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월

 





'''남비엣'''
'''南越'''
기원전 204년~기원전 111년
위치
중국 남방 ~ 베트남 북부
수도
번우
정치 체제
군주제
군주
1대 무제
2대 문제
3대 명왕
4대 애왕
5대 조건덕
언어
고대 중국어, 고대 베트남어, 좡어 외 여러 언어들
1. 소개
2. 역사
3. 역사적 평가
3.1. 베트남
3.2. 중국
3.3. 동아시아
4. 여담
5. 역대 군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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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중국 남부와 베트남 북부에 있었던 국가. 초한쟁패기에서 활동했던 중국 군웅 무제 조타가 중국 광둥 성 지역을 거점을 삼아서 건국한 국가이다. 그 뒤에 지금의 베트남 북부 지역에 있었던 구락국과 전쟁을 벌여서 구락국의 왕인 안양왕에게 승리하게 되고, 베트남 북부 지역을 통치하게 된다.
건국자 남월 무제의 성씨가 조씨(趙氏)이기 때문에 베트남에서는 조씨 왕조인 조조(趙朝)나 조가(趙家)라는 명칭으로도 불린다. 한때는 월남 북부에서 중국 광동-광시를 아울렀고 중국 남부를 위협할 정도로 잘 나갔었지만, 한(漢)나라의 황제인 한무제(漢武帝)에 의해서 5대만에 멸망을 당했다.

2. 역사


진나라 시대에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세력을 넓혀서 지금의 광둥과 광시 지방으로 진출하여 진나라의 영역에 들게 되었다. 이 때 이 곳에 파견된 인물인 진나라 장수 임오(任囂)와 부관인 조타(趙佗)[1]였다. 그러나 진시황이 죽고, 그 뒤를 이은 이세황제의 폭정으로 인해서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이들은 독립을 꾀하였다. 도중 임오가 고령으로 사망하면서 그의 부관 조타에게 그 대업을 넘겼다. 조타는 남방 3군을 통합해서 국가를 세우니 이 국가가 바로 남월(남비엣)이다. (越)은 당시 중국 남쪽의 월족, 혹은 월나라에서 따온 것이다. 당시 중국 남부 해안 지방의 민족을 중국에서는 주로 월이라고 불렀다. 월나라 항목 참조. 베트남의 역사서에 의하면 조타는 현지인과 같이 상투를 틀고 있었다고 한다.[2]
그러던 와중에 유방에 의해 전한(前漢)이 건국되고, 기원전 196년, 한고조 유방은 조타(찌에우 다)를 제후로 인정하여 남월왕(南越王)으로 봉하였다. 한동안은 별 일 없이 지내다가, 고황후가 철기 교역을 금지하면서 한나라와 남월은 대립관계에 들어갔고, 조타는 스스로 무제(武帝)를 칭하였다. 이 때에 베트남 북부 지역의 국가인 어우락을 정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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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제국의 남부 확장 과정을 담은 지도. 남월(지도의 Nam Viet) 영토 중 현대에는 중국에 속하는 쪽은 표시가 안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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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월(남비엣)의 최대 강역
남월은 최전성기에는 현재 오령산맥 남부, 베트남 북부, 광둥 성, 푸젠 성 서부를 다스리는 국가였지만, 제2대 국왕인 문제 조말(조호) 시대 이후에는 스스로 직위를 황제에서 왕으로 낮추고, 외왕내제 형식으로 가서, 제국이라고 부르기는 약간 애매모호하게 되었다. 홍콩마카오 지역도 이 때는 남월의 영역이었고, 이 때문에 이 시대에는 홍콩마카오를 비롯한 광동 지역 사람들은 본토의 한족과 합치지 않고서 이민족인 베트남인과 하나의 나라를 이뤘다고 하는 주장도 있지만 이 당시는 광동지역은 한족은 거의 없었고 베트남의 선조들인 월족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타가 국호를 왜 '''월'''이라고 했겠는가...[3]
한문제(漢文帝) 시기에는 화평도 맺어졌지만, 한무제가 즉위한 뒤 천하질서를 재편하기 시작하자 남월 역시 공격대상이 되었는데, 조타가 살아있을 적에는 한나라의 군대를 막아내어서 한동안은 화친관계가 지속되었으나, 제4대 국왕 애왕 조흥(趙興, Triệu Hưng, 찌에우흥)과 토착민 출신인 재상 여가(呂嘉, Lã Gia, 라지아)와의 대립이 불거져서 남월 내부에 쿠데타가 일어나서 제5대 국왕이자, 마지막 국왕인 조건덕(趙建德, Triệu Kiến Đức, 찌에우끼엔둑)이 추대되자, 이에 한나라는 노박덕을 남월 토벌군 사령관으로 삼아서, 공격했고, 기원전 111년에 남월을 멸망시켰다.
남월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남월 서부 지역의 교지(交趾, Giao Chỉ, 쟈오찌)와 구진(九眞, Cửu Chân, 끄우 쩐) 지방의 세력가들이 한나라 군에게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한나라에 항복하였고, 한나라는 옛 남월 영토에 9개 군을 설치하였다. 이 사건이 약 1천년에 이르는 중국의 베트남 지배의 시작이었다.

