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가
陸賈
기원전 240년 ~ 기원전 170년
1. 생애
전한의 인물. 육고라고도 하며, 통칭 육생(육 선생)으로 불린다. 초한전쟁 당시의 정황을 실시간으로 기록한 1차사료로 전해지는 초한춘추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육가는 진나라 말기의 폭정과 초한전쟁기로 인한 대혼돈 속에서, 적어도 문장 쪽에서는 가장 독보적인 문장가라고 할 수 있다. 유지기의 사통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다.
여기서 "글을 아는 사람이 육가 뿐이었다" 건 정말로 육가 말고는 문맹이었다는 것보다도, 제대로 된 거대한 저작을 남길만한 사람이 육가뿐이었다 것이다.유씨(한나라)가 처음 일어났을 때, 글을 아는 이는 오직 육가 뿐이었다. 육가가 초, 한나라 사이에 벌어진 일을 (처음) 기록하기 시작했을 떄, (누군가 써놓은 글이 없다시피 하여) 마치 가려해도 길이 없고, 나가려해도 문이 없는 것과 같아,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초나라 사람으로 빈객으로 유방을 따라다녔다. 말재주가 좋아서 사신으로 자주 파견되었다고 한다.
육가는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시서를 인용하곤 했는데, 기본적으로 책이나 선비를 싫어했던 유방은 어느날 지긋지긋해져서 "이 몸께선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그깟 시서가 무슨 소용이냐?"라고 짜증을 내었다. 이 말을 듣자 육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유방은 민망해서 기분이 상했지만 육가에게 진나라와 과거 국가들의 멸망 사례에 대해 정리해서 글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육가는 신어(新語)라는 이름으로 국가의 존망에 대한 글을 묶어 쓰기 시작했는데, 그 수는 총 12편이었고 처음엔 언짢았던 유방도 육가가 신어를 한 권 써낼 때마다 좋아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정치 및 사상에 대한 확립이 부족한 전한 초기 유방의 통치를 도우며 사상적 기틀을 다졌다."말 위에서 얻은 천하를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천하통일 후 남월왕이 된 조타에게 인수를 전달하게 되었는데, 조타가 다리를 쩍 벌리고는 되먹지 못한 태도로 나오기에 "우리 황제가 5년만에 항우를 잡아 죽인걸 잊었소? 제장들은 다 그쪽을 정벌해서 죽이자고 하는걸 황제께서 그쪽이 잘못한 게 없고 백성들이 피곤할까봐 서로 잘 지내고자 하는데, 마땅히 신하된 도리를 보이질 못할 망정 뭘 하는 것이오? 우리가 월나라를 멸망시키지 못할 것 같소?"라고 위협하자 조타는 깜짝 놀라서 자기가 깜빡 예의를 잊었다고 해명했다. 조타는 슬쩍 소하, 조참, 한신에 비하면 내가 어떻냐고 물었는데, 육가는 왕께서 나은 것 같다고 대답했다.
조타가 장난기가 동했는지 아예 유방에 비하면 누가 낫냐고 묻자 육가는 대뜸 "황제께선 맨땅에서 중원을 일통하셨고 폐하의 땅이래봐야 우리 나라의 한 군에 불과한데요?"라고 정색했다. 어쨌든 조타는 할 말은 다 하는 육가가 마음에 들어서 몇 달이나 곁에 두고 술친구로 삼았다고 한다. 조타는 육가를 돌려보내면서 "남월에는 순 무식해서 말이 안통하는 녀석들 뿐이었는데 선생이 계실 땐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소."라며 무려 2천금을 선물했다. 여후가 집권하고 있을동안 조타에게 받은 금중 절반을 나누어 자식들의 생계에 보탠 뒤 남는 돈으론 어디 갈때마다 말 네마리가 끄는 안거에 타서 거문고를 튕기는 시종들을 이끌고 100금짜리 보검을 차면서 유유자적하게 살고 다녔다. 돈지랄이 따로 없지만(...) 자식들이 유산 때문에라도 자신에게 어련히 효도하도록 만들려는 의도적인 과시였던 듯.
유방 사후에는 여후의 횡포를 보다 못해 관직을 내려놓았으며, 사이가 나빴던 진평과 주발을 연합시켜서 여씨 척결에 큰 공을 세웠다.[1] 진평이나 주발 등 대부분의 공신들이 여씨의 전횡을 방조 혹은 아예 조장했다는 의혹을 제기할 만할 상황에서 육가만이 일관되게 유씨를 위해 움직였으니 유방 최후의 충신이라 할 수 있을 듯. 한편으론 여후에게 일조한 심이기를 굳이 보호하는 기이한 행보 또한 보였다.[2] 심이기 쪽은 그런 보람도 없이 회남왕 유장에게 살해당하긴 했지만.
