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6F 헬캣

 




1. 개요
2. 설계
3. 헬캣의 양산과 카탈로그 성능
3.1. 그리고 실전
4. 퇴장
5. 역대 라인업
6. 매체에서의 등장
7. 둘러보기

'''Grumman F6F Hellc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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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헬캣의 도장과 마킹은 항공모함 USS 에식스의 VF-15 소속으로 34대 격추를 기록한 에이스 데이비드 맥캠벨(David McCampbell)[1]의 기체 "Minsi III"를 재현한 것이다.

1. 개요




영국 해군 Hellcat Mk.1 도장의 기체와 미국 해군의 전쟁 중반 다크블루-라이트블루-화이트 3색 도장 기체, 그리고 전쟁 후반 씨-블루 도장의 기체를 모두 볼 수 있다.

A6M과의 재현비행.

제원(F6F-3 기준)

전장 : 10.24m

전폭 : 13.06m[2]

전고 : 3.99m

주익면적 : 31m²

자체중량 : 4,176kg

전비중량 : 5,704kg

익면하중 : 184kg/m²

최고속도 : 618km/h

항속거리 : 1,536km

프로펠러 : 해밀턴 스탠다드 3엽 프로펠러, 직경 13피트 1인치

엔진 : 프랫&휘트니 R-2800-10W '더블 와스프' 복렬 18기통 공랭식 성형 엔진 2,000마력

무장 : 주익에 12.7mm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6정, 정당 탄약 400발 - 총 2400발

폭장 : 양 주익 내측 파일런에 11¾인치 'Tiny Tim' 로켓 2발/1,000파운드(450kg) 폭탄 2발/500파운드(227kg) 폭탄 2발/250파운드(110kg) 폭탄 2발

양 주익 외측 파일런에 5인치 HVAR 로켓 6발/100파운드(45kg) 폭탄 6발

동체 센터라인에 11¾인치 'Tiny Tim' 로켓 1발/2,000파운드(907kg) 폭탄 1발/1,600파운드(726kg) 폭탄 1발/1,000파운드(450kg) 폭탄 1발/500파운드(227kg) 항공폭탄 1발/Mk.13-3 항공어뢰 1발[3]

실험용 특설 파일런에 AIM-7 스패로우 미사일[4]

상승률 : 해수면에서 최대 3250ft/min. (16.5m/s)

단가 : 35,000달러(1945)[5]

제2차 세계 대전 중후반의 미 해군 주력 함상전투기. 일본 해군항공대를 패망시킨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의 주역이 된 전투기이다.
그루먼 사의 전통에 따라 별칭은(미해군 고양이가문) Cat이란 단어가 들어간다. 그런데 애칭인 헬캣(Hellcat)[6]은 사전을 찾아보면 "지옥 고양이"라는 뜻이 아니라 '히스테릭한 여자' 내지 '손도 못 댈 말괄량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A6M 최악천적이자 언더테이커로 활약한만큼 일본군에게는 정말로 '''지옥에서 올라온 고양이''' 였으며, 태평양 상공이 일본군이 얼쩡거릴 구역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가르쳐 준 '태평양의 미친 년'이기도 했다. 즉 어찌 해석하든 결과적으로는 다 맞는 작명.

1943년 제작된 조종사 교육용 안내영상.

2. 설계


헬캣의 설계는 진주만 공습이 있기 훨씬 이전인 1938년부터 시작했다. 이 무렵 미 해군은 주력전투기로 F4F 와일드캣을 승인(1938년 10월)한 상태였으나 점점 높아져가는 전운을 감지한 상황이라 즉시 차기 주력전투기 개발을 추진하기로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이 때 그루먼(Grumman) 사는 향후 대규모로 징집될 미숙련 파일럿[7]이 조종할 수 있을 정도로 신뢰성이 높고 생존성이 우수하며 탑재량이 많으면서도 생산성 또한 우수한 격투전용 기종을 개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즉, 기존 베테랑 파일럿의 요망에 따른 고고도전 우선의 고출력, 고속전기를 요구받은 보우트(Vought) 사와는 정반대였다. 이는 하이로우 믹스로 예산 절감과 함께, 생산성이 좋으면 해군항공대의 수요를 충분히 확보한 다음 어느 정도 랜드-리스를 통해 동맹국에게도 인도될 것도 고려한 판단에서였다.
사내번호 G-35로 시작된 이 기체는 처음에는 1,600마력 엔진을 장착한 와일드캣 개량형 정도로나 인식되고 있었다. 그 결과 와일드캣을 옆그레이드한 수준의 실망스러운 성능에 경쟁기이자 자매기(?)[8]인 보우트 F4U 콜세어와의 확연한 성능격차를 보이는 망작이 되고 말았다.[9] 이에 해군은 개선지시를 내려 2,000마력 엔진을 장착한 G-50으로 이행했다. G-50에 이르자 기체형상 일부는 F4F와 유사한 면도 있었으나 실제로는 부품조차 공통되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전혀 다른 전투기가 되었다.
1941년 6월 30일, P&W 트윈와스프 R-2600-10(1,700hp) 엔진을 장착한 원형기 XF6F-1 2대가 비행에 성공했고 성능이 퍽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으나 해군으로서는 수요가 워낙 급했기에[10] 2,000hp 엔진 탑재형을 보지도 않고 1942년 1월, 1,000대의 인도계약을 체결한다.
간혹 제로센 쇼크에 빠져있던 미군이 불시착한 코가 타다요시의 제로센('아쿠탄 제로'로 불렸다)을 노획하자 이를 면밀히 분석하여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헬캣을 개발했다는 이야기를 간혹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거짓으로, 연합군이 경험한 제로센 쇼크와 중국 등을 통해서 자료를 입수한 상태에서 제로센을 의식하고 헬캣 개발에 영향이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날짜를 면밀히 살펴보면 알래스카 근처에서 코가의 제로센을 노획하기 훨씬 이전에 헬캣의 설계와 개발이 끝났기 때문에 아쿠탄 제로가 헬캣에 미친 영향은 없었다.[11] 코가의 제로센은 미군 도장이 칠해진 뒤 미국의 전투기들과 비교과정을 거쳐 장단점을 파악, 이에 따라 대 제로센용 전술이 새로이 개발되고 보완되는데 한몫하기는 했다.[12] 참고로 당시 제로센의 단점 중 하나는 급강하 도중 특정 속도를 넘으면 좌우로 롤을 하기 힘들어진다는 것이었다. 특히나 오른쪽 롤은...