3. 역사적 평가



3.1. 베트남


베트남에서는 전통적으로 남월을 자신들의 역사라고 여겼다. 조타가 황제를 자칭하면서 베트남의 대중국투쟁의 시발점이 되었고, 현지인에 대해 우호적인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쩐 왕조 시절에 『대월사기』 편찬 당시 남월을 베트남의 기원으로 삼은 사실과 영남척괴열전 등의 전설집에서 현지인에 대해 우호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호찌민 또한 남월을 베트남 역사라고 여겼다. 예외적으로 18세기의 학자인 응오티씨(Ngô Thì Sĩ, 吳時仕, 오시사)가 조타를 중국인 군주로 취급하긴 했지만, 주류의견은 아니었다.
하지만 현재 베트남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1970년대 이후로 남월을 자신들의 역사로 보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남월이 한족과 토착민의 연합정권이었다 해도 군주는 중국계였던데다가, 현 베트남 북부에 있던 토착민족 국가[4]인 어우락을 정복했기 때문.[5] 남 비엣이 멸망한 후 세워진 교주(交州)의 정치적·경제적 중심지가 남 비엣의 수도 번우(番禺)가 있던 남해군(南海郡)이 아니라 현 하노이를 중심으로 하는 베트남 북부 교지군(交趾郡)이었다는 것, 전통시대 베트남에서 남월을 자신의 기원이자 정체성으로 여겨 남월과 그 시조 조타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베트남과 중국 간의 역사적 관계를 알 수 있는 부분.

3.2. 중국


중국에서는 남월을 별개의 국가로 취급한 한 왕조 시절을 제외하고는,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남월을 당연히 중국 왕조의 지방정권으로 보고 있다. 조타가 중국 출신이고, 남월이 지배했던 광둥성과 광시성이 한 무제의 정복 이래로 계속 중국 영토[6]였으니 당연히 남월도 중국역사의 일부로 보는 것.
하지만 조타의 고향이 있는 당시 조나라 상산(常山) 지방이 본래 까마득한 북쪽 변방으로서 옆동네인 흉노동호와 교류가 잦은 곳이었던지라 조타가 혈통적으로 정말로 순수한 한족이었는지도 불분명하다는 문제가 있으며, 조타가 남월을 다스리면서 현지인들에게 우호적인 제스쳐를 보이면서 그들의 습속을 따랐고[7], 남월이 이후 베트남의 대중국 저항의 기원이 됐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로 보기에는 애매하다. 게다가 반랑과 어우락이 역사적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문제가 따른다.