2. 사상
육가는 순자의 제자로 알려진 부구백(浮丘伯)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육가 또한 초나라 사람이고 초나라는 순자의 학문적 영향력이 강했으므로, 순자의 영향력이 느껴지는 부분들이 많다. 그런 동시에 신어에서는 '논어' 의 영향력도 보이는데, 논어의 인용구나 논어의 주장 역시 많이 보인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법가와 도가의 영향도 있어서, 순자의 '인의' 를 주장하는 동시에 '왕도' 를 주장하면서도 법가와 도가의 모습을 보이는 뒤섞인 학문을 보여준다
즉, 현실중시적인 태도로 인해, 유가사상가들이 전통으로 피력하는 '삼왕' 마저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차피 도는 똑같은데, 뭐하러 굳이 그런 옛날 이야기까지 들먹일 필요 있나?" 하면서 부정한 것이다. 그 뒤의 구절도 인상적인데도는 가까운데 있으니, 굳이 요원한 먼 옛날에서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 핵심만 취하면 바로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춘추는 위로 오제를 언급하지 않았고, 아래로 삼왕을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제환공 - 진문공 등의 작은 선정과 노나라 군주 열 두 분의 정치적 공과를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를 근거로 성패의 효험을 충분히 알 수 있느니 뭐하러 먼 삼왕까지 들먹인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옛날 사람들이 하는 행위도 오늘날의 우리와 똑같았습니다. 사업을 벌이는 사람은 도덕을 떠나지 않았으며, 현악기를 조율하는 사람은 궁 - 상의 음조를 잃지 않았습니다. 천도는 사시의 균형을 잡고, 인도는 오상의 질서를 관리합니다. 주공과 요순은 하늘로부터 상서로운 징조, 즉 부명을 받았고, 진 2세와 걸 주는 하늘로부터 징벌의 재앙을 받았습니다.
신어 사술편
이 부분에서 육가는 "좋은 것이 하나만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 제대로 쓰여지는게 더 중요하다" 면서, '어디 좋은 것이 공자의 계통에서만 나오겠나? 여러가지 중에서 적당히 세상 변화에 따라 게중에 잘 골라서 쓰면 된다. 결과적으로 좋으면 다 좋은거다' 라고 말한다. 육가가 공자의 영향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신어에서도 '공자에 이르러 오경과 육예가 정해지고 문명이 집대성 되었다' 는 식의 구절이 있다. 즉 공자가 대단한 위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꼭 공자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쓸만하면 쓰자는 것. 육가의 경우는 말 그대로 '사상적인 면모에서 현실 영합적인' 당대 유가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좋은 말이 기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리한 검이 간장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미녀가 서시만 있는것도 아닙니다. 충신이 태공망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도 좋은 말은 있지만 왕량만한 말몰이꾼이 없으며, 예리한 검은 있지만 고운 숫돌에 가는 노력이 없으며, 미녀는 있지만 흰 분 검은 눈썹의 치장술이 없으며, 훌륭한 선비는 있지만 문왕 같은 분을 만나지 못했을 뿐입니다. 세상을 경영할 도술을 지녔음에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니 아름다운 옥이 갑 속에 깊이 감추어진 형국 입니다.
그러니 도를 품은 사람은 그에 맞는 환경이 갖추어져야 하고, 박옥을 가진 사람은 기술자의 가공을 기다려야 합니다. 도는 지혜로운 사람을 만나야 제대로 발휘되며, 좋은 말은 훌륭한 말몰이 꾼을 만나야 능력을 발휘하며, 현자는 성인을 만나야 제대로 쓰이며, 변론은 지혜로운 사람을 만나야 제대로 소통되며, 경서는 깨친 사람을 만나야 제대로 전파되며, 사리는 분별력 있는 사람을 만나야 제대로 밝혀집니다.
따라서 일을 관리하는 사람은 해당 규칙을 지켜야 하고, 약을 먹는 사람은 처방에 따라야 합니다.
'''좋은 책이 꼭 공자의 문하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며''', 좋은 약이 꼭 편작의 처방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도에 합치하는 것이면 모두 다 좋으며, 모범으로 삼을 수 있으며''', 세상의 변화에 따라 잘 저울질 하여 권력을 행사하면 됩니다.
신어 사술편
3. 기타
소설인 초한지에서는 친구인 하남왕 신양을 설득하기 위해 사신으로 떠나지만, 고향인 낙양에서 오래 떨어진 가족들을 만나자 생각이 바뀌어 신양을 설득하지 않고 몇 달을 그 곳에서 보냈다. 유방은 때마침 돌아온 장량에게 육가의 소식을 전했지만, 장량은 육가가 단지 가족들을 만나고 싶어 하남으로 가기를 자청했을 뿐이라며 유방이 직접 항복시켜야 한다고 대답했다. 장량이 위표를 설득하는 사이에 유방은 신양을 사로잡아 항복을 받았다. 육가는 왕을 속인 것에 몇 번을 죽어도 할 말이 없다고 무릎을 꿇고 죄를 청했으나, 유방은 자신 또한 가족이 항우에게 잡혀 있어 육가의 마음을 이해한다면서 죄를 묻지 않고 오히려 그를 가족과 함께 살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