 하시오. 그러나 왕릉은 우직하므로 진평으로 하여금 돕도록 하시오. 진평은 지혜로운 사람이나 그렇다고 그에게 모든 맡기지는 마시오. 또한 주발(周勃)은 행동거지가 무겁고 믿음직하오. 비록 배운 바는 부족하지만 장차 유씨 왕조를 지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주발일 것이오. 그를 태위(太尉)로 삼으시오."

유방 사후 왕릉은 실제로 여태후 일족의 전횡에 우직하게 항거했으며, 진평의 경우 여씨 일족과 적당히 타협[25]하는 척 하며 정국의 안정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여태후 사후 주발에게 군권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주발은 이 군권으로 여씨 일족을 일대 숙청하여 유씨 왕조를 안정시켰다. 죽어가는 마당에 부하들에 대한 평가를 한치도 틀림없이 하는 유방의 매의 눈이다(…)
무엇보다 유방의 부하들은 수차례 엄청나게 강도 높은 직언(直言)[26]을 퍼부었지만, 유방은 자신에게 비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비판을 경청 할 줄 알았다.''' 듣기 싫은 소리를 했다고 사람을 삶아 죽인 한 항우와는 정반대 케이스다. 이런 유방의 가장 적절한 사례로 육가(陸賈)와의 대화가 있다.

'''"이 어르신(乃公)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시서(詩書)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육생이 대답했다.

'''"말 위에서 얻은 천하를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고제(유방)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부끄러운 표정을 짓고 말했다.

'''"나를 위해 진나라가 어떻게 천하를 잃었고, 내가 어떻게 천하를 얻었으며, 과거에 나라를 얻은 일, 잃어버렸던 일을 글을 지어 올려주시오."'''

사기》 역생 육가 열전'''

이렇게 충고를 들을 줄 아는 태도는 유방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아무리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해도 그 충고와 제안을 써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다. '''한신도, 진평도 본래 항우의 군단에 있었다.''' 물론 백등산 포위전에서 유경의 말을 무시했다고 혼쭐이 난 사례가 있기는 하다. 다만 이 경우는 유방이 이미 나름대로 경계를 하고 확신을 가진 후 전투에 나섰을 시점에서 유경의 충고가 있던지라 무르기가 곤란했던 점도 있었다. 유방은 백등산에서 실패를 경험하고 유경에게 사과한 뒤 그의 조언을 자주 들었다. 주군으로서 이런 게 절대 쉬운게 아닌게, 당장 후대에 원소전풍의 말을 안들었다가 대패하고 돌아와서 그 독선으로 인한 나머지 전풍을 죽여버렸던 전적도 있다. 한때나마 천하를 손아귀에 쥐고 하북의 패자로 군림했던 인물이 말이다.
그리고 여러 비판을 수용할 줄 안다는 것은 자신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유방이 "나는 한삼걸보다 지략, 내정, 통솔 능력이 모두 부족하지만 이들을 쓸 줄은 알았다. 항우는 범증 한 사람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에서 보이듯이 유방의 성격은 독선적인 지도자들이 자주 보이는 지독한 아집, 자만심과는 거리가 있었다. 유방과 비슷하게 가방끈이 짧은 편이었던 아돌프 히틀러 등이 '''자신에 대한 과대 평가'''로 주위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해버리며 계속 삽질을 하다 몰락해버린 것과 대조적이다.
즉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참모들의 의견을 수립해서 채우는데, 그 의견을 수립하는 과정에서도 가장 적절한 의견을 수용 할 줄 아는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남의 말을 잘 들어주기만 한다면 그건 비판을 잘 수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귀가 얇은 사람일 뿐이다. 기록을 보면 유방은 항상 올바른 건의만을 들었고 유방은 단지 그대로 시행했을 뿐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지도자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수많은 건의를 듣기 마련이다. 유방은 그중에서 더 바른 건의를 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그러한 건의들만 기록에 남은 것이다. 건의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판단력, 날선 비판이라도 아주 쉽게 수용하는 도량, 옳다고 판단된 그 즉시 실행하는 행동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27]
고문원(古文苑)에 실린 手敕太子文에서는 유방의 이러한 태도가 가장 적절하게 보여진다. 이 글은 유방이 태자에게 경각심을 가지게 하기 위해 지었다는 부분인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난세를 만나 진나라가 학문을 금하자, 스스로 기뻐하여 책을 읽는 것이 유익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임금이 되고 난 뒤로부터 비로소 때때로 책을 살펴보았는데 글 쓴 사람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이에 비추어 내가 옛날에 행동하였던 것을 생각해보니 옳지 않은 일이 많았다."'''[28]

유방의 이런 능력이 폄하받는 기저에는 논의, 논쟁, 논리에 대해 의외로 무지한 인간군상들의 편견이 바탕이 되어 있다. 스스로의 지적 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역사를 전지적 시점에서 받아들이다 보니 저 정도는 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 매우 많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살아오면서 면전에 대고 단점을 지적하는 말을 기껍게 받아들인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 돌이켜 보면 유방의 대단함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 보통은 단점을 지적받으면 귀에 거슬리는 말로 여기고, 심하면 상대방이 시비를 건다고 생각해 즉각 싸움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상대방이 옳은 얘기를 조목조목 늘어놓으며 자신을 지적해 줘도 곧이 듣지 않고 그냥 말싸움에 졌다는 식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나의 행동이나 식견, 사고, 태도는 올바르거나 상례에 어긋나지 않았지만 단지 날 지적하는 상대방의 말싸움 능력이 월등해서 궤변을 펼치거나 이상하게 꼬투리를 잡았다는 식으로 대응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유방은 논리적인 지적에서부터 인신공격성 발언까지 말이 옳기만 하다면 전부 다 수용할 줄 알았고 뒤끝도 거의 없었다. 게다가 유방은 대부분의 경우 중간관리자도 아니고 절대적인 상급자 입장에서 논의를 받아들였다. 보통 사람들이 지위의 고하가 얽혀 있을 경우 상급자는 하급자의 비판을 기분 따라 받아들이고, 하급자는 상급자의 말을 억지로 받아들이고, 설령 옳은 말이라도 고깝게 여기다 정신승리하거나 훗날의 경험을 통해서야 옳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한다.
그리고 유명인사라는 것도 그들의 이름이 날려야 유명인사가 되는 것이다. 유방과 얽힌 유명인사들은 대부분이 유방과 얽히고 나서야 이름을 날려서 유명해질 수 있었다. 당대의 위치에서 누가 옥석인지 판별하는 것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고향을 잘 만나서 인재가 몰렸다면 같은 패현 출신에 본래는 유방보다 월등한 입지를 지녔던 왕릉이 유방의 자리를 차지해야 했겠지만 정작 왕릉은 유방의 그 숱한 친구들 중 단 한명도 얻지 못하고 뒤늦게 마음을 바꿔서 유방의 신하가 되고서야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한신을 추천한 건 소하이니 유방은 인재 보는 눈조차 형편 없었다고 비하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이는 실로 단편적인 시각인 게, 정말 인재 보는 눈이 없었으면 당장 그 소하부터 쓰지 못했을 것이다. 인재가 인재를 부르는 건 아주 당연한 이치이고, 무엇보다 한신은 그 진가를 알아봐 준 사람이 별로 없었다. 초군에서도 아무도 한신을 중용하라는 건의조차 않았다. 범증이 한신을 추천했다는 이야기조차 사기에선 나오지 않는 야사. 소하도 이야기를 나누고 그 식견을 파악하기 전까지는 한신이 뭐하는 인간인지조차 몰랐다. 유방은 한신이 치속도위로 지낼 때까진 만나서 말을 나눠본 적도 없었다. 애초에 이런 논리면 순욱을 시작으로 순유, 정욱, 곽가 같은 당대의 명참모들을 줄줄이소세지처럼 받아들인 조조도 이들을 애초부터 몰랐으니 인재 보는 눈이 형편 없었다는 소리가 된다.
그리고 설령 유명인사라 하더라도 항상 옳은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육국분할론을 논했던 역이기처럼 때로는 아주 심각하게 잘못된 얘기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유방은 장량의 비판을 듣고 단숨에 역이기의 입론이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유방 주변의 유명인사들도 뭘 잘못 먹은 게 아니고서야 아무 이유 없이 유방 옆에 머무르고 있을 이유가 없다. 대부분의 갑남을녀가 돈과 세력이 어지간하지 않은 이상 유명인사들에게 갑남을녀는 몸을 의탁할 영웅이 아니라 그냥 스쳐지나가는 사람이다. 소위 말하는 인재들과 유방이 처음 만났을 때 나눠보는 가벼운 시험, 기싸움, 그리고 유방과 계속 함께하면서 유방 및 동료들과 나누는 담론, 그리고 그 담론의 결론을 내리는 유방의 모습을 통해서 유방이 논의의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지 않았다면 난세의 호걸들이 동네 양아치 출신의 무례한 프로 욕쟁이 유방 곁에 머물러 있을 이유는 없다.
이러한 용인술은 후손이자 촉한의 초대황제 또는 한나라의 30대황제로 추존된 소열제 유비한테서 나타나게 되는데 유명한 도원결의 삼고초려 일화에서 보듯이 유비 역시 조상인 한고제 못지않게 용인술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5.4. 인간적인 면모