3.3. 동아시아


남월에 9개의 군현을 설치하는 것은 한 무제의 동서남북의 이민족 정복 및 관리 정책에 해당하는 사업이기도 하다. 한국의 역사적 기준에서는 낙랑군을 비롯한 한 사군의 설치는 비교적 한반도만의 사건으로 보는 편이지만 조금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보면 무제의 이민족 국가 정복, 군현 통제와 그 이후의 추이, 역사적 반향 등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많다.
애초에 고조선으로의 공세를 펼침에 있어서 어느정도 부침이 있었던 것은 고조선의 역량도 있었겠지만 한은 당시에 남월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이었다. 마침내 남월과의 전쟁이 정리되면서 고조선과의 전쟁에 모든 공력을 쏟아부을 수 있게 되면서 고조선도 결국 멸망하게 되었고 남월과 마찬가지로 군현이 설치되게 된다. 각 군현의 설치는 직접적 지배를 표상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각 재지세력를 어느 정도 존중해주면서 유지된 것으로 비교적 간접적인 것이 었다.
문화사적으로도 각 군현의 설치는 한 문화와의 직접적인 교류를 증대시키는 기능을 하기도 하였다. 베트남 또한 군현의 설치 이후 재지계 유물이 유지되면서도 일부 위세품, 신분을 상징하는 한식 유물이 부장되기 시작하며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삼한에 재지계 유물과 함께 한식 유물들이 다량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국의 역사에 있어 한나라의 군현 설치에 대해서 식민지의 수립, 흑역사 등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과정과 결과를 보면 식민지 정책이었을지언정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도 그렇게 까지 흥분하여 부정할 역사로도 볼 필요가 없다. 이 한 군현의 설치가 해당 민족 내지는 국가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한다면 바로 중원을 벗어나서의 '''동아시아 한 문화권의 형성'''이라는 것으로 현대에서의 동아시아에 문화적인 기준의 시작이 되는 사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4. 여담


베트남의 한자어인 월남은 남월을 베트남어 어순[8]대로 뒤집은 것으로, 정완 분쟁과 서산조의 이후 베트남을 통일한 가륭이 국호를 남월로 정할 예정이었지만, 청나라의 반대로 국호는 월남이 된다. 그만큼 소수 민족 왕조도 치를 떨 정도로 중국 왕조의 남방 지역을 괴롭혀온 나라이다.

5. 역대 군주 목록


대수
시호

재위 기간
비고
1
무왕(武王)
무제(武帝)
조타(趙佗)
기원전 204년경 ~ 기원전 137년

2
문왕(文王)
문제(文帝)
조말(趙眜)
조호(趙胡)
기원전 137년 ~ 기원전 125년경

3
명왕(明王)
조영제(趙嬰齊)
기원전 125년 ~ 기원전 113년경

4
애왕(哀王)
조흥(趙興)
기원전 113년경 ~ 기원전 112년

5
-
,<술양후(術陽侯)>,
조건덕(趙建德)
기원전 112년

[1] 베트남식 독음은 찌에우 다(Triệu Đà). 위타(尉佗)라고 불리기도 한다.[2] 마찬가지로 위만조선의 건국자 위만도 조선으로 넘어갈 때 조선인처럼 상투를 틀고 있었다고 전한다.[3] 비슷하게 위만도 왕이 된 후 국호를 조선 그대로 유지했다.[4] 물론 어우 락의 건국자 툭 판도 촉(蜀) 출신이라고는 하는데, 현 사학계는 이를 오류로 보고 있다.[5] 출처: 유인선, 『베트남과 그 이웃 중국』, 『베트남의 역사 (고대에서 현대까지)』[6] 이미 진시황 때 중국이 정복한 지역이긴 했지만 그 시기도 짧았고 얼마 안되어 조타가 독립정권을 세웠으니 실질적 편입시기는 한 무제 이후다.[7] 한고조가 조타를 책봉하려고 사신을 보냈을 때, 조타는 현지의 방식의 상투를 튼 차림새로 두 다릴 뻗고 앉아서 한의 사신을 맞이하는 등 현지 풍속에 동화해있었다. 게다가, 명왕 재위기 왕후였던 규씨(樛氏)의 전횡을 억제하며 대립각을 세웠던 승상 여가(呂嘉, Lữ Gia, 르쟈)가 토착민 출신이었다.[8] 베트남어에서는 수식어가 피수식어 뒤에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