3. 헬캣의 양산과 카탈로그 성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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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W 트윈 와스프 R-2800-10(2,000hp)엔진을 장착한 XF6F-3이 1942년 6월말에 날아 올랐다.
이 시기, 헬캣의 경쟁기인 콜세어는 실속시 기체 제어가 곤란하다는 문제점과 항공모함 착함시 발생하는 제어 불능, 기수가 매우 길다란 디자인 탓에 착함시 기수를 들면 전방 시계가 제한된다는 문제점 ~을 가지고 있었다. 즉 함재기로 사용이 불가능했었던 상태. 그래서 해군 항공대의 의견에 따라 해병대에게 떠넘겨진 상태였고 그 사이에 그루먼 사가 F6F를 코피를 흘려가며 생산한 덕에 양산기는 모조리 R-2800-10 엔진을 장비한 F6F-3로 채울 수 있었다.
헬캣은 결코 세련된 고성능기라고는 할 수 없었다. 생산성을 위해 곡선 부분을 없애는 바람에 유선형기가 판치는 가운데 P-47 썬더볼트와 같이 각지고 뚱뚱한 모양새였으며 그 덕에 공기역학적으로도 단점이 많아 속도는 2,000마력 엔진 전투기로서는 가장 느렸다.[13] 함상기로서는 너무 무거워 특히 착함시 랜딩 기어가 부러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거기에 일반 리벳을 사용해서 공기저항과 무게면에서는 손해를 봤지만 정비성과 내구성에서는 유리하였으니 일장일단이라 할 수 있겠다.[14] 어쨌든 싸워야 할 주적인 제로센과 비교하면 속도에서 80km/h 이상이 빨랐고 최대 상승고도와 급강하성능, 고속선회능력, 장갑 두께와 탑재무장 등 많은 점에서 우월했다. 유일하게 저속 선회능력이 떨어졌지만, 당시 공중전의 대세는 속도를 중시하는 에너지 파이팅이다보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와일드캣 특유의 날개접기도 물려받아 덩치에 비해 수납량도 월등했다.[15] 또한 등뼈가 툭 솟아난 듯한 구조는 내구성에 도움을 주었다.
그 외에도 1945년 기준으로 약 36,500 달러라는 저렴한 가격[16]도 장점이었다.
폭장량도 굉장했는데 헬캣의 선대인 와일드캣과 손발을 맞추던 함상폭격기 SBD 돈틀리스보다도 폭장량이 많아 전쟁 동안 5,000t이 넘는 폭탄이 헬캣에게서 투하되었다. 900kg이 넘는 저 폭장량은 이후 대전기 일본군 함재기들중 어떤 기종보다도 우수한 수치다. 주력 무장인 6정의 M2 중기관총도 뛰어난 신뢰성으로 빈약한 방어력을 가진 기체들은 쉽게 갈아버릴 수 있었다. 여러모로 함재기계의 P-47 썬더볼트.

3.1. 그리고 실전


'''"구라망은 재앙입니다. 아무리 맞춰도 떨어지질 않아요. 신참들은 얼마 버티지 못할겁니다."'''

사카이 사부로.

'''"눈에 보이는 적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시야 밖에서 급강하로 내리꽂는 적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이와모토 테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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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헬캣을 지급받고 환호하는 항모 렉싱턴(CV-16)의 파일럿들.