'''한낱 짐승 새끼들도 제 자식 귀한 줄은 압니다. 그런데 폐하께선 도대체 뭐하시는 겁니까!'''

하후영[29]

창작물에서 대체로 유방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토사구팽 등을 이유로 비열하고 추악한 인간으로 그려지는 편이 많고, 그 적수인 항우에 대해서는 남자답고 화통한 면면으로 묘사되는 편이 많다. 실제로 초나라 귀족 출신인 항우가 품위를 지켜 예법으로 사람을 대할 줄 알았던 편이었던 것에 비해 동네 왈자패 대장 출신인 유방은 그만큼 언행이 방자하고 틈만 나면 마구 욕을 내뱉는 편이었는데 이는 한신, 왕릉, 소하 등이 모두 말한 부분이다. 사기에서 유방이 욕을 퍼붓는 장면은 '''12번'''에 이른다. 고대에 이건 생각보다 큰 결점이다.[30] 당장 유방도 이 성질 때문에 손해를 자주 봤는데 우선 위왕 위표가 배신한 이유로 주장한게 이 유방의 욕설이고[31], 황제가 된 이후에는 조왕 장오에게 욕설을 퍼붓다가 암살시도까지 당한다.[32]
그러나 지도자로서는 항우가 틈만 나면 부하들을 의심하고, 작은 것은 폼나게 뿌리면서 정작 작위나 봉지같은 큰 것을 하사해야 할 때는 아까워서 어쩔 줄을 모르는 속좁은 본색을 보였던 반면에, 유방은 일단 결정을 내리면 그야말로 배포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신의 인사도 그저 소하의 추천만 듣고 아무런 공적도 없었고 만난지는 채 1달이 좀 넘었던 인물을 단숨에 대장군에 봉했던 파격 중의 파격이었다. 또한 꼭 결정적일 때 배신해서 자신을 곤경에 빠트린 옹치를 대접하는게 이득이 된다고 판단하자 지체없이 그렇게 했다. 또 '''항우의 심복으로서 몇 번이나 자신을 괴롭힌''' 계포에게 그를 붙잡거나 죽이면 현상금을 주겠다고 수배를 내렸지만 계포를 숨긴 사람이 하후영을 만나 "어차피 항우는 망했는데, 굳이 그 부하를 죽여봤자 괜히 폐하의 속만 좁아보이지 않을까요?"라는 요지의 논리로 계포를 변호했고, 하후영이 그걸 그대로 유방에게 전하자 바로 용서해 주고, 낭중으로 임명시켜 거기에 계포는 한고제 때는 물론 혜제, 3대인 한문제 시대까지 살아서 중랑장과 하동 태수를 역임하며 천수를 누리고 살았다.
또한 비판을 들을 줄 알았다는 태도에서 보이지만 유방은 자기에게 직언을 퍼붓는 신하들에 대해서도 크게 노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수차례 신하들에게 무례하다는 언급[33]을 듣고, 심지어 주창(周昌)에게는 '''"폐하께서는 참 (桀紂)와 같은 폭군이십니다."''' [34]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지만 유방은 그저 웃고 말았다.[35]
이런 면모는 중원 제패 후 도읍을 정할 때도 잘 드러난다. 유방은 수자리하러 지나가던 제나라 평민 누경의 말을 듣고 그 날 하루만에 도읍을 바꾸는, 이 이상 보여주기도 어려울 만큼의 화통함을 보였다. 비슷하게 항우가 수도를 옮길 때 반대 의견을 제시했던 한생은 개무시당한 다음 뒤에서 원숭이라고 욕했다가 냅다 끓는 솥에 던져졌다. 어쩌면 이 일 때문에 유경의 말을 귀담아들었을 수도 있다. 이런 일화에서 보이듯 유방은 고대 권력자들, 특히 전국시대 물이 덜 빠졌던 그 시대 인물들은 더욱 흔히 벌이던 분풀이식 살인을 유별날 만큼 꺼렸다.
게다가 유방은 정말 배짱과 언플능력이 좋았는데, 유방은 팽성대전에서 대패한 후 오히려 사방으로 공격을 가해 배신자들을 순식간에 소탕하거나, 성고가 함락될 상황에 처하자 맨몸뚱이로 한신의 진영으로 이동해 군사를 빼앗거나, 한발짝만 더 물러나면 관중인 상황에서 오히려 군사를 쪼개서 자기가 팽월을 지원하는 등 그때 뭐가 필요한가를 중시하고 만에 하나의 리스크는 안중에 두지 않았다. 항우한신 등이 대승을 거두어도 이런저런 불안 때문에 머뭇거리다가 때를 놓치곤 하는 것에 비해 유방은 패배를 하더라도 결정과 실행은 오히려 더 기민했다. 그리고 항우와의 대치에서[36] 항우가 직접 쏜 화살에 가슴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항우를 무서워하긴커녕 유방은 갑자기 허리를 굽혀 앉더니 자신의 발을 쓰다듬으면서 항우에게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봤나. '''어린 아이가 감히 어른의 발을 쏘다니!'''"라는 말로 일갈했다. 이때 유방은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위장한 것이다. 이후 억지로 아픈 몸을 이끌고 군대 사찰에 나섰다가 사경을 해매게 되었고 결국은 후방으로 이송되었다. 다만 자기 애들을 마차에서 집어던졌을 때가 있는 것처럼 항상 유방이 허세를 피울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숙청의 경우 아무렇게나 숙청한 것은 아니다. 또한 백등산 포위전에서 패해 안 그래도 빡쳐있던 참이라 조나라 왕이자 자신의 사위(유방의 첫째딸 노원공주의 남편)인 장오(張敖)에게 무례하게 군 것 때문에 원한을 품은 장오의 가신인 관고(貫高)가 자신에 대한 '''암살 음모'''를 꾸몄음에도, 심문 내내 기개있는 모습을 보이자 장오를 조나라 왕에서 해임하는 정도로 처벌을 끝낸다.
소위 토사구팽이라는 것도 사실과는 전혀 달라, 쓸모가 없어 버렸다고 단순히 얘기하게 되면, 유방에게 충신이 남아있었을 리가 없다. 대부분 먼저 월권으로 책잡힐 행동을 한 자들이 잘못을 빌지않아 숙청한 것이 토사구팽으로 왜곡된 것이다. 물론 유방이 의심이 없는 사람은 아니라 여러 공신들을 견제하고 의심하긴 했지만, 이성왕 정도가 아니면 어지간해선 피를 보진 않았고 그마저도 보통 상대가 먼저 칼을 뽑았다. 토사구팽의 대표적인 예라고 하는 한신은 실제로는 유방을 수 차례 기만한 위험분자라 공신들까지 죽이려고 벼르던 것을, 정작 가장 빡치는게 정상일 '''유방이 봐줘서''' 그나마 목이 붙어 있었다. 노관은 공이 부족한 인물을 친구라고 왕으로 봉해주니 뒤통수를 쳤다.[37] 장도나 경포는 자신들이 알아서 반란을 일으킨 것. 단 경포는 한신, 팽월의 숙청을 보고 겁먹은데다가 원한을 산 신하 비혁의 참소 때문에 자포자기성으로 반란을 일으킨 점도 있어서 억울한 면이 전혀 없지는 않다. 물론 그 후의 상남자스러운 발언을 보면 야심은 있었던 것 같긴 하다. 잘못 없이 억울하게 제거된 것은 팽월뿐이나, 그 팽월도 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여후가 덜컥 죽여버려서 그런 거지.
