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공정대
義烈空挺隊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 육군이 만든 특수부대(?).
1944년 11월, B-29의 도쿄 공습이 시작되면서 일본군도 이에 대해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실질적인 피해가 없는 것과 별개로 덴노가 사는 제도 도쿄의 하늘을 허구한 날 미군 폭격기가 누비며 폭격을 퍼부으니 당연한 일. 둘리틀 특공대때도 크게 긴장하여 결국 미드웨이 공략이라는 무리수를 둔 일본군이, 그때와 달리 거의 매일같이 날아오는 공습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일본군에게 B-29의 발진기지인 괌과 사이판을 공격할 수단이 없었다'''는데 있었다. 해군은 필리핀 해 해전과 레이테 만 해전을 거치며 완전히 소멸, 레이테 만 해전 직후 겨우 건조 및 취역시킨 최대규모의 항모 시나노는 11월 29일 격침되었다. 설령 격침을 면했더라도 시나노 한 척으로 괌과 사이판을 친다는 건 미친 짓이겠지만. 육군이 가진 가장 큰 폭격기 Ki-67 히류조차 항속거리 3,800km로 폭탄을 만재한 상태에서 도쿄-괌 직선거리 2,500km를 왕복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거리를 줄이기 위해 보소 반도 남단에서 사이판으로 간격을 줄여도 2,250km로 여전히 택도 없다. 더군다나 이놈은 폭장량 자체가 적어서 폭장을 덜 싣고 연료를 늘린다는 개념으로 사이판 공격을 시도할 수도 없었다. 사실 이놈만이 아니라 일본군의 폭격기 개발 테크트리가 폭장량을 줄이고 대신 기동성과 운동성능, 속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발전해서 어쩔 수 없긴 했다.[1]
하지만 육군으로선 어떻게든 B-29 기지를 타격해야 한다는 절박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육군의 영원한 라이벌 해군이야 상술했듯 연합함대 전멸로 어떤 활동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대본영 전체와 내각 그리고 '''덴노의 기대'''는 모두 육군에게 쏠려 있었다. 그리고 육군은 그동안 놀고 있던 정예부대인 정진 제1연대를 떠올린다.
정진대는 2차대전 유럽전선 초기 독일 팔슈름예거의 대성공을 보고 감명을 받은 일본 육군이 만든 공수부대로, 제1, 제2 2개 연대가 있었으며 그 중 제1연대가 좀 더 역사가 길고 본토에서 전략적 투입을 기다리던 정예부대로 남방작전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팔렘방 공수전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2]
정진대 2개 연대 중 제2연대는 필리핀 전선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었고, 제1연대가 본토에서 대기되어 투입을 대기 중이었는데 대본영은 바로 여기에 주목했다. 육군은 정진 제1연대 중에서도 다시 정예병력 1개 중대 126명을 차출하고 추가로 일본군의 정보전학교인 나가노 학교 출신의 정보장교 및 통신장교 총 10명을 차출하여 총원 136명의 정예부대 의열공정대를 창설한다. 즉, 사이판 공격을 위해 공수특수부대를 창설한 것이다.
함대를 동원한 공격이나 항공기를 동원한 폭격 모두 불가능했으니 특수부대를 편성, 비행장을 공격한다는 개념은 충분히 납득할 만 했다. 현대전에서도 특수부대의 주요 공격목표 중 하나가 바로 비행장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래본들 근본적인 거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폭격기도 항속거리 문제로 사이판을 공격할 수 없는데, 수송기라고 멀쩡할까? 그나마 해군이 가진 일부 수송기(비행정 H8K나 폭격기였다가 수송기로 전용된 G5N 신잔)가 항속거리 면에서 사이판까지 작전이 가능했지만, 폭격기와 마찬가지로 호위기없는 수송기만의 단독 돌입은 자살행위였고, 무엇보다 해군이 육군의 작전에 수송기를 내어줄 리가.(...)
이에 육군의 선택은 '''일종의 자살작전'''. 사실, 필리핀 전선에서 정진 제2연대가 이미 미군이 점령한 레이테 섬의 비행장에 공수작전을 단행, 자살행위에 가까운 비행장 공격을 시도했으나 큰 성과 없이 전멸된 사례가 있었다. 거리문제상 정진 제1연대 전부는 투입 못하더라도 1개 중대 규모인 의열공정대의 투입은, 귀환할 방법이 없다는 사소한(?) 문제만 빼면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다.