산호해에서 과달카날까지, 바다에서는 태평양 전선의 마지막 미군 항공모함이 된 엔터프라이즈가 함교에 "엔터프라이즈 vs 일본"이라 써놓고 사투를 펼치고, 하늘에서는 와일드캣들이 제로센을 상대로 악전고투를 펼치며 일본군의 예봉을 막는 사이 진주만의 충격에서 회복된 미국은 전시생산체제로의 전환을 완료한다.
풀빵 찍듯 건조된 신형 에식스급 항공모함들이 홀로 분투하던 엔터프라이즈의 옆자리를 채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에 발맞춰 헬캣 또한 1943년 2월 항공모함 에식스호의 비행대를 시작으로 태평양 전선에 속속 배치되며 그동안 힘겹게 태평양 상공을 지키던 와일드캣의 자리를 대신했다.
헬캣의 첫 격추는 1943년 9월에 경항공모함 인디펜던스에서 출격한 헬캣이 일본의 H8K 에밀리 비행정을 격추한 것. 그로부터 한 달 후 1943년 10월 5일의 웨이크 섬 공습에서 헬캣의 첫 제로센 격추가 이뤄졌다. 그것도 "에식스급 항공모함 '''요크타운'''"에서 출격한 헬캣에 의해서였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완벽한 복수. 이틀간의 전투에서 미군은 공중전에서 6기, 대공포화에 6기의 손실을 입으며 22기의 일본기를 격추하고 웨이크 섬의 일본군 지상시설 90%를 파괴해 기지를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이어진 동년 11월의 타라와 상공 전투에서는 단 1기의 헬캣만을 손실하며 30기의 제로센을 격추했다. 같은 달 라바울 전투에도 참여 F4U 콜세어와 함께 50여기의 일본기를 격추했다. 그렇게 시작부터 실력을 과시한 헬캣은 다음해 1944년 6월 필리핀 해 해전에서 급기야 제로센을 상대로 무쌍을 찍으며, 제로센을 전투기에서 "가금류"로 전락시키고 태평양 상공에서 일본기의 씨를 말리기 시작한다. 필리핀 해 해전의 별칭이 괜히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 아니다!
등장 초반, 헬캣을 그저 와일드캣의 뻥튀기 정도로 여겼던 일본군은 헬캣이 우월한 격투전 성능을 가진 난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태평양 전쟁 당시의 제로센과 헬캣의 이야기를 하는 영상. 아래 설명의 주인공인 로버트 던컨 소위가 나온다.
와일드캣을 상대하던 때까지 적잖은 제로센 조종사들은 교전시 강한 지속상승력을 활용하여 F4F 와일드캣이나 P-40 워호크 등의 적기가 제로센을 따라오다가 스톨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이에 반전하여 내리꽂으면서 스톨로 제대로 기동할 수 없는 적기에 사격을 퍼붓는 일명 '해머헤드' 전술을 선호했다. 악평이 자자했던 제로센의 20mm 99식 기관포라도 이런 상태의 적기라면 충분히 맞출 수 있었을 것. 그런데 헬캣을 상대로 이짓을 하려니 이게 웬걸, 헬캣은 아무 문제 없이 제로센을 쫓아 올라왔다. 이걸로 일본 해군 에이스가 제 꾀에 제가 낚여서 상승하는 그대로 기총소사를 두들겨맞고 사망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정확히는, 제로센과 헬캣의 상승력 차이는 헬캣이 약간 앞서는 정도의 차이였으므로 제로센이 스톨에 빠져 허우적거린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헬캣이 와일드캣이나 워호크와 차원이 다른 상승력을 지녔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한 제로센 파일럿이 '생긴 건 비슷한데 뭔가 다르다' 라고 당황하는 사이 제로센을 따라잡은 헬캣이 기총소사를 퍼붓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헬캣이 첫 제로센 격추 전과를 올렸던 "'''1943년 10월 5일''' 웨이크 섬 공습" 당시 격추되어, 헬캣에게 격추당한 두 번째 일본군 파일럿이 된 '''스에다 토시유키'''준위의 경우였다. 스에다는 이전까지 바로 이 '에너지 트랩' 전술을 주특기로 활용하며 9기를 격추기록을 가졌던 일본군의 에이스였다. 스에다는 늘 하던대로 '와일드캣 비슷하게 생긴' 미군기를 상대로 에너지 트랩을 걸었다. 하지만 그 뭔지 모를 미군기는 실속은커녕 상승하는 스에다의 제로센을 죽죽 잘만 따라올라왔다. 그것도 모르고 혼자 신나서 상승한 스에다는 최고 고도에서 반전하며 그의 밑에 실속한 미군기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헬캣은 스에다의 제로센을 완전히 따라잡아 꼬리를 잡고 있었다. 상승 정점에서 반전 중인 스에다의 제로센은 맞추기 쉬운 표적에 불과했다. 헬캣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대로 기총소사를 퍼부어 스에다의 제로센을 격추시켜 버렸다. '라이터'의 명성에 어울리게 단번에 불덩어리가 된 제로센과 함께 스에다는 자기가 무슨 실수를 했는지 깨달을 기회도 없이 사망했다. 그런데 정작 이날 스에다를 격추시킨 로버트 던컨 소위는, '''1943년 8월 31일''' 마커스섬 공격 때 처음 실전을 경험한 파일럿.[17] 그래서 실전에서 일본군 파일럿들이 어떤 전법을 쓰는지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었던 듯 하다. 사실 전투 당시 던컨은 서로 선회하던 도중 스에다가 에너지트랩 전술을 걸기 위해 갑자기 상승하는 것을 보고 '저게 지금 뭐하는 짓이지? 저 녀석 비행학교 갓 나온 햇병아리 아님?'이라 황당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그냥 '옳지'하고 쫒아올라가 격추시켜 버린 것. 상대가 왜 그런 기동을 했는지는 후일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사후 스에다 토시유키 준위는 중위로 진급처리되었다.