이성왕 숙청은 사실 한고제보다도 여후의 의지가 더 강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고제 사후 호랑이같은 장수들이었던 제후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고제가 사망한 직후 고제의 측근들을 전부 갈아버리려다가 오히려 역공을 맞을 가능성이 있어서 그만둔 적도 있었을 정도다. 소위 '토사구팽'의 전형적인 예인 한신도 여후를 비롯해서 힘이 있는 공신들이 죄다 죽이려고 벼르고 있었음에도 유방이 손을 대지 않아서 행실에 비해서는 오래 살았는데, 이를 보고 유방은 실제로 한신을 가지고 놀았던 전적상 자기가 다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목숨은 붙여뒀지만 여후는 한신을 감당하지 못해 죽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소하는 다른 사람의 조언을 받아들여 숙청을 그만 두었다. 소하도 객관적으로 보면 수상했을 행동을 여러 번 했다. 단지 본인에게 사심이 없었고 주변의 충고를 받아 잘못을 고쳤기 때문에 고제의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소하는 어디까지나 뇌물수수 혐의로 잡혀들어갔지 반역죄 같은 죽을 죄로 들어간 것은 아니다. 유방 때문이었지만 혐의 자체는 사실이었고, 유방이 이에 대해 넘어가는 대신 사죄하라고 하자 대수롭지 않게 여긴 소하가 본의 아니게 발뺌하는 바람에 유방이 화가 나 그대로 죄를 물으려고 한 것. 관고의 일화를 볼때 반역죄로 다뤘으면 유방이 풀어주기 전에 이미 심문을 받다가 만신창이가 되어서 곧바로 입궐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사실 유방은 후대의 홍무제, 영락제와 같은 진짜 숙청 전문가들이나,[38] 멀리 갈 것도 없이 자기 아내인 여후와 비교한다면 토사구팽의 대명사라 불리기에는 억울한 면이 많다. 실제로 노관을 제외하면, 그와 거병 초창기부터 함께했던 풍읍과 패현 출신의 동지들 중에 토사구팽당한 이는 아무도 없다. 이름을 남긴 친구들 외에도 한왕 등극 이전부터 쭉 함께한 고참병들에게도 모조리 고급 작위와 함께 집과 땅을 주려고 했는데 관리들이 딴청을 피우면서 시간을 끌자 나도 지키는 법이 너희들은 우습냐는 말까지 하면서 재차 꾸짖기도 했다.[39] 심지어 노관도 유방이 죽지 않았다면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실제로 유방은 용서를 구하거나 여간한 변명을 하면 많은 경우 용서를 해주었다.[40] 더구나 사실 죽임을 당한 공신들도 여후가 처리한 경우가 많고 유방 역시 그러한 여후를 좋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유방이 경계 주시했던 대상들은 거의 대부분 중앙 집권에 걸림돌이 될 게 분명한 분봉왕들이었다. 이러한 제후들은 유방에 대한 친분이나 충성보다는 이익을 따지는 무리였다. 그 억울하다는 팽월도 해하 전투에서 진격하지 않다가 유방이 분봉을 승낙한 뒤에야 움직였으니, 유방이 아주 숙청할 생각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밉상이긴 했을 것이다. 결국 유방이나 토사구팽 당한 쪽이나 충성보다는 서로 이익관계로 움직이다 결말이 정해졌다. 반대로, 친분이나 충성심으로 유방을 따른 무리들은 노관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중앙 정부에서 임직하다가 대체로 무난하게 살았다. 심지어 개중에 달아난 노관마저 '''유방은 자신을 용서해줄 수 있겠지만''' 표독스러운 여후가 자신을 제거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였다.
다만 유방에게 늦게 합류했고 유방보다 동네에서 잘 나가던 형 같은 존재라 껄끄러웠던 왕릉 같은 경우, 유방 사후 충성심을 보인 것이 단순히 유방이 좋은 사람이라서 그랬던 것인지, 그게 아니면 왕릉의 사람됨이 원래 좀 그랬는지 아니면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표현한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그 왕릉조차도 최고 지위인 우승상의 자리까지 올랐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결코 고제가 왕릉을 홀대하지 않았고 왕릉도 충성을 바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일 왕릉도 진평과 주발이 여후에게 사바사바하는(척 하는)걸 보고 "한 고제 보기 부끄럽지도 않냐" 라고 일갈하기도 했고(물론 이들은 여후를 진심으로 따르는게 아니었기에 결국 진평과 주발은 여후 사후 여씨 일족을 몰아낸다). 노관의 반란 때는 연대책임으로 엮여들어갈 관련자들이 용서를 비는 것만으로 사면은 물론이고 상금을 내렸다.
또한 한신에게 반란을 권고했던 괴철이나, 팽월의 시신을 수습해준 난포도 실질적인 위협을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서 살려두었다.
다만 가족으로서는 좋은 사람이라 할 수 없었다. 여색을 밝히는 편이라 여후가 심하게 맘고생을 했고[41], 자식들을 팽성 대전에서 던져버린 사례하며,[42] 백등산 포위전 이후 묵돌의 압박이 심해지자 당시 장오와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딸인 노원공주를 묵돌에게 줘 버릴 생각도 하고 있었다. 유방과 반대로 가족을 매우 아꼈던 항우와 여후는 그 애정에서 비롯된 불공정한 인사로 인심을 잃었으니 지도자로서는 나쁘다고만 하긴 그렇겠지만, 가족의 일원으로서는 애초에 무책임한 인물이다. 대의를 논하는 것도 웃긴 게 원래 패현 건달 시절에도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위치에 대한 자각이 있었으면 뭐라도 좀 가져다 주던가 했어야 했다.