육군은 일선에서 물러나있던 Ki-21 중폭격기 몇 대를 인원수송용으로 개조하여 의열공정대에 배치했다. 다만, Ki-21 역시 항속거리가 짧아서 본토에서 사이판 섬으로 한 번에 비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대신 이오지마에 중간기착하여 급유를 한 후 재출격, 사이판에 도달하는 것으로 계획했다. 문제는 그 이후인데, 정진대가 육군의 정예부대이긴 했지만 몇 년간에 걸친 유류부족으로 대규모 공수훈련을 추가로 실시할 여력이 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투입된 기체들은 항속거리 문제로 사이판까지 편도 비행 후 돌아올 방법이 없었다. 때문에 의열공정대는 정상적인 공수작전대신, '''투입된 기체들이 미군 점령하 활주로로 강행 착륙'''하고, 적진에서 재정비나 급유를 할 수 없으니 착륙한 기체들은 모조리 포기하고, 대신 주변에 널린 B-29를 최대한 파괴하면서도 그 중 1대만을 살려둔 다음 그 1대에 특공대가 타서 귀환한다(...)는 것으로 계획이 수립되었다. 특공대의 귀환도 귀환이지만, 당시 일본군이 확보하지 못했던 초장거리 전략폭격기 B-29를 어떻게든 확보해서 연구할 필요성도 있었다.[3]
이런 일련의 계획에 일본군은 의호작전(義号作戦)이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붙여가며 큰 기대를 걸었다.
문제는 이오지마에 허구한 날 미군의 공습이 가해지는 바람에 의열공정대의 투입 계획이 계속 지연되었다는 것이고, 결국 해가 넘어가 1945년 3월, 이오지마는 함락당한다. 이오지마가 함락되어 재급유장소가 사라지게 됨으로서, 기존의 계획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사이판에 의열공정대를 투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의열공정대는 도쿄대공습을 바라보며 발이나 동동 굴러야했다.
그러나 이왕 만든 특공대, 대본영은 어떻게든 다른 곳에서라도 활용처를 찾고자 했고 그 활용처는 비교적 일찍 나타났다. 오키나와 전투가 막바지로 들어서면서 미군은 오키나와 섬의 욘탄, 가데나 비행장에 전투기들을 전개시켰고 이들 전투기들은 큐슈 남부 일대를 활공하며 닥치는 대로 일본군 시설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가미카제 공격이 차질을 빚는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미군 전투기 기지에 타격을 가하고자 했으나 '''대부분의 기체를 가미카제용으로 전용해서''' 띄울 기체가 매우 적었다. 때문에 사이판 공격이 취소되어 대기되고 있던 의열공정대에 투입 명령이 떨어진다.
1945년 5월 24일 6시 50분, 구마모토 비행장에서 Ki-21 중폭격기 12대가 출격, 밤 10시를 전후로 오키나와 상공에 도달했다. 야간을 틈타 미군기들의 요격을 피한 폭격기들은 차례차례로 욘탄 비행장에 강행착륙을 시도했으나, 이들의 공격은 일제히 이뤄지지 않고 '''순차적'''으로 몇 분 간격씩 이뤄졌다. 아마도 파일럿의 숙련도 문제 및 야간비행에 따른 항법착오 등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미군 대공포 부대는 접근하는 기체들을 순차적으로 요격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일거에 투입되었으면 대공포화가 선도기에 집중되는 동안 후속기들이 대거 강행착륙에 성공이라도 했을텐데.
그렇게 욘탄 비행장에는 Ki-27 6기가 강행착륙을 시도했고, 이중 5기가 격추되었으며 겨우 1기만이 강행착륙에 성공했다. 이 강행착륙한 기체에서 튀어나온 의열공정대 십여 명이 닥치는 대로 주변을 공격하며 매우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워낙 병력 수가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서 한두 시간의 교전 끝에 전멸되었다.
그 와중에도 의열공정대는 본래 목표인 항공기 파괴에 집중하여 미군의 인명 피해는 부상 18명에 불과했다. 전사자 2명이 있긴 한데 교전 중 전사가 아니라 격추한 일본기가 대공포대 근처에 추락하면서 대공포대가 매몰되어 질식사했다. 대신 항공기 피해가 좀 있었는데 완파 7기(F4U 콜세어 전투기 2기, C-54 수송기 4기, PB4Y-2 폭격기 1기) 파손 19기(B-24 폭격기 1기, F6F 헬캣 전투기 3기, F4U 전투기 15기)에 달했다. 이중 파손의 경우 야간전투 와중에 미군간의 오인사격으로 인한 것이 다수라는 것이 함정.(...)
참고로 투입된 12기 중 나머지 6기의 운명은, 2기는 다른 곳에서 격추, 4기는 길을 못 찾아 그냥 귀환.(...)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 육군이 만든 특수부대(?).