또한 이미 와일드캣 시절부터 튼실한 방어력으로 일본군을 엿먹이던 '그루먼 철공소'의 신작답게 전작보다도 한참 더 튼튼해진 방어력으로 일본군을 좌절케 했다. 이는 특히 대규모 편대가 맞붙는 난전이 될 때에는 더욱 위력을 발휘했다. 허접한 제로센의 화력은 물론이고 아군기의 오발 몇 발에는 끄떡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8] 반면 제로센은... '''그런 거 없다...'''[19] 이러한 강력한 맷집 덕택에 수많은 파일럿이 무사히 생환할 수 있었다. 베테랑 파일럿이 공중전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보면 이는 강력한 강점이 되었다. 헬켓의 사기적인 맷집은 '''제로센에 둘러싸여서 뭇매를 맞아서 구멍투성이에 랜딩 기어까지 나갔음에도 무사히 착륙'''했다든가, 헤드온으로 20mm와 7.7mm탄 세례로 '''엔진이 반쯤 맛이 간 상태'''에서도 무사히 귀함했다든가 하는 사례로 증명되었다.[20] 데미지를 입은 헬캣하면 유명한 사진. 대부분의 탄알들이 외피조차 관통하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앞서 언급된 것처럼 생산성을 위해 공기역학적 측면까지 일부 희생시켜가며 설계한 만큼 생산성 역시 엄청나서 1943년과 44년 2년 동안 전체 양산댓수 12,000여기 중 11,000여기를 뽑아내는 기염을 토했다. 이를테면 첫 양산형인 F6F-3은 1942년 10월에 초도비행을 한 후, 1944년 4월 개량형 F6F-5 생산으로 전환될 때 까지, 4,402대를 찍어냈다. 이를 이전 주력기종이던 F4F 와일드캣과 비교하면, 헬캣이 본격적으로 양산 배치되기 시작한 1943년 초 까지 미 해군이 수령한 와일드캣의 숫자는 2,200대 정도였다. 덕분에 이미 1943년 중반이 되면 미 해군의 일선 항모 대부분이 와일드캣 대신 헬캣으로 무장할 수 있었다. 그 후 1945년 11월 생산 종료까지 7,000대 이상을 더 뽑아 총 12,275대를 생산. 이 기간 동안 그루먼의 헬캣 생산량은 피크 시점에는 월 500기를 넘게 찍어냈다. 덕분에 만만히 여기던 언니를 상대로도 호각열세의 고전을 하던 일본군은 T-34 웨이브와 티거 쇼크를 한 번에 맛보는 듯한 충격을 경험한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에이스들이 씨가 마를 무렵, 헬캣은 반대로 그 어마무시한 방호력으로 수많은 에이스를 '''살려서'''[21] 배출, 그들에게 교육받은 파일럿들이 탑승한 덕분에 파일럿의 기량 차이마저 벌어져 성능차 외에도 한 몫을 추가했다. 물론 초짜들이 탑승한 헬캣의 기록도 상당히 자주 보이지만 그건 파일럿의 부족이라기보다는 베테랑을 후방으로 빼고 신참을 새로 배치시킬 수 있는 미군의 여유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또한 헬캣은 '''다루기 쉬운 순한''' 전투기로 설명되는데 이것은 교육훈련상으로도 실전상으로도 매우 큰 장점이다. 초보자가 빠르게 적응할 수 있고, 치열한 교전 상황에서 파일럿의 부담을 줄여줄 뿐 아니라 살아남을 확률을 높여줌으로써 에이스로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미군이 나타나는 곳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헬캣을 일본군은 '구라망(グラマン)'기라 부르며 두려워했다.[22] 특히나 헬캣은 넓은 주익면적으로 인해 제로센과의 선회전에서도 쉽사리 지지 않았고 심지어 제로센과 격한 선회전을 벌인 끝에 탄약이 동나 무승부가 난 헬캣도 있었다. 이런 점 때문에 일본군 파일럿들중 일부는 헬캣을 콜세어보다 우위로 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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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식스급 항공모함 렉싱턴으로부터 발진 중인 헬캣 전투기들.
전후 미 해군의 발표에 따르면 헬캣이 장사지낸 일본군기는 총 5,163대로 해군 및 해병대 전과의 '''56%'''를 차지한다.[23] 참고로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항공기 총 손실 대수는, 약 35,000대에서 50,000대로 추정된다.[24] 그렇다면 일본군 항공기 '손실원인'의 15~10%가 '헬캣'이었다는 것. 전투손실 만을 따진다면 '일본기의 단일 사망 원인'으로는 가장 비중이 높지 않았을까?[25] 적 항공기에 격추당한 것은 270대이며 19대 1이라는 압도적 우위를 차지했다. A6M 상대로 13대 1, Ki-84 하야테 상대로 9.5대 1, J2M 라이덴 상대로 3.7대 1의 격추비를 가지고 있었다. 추가로 헬캣의 총 손실 대수는 2,461대로 적 항공기에 의한 격추는 270대이며 대공포화에 의한 격추는 553대 나머지 1,638대는 함상에서 화재로 손실하거나 이착함 실패, 귀환 후 수리 불가 판정 같은 사유들이었다.
오히려 콜세어가 결전병기였던 미 해병대는 헬캣에 씨가 마른 제로센 때문에 콜세어를 지상공격용으로 전환시키는 일도 일어났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 되었듯, 같은 R-2800 엔진을 쓰는 P-47이나 콜세어와 마찬가지로 헬캣 역시 어지간한 함상폭격기나 뇌격기를 능가하는 4000lb(1800kg)급의 폭장능력을 지녔고, 전투손실의 가장 많은 부분이 대공포화라는 위의 통계가 말해주듯 대지, 대함 공격에도 큰 활약을 했다. 전쟁기간 헬캣이 투하한 폭장량은 5,899톤.
지상공격 능력이 거의 없다시피한 와일드캣[26]이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주력 전투기이던 시절에는 더 많은 숫자의 뇌격기와 급강하 폭격기가 필요했으므로 함대 방공 전투기는 상대적으로 소수를 싣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헬캣의 넉넉한 폭장능력 덕분에 미 해군 항모들은 함재기 중 전투기의 비중을 크게 늘릴 수 있었고, 덕분에 제공 능력과 전술적 유연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전쟁 후반에는 아예 함재기의 대다수를 헬캣과 F4U 콜세어로 채워넣고 다녔다. 함재기 구성에서 전투기 비중이 늘었지만, 함재기 전체의 폭장능력을 따져보면 대지, 대함 타격력은 더 증가했다는 게 함정.
전후까지 살아남은 사카이 사부로(64기 격추)와 타니미즈 타케오(18기 격추)는 "가장 까다로운 게 육군기(P-51 머스탱, P-47 썬더볼트), 그 다음이 운동성 좋은 구라망(F6F 헬캣)이며 시콜스키(F4U 콜세어) [27]와 정어리꼬지(P-38 라이트닝)는 빠르기만 할 뿐이고 영국군기는 상대하기 쉬웠다"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28][29]