여기에 팽월은 의심으로 제거하고 소하마저도 한때 가뒀으면서 정작 외척인 여씨 세력은 견제하질 않아 사후에 여씨 세력이 날뛰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렇게 좋은 소리를 듣지는 못한다. 실제 진평 같은 공신 세력들이 여씨 세력을 물리치지 않았다면 한나라는 몇대 만에 끝장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더더욱 그렇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결과론일 뿐이고, 제후왕들의 숙청이 끝나자마자 죽은 탓에 여씨 쪽에 손을 댈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 사실 그 공신들도 유방이 여후를 견제하려고 할 때는 호응해주지 않기도 했다. 척부인은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기생충 노릇을 한 여희의 경우가 있었기에 제때 경계하고 차단했지만 여후같은 방식은 거의 선례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에 폐태자에 실패한 이상 유방 손으로 여씨를 죽였다간 혜제 쪽이 흑화해서 여후 이상의 참사를 부를 가능성이 더 컸을 것이다. 실제로 죽기 직전 번쾌를 참수하려 드는 것으로 여씨 일족을 견제하려 하기도 했고(번쾌의 부인이 여후의 동생이기 때문이고, 여씨 친족 중 군권 면에서 가장 강력했던 것이 번쾌다), 후일 여씨를 몰아낸 신하들도 전부 유방이 추천한 사람이다. 사실 여씨의 뒷처리는 고제가 아니라 혜제가 책임졌어야 했었는데, 안타깝게도 혜제가 척부인의 일로 맛이 가서 일찍 죽은 탓에 결국 여태후의 폭주를 견제할 방법이 없어져서 문제가 더더욱 심각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실 '''유방 건달 시절부터 형수님'''이었던 여후 또한 정통성 관계상 건드리기 힘들었다. 여씨를 몰살시킨 공신들도 전부 '간악한 외척의 횡포'로 전가했지 여후 본인의 명예는 거의 훼손하지 않았다. 여후 본인의 명예가 떨어진건 후한 성립 후의 일인데, 이 때는 전한 건국 후로부터 200여년 후 이야기다.
항우마냥 대규모 학살은 저지르지 않았어도, 항우 타도를 위해 팽월 등의 장수를 이용해 전쟁 내내 초나라 지역을 숱하게 공격하고 약탈하게 하는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살해했을 사람을 따지면[43] 이쪽도 어지간한 규모였을 것은 예상할 수 있다. 유경이 댁 때문에 죽은 해골이 아직도 지천에 깔렸다고 할 정도이니 당대에도 유방을 인군보단 독한 인물로 인식하는 경향이 당연히 있었던 듯하며, 실제로 왕릉 같은 경우에도 유방이 인덕이 있다는 말은 하지 않고 단지 유방이 항우와 달리 논공행상이 푸짐해서 제장들이 유방에게 붙었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평소 성격만 따지면 항우가 훨씬 다정했다는 건 한신도 언급한 부분. 즉 초한쟁패기라는 난세의 인물들은 딱히 명분도 없이 그냥 다들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자기 보신과 영달을 위해 '유방 밑에 있는 것이 수지타산에 맞으니까', '항우 밑에 있는것보단 더 짭짤할 것 같으니까' 그렇게 행동한 것일 뿐.
물론 사람을 끌어들이는 순수한 ' 매력'이나 적재적소에 사람을 기용하고 적절한 논공행상으로 부하들을 만족시키는 것만으로도 역대급 정치력/용인술 이지만, 유방이 딱히 '황실 재건', '역적 토벌' 따위의 구름 잡는 듯한 이상으로 부하를 매료시킨 것은 아니다. 함양에 처음 들어갔을 때 말했듯 유방이 하고싶었던 건 단지 누구나 생각할 법한 '사람을 고생시키는 나쁜 법을 없애고 싶다.'였고, 죽을 때까지 이 부분만큼은 일관적이었다. 진 시대의 법이 워낙 악법 투성이라 이것만으로도 세상이 바뀌는 수준이 된 것 뿐.(...) 단, 의외로 다른 사서들까지 참고하면 근본적으로 당시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도 볼 수 있다. 스스로를 3인칭으로 언급하면서 다니는 것도 그렇고, 언행이 신분 사회에 맞지 않는 파격적인 사람이었다. 하층민들을 잘 대우하는 것은 물론 과거와 달리 귀족들이 하층민들의 재산을 자연스럽게 강탈하는 관습과 제도를 제거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자신들이 가진 것만 가지고 알아서 먹고 살아야 하게 되어 권세있는 가문의 황족이나 귀족조차 거지가 되어 몰락하는 일이 과거와 다르게 비일비재하게 생기게 되었다.
귀공자 같은 영웅과는 달리 서민적인 맛이 있어서 오히려 이런 유방을 더 선호하는 작가도 적지 않다. 또한 인간적 단점들도 오히려 이런 건달 같은 인간이 황제가 되었다는 입지전적인 스토리에 기묘하게도 중요한 상황에선 옳은 결정을 하는 모습에 오히려 인간적인 영웅상으로 재평가되기도 한다.
황제가 된 이후에도 아버지를 극진하게 대우한 기록이 있다. 고제가 황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5일에 한번씩 꼬박꼬박 아버지 유태공을 문안 인사하였는데, 이때는 황제가 아닌 일개 평민의 부자 관계처럼 서로를 편안하게 대했다. 그러자 집사가 '황제께서는 태공의 아들이지만 엄연히 백성들의 임금이니, 황제의 위엄을 위해서라도 예를 갖춰야 한다'라고 충고하고, 유태공도 이를 받아들여서 이후에 유방을 만날 때는 직접 황제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그러자 유방도 태상황이란 호칭을 유태공에 올려서 공식적으로 유태공의 위치를 확립했다. 동시에 이 간언을 한 집사에게는 상을 따로 내렸다.
또한 서경잡기에 따르면, 아버지 유태공은 장안의 궁궐에서 대접받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우울해했다. 위에 나왔듯이 유태공은 평민 출신이어서 적막한 궁궐 생활을 불편하게 여겼던 것. 그러자 고제는 장안 근처에 신풍이라는 마을을 새로 만들고 고향 풍읍의 사람들을 이주시켜서 살게 하였다. 유태공도 이를 매우 좋아했다고.
재밌는건 군신간의 사이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같은 제후를 상대할 때조차도 위나라 왕족 출신 위표가 "오만하고 무례하고 모욕적이다!" 라고 혀를 내두르던 유방의 태도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일관적인 편이었다.