1. 배경
1944년 11월, B-29의 도쿄 공습이 시작되면서 일본군도 이에 대해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실질적인 피해가 없는 것과 별개로 덴노가 사는 제도 도쿄의 하늘을 허구한 날 미군 폭격기가 누비며 폭격을 퍼부으니 당연한 일. 둘리틀 특공대때도 크게 긴장하여 결국 미드웨이 공략이라는 무리수를 둔 일본군이, 그때와 달리 거의 매일같이 날아오는 공습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일본군에게 B-29의 발진기지인 괌과 사이판을 공격할 수단이 없었다'''는데 있었다. 해군은 필리핀 해 해전과 레이테 만 해전을 거치며 완전히 소멸, 레이테 만 해전 직후 겨우 건조 및 취역시킨 최대규모의 항모 시나노는 11월 29일 격침되었다. 설령 격침을 면했더라도 시나노 한 척으로 괌과 사이판을 친다는 건 미친 짓이겠지만. 육군이 가진 가장 큰 폭격기 Ki-67 히류조차 항속거리 3,800km로 폭탄을 만재한 상태에서 도쿄-괌 직선거리 2,500km를 왕복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거리를 줄이기 위해 보소 반도 남단에서 사이판으로 간격을 줄여도 2,250km로 여전히 택도 없다. 더군다나 이놈은 폭장량 자체가 적어서 폭장을 덜 싣고 연료를 늘린다는 개념으로 사이판 공격을 시도할 수도 없었다. 사실 이놈만이 아니라 일본군의 폭격기 개발 테크트리가 폭장량을 줄이고 대신 기동성과 운동성능, 속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발전해서 어쩔 수 없긴 했다.[1]
하지만 육군으로선 어떻게든 B-29 기지를 타격해야 한다는 절박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육군의 영원한 라이벌 해군이야 상술했듯 연합함대 전멸로 어떤 활동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대본영 전체와 내각 그리고 '''덴노의 기대'''는 모두 육군에게 쏠려 있었다. 그리고 육군은 그동안 놀고 있던 정예부대인 정진 제1연대를 떠올린다.
2. 계획
정진대는 2차대전 유럽전선 초기 독일 팔슈름예거의 대성공을 보고 감명을 받은 일본 육군이 만든 공수부대로, 제1, 제2 2개 연대가 있었으며 그 중 제1연대가 좀 더 역사가 길고 본토에서 전략적 투입을 기다리던 정예부대로 남방작전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팔렘방 공수전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2]
정진대 2개 연대 중 제2연대는 필리핀 전선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었고, 제1연대가 본토에서 대기되어 투입을 대기 중이었는데 대본영은 바로 여기에 주목했다. 육군은 정진 제1연대 중에서도 다시 정예병력 1개 중대 126명을 차출하고 추가로 일본군의 정보전학교인 나가노 학교 출신의 정보장교 및 통신장교 총 10명을 차출하여 총원 136명의 정예부대 의열공정대를 창설한다. 즉, 사이판 공격을 위해 공수특수부대를 창설한 것이다.
함대를 동원한 공격이나 항공기를 동원한 폭격 모두 불가능했으니 특수부대를 편성, 비행장을 공격한다는 개념은 충분히 납득할 만 했다. 현대전에서도 특수부대의 주요 공격목표 중 하나가 바로 비행장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래본들 근본적인 거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폭격기도 항속거리 문제로 사이판을 공격할 수 없는데, 수송기라고 멀쩡할까? 그나마 해군이 가진 일부 수송기(비행정 H8K나 폭격기였다가 수송기로 전용된 G5N 신잔)가 항속거리 면에서 사이판까지 작전이 가능했지만, 폭격기와 마찬가지로 호위기없는 수송기만의 단독 돌입은 자살행위였고, 무엇보다 해군이 육군의 작전에 수송기를 내어줄 리가.(...)
이에 육군의 선택은 '''일종의 자살작전'''. 사실, 필리핀 전선에서 정진 제2연대가 이미 미군이 점령한 레이테 섬의 비행장에 공수작전을 단행, 자살행위에 가까운 비행장 공격을 시도했으나 큰 성과 없이 전멸된 사례가 있었다. 거리문제상 정진 제1연대 전부는 투입 못하더라도 1개 중대 규모인 의열공정대의 투입은, 귀환할 방법이 없다는 사소한(?) 문제만 빼면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다.