물론 헬캣이 활약하게 된 큰 이유는 일종의 '상대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헬캣은 성능상으로 아주 우수한 전투기는 결코 아니었다.[30] 성능으로 따지자면 콜세어가 거의 모든 면에서 헬캣을 압도한다. 하지만 주적이 될 당시의 일본 전투기들과 비교하면 속도, 폭장량, 생산량, 항공모함 탑재량, 내구성 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월등했다. 나아가 헬캣이 태평양전쟁 후반의 승리의 주역으로 활약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라면 역시 (콜세어가 이착함 문제를 비롯 함재기로서 적응에 고생하는 동안) 개발과정이 어처구니 없이 신속하게 이루어져, 적시적기에 '준비된 함상 전투기'로서 전력화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비록 최초 개발이 시작된 것은 193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헬캣이 '헬캣다운 헬캣'이 되는데 가장 중요했던 것은 뭐니뭐니해도 2000hp급 더블 와스프 엔진의 적용이었다. 이는 자주 언급되듯, 콜세어의 이착함 문제 해결이 지연되며 대타인 헬캣의 성능강화가 급박한 문제로 제기된 탓이다. 그런데 R-2800 엔진의 적용이 결정된 것은 1942년 4월 26일이었는데, R-2800 엔진탑재 시제기 XF6F-3의 초도비행이 이루어진 것은, 불과 2개월 후인 6월 26일이었고, 그해 10월 3일엔 양산형 F6F-3이 나오기 시작했다. 즉 시험기에서 전력화까지의 과정을 불과 5개월만에 완료한 것이다. 그렇다고 날림 전투기가 나온 것도 아니고, 해군과 해병대의 기본적인 요구사양은 충족한, 나름 완성도 있는 견실한 물건으로 말이다.[31]
덧붙여, '제로센 킬러'로서 헬캣의 명성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헬캣의 '전술적 유연성'이다. 늘 언급되듯 헬캣은 '도그파이트를 벌여도 제로센을 꺾을 수 있는 전투기'였다. 전쟁에서 '하드웨어에 의한 승리' 를 말하려면 상대보다 평균적으로 우수한 능력을 지닌 것 뿐 아니라, 동시에 더 많은 상황에서 우위를 지닐 수 있는 전술적 유연성 까지 지닌 무기를 보유했을 때 가장 확실하게 '하드웨어의 우위에 의한 승리'라고 평가할 수 있을지 모른다. 태평양 상공의 항공전에서 정확히 그런 전투기가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헬캣이었다.
분명 당시 태평양 상공에는 헬캣보다 더 고성능의 전투기들이 이미 존재했다. 늘 비교대상이 되는 F4U 콜세어는 물론이고, 육군의 P-38 라이트닝도 만만찮은 고성능기였다. '쌍발기의 불리함'은 최상급 성능을 지닌 독일 루프트바페의 Bf109Fw190을 상대로 했을 때나 문제였지, 제로센이 주력인 일본군을 상대로는 따질 문제가 아니었다. 헬캣보다 한참 빠른 두 기종은 그냥 수평비행 속도가 급강하 하는 제로센보다도 빠른 고성능기였다. 그러나 그런 고성능에도 불구하고 선회전에 휘말리면 쓸데없이 손해를 볼 수 있는 전술적 상성에 영향을 받았다. 콜세어는 거의 모든 면에서 제로센을 능가했으나, 그 속도와 고속기동성을 위해 저속 선회력이 제로센보다 약간 떨어지는게 유일한 단점이었고 그것이 간혹 'F4U나 P-38은 별로 어렵지 않은 상대'라고 말하는 제로센 에이스들이 있는 이유이다. 실제로 전쟁 초기에 P-38이나 콜세어 초기형을 타고 제로센과 도그파이트를 벌이다 킬 수를 조공한 육군이나 해병대 파일럿도 꽤 있었다. 하지만 헬캣에겐 별로 그런 기록이 없다. 물론 헬캣을 몬 해군 파일럿들이 상대적으로 일본군과의 전투에 더 경험이 많은 베테랑들인 탓도 있지만, 헬캣은 적어도 제로센이 주력인 일본군을 상대로는 기체 그 자체의 능력으로 전술적 상성에 훨씬 덜 구애받는 우위를 지닌 때문이기도 했다. 즉 태평양 전쟁 초반에서, 제로센이 F2A 버팔로등의 낙후된 연합군기를 상대로 누렸던 완전한 일방적 우세를 그대로 뒤집어서 갚아준 셈이었다.
전체적인 성능비교를 한다면 헬캣보다 콜세어가 분명 한 수 위이고, 아마도 두 기종이 맞붙는다면 콜세어가 승리할 확률이 더 높을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제로센을 상대하는 전투에선 일격이탈을 쓰건 선회전을 받아주던, 어떤 형태의 전투로도 제로센을 꺾을 수 있는 말 그대로의 천적이었다. 이는 헬캣 이상의 고성능을 지닌 다른 연합군 전투기들로서도 확보하기 힘든 '절대적 우세'였다. 사실 일본군 에이스들이 종종 쉬운 상대라고 말하는, 그 "정어리꼬지"가 사실은 미 육군항공대 전투기들 중 가장 많은 숫자의 일본기를 격추한 기종이었다.[32][33] 그래도 자신에게 유리한 전투상황을 이끌어 낼 능력을 지닌 에이스 파일럿들은 P-38은 물론이고, 심지어 사실 대전 후반 최강기 중 하나인 "시콜스키"조차, '격투전에 끌어들이면 해볼만 하다'고 투지를 불태워 볼 수는 있었다. 하지만 헬캣을 상대로는 그 조차 가능하지 않았다.
이것이 역전의 제로센 에이스들조차도, 유독 헬캣에 대해 틀렸어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라고 회상하는 이유일 것이다.[34] 헬캣은 태평양에서 격추된 일본기 대부분을 물리적으로 장사지낸 장본인이었을 뿐 아니라, 일본군의 멘탈까지 붕괴시키는 재앙 그 자체였던 것이다... 정말로 '이 전투기 때문에 태평양 상공의 항공전에 승리했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는, 진정한 '결전병기'였던 것.
하지만 같은 계열의 엔진을 사용하는 썬더볼트나 콜세어 등에 비해 밀리는 성능상의 애매함은 분명했고, 때문에 헬캣이 실전에 배치되어 성공적으로 활약할 당시에도 "제로보다 좋은 거 나오면 언제든 제공권을 뺏길 수 있다"는 걱정을 한 그루먼 개발진들은 F8F 베어캣을 만들고 있었다. (몰락 작전을 수행하려면 일본군의 본토방공 전투기들을 압도해야 할테니까...)
헬캣은 아무래도 미 해군이 활약한 태평양 전선에서의 전과가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영국 해군에서도 미군이 개발한 헬캣을 소수 도입한 이력이 있다. 태평양 전선에 비해 공중전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 덕분에 유럽 전선에도 투입되어 Bf109Fw190과도 싸워 전과를 올렸다. 영국 해군의 헬캣은 18회의 공중전을 치렀고 52기의 격추를 보고했다.
일본군은 헬캣과 와일드캣을 잘 구분하지 못했는데, 위에서 소개된 에이스의 사례도 있지만 대만 항공전 당시 와일드캣이 전혀 투입되지 않은 곳에서 전투한 파일럿의 수기에 '나는 F4F를 격추했다...'라고 적혀있는 등 여러 사례에서 둘을 혼동한 자료가 보인다. 실제로 둘의 디자인 차이는 날개가 붙은 위치나 바퀴의 위치 등 전투 중엔 구분하기 힘든 점들이 많다.