애초에, 고제는 문학(유학)을 읽히지 아니하였지만, 그 성정은 밝고 통달하여 도모하는 것을 할 수 있었고 능히 남의 말을 들을 줄 알았다. 그가 감문(문지기)에서부터 일개 수졸을 볼 때마다 그 대하는 태도는, 흡사 옛날의 친구를 만나 대하듯 하는 것이었다.

자치통감 12권 中

자기의 세력에 여기저기서 몰려든 쟁쟁한 명망가들, 세력가들, 유력자들 한테도 무례하게 대했다던 유방은, 당시 유방 입장에선 진짜로 아무것도 아닌 일개 문지기, 병졸을 볼때마다 대하는 태도가 마치 자기 옛날 친구나 되는 양 스스럼 없었다고 한다. 이 구절은 자치통감에만 있어서 별로 유명한 구절은 아니지만, 말 그대로 자기 앞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죄다 평등한 눈높이(?)에서 깔아본다고 할 수 있고, 중국 사극이나 무협지 같은 표현으로 소위 '사해의 영웅을 초개같이 본다.' 고 할 수도 있겠다.
고대로부터 수백, 수천년간 기존질서가 계속 이어지던 상황에서, 그것도 기존질서에서 기준에서 보면 밑바닥 출신에 불과하던 사람이 시대배경 타고 계속 올라가면서도 무슨 밑바닥 특유의 콤플렉스 그럴것도 없이, 아직 패현의 사고뭉치로 패거리 이끌고 외상술 퍼먹고 아무데서나 퍼자고 땡전 한푼 없으면서도 행사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안색 하나 바꾸지도 않고 차지하고 앉아있을 때나, 패공이니, 한왕이니, 황제라는 소리 들으면서 온갖 권력자들 밑에 두고 있을때나 변함없이 일관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게, 지금보다도 훨씬 신분질서가 공고하고 사람 사이의 계급이 공고하던 그 시대 주위 사람들 입장에선 정말로 기이하게 보이면서도 이해가 잘 안되며 소위 "그릇이 크다." 라는 인식을 주지 않았을까. 현실에서는 한미한 배경을 극복하고 성공한 경우 출신 컴플렉스가 크건 작건 상관 없이 자격지심을 가지는 사례가 많다. 평민 출신 황제의 또다른 대명사인 홍무제만 봐도...탁발승 시절의 이야기는 금기 중 금기였고, 이걸 잘못 건드렸다가 목이 날아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인간적인 면모도 많이 보였다. 군대 일에 노역(勞役)을 제공하면 2년간 조세(租稅)를 거두지 말게 하거나 군졸로서 종군한 자에게 그 집안에 1년간 부역(賦役)을 없애주었으며 23세[44]부터 조세와 군역 대상인 부적에 올리게 하였다. 법령도 간략히 하고 금제를 줄였으며, 전조를 15분의 1로 경감했다. 또 관리들이 항상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징수한다고 하여 해마다 중앙에 바치는 공물의 양을 구체적으로 정해 1년에 63전 이상을 징수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해마다 딱 한 번만 바치도록 하였다.
유방은 인간성 면에 있어서도 전반적으로 평범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비범한 모습이 많이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찌질한 모습도 부인하기 어렵다. 유방의 남다른 비범함에 놀라서 찌질함마저 비범함으로 설명할 필요까진 없다. 한 인간 속에 선함과 악함 탁월함과 찌질함이 공존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다. 그리고 한 인간의 악함으로 그가 행했던 선한 행위까지 동시에 평가하기는 어렵고 그렇다고 해서 한 인간의 탁월함을 통해서 그가 보여줬던 찌질함까지 탁월함과 동일한 맥락으로 묶어서 설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격은 후손들 한테서도 나타나는데 명군이라 칭송받는 한문제와 한경제의 경우 문제는 망나니 동생인 유장의 사고를 처리하면서도 황제답지 않게 동생이 엇나가지 않을까 노심초사 했고 한경제의 경우 태자시절 바둑을 두다가 사촌형이 져주지않자 빡쳐서 바둑판을 던져 사촌형을 죽였고 그나마 한고조의 후손중 인격자라고 불리는 광무제와 소열제의 경우에도 오랜친우가 놀러오자 격식을 차리지 않거나 의형제가 죽자 복수를 다짐하는등의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보여준다.
요약하면, 인간적이다. 청렴하거나 인격자라기보다는 위급할 때는 찌질해지고 평안할 때는 쿨가이다. 오히려 이런 스스럼없음이 그를 황제로 올렸다고 평할 수 있는 것이, 항우는 귀족이고 예법을 지키지만 오히려 이러한 교양과 지식이 오만을 불러일으켜 책사의 책략을 무시하고 제뜻대로 하려다 그르친 것이 화근이었고. 여러 다른 쟁쟁한 군웅들을 제치고 올라갈 수 있게 도와준 그 장자방도, 유방이 자신의 뜻을 숨기거나, 관철하려는 바가 있으면 끝까지 구부리지 않았다면 반드시 문제가 생겼을 것인데, 가장 미운 신하에게 영지를 하사하라거나 젓가락을 뺏어가며 강력히 제후책봉을 반대하는 등 파격적인 제안과 책략을 조언했을 때에도 잘 들어주고 고려해준 유방의 성품이 혼란한 시기에 가장 뛰어난 효율을 발휘하여 그를 1인자의 자리에 올렸다.

5.5. 총평


한고조는 참으로 고집 센 사람이었다. 그러나 기회를 틈타고 신속히 변화하는 신묘함은 용이나 호랑이도 그에게 미칠 수 없었다. 그가 형양(滎陽)에서 패하고는 홀연히 황하를 건너 북쪽으로 가서 한(漢)나라 사신이라 일컬으며 조(趙)나라 성으로 달려 들어가 군리(軍吏)를 바꿔 세웠지만 한신(韓信)과 장이(張耳)도 눈치 채지 못하였다.

한신이 제나라를 점령하고서 제나라의 임시 왕이 되겠다고 하자, 고조는 그가 보낸 사신을 뜰에 엎드리게 하고는 크게 노여워하며 욕하고서 군대를 일으켜 공격하려고까지 하였다. 그런데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이 고조의 발을 밟아 제지하며 그래서는 안 된다고 간청하자 갑작스레 다시 꾸짖기를

"대장부가 왕이 되려면 진짜 왕이 되어야지 어찌 임시 왕이 되려 하는가."

하였다. 말을 민첩하게 바꾸는 것은 장량과 진평도 그만 못하였다.

또 고조는 광무(廣武)에서 가슴에 화살을 맞았으나 발을 문지르면서

"저 놈이 내 발을 맞췄다."

하였다. 이는 소열제(昭烈帝)천둥소리에 임기응변한 것과 거의 같다. 이런 임기응변이 있었기에 많은 책사를 굴복시키고 강한 적을 이긴 것이다. 소하, 한신, 장량, 진평이 모두 천하의 영웅이고 재주와 지략이 모두 고조보다 나았지만 기꺼이 고조의 신하가 된 것은 다 까닭이 있다.

청성잡기의 저자 성대중

항우는 최고의 야전 지휘관은 되었어도 군주라는 자리에 앉기엔 부족한 인간이었다. 반면 유방은 '''군주의 덕목을 충실히 갖추고''' 있다. 유방의 군사적 능력은 준수하였으나, 그 맞수인 항우보다 못했고 정치적 식견도 대국의 흐름을 읽는 재주는 갖추었으나 휘하의 장량과 소하 같은 인재보다는 부족한 편이었다. 허나 한신이 말했던 '저에 비해 병사를 많이 다룰 수 없지만 병사를 다루는 장수들을 다룰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는 말처럼 여러 사람을 휘어잡아야 할 난세의 군주로서는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들을 줄 알고, 사고가 유연하며, 말을 들으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할 줄 아는 능력이 있었고, 결정적으로 이러한 능력을 써먹을 수 있는 배포를 가지고 있었다. 군주감으로서는 이만 한 인물도 드물 것이다. 하물며 바로 앞에서 '군재에서 항우만 못했다'고 평하긴 했으나, 군사 지도자로서 항우의 재능이 중국사에서 당당히 최정상급에 드는 수준인 걸 생각하면 이는 유방에게는 지나치게 높은 비교 기준이다.[45]
유방은 실수를 안 하는 초인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반성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런 면에서 그는 항우와는 극단적으로 대조된 인물이었다. 인간성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지만 신기하게도 군주로서 가져야 할 장점의 거의 대부분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최초의 평민 출신 군주로서 이전의 관습과는 상관없이 즉위한 유방은 이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여 하나로 만든 것은 진나라였지만 이는 곧 멸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유방은 한나라를 탄생시키고 개국 초기의 정권을 단단하게 닦아 진나라처럼 모래성으로 무너지는 일을 막았으며, 이후 한나라는 전한 - 후한 400년의 역사를 이어나가며 이전까지 분열의 역사였던 중국을 '하나의 중국'으로 만들었다. 언어도, 문자도, 단위도 다 제각각이었던 '다른 나라' 들은 외관, 혈면,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나라의 치세를 거치면서 하나가 되었다.
또한 이 한나라에서 시행된 유교 국교화, 군현 제도 정비, 율령(律令)의 정비 등이 시행되었고 이것이 향후 2,000여 년간 중국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을 생각하면 유방은 그 출발점을 닦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46]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중화(中華)를 시작하게 했던 인물. 가히 최초의 중화인'''이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 한족이라는 명칭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물론 이는 유방 개인의 차원이 아닌 거대한 역사적 흐름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겠지만, 유방의 적수였던 항우가 봉건제에 대한 선호부터 해서 최후의 전국인(戰國人) 그 자체였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대조적인 편이다.

