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내리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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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세종문화재연구원, 2017, 영주 읍내리고분군1 -영주 읍내리고분군1 내 고분 긴급발굴조사 및 주변 고분군 분포조사.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제238호'''
'''영주 순흥 어숙묘'''
榮州 順興 於宿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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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태장리 산95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봉토묘
'''면적'''
1\,244㎡
'''지정연도'''
1974년 12월 6일
'''제작시기'''
신라시대
'''위치'''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제313호'''
'''영주 순흥 벽화 고분'''
榮州 順興 壁畵 古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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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산29-1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봉토묘
'''면적'''
180\,504㎡
'''지정연도'''
1985년 11월 7일
'''제작시기'''
신라시대
'''위치'''


1. 개요
2. 조사 내용
3. 여담
4. 바깥고리
4.1. 영주 순흥 어숙묘
4.2. 영주 순흥 벽화 고분
5. 사적 제238호
6. 사적 제313호


1. 개요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소재하고 있는 신라의 고분군. 순흥 어숙지술간묘(於宿知述干墓)와 읍내리 벽화고분은 그 역사적, 사료적 가치로 인해서 각각 사적 제238호 '''영주 순흥 어숙묘''', 사적 제313호 '''영주 순흥 벽화 고분'''으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로 영주 읍내리 고분군이라는 표현보다 순흥 읍내리 고분군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고 있다. 영주시 문서의 역사 항목에서 보이는 것 처럼 영주시 이전에 영주, 풍기, 순흥으로 구분되어 있던 탓으로 보인다.

2. 조사 내용


첫 발굴은 1971년 어숙지술간묘(사적 제238호)였으며 이후 1985년에 대구대학교 박물관과 문화재연구소에 의해서 읍내리 벽화고분(사적 제313호)가 발굴조사되었다. 두 고분다 고구려적인 특징을 갖고 있어서 애초에는 고구려 석실이 아닌가라고도 추정하였다. 그러나 벽화나 일부 묵서명의 표현만 제외하면 내용은 본질적으로 신라 고분이라는 점에서 최근에는 신라의 고분군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상술한 두 고분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신라적인 색채를 띠는 고분군이다.

3. 여담


흔히 국사책에서 볼 수 있는 역사지도의 이미지와 실제 이 읍내리 고분군의 존재와 관련지어 보면 고대의 영토적 개념에 대해서 재고할 여지를 준다. 특히 크고 아름다운 영토가 그려진 지도만 보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고구려장수왕 대, 신라눌지 마립간 시기의 기록을 보면

38년(서기 450), 신라인이 우리의 변방을 지키는 장수를 습격하여 죽였다. 임금이 노하여 병사를 출동시켜 공격하려 하였으나,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와 용서를 빌었으므로 이를 중단하였다.

三十八年 新羅人襲殺邊將 王怒 將擧兵討之 羅王遣使謝罪 乃止

삼국사기 제 18권 고구려본기 제 6

라는 기록이 존재하며, 이후 454년에도 고구려는 다시 신라의 북방을 공격하였다. 이때의 진출로 일반적으로 지금의 포항시 흥해면 일대까지 진출을 하였다고 되어 있다. 실제 고고학적으로도 흥해 냉수리 고분군도 그렇고 이 읍내리 고분군도 고구려적 성격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매우 단발적이고 옅게 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이 시점의 역사지도를 갖고 영역화된 점령을 했다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와 반대되는 영역화된 점령을 시도한 사례는 475년을 위시한 장수왕대의 남진이 해당한다.
위의 역사적 사건이 이 고분군의 시간과 맞지 않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5세기 후반, 6세기 전반 언저리의 시점까지도 이 지역은 고고학적 문화 양상을 보건데 고구려와의 접경지역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 강원도 남부의 신라산성 ─단양적성같은 산성들이 나타나서 선(線)적인 국경을 형성하기 전까지는 역사지도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영역이라고 이해해서는 안된다. 영토의 개념과 구성, 군사적 활동은 아무리 고대라고 할지라도 현대처럼 복잡다난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고 실행되는 것이다. 역사를 나름대로 분석하는 일부 집단들의 확장주의는 이처럼 고려되어야할 역사적, 고고학, 문화적인 요소들이 심각하리만치 배제된 채 영토에 대해서 넓혀 이야기하는 경향이 크다.