4. 퇴장


헬캣은 최고의 일본군 언더테이커로 활약해 혁혁한 전과를 세웠지만, 콜세어를 정규 항공모함에서도 쓸 수 있게 개량하자 해군은 서둘러 헬켓을 강판시키기 시작하여 이미 발주된 헬켓의 생산도 취소되고 콜세어 생산에 집중했다. 이 때문에 후일 헬캣이 콜세어의 땜빵용이라는 뿌리깊은 오해가 생기기도 했다.
주력에서 내려도 2선급인 호위 항공모함에서 활약하면 되지…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호위 항공모함은 이미 F4F 와일드캣의 호위항공모함 전용 개량형인 FM-2[35]이 자리를 잡은 상태. 어차피 일선에서 활동할 게 아닐 이상 이착륙이 좀 더 용이하고 무엇보다 '''캐터펄트 없이도 호위 항공모함에서 이함이 가능'''하다는 장점을 가진 FM-2가 더 선호된 것은 당연한 결과로, 콜세어와 와일드캣 사이에 끼어버린 형국이 된 헬켓의 설 자리는 더욱 좁아졌다.
전쟁이 끝난 후 헬켓은 빠른 속도로 현역에서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일부는 헐값으로 해군 항공대가 있는 외국(프랑스, 우루과이)에 팔렸으나 그마저도 '''보기좋고 먹기좋은''' 콜세어에 밀렸고 결국은 대부분 스크랩되어 사라졌다. 매각과 해체의 폭풍에서 겨우 살아남은 기체들도 거의 무선조종기로 개조되어 실탄사격용 표적기로 소모되거나 일부는 한국전쟁에서 폭탄을 싣고 지상공격용 무선조종폭탄, 이른바 다리깨기(bridge-busting)로 소비되는 수모도 당했다.
1946년에는 잠시 미 해군 곡예비행단 블루 엔젤스에서 사용되기도 했지만, 그것도 2개월 만인 그해 8월에 F8F 베어캣에 자리를 내주었다...
이런 점 때문에 12,000여기가 생산된 명기이면서도 현재 비행 가능한 기체가 극히 적다는 안습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또한 갖가지 해괴한 실험에도 동원되었는데, 개중에는 역시 무인기로 개장된 B-17과 함께, 1946년 비키니섬 핵실험에서 핵폭발의 영향을 관측하기 위해 동원되기도 했다.
하지만 가끔은 흔치않게 폼나는 일도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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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레이더 장착형으로 개수된 헬캣 무인기로부터, 스패로우 미사일의 [36] 최초 공중발사 실험이 이뤄졌다. 아마도 중거리 미사일을 최초로 공중발사해본 기종이 아닐지. 헌데 표적기로도 굴려졌던 헬캣의 말년을 생각하면 표적도 헬캣일지도 모른다.[37]