6. 기타


[image]
중국 한중 석문잔도풍경구(石門棧道風景區)에 있는 유방의 석상. 왼편으로 소하, 오른편으로 한신이다.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호칭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乃公居馬上而得之,安事《詩》、《書》!"'''

사기》역생 육가 열전


'''"豎儒,幾敗而公事!"'''

사기》유후세가

여기서 보이는 내공(乃公)과 이공(而公)은 비슷한 표현인데, 이는 본래 '자신' 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乃나 而는 "너" 아니면 "자네" 정도의 의미가 되는데, 뒤에 公이 붙이니 그렇다면 "자네 아버지" "네 어르신" 정도의 의미가 된다.
그런데 유방은 여기서 이 표현을 자신에게 사용했다. 이건 자기를 일컫어 '''"네 아버지" "(너희 아버지에 해당하는) 이 어르신"''' 같은 묘한 어감이 된다. 마찬가지로 상대 역시 '''"아들" "조무래기"''' 같은 상황이 된다. 이런 점을 생각하고 어감을 살려 문장을 번역하면 이런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어르신께서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으셨다. 그런데 시, 서 따위가 대관절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47]


'''"하찮은 유생 놈 때문에 이 어르신이 대사를 그르칠 뻔 했구나!"'''

물론 황제 등은 3인칭으로 자신을 호칭하기도 했지만, 이건 황제의 어투라기보다는 '''건달'''이 '''쫄따구'''에게 하는 느낌이 강하다. 그런 '쫄따구 풋내기' 등을 일컫는 수자(豎子)[48]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와 대조해서 보면 그런 느낌이 더욱 강하다.

'''"吾惟豎子固不足遣,而公自行耳。"'''

사기》유후세가─

이 부분은 영포의 반란때 여후의 아들인 혜제가 나설 지경이 되자, 여후가 울면서 만류하여 유방이 대답하는 부분이다. 기서 유방은 자기 아들을 수자(豎子)로 표현하고, 자신을 이공(而公)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대략 이런 늬앙스가 될 수 있다.

'''"나도 그런 조무래기가 나서기에 적절치 않다는건 알고 있었다. 이 어르신께서 직접 가시겠다."'''

혹은,

'''"그 조무래기가 시원치 않으니, 당신 남편이 나서야겠구만."'''

이런 느낌으로, 여하간 평민 출신 황제만이 할 수 있는 어법이라고 해야 할 듯 싶다. 사실 멀리 갈 것 없이 유방의 이런 3인칭 화법은 오늘날로 치면 남자가 좀 허세를 부리거나 잘난 척 할 때 쓰는 "이 형이 말이야.", "오빠가 한 턱 쏜다" 이런 분위기라고 생각하면 될 듯. 좀 더 건달(?)스럽게 바꿔보면 "이 엉아가 말야~" 정도로 볼 수 있다.
자신을 따르는 신하를 고발했다고 코를 잘라버린 적이 있다(…).

正疆首茉事而當,上使參乘,解玉劍以之。天下定,出以爲守。有告之者,上曰:「天下方急,汝何在?」曰:「亡。」上曰:「正疆沐浴霜露,與我從軍而汝亡,告之何也?下廷尉劓。

정강(正疆)이 수차례 사건에 대해 하는 말이 타당하자, 주상(유방)은 수레에 참승하도록 하고 옥검을 풀어 그에게 채워주었다. 천하가 안정되자 (정강을) 내보내 군수로 삼았는데 그를 고발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주상이 물었다.

"천하가 위급해졌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도망쳤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주상이 말하였다.

"정강은 서리와 이슬로 목욕을 하며 나와 더불어 종군하였는데, 너는 도망을 하고서 이제 고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그리고 정위에게 하명하여, 코를 베어버리는 의형에 처하였다.

'''《태평어람(太平御覽)》 648, 《초한춘추(楚漢春秋)》'''

'''朕若逢高皇,當北面而事之,與韓彭競鞭而爭先耳。'''

'''"짐이 만약 고황(高皇)을 만났다면 응당 북면[49]

하여 그를 기쁘게 섬겼을 것이고, 공을 세우기 위해 한신(韓信), 팽월(彭越)과 채찍질을 경쟁하며 선두를 다투었을 것이오."'''

석륵

후에 자신과 똑같은 인생을 살게되는 후손인 광무제유비가 나타나게 된다. 이후 황조들과는 다르게 황족에 유능한 인물들이 많았다. 처음 시기의 인물들만이 아니라 전한이 멸망하니 후한으로 부활시킨 사람도 유씨 일족이며 삼국지 때도 유우, 유표, 유장 등의 세력을 합치면 최강급에 유우는 원소보다 강했던 공손찬이 꼼수로 간신히 이겼고, 유표는 동탁 때려잡던 손견 가문의 통곡의 벽이었으며 유장은 유비도 마초가 합세하기 전까지는 밀렸었다. 심지어 유비는 막판 보스였다. 한국의 성씨 유(劉)씨의 먼 조상이기도 하다. 유(성씨) 문서 참고.
생년에 관하여 논란이 있는데, 만약 기원전 256년으로 칠 경우[50],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한 게 기원전 221년이었으니 인생의 반 이상을 전국시대에서 보냈다는 얘기가 된다. 기원전 247년으로 칠 경우, 인생(53년)에서 반에 가까운(26년)을 전국시대에서 보낸 셈이 된다.
아버지인 유태공보다 불과 2년 늦게 죽었다. 아버지에 비하면 별로 오래 살지도 않은 셈이다. 아니면 아버지인 유태공이 엄청 장수했거나.
이름이 여자 가슴이랑 동음이의어다 보니까 종종 이름으로 섹드립을 치기도 한다.
그의 가족관계는 주나라#s-2.1를 세운 주무왕과 비슷하다. 일단 창업군주이며(주무왕, 한고제) 왕조의 기틀을 다진 아들(주성왕, 한문제)이 있고, 선대 왕들이 쌓은 기반을 통해 훌륭한 업적들을 세운 손자#s-1(주강왕, 한경제)가 있으며[51], 무리한 정복전쟁으로 국가의 전성기를 파탄내고 하락세를 유발한 증손자(주소왕, 한무제)가 있기 때문이다.

7. 기타 창작물




8. 둘러보기(계보)