육군은 일선에서 물러나있던 Ki-21 중폭격기 몇 대를 인원수송용으로 개조하여 의열공정대에 배치했다. 다만, Ki-21 역시 항속거리가 짧아서 본토에서 사이판 섬으로 한 번에 비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대신 이오지마에 중간기착하여 급유를 한 후 재출격, 사이판에 도달하는 것으로 계획했다. 문제는 그 이후인데, 정진대가 육군의 정예부대이긴 했지만 몇 년간에 걸친 유류부족으로 대규모 공수훈련을 추가로 실시할 여력이 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투입된 기체들은 항속거리 문제로 사이판까지 편도 비행 후 돌아올 방법이 없었다. 때문에 의열공정대는 정상적인 공수작전대신, '''투입된 기체들이 미군 점령하 활주로로 강행 착륙'''하고, 적진에서 재정비나 급유를 할 수 없으니 착륙한 기체들은 모조리 포기하고, 대신 주변에 널린 B-29를 최대한 파괴하면서도 그 중 1대만을 살려둔 다음 그 1대에 특공대가 타서 귀환한다(...)는 것으로 계획이 수립되었다. 특공대의 귀환도 귀환이지만, 당시 일본군이 확보하지 못했던 초장거리 전략폭격기 B-29를 어떻게든 확보해서 연구할 필요성도 있었다.[3]
이런 일련의 계획에 일본군은 의호작전(義号作戦)이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붙여가며 큰 기대를 걸었다.
3. 경과
문제는 이오지마에 허구한 날 미군의 공습이 가해지는 바람에 의열공정대의 투입 계획이 계속 지연되었다는 것이고, 결국 해가 넘어가 1945년 3월, 이오지마는 함락당한다. 이오지마가 함락되어 재급유장소가 사라지게 됨으로서, 기존의 계획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사이판에 의열공정대를 투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의열공정대는 도쿄대공습을 바라보며 발이나 동동 굴러야했다.
그러나 이왕 만든 특공대, 대본영은 어떻게든 다른 곳에서라도 활용처를 찾고자 했고 그 활용처는 비교적 일찍 나타났다. 오키나와 전투가 막바지로 들어서면서 미군은 오키나와 섬의 욘탄, 가데나 비행장에 전투기들을 전개시켰고 이들 전투기들은 큐슈 남부 일대를 활공하며 닥치는 대로 일본군 시설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가미카제 공격이 차질을 빚는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미군 전투기 기지에 타격을 가하고자 했으나 '''대부분의 기체를 가미카제용으로 전용해서''' 띄울 기체가 매우 적었다. 때문에 사이판 공격이 취소되어 대기되고 있던 의열공정대에 투입 명령이 떨어진다.
4. 실전
1945년 5월 24일 6시 50분, 구마모토 비행장에서 Ki-21 중폭격기 12대가 출격, 밤 10시를 전후로 오키나와 상공에 도달했다. 야간을 틈타 미군기들의 요격을 피한 폭격기들은 차례차례로 욘탄 비행장에 강행착륙을 시도했으나, 이들의 공격은 일제히 이뤄지지 않고 '''순차적'''으로 몇 분 간격씩 이뤄졌다. 아마도 파일럿의 숙련도 문제 및 야간비행에 따른 항법착오 등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미군 대공포 부대는 접근하는 기체들을 순차적으로 요격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일거에 투입되었으면 대공포화가 선도기에 집중되는 동안 후속기들이 대거 강행착륙에 성공이라도 했을텐데.
그렇게 욘탄 비행장에는 Ki-27 6기가 강행착륙을 시도했고, 이중 5기가 격추되었으며 겨우 1기만이 강행착륙에 성공했다. 이 강행착륙한 기체에서 튀어나온 의열공정대 십여 명이 닥치는 대로 주변을 공격하며 매우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워낙 병력 수가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서 한두 시간의 교전 끝에 전멸되었다.
그 와중에도 의열공정대는 본래 목표인 항공기 파괴에 집중하여 미군의 인명 피해는 부상 18명에 불과했다. 전사자 2명이 있긴 한데 교전 중 전사가 아니라 격추한 일본기가 대공포대 근처에 추락하면서 대공포대가 매몰되어 질식사했다. 대신 항공기 피해가 좀 있었는데 완파 7기(F4U 콜세어 전투기 2기, C-54 수송기 4기, PB4Y-2 폭격기 1기) 파손 19기(B-24 폭격기 1기, F6F 헬캣 전투기 3기, F4U 전투기 15기)에 달했다. 이중 파손의 경우 야간전투 와중에 미군간의 오인사격으로 인한 것이 다수라는 것이 함정.(...)
참고로 투입된 12기 중 나머지 6기의 운명은, 2기는 다른 곳에서 격추, 4기는 길을 못 찾아 그냥 귀환.(...)
[1] 그래도 그에 준하는 개량을 해서 외부연료탱크를 달고 기체를 경량화하는 등등의 개조를 한 물건이 있기는 한데 우글우글한 미군 전투기들을 호위기도 없는 소수의 폭격기가 돌파하여 공습을 할 수 있을지는.[2] 참고로, 해군 역시 육군에 질 수 없어서(...) 해군육전대 요코스카지대를 공수부대로 운용했다.[3] 1944년이면 아직 B-29의 일본 본토 공습이 소규모로 진행 중이어서 격추 및 추락으로 일본 영토에 추락한 B-29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