5. 역대 라인업


  • XF6F-1
P&W 트윈 와스프 R-2600-10(1,700hp) 엔진을 장착한 최초의 프로토타입. 2,000hp엔진을 사용하려고 설계되었으나 수급 문제로 이것을 달았다.
  • XF6F-2
P&W 트윈 와스프 R-2600-16를 장착하려고 한 두번째 프로토타입. 엔진의 터보 차저 기술 탑재 실패로 제작 중단.
  • XF6F-3
설계대로 2,000hp 엔진을 탑재한 첫 기체. 터보차저 기술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 F6F-3
양산이 시작된 정식 운용기. XF6F-3랑 차이 없음.
  • F6F-3E
야간전투기 테스트를 위한 F6F-3.
  • F6F-3N
본격 야간전투기. 날개에 AN/APS-6 레이더를 장착하였으며 탐색, 추적, 항법 기능을 지원한다.
  • XF6F-4
2단과급기가 달린 R-2800-27(2,100hp)탑재 프로토 타입.
  • F6F-5
R-2800-10W 엔진, 공정 변경으로 생산성 강화. 캐노피를 버블형으로 재설계하고 착함장치도 강화한 최다 생산형으로, 영국 해군용으로 발주된 헬캣 Mk. II도 이 사양이다.
  • F6F-5K
각종 신형 장비 또는 무장 테스트에 사용된 기체에 공통 분류로서 부여된 번호. 영국에는 헬캣 N.F. Mk. II라는 이름으로 도입되었으며, 일부는 20mm 기관포 2정과 .50구경 기관총 4정으로 무장이 교체되었다.
  • F6F-5N
역시 레이더 탑재 야간전투기.
  • F6F-5P
사진 정찰기.
  • XF6F-6
R-2800-18W(2,450hp)탑재의 개량형 프로토 타입. F8F 베어캣에 밀려 퇴장.
  • Gannet Mk I
영국 해군에 인도된 헬캣. F6F-3와의 차이점은 컬러링과 생산명칭 뿐이며, 훗날 Hellcat FR Mk.I이라는 이름으로 도입명이 변경된다.
  • Hellcat FR.Mk II/Hellcat NR.Mk II
각기 F6F-5, F6F-5N에 해당하는 영국 해군 헬캣.
  • FV-1
영국 빅커스 공업의 캐나다 지부에서 생산한 헬캣에 대해 이 번호가 부여될 예정이었으나 생산되기 전에 전량 취소되었다.

6. 매체에서의 등장


와일드캣의 직계손이자 미 기동부대의 공세기를 상징하는 전투기고, 주적과는 압도적인 격추교환비로 유명한 기종이다보니 와일드캣과 더불어 2차 세계 대전을 다룬 작품에 종종 등장한다. 특히 태평양 전쟁을 다룬 작품에서는 거의 반드시 등장하는 기종.
또한 일본에서 만들었거나 일본 영향을 많이 받은 오타쿠 계열 매체에서는 백이면 백 콜세어보다 고성능 전투기로 등장하는 것이 클리셰다. 후계기로는 F8F 베어캣이 언급되는 편.
  • 헬캣을 주인공으로 하는 매킨토시용 플라이트 시뮬레이터인 Hellcats of the Pacific은 1991년도 게임 치고는 높은 해상도이다. 다만 헬캣의 기관총이 2정이고 헬캣이 플랩만 펴면 제로를 선회전에서 이기는데다 초고성능 레이더가 있는 등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치고는 여러가지로 간략화된 모습을 보인다. 플레이 영상 참조.
  • 함대 컬렉션에서는 '고양이 함전'이란 이름으로 심해서함 측이 사용한다. 문제는 유저들이 널리 사용하는 함재기인 N1K-J 시덴보다 강하고 A7M 렛푸와도 비등비등한 충격과 공포의 전투력으로 많은 유저들이 멘탈붕괴 하는 중. 게다가 이후 추가된 고양이 함전 改는 제공치가 12로, 그 유명한 이와모토 테츠조의 영식전투기 53형과도 제공치가 동일한 충공깽의 성능이다. [38] 11월 랭킹 보상으로 F6F-3가 지급되었다. F6F-3의 도감 설명에서 초기형이라고 지칭하여 후기형을 암시했고, 2017년 5월 랭킹 보상으로 F6F-5가 등장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특이하게 F4F-4를 개수해서 F6F-3로 만들 수 있다.
  • 전함소녀에서 미국 측 함재기로 등장. 대공 8과 회피 1이라는 수치가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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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6F-5'''
'''◎헬캣 Mk II
(영국 랜드리스)'''

'''◎F6F-5
(프랑스 랜드리스)'''

'''F6F-5N'''
'''◎F6F-5N
(프랑스 랜드리스)'''