[1] 유방의 절친인 노관도 247년생인데 심지어 같은 날에 태어나 가족끼리 서로 매우 친했다는 언급이 있어 아마도 기원전 247년이 출생년이 맞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는 기원전 256년으로 보기도 한다. 여담으로 기원전 247년생일 경우 시황제가 즉위한 해 출생이고, 기원전 256년생일 경우 진나라가 시황제의 증조부인 소양왕 치세였던 시절에 출생한 것으로 시황제와는 고작 3살 차이밖에 안 난다.[2] 음력 기준.[3] 한서 권1 고제기: (五年)二月甲午 上尊號 漢王即皇帝位于氾水之陽.[4] 한서 권1 고제기: (十二年)夏四月甲辰 帝崩于長樂宮.[5]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현재의 인기일 뿐, 당대의 인기는 유방이 가장 좋았다. 한신은 자신의 전문 분야인 군 지휘에서는 탁월했지만 인간관계에 심각할 정도로 문제가 많았고, 항우는 무분별하게 학살을 자행한 인간백정에 성격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었다. 그에 비해 유방은 비교적 부하들도 잘 챙겨준 편이었고, 병사들로부터도 신망이 두터웠으며(싸우다 죽은 병사들을 하나하나 시체를 찾아서 고향에 보내주었을 정도니 따를 수 밖에...) 무엇보다 사람을 모으고 분위기를 휘어잡는 재능이 있어서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골고루 인망이 높았고 심지어 의제나 그 신하들도 유방을 항우의 대항마로 내세울 정도였다.[6] 지금의 장쑤성 (江蘇省) 펑현(丰县, 병음: Fēng Xiàn)[7] 이라고는 해도, 이 시기는 이미 조조가 집권하여 위나라나 마찬가지였다.[8] 이와 같은 케이스로 삼국지 시대의 많은 인물들을 들 수 있다. 손견의 아들들인 손책, 손권, 손익, 손광의 자를 각각 백부, 중모, 숙필, 계좌로 썼으며, 사마랑, 사마의, 사마부, 사마욱 형제 역시 자를 각각 백달, 중달, 숙달, 계달로 백중숙계에 맞춰 자를 지었다. 공자 또한 형제 중 둘째였기 때문에 자를 중니로 썼다. 덧붙여 막내의 자에는 유(幼)를 붙이는데, 사마의 막내 아우인 사마민의 자가 유달이었으며 마량의 막내 아우인 마속의 자는 유상이다. 마량 또한 자를 계상으로 썼는데, 이것이 백중숙계에 맞춘 것이라면 마량은 형제 중 넷째이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마씨 형제들의 자는 백상, 중상, 숙상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9] 즉 유방은 어린 시절 '막둥이' 정도로 불렸다는 얘기. 가까운 예로 올림픽 이전만해도 이름을 대충 짓느라(무성의하게 지어야 오래 산다는 믿음도 있고) 막동이, 막둥이, 막딸이 이렇게 짓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10] 여기서 유래하여 유방을 패상융준(沛上隆準) 또는 한준(漢準)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http://thesaurus.itkc.or.kr/search/view?dataId=4046&sType=_detail&q=&secType=uf&&fq=cateType2_fct%3A%EC%9D%B8%EB%AA%85%2F%EC%99%95%EC%8B%A4%2F%EA%B5%AD%EC%99%95&fq=catePeriod1_fct%3A%EC%A4%91%EA%B5%AD&fq=cateArea1_fct%3A%EC%A4%91%EA%B5%AD[11] 사실 홍문연과 파촉 분봉이 항우의 막나가는 행패긴 했지만, 유방 이외의 인물들에게 보인 훨씬 더 막나가는 행패에 비하면, 그래도 유방은 항우가 나름 눈치 봐가며 핍박을 한(?) 케이스에 속한다.[12] 그것도 자신의 무기라고 할 수 있는 한신, 조참, 관영, 시무 등은 전부 밖에 내보낸 채였다.[13] 만약 이들이 유방의 영향력 없이 자력으로 자기 군대를 이끌고 항우와 싸울 수 있었다면 애시당초 유방의 신하가 되었을 이유가 없다. 따지고보면 한신도 자기가 제왕의 자리에 오른 게 아니라 유방더러 제왕으로 임명해 달라고 청하고 있었고.[14] 한신이 완전히 통제된 건 아니었지만 대놓고 반란까진 저지르지 못한 게 자기 주변의 유방파 측근들을 경계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은 적지 않다.[15] (물론 유방의 군사 지휘력이 결정적인 요소지만,) 당시 유방의 군대는 '''보편적으로 지지를 받는''', '''황제의 군대'''였기에 사기가 오르긴 했지만 그 전까진 경포가 계속 이기고 있었기에 사기는 경포쪽이 좀 더 높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그 점을 감안해도 '''립서비스와는 거리가 100만 광년 먼 한신'''이 자신 다음인 "10만을 지휘할 수 있다." 라고 할정도로 온갖 경험과 조언 흡수를 통해 기본 군사적 역량 자체가 높았긴했고, 유방 또한 가만히 있는게 아니라 몸소 전장에서 전두지휘함으로써 그 이점을 배가시키는 쪽이였지만, 그럼에도 유방에게 시작부터 먹고들어가는게 다소 있었다는 이야기.[16] 백등산 포위전 문서에 나온 흉노의 패배는 일부러 패전하여 깐 밑밥이라고 한다. 애초에 백등산 포위전 자체가 유경의 충고를 듣지 않아서 일어난 일인데 한고제는 이전까지는 남의 충고를 그렇게 쉽게 내치는 인물이 아니었다.[17] 나중에 용저, 종리말, 계포 같은 핵심 인물들에게는 사과하기는 한다. [18] 항우가 인재를 대하는 수준을 보면 그는 다른 사람들을 근본적인 부분에서부터 형편없는 놈들이라고 깔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이다. [19] 역이기 또한 멍청한 놈이라고 욕을 먹었으나 잘만 대접받았다. 더구나 자신이 남을 무례하게 대하는만큼 남들이 자신을 무례하게 대해도 내로남불이 없는 편이었다. [20] 이는 후에 다른 사람들을 평하는 그의 발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21] 고릉 전투에서는 원래 오기로 되어있던 팽월, 한신은 오지 않았고, 유방은 대패하여 항우에 의해 위험에 빠진다. [22] 장량도 항상 유방의 수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한삼걸 중에 한고조가 그나마 적극적으로 붙잡았던 사람은 소하밖에 없다. 한신도 처음에는 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으며 나중에 가왕 시켜달라고 할 때도 자신을 떠나려고 해도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가 수하들의 말을 듣고 분노를 삭히고 대처한다. [23] 거병까지는 좋았지만 막상 일어난 후로는 눈에 띄는 군공도 세우지 못하는 상황에서 욕심이 앞서다보니 인망을 잃은 결과 숱하게 배신을 당한 끝에 부하의 손에 죽었다.[24] 덧붙여 유방 본인은 항우라는 당대 최고 망치의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가장 위험한 모루의 역할을 직접 수행했다.[25] 왕릉이 이를 탓하자 '''"지금 따지고 항거하는 건 자네가 나보다 낫지만 여태후가 죽은후 일을 정리하는 건 내가 자네보다 나을걸세."'''라고 대답했다고 한다.[26] 무례하다느니, 어린아이 같다느니, '''짐승만도 못하다나, 걸주 같다느니''' 등등.[27]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도 훌륭한 군주는 1. 스스로 좋은 생각을 짜내거나 2. 좋은 생각을 받아들일 줄 안다고 평가했는데 유방은 2의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역시 군주론에서도 2번이 말은 쉽지만 만만한 짓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자칭 조언자들이 옳은 조언만 할 리 없으며, 실제로는 자신들에게만 이익이 될 주장을 하는 것도 흔하기 때문이라고.[28] "吾遭亂世,當秦禁學,自喜。謂讀書無益。