4. 바깥고리



4.1. 영주 순흥 어숙묘



4.2. 영주 순흥 벽화 고분



5. 사적 제238호


비봉산 서남 남사면에 있는 신라의 벽화무덤으로 1971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하였다. 흙을 쌓아 올린 원형 봉토무덤으로 지름은 16m이며 파손이 심하여 높이는 확인할 수 없다. 봉토 아래쪽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돌을 돌렸다. 내부는 널방(현실)과 널길(연도)이 있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이다.

현실의 4곳의 벽과 천장 표면에는 석회를 바르고 벽화를 그렸으며, 바닥에는 널을 올려놓는 넓은 널받침을 설치하였다. 서쪽 벽 위에는 도굴로 인해 흙이 밑에 쌓여 있었고, 유물은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널방은 돌로 문짝을 세워 닫았으며, 널길 입구에는 막돌을 쌓아 막았다.

그림은 무덤 전반에 걸쳐 그려졌으나 자연적인 습기 등으로 파괴되고 널길천장과 문짝에만 벽화가 남아있는데 모두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천장에는 대형 연꽃무늬 1개가 그려져 있는데 붉은색 한가지로만 연꽃을 그린 것이 특색이다.

돌로 만든 문짝의 바깥쪽에는 인물상으로 보이는 그림이 전면에 그려 있으나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으며, 문짝의 안쪽에는 ‘을묘년어숙지술간’이란 글을 새겼다. 을묘년은 연꽃무늬로 보아 법흥왕 불교 공인 이후인 6세기말의 진평왕 17년(595)년으로 추정되며, 어숙은 사람 이름으로 고구려계이다. 술간은 신라의 관직명으로 6세기경 이 지방이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지역이라는 독특한 상황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순흥 벽화무덤과 함께 신라 영역에서 발견된 벽화무덤이라는 점과 이름이 있는 신라 유일의 무덤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연꽃무늬와 어숙이라는 사람 이름이 고구려계로 추측되어, 이 지역이 고구려와 신라의 통로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순흥어숙묘 → 영주 순흥 어숙묘)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6. 사적 제313호


비봉산 정상(높이 431m)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내려온 구릉의 경사면에 있는 무덤이다.

무덤의 외형은 둥글고 내부는 널방(현실)과 그 방에서 입구를 연결하는 널길(연도)로 이루어진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다. 널방은 4각형으로, 크기는 동·서 약 3.5m, 남·북 약 2m, 높이 약 2m이다. 벽에서 천장으로 갈수록 좁아지며 천장은 2장의 돌이 나란히 덮혀 있다. 천장을 제외한 모든 벽면에는 채색화가 그려져 있다.

동벽에는 새의 머리 그림이, 남벽에는 사람과 글씨가, 북벽에는 3개의 산과 연꽃, 구름무늬가, 서벽에는 나무와 집이 있고 수문장으로 추정되는 역사(力士)가 그려져 있다.

널길의 동·서쪽 벽면에도 그림이 있는데, 서벽엔 뱀을 손에 잡아 감고 있는 사나이의 모습이, 동벽에는 눈을 부릅 뜬 힘 센 사람의 그림이 있다. 이것은 무덤의 시신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그려진 것으로 해석된다.

이 무덤의 그림들은 삼국시대 회화는 물론 당시의 종교관·내세관, 고구려와의 문화교류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순흥읍내리벽화고분 → 영주 순흥 벽화 고분)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