  • 워 썬더에선 F6F-5[39]가 전투폭격기로도 활약한 것을 고증해 훌륭한 폭장량을 지닌 전투기로 등장한다. 독일의 210mm를 능가하는 298mm 대함로켓이 백미. 뇌장도 가능하다. 이밖에 영국 해군항공대 소속 F6F-5가 영국 트리 프리미엄 기체로 등장하며, 1.65패치에서 야간 전투기형인 F6F-5N이 미국 해군항공대 트리에 합류했다. 오른쪽 주익에 달린 커다란 레이더 포드와 화끈한 화력을 갖춘 20mm AN/M2 기관포 2문을 받아온게 특징. 레이더 구현 전까지는 레이더 포드가 그냥 무게와 항력계수나 늘리는 장식품이라 기관포 던져주고 비행성능 빼앗았다고 욕을 먹었지만, 레이더가 사용가능해지면서 야간전과 우천시, 그리고 시뮬레이터 전투에서 좋은 활약이 가능하다. 1.73 패치에서는 F6F-5와 F6F-5N이 프랑스 공군 소속으로 합류했다. 동랭크 프랑스 전투기보다 더 좋은 게 특징.
  • 배틀스테이션 시리즈에서도 등장, 게임상에선 와일드캣 다음의 기본 전투기로 나오는데 제로와 1:1 성능을 낸다.(고증 따윈 저 멀리...) 폭탄을 탑재할 수 있어서 급강하폭격용으로 써도 되지만, 성능은 별로이니 차라리 제대로 된 급강하폭격기를 쓰자.
  • 편대소녀에서는 4성 미국 전투기로 등장하기는 하는데, 실질적인 4성 최약의 기체로 나온다. 종합성능 최강인 P-47 썬더볼트와 기본성능이 최강인 A7M 렛푸에게는 아예 압도적으로 밀릴 정도. 그나마 일본에서는 상대적으로 평가가 낮은 F4U 콜세어가 레어도도 더 낮고 능력치도 떨어진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거리.
  • 벽람항로에서는 T3 기준 5성 기체로 등장한다. 성능은 전체 전투기 중 최상위권.
  • Naval Creed:Warships에서 F6F-3이 6티어 전투기로, F6F-6형이 7티어 전투기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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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해군 3티어 전투기 F6F3 헬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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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해군 4티어 전투기 F6F5 헬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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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이비드 맥캠벨은 미 해군 항공대 역사상 가장 많은 격추수를 기록한 에이스이다.[2] 날개를 접을 시 4.93m[3] 어뢰는 탑재 가능하다고 나와있으나 탑재된 기록이 없다. 함재 전투기인 만큼 시험단계에서 장착 가능을 확인했으나 실전에서 뇌격에 투입된 경우는 없는 것 같다(게다가 핼캣은 TBF(M) 어벤저와 같은 뇌격기가 아니라 함대 방공 전투기다. 즉, 함대 상공을 지키며 적 함재 전투기인 A6M 등과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전투기다. 그리고 저 어뢰, 해군 항공대판 어뢰 스캔들의 원흉이 된 어뢰다.).[4] 시험용으로만 장착. 자세한 것은 후술.[5] 현재가치 45만 4천달러. '''전차인 M4 셔먼보다 싸다.''' 한화 약 5억.[6] 개발 당시 Tomcat으로 명명하려 했으나, 당시 Tomcat이란 뜻이 굉장히 야한 뜻(옥스퍼드 사전에 의하면 사람을 가리키며 그 단어를 쓰면 발정난 남자를 의미함) 이라 Hellcat으로 명명했다. 다만 그 동생이 그 이름을 가져갔으니... 노스롭 그루먼의 전통은 이어졌다.[7] 즉 훈련을 마치고 소위 계급을 막 단 초짜 파일럿들을 말한다.[8] 어찌 보면 자매기로도 볼 수 있는데 미국에서 당시 개발한 항공기용 신형 2,000 마력급 엔진인 R2800 엔진은 F4U에 가장 먼저 장착되었기 때문이다.[9] 애초에 콜세어는 함재기인데도 불구하고 대전 말 최강기 반열에 들 만큼 고성능기였다.[10] 해병대 수요가 덤으로 붙었다.[11] 아쿠탄 제로가 입수된 날은 1942년 7월 10일이다.[12] 이걸로 인해 F4F 와일드캣도 제로센을 사냥한다.[13] 동급 엔진을 단 콜세어에 비해 100km/h 가까이 느렸다.[14] 일부 팬들은 '저 출력대 기종 중 가장 쓰레기를 뽑으라면 바로 뽑을 수 있다. 헬캣이다.'라며 악평하기도 한다. 외형부터가 둔중하게 생긴데다 성능도 실제로 비슷한 출력의 기종들에 비해 썩 우수하지도 않으니...[15] 일부 밀리터리 매니아들은 이 날개접기를 매미에 비유해 '헬매미'라고 부르기도 한다.[16] P-40 워호크의 가격은 1944년 기준으로 약 45,000 달러였고 P-51 머스탱은 1945년 기준으로 51,000 달러였다. 출저[17] 그러나 이 공격 당시 공중전은 없었다.[18] 기록상으로는 자살공격기에 대한 근접방어시 아군 40mm 보포스 대공포의 오사를 견뎌내고 귀환한 기체까지 있었다.[19] 이것은 일본이 태평양 전쟁 후기 특히 과달카날 전투 이후 본격화한 자원난과도 연계돼있다. 쉽게 말해 '''기존의 기종을 개량하든, 새로운 기종을 만들든, 만들 재료가 없는 상황이다.'''[20] 그런데 헬캣이 주력이던 시기의 주요 맞상대였던 제로센 후기형 52형은 이전의 7.7mm 기관총 대신 13.2mm 기관총을 장비했다. 7.7mm를 "괜찮아, 튕겨냈다"며 씹고 다닌 언니 와일드캣의 뒤를 이어, 그 동생은 한술 더 떠, 13.2mm 까지 "괜찮아 튕겨냈다"며 날아다닌 셈. 탄속, 탄도, 발사속도 어느 것도 전투기 상대로는 적합하지 않았던 애물단지 같은 99식 기관포였음에도 계속 달고 다닌 것은 20mm가 없으면 상대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21] 이 부분이 ''''굽은 날개의 소위 제거자''''로 불리면서 대위 이상이나 되어야 몰 수 있을 정도였던 F4U 콜세어와 대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22] 구라망은 그루먼의 일본식 발음이다. 이것은 헬캣만을 지칭한다기보다는 와일드캣을 포함하여 미군 전투기 전체를, 심지어 그루먼에서 만들지 않은 F4U 콜세어(콜세어는 보우트 사에서 만든 것이다.)도 포함하여 부르는 말로도 쓰였다.[23] 물론 이 전과에는 대전말 자폭특공기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기에 그냥 그대로 믿어선 곤란하다. 그렇다고 이 전과가 안 놀라운 건 아니고...[24] 아마도 비전투손실이 포함된 숫자[25] 총 3,800여 기로 추정되는 ''작정하고 갖다 버리는" 카미카제 자살공격 동원 항공기보다도 많은 숫자.[26] 일선 항공모함의 주력전투기로 활동하던 시절의 그루먼제 와일드캣(F4F-3/4)들은 폭탄이나 로켓을 탑재할 파일런조차 없다시피해서, 100lb(45kg) 폭탄 2발이라는 카와이한 폭장량을 자랑했다. 그거에 잡힌 경우도 있긴 하지만[27] 보우트사와 시콜스키사는 1939년 보우트-시콜스키사로 합병해서 공동으로 항공기를 생산하다가 1943년 다시 두 회사로 분할되었다. 그러므로 일본인들은 보우트사를 시콜스키사와 동일시한 것이다. 콜세어가 합병기간 중 만들어지기도 했고...[28] 기동성 외에는 성능상 형편없이 밀리는 제로센을 타고도, 그렇게 혹독한 태평양 전쟁 말기의 일본군의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아 이런 평가를 내리는 것은 결코 허세만은 아닐 것이다. 공중전에 있어 전투기의 다소간의 스펙 차이보다는 교전상황의 사전 조성 (당연한 얘기지만, 이길 수 있을 때만 싸워야 한다. 특히 상대고도의 선점이 절대적이다.) 선제 발견, 정확한 조종-사격 및 임기응변 등 '''조종사의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29] 사카이 사부로는 자신의 저서에서 F6F와 F4U, P-38, 기타 후기형 전투기들을 재앙이라고 표현했었다. 비단 사카이뿐만이 아니다. 물론 그들이 그런 판단을 한 데에는 헬캣의 성능 외에도 압도적인 물량과 지지부진한 제로센의 개량 같은 부분도 한몫 했을 것이지만 헬캣도 태평양에서라면 강적이라는 증거다.[30] 그렇다고 헬캣이 성능이 낮은 전투기도 아니었다. 동시기에 아군내의 경쟁기종들이 너무 잘나서 그런 것이지. 적들이 가진 전투기 특히 직접 상대해야할 제로센에 비해서는 거의 저승사자가 따로 없을 정도였다.[31] 덧붙여 같은 엔진을 사용하는 썬더볼트나 특히 콜세어에 비해 성능상 뒤쳐지기는 했지만, 사실 2차 세계대전 당시 함상기로 운용된 기종 중 콜세어를 제외하고는 가장 고성능의 전투기였다. 함재기는 지상기지 항공기에 비해 다소의 핸디캡을 지닌다. 날개를 접는 기구나 어레스팅 후크 등 함상운용을 위한 장비로 인한 추가 중량이 붙으며, 거친 함상운용의 환경은 기체의 내구성이나 정비 용이성에도 지상기보다 높은 조건이 요구된다. 그루먼사가 괜히 '철공소'라는 별명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니다. 제트엔진 시대의 전투기에서도 이는 핸디캡이 되는데 레시프로 시절의 전투기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콜세어가 초기에 겪었던 어려움에서 잘 알 수 있듯, 좁은 항모에서 이착함 해야 하는 함재기의 요구조건과 고속, 고성능 기체의 요구를 조화시키는 것은 복잡한 문제다. 아무튼 콜세어를 제외한 동시대의 다른 함재기들과 비교한다면 종전까지 제로센을 울궈먹던 일본 해군 뿐 아니라, 영국 해군의 경우에도 전쟁 발발 이후 복엽기인 글로스터 글래디에이터 같은 낙후한 함상전투기들을 공군의 호커 허리케인슈퍼마린 스핏파이어의 함재기형인 호커 시허리케인과 슈퍼마린 시파이어로 교체하려 했지만 제때 조달하기 어려워 한참동안은 다수의 F4F 와일드캣을 랜드리스 해서 운용했고, 헬캣도 소수 운용했다. 게다가 스핏파이어가 원판이던 시파이어조차 함상운용에 필요한 내구도의 부족으로 한동안 고생하기도 했을 뿐 아니라, 성능상 헬캣에 앞서게 되는 것은 그리폰 엔진을 사용한 후기형에 가서야 이뤄졌는데 그 기체들은 전쟁이 거의 끝날 즈음인 1945년 5월에야 배치되기 시작했다. 즉 헬캣의 성능이 불충분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사실 대부분, 그 비교대상이 함상기임에도 불구하고 동시기 육상기 대부분을 씹어먹는 고성능을 자랑하던 "콜세어"같은 먼치킨 급 전투기인 탓이기도 하다.[32] 특히 저 정어리꼬지일본군 해군 연합함대 사령장관을 기관포로 끔살시킨 기종이기도 하다.[33] 게다가 P-47이나 P-51이 양산궤도에 오르기 이전, P-38이 미 육군항공대가 보유한 가장 고성능 기체이던 시기 내내 P-38 생산량 대부분은 유럽전선에 배치되었다. 때문에 태평양 전역의 미 육군항공대는 내내 고성능 전투기 부족에 시달리며 '우리한테도 P-38 좀 주세요' 징징거려야 하는 신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얼마 안되는 P-38들이 1700기 이상의 일본기를 격추시키며 태평양 전역의 미 육군항공대 전투기들 중 가장 많은 격추수를 기록하고 에이스를 줄줄이 배출한 것이다.[34] 알고 보면 전후까지 살아서 회고담을 말한다는 것은, 사실은 헬캣까지 만나고도 살아남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럼에도 회고할 때는 '정말 어려운 상대였지만 이겨냈다'라고 비장하게 얘기하기 보다는, 가까스로 살아남은 천재지변 생존자같은 투로 말한다...[35] 기총을 12.7mm 4정으로 줄이고 기본적으로 로켓이나 폭탄 탑재가 가능, 고출력 엔진에 기체를 경량화해 기동성이 향상되고 이륙거리가 단축되었다.[36] XAAM-N-2, "빔라이딩" 방식의 스패로우 초기형 "AIM-7A 스패로우 1"의 프로토타입.[37] 스패로우의 경우는 확인되지 않으나, 실제로 사이드와인더 미사일을 최초로 얻어맞은 기체가 바로 시험발사에 무인표적기로 사용된 헬캣이었다...[38] 사실 일본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헬캣의 평가가 높다. 심지어 F4U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가하는 경우까지 있으니. 하지만 성능은 둘째치고 결과적으로 가장 중요한 시기에 미 항공모함에서 운용된 것은 헬캣이니 그렇게까지 틀린 평가라고 보기도 힘들다. 물론 성능상으로는 F4U 후기형의 압승.[39] 원래는 F6F-3였으나, 1.65패치에서 F6F-5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