洎踐祚以來,時方省書,乃使人知作者之意,追思昔所行,多不是" [29] 팽성대전에서 참패하고 도주하던 중에 유방이 자기 자식들을 무거워서 마차 속도가 느리다는 이유로 '''몇번이나 달리는 마차 밖으로 던져버리자''', 마차를 몰던 하후영이 노하여 유방에게 했던 말.[30] 사실 지금도 심각한 결점이다. 위키를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대로 따지면 저자에 속해 있거나, 어느 정도 출세했다 하더라도 출신은 저자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현대에도 국가 영수나 기업 회장이 욕쟁이라면? 결점이지 결코 장점이 아니다. 당장에 대기업 부하 직원에게 욕설을 퍼붓는 모습이 언론에 노출되었다고 생각해보자 갑질 의혹이 붙을 것이다.[31] 물론 표면적인 이유고 실질적으로는 팽성에서의 패전등 복잡하게 얽혀있다. 애당초 위표 이 인간은 좀 이랬다저랬다하던 인간이라... 어찌되었건 나라의 군왕이 욕설로 시비가 붙어 분쟁이 일어났다는 명분을 갖다 붙일 수 있는 것 자체가 결점이다.[32] 물론 유방이 욕을 잘 퍼붓지만 그에 비해 뒤끝은 전혀 없었다. 위왕 위표도 유방이 죽인 게 아니라 유방이 없던 성고성에서 위표가 배신할 것을 두려워 유방의 부하들이 멋대로 죽인 것이고(물론 이전에 몇 번이나 배신을 때렸던 전적이 있었으니 어느 정도는 자업자득이지만...) 장오에게도 욕만 했을 뿐이고 또, 암살시도를 한 것도 장오가 아니라 그 신하들이었다. 그리고 유방은 이들을 조사하여 정말로 장오가 암살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풀어주기까지 하였다.[33] 소하가 '''평소에 쫌팽이처럼 굴지말고 좀 대범해지라고 돌려까면서''' 대범하게 한신을 등용하라고 추천했으며, 왕릉은 '''"항우만도 못한 인성"'''이라고 깠고, 진평은 '''"자꾸 욕만 하고 천박하게 구시니까 재물에 눈이 먼 놈들만 몰려들잖아요."'''라고 깠다.[34] 폭군으로 유명한 걸왕제신을 함께 일컫는 말로, 오늘날로 치면 "히틀러 같다."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연산군과 같다"와 같은 표현[35] 상황이 웃겼던 게, 주창이 진언하러 갔을때 매우 이른 시간임에도 유방이 동침하려는 장면을 목격하고 당황해서 "나중에 오겠습니다." 하고 나왔는데 유방이 장난기가 발동해 나체로 뛰쳐나와 그대로 주창을 넘어뜨리고 팔로 목을 속박하고 헤드락을 걸며 "얌마,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맘대로 그래!?" 하고 물어보는, 누가 봐도 장난치던 상황이었다. 갑작스런 공격에 흥분한 주창이 저런 답을 낼 수도 있다는 게 용인되는 상황이었다. 근데 저 말을 듣고 유방이 주창을 두려워하긴 했다고 한다. [36] 광무대치.[37] 사실 유방의 뒤통수를 친 것이기 보다는 유방의 부인인 여후와의 사이가 안 좋았고 유방이 늙어 오늘 내일 하는 사이 여후가 권력을 틀어쥐고 한신과 팽월을 숙청해대니 이제 내 차례겠거니 해서 지레 겁을 먹고 흉노로 달아난 것이지만...[38] 이쪽이야말로 진정한 숙청마스터들로 9족, 10족까지 멸하는건 물론이요 시답잖은 이유로도 엮어서 날려버렸다. 오죽하면 홍무제는 그 여파가 너무나 커 정작 영락제가 정난의 변을 일으켰을 때 건문제를 지켜줄 사람이 없었을 정도.[39] 당초엔 유방이 패현에서부터 알고지낸 가까운 사람들 위주로만 봉작을 내렸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소외감을 느낀 결과 굳이 옹치를 후로 봉해야 했던 것이라 오히려 이들은 유방 아래에선 편애를 받으며 지냈다. 왕릉, 주창, 주발 등이 유방이 죽은 후로는 성격 때문에 찍혀서 불행한 말년을 보내는 것만 봐도….[40] 괴철을 봐주긴 했지만 유방이 울컥해서 벌을 내리지 않은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죽기 직전에 번쾌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유방이 이걸 살려줄 것이라고 말하는 의견도 있지만 어쨌거나 최종적으로 내린 명령은 사형이고 이걸 유방이 살려줄 것인지 아닐 것인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41] 사실 이 부분은 그 당시 축첩이 당연하고 부인만 여러 명을 두었던 지배층 사이에서 이런 것에 앙앙불락하며 사사건건 대드는 여후가 오히려 당대의 도덕관으로는 적합하지 못하다. 유방의 주변 인물들은 계속 여자 문제로 남편을 쪼아대는 여후를 결코 좋게 보지 않았다. 유방이 어쨌건 저쨌건 간에 그랬다고 곱게 목을 베는 것도 아니고 인간을 돼지로까지 만드는 인간 돼지 사건은 여후의 미치광이 짓거리였고 여후 역시 유방 사후 열심히 잘 놀았다.[42] 항우본기와 번역등관열전을 보면 이 아이들을 구한 사람 또한 유방이다. 유방은 팽성대전정공에게서 벗어나자 가족을 거두기 위해 패현에 들렀고, 항우도 유방의 가족을 잡기 위해 패현에 사람을 보냈기에 가족들도 난리를 피해 도망친 와중이라 만날 수가 없었지만 대신에 아들인 유영과 장녀인 노원공주가 여후는 어쨌는지(...) 길거리에 버려져있는 것을 보고 이들을 자기가 타고 있는 수레에 태웠던 것이다. 그러나 애들을 마차에서 집어던진 것은 발작에 가까운 행동이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43] 예를 들어 유방은 형양에서 탈출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인 기신과 '''여자들을''' 자신과 자신의 병사로 분장시켜서 항우의 진영으로 보냈는데, 이때 기신이 결국 살해당했으니 다른 수천 명의 여성들도 멀쩡하게 끝냈을 리가 없다.[44] 현대에는 나름 당연하게 보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해를 하지 못하여서 나중에 사라진다. [45] 항우는 가는 곳마다 횡포를 일삼아 적을 만들고 다녔지만, 군사적 재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해서 자기보다 병력이 10배 이상 많은 상대조차 이겼을 정도다. 즉, 군사적인 우위 덕분에 몰락이 늦춰질 수 있던 것. 다른 능력도 개차반인데 군사적 능력조차 잘해봐야 평범하다면 진작에 망했을 것이다.[46] 유교에 대한 유방의 태도는 성장형 주인공을 연상시키는 흥미로운 점이 있다. 유생이나 세객들 업신 여기기를 즐겨하던 유방이 역이기에게 크게 지적받고, 자기 밑에서 수하나 역이기, 육가 같은 인물들이 혁혁한 공을 세우는 것을 보며 다르게 보다가 기신이나 주가, 종공 등이 유교적 충성심에 입각해 자기 대신 희생하는 것을 직면하게 되면서 더이상 유생들을 업신여기는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유교는 숙손통의 예법 제정 등을 시작으로 입지를 구축하다 한무제 즈음부터 명실상부한 한나라의 지배적 사상이 된다.[47] 이 발언에서 유래하여, 유방을 마상옹(馬上翁)혹은 마상지내옹(馬上之乃翁)이라고도 한다. 말 위의 어르신, 의역하자면 말 좀 타본 형님 정도?http://thesaurus.itkc.or.kr/search/view?dataId=4046&sType=_detail&q=&secType=uf&&fq=cateType2_fct%3A%EC%9D%B8%EB%AA%85%2F%EC%99%95%EC%8B%A4%2F%EA%B5%AD%EC%99%95&fq=catePeriod1_fct%3A%EC%A4%91%EA%B5%AD&fq=catePeriod2_fct%3A%EC%A4%91%EA%B5%AD%2F%EC%A0%84%ED%95%9C[48] 더벅머리 놈 정도로 번역되기도 한다.[49] 왕이 항상 남쪽을 향해 앉으므로(南面) 신하가 이것을 바라보면 북쪽이 되게 된다.[50] 여담으로 주나라의 마지막 왕인 난왕이 같은 해에 사망했다.[51] 아들과 손자들이 국가를 발전시킨 훌륭한 명군들이기 때문에 아들과 손자 때의 치세를 상징하는 말(성강지치, 문경지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