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리틀 특공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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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S 호넷 함에서 발진하는 B-25 미첼 폭격기.
1. 개요
2. 발단
3. 전개
4. 실행
5. 결과
6. 전후
7. 매체에서의 등장
8. 여담


1. 개요



'''Doolittle Raiders'''
제2차 세계대전 때인 1942년 4월 18일미 육군 항공대의 제임스 둘리틀(James Harold Doolittle) 당시 항공 중령이 이끌었던 특공대. 진주만 공습에 대한 보복작전으로 실행되어 일본도쿄, 오사카 등 주요 도시에 폭격을 가했다.

2. 발단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태평양 전선에서 빠르게 무너졌다. 이런 상황에서 루즈벨트 미합중국 대통령은 이러한 국면을 반전시키기 위한 보복 공격을 빨리 시행하라고 육해군 수뇌부를 날마다 질책하고 있었다. 이는 단순한 복수심만은 아니었다. 전황이 계속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미군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군부와 국민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려면 뭔가 일본군한테 한 방을 먹여줄 필요가 있었다. 항공모함인 엔터프라이즈와 요크타운을 동원해서 마셜 제도와 길버트 섬에 공습을 가하는 작전을 펴기는 했으나, 군사적으로는 큰 성과가 없고 주목할 만한 상징적인 가치도 큰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눈팔고 있다가 뼈아픈 한방을 맞고서 시종 일본군에게 밀리고 있던 미군으로서도 뾰족한 수가 없는 판이었다. 미합중국 해군 태평양 함대에 가용 가능한 전함이 한척도 없는 상황에서 몇 안되는 항공모함순양함 이하의 호위함과 같이 일본 근처까지 접근시키기에는 당시 일본 해군이 너무 막강했으며, 그나마 개전 초반 괌과 웨이크를 빼앗기는 바람에 작전을 엄호해줄 비행장이나 거점이 하나도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접근도 못하며, 무작정 갖다 박으면 성공을 따지기 이전에 제대로 접근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추가적인 대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암울한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일각에서 '''항모에 육군항공대 폭격기를 싣고 가서 일본 본토를 폭격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나왔다. 기존의 함재기는 항속거리가 짧기 때문에 일본 본토에 항공모함을 엄청나게 접근시켜야 하므로 기습전에 들켜서 격추당할 확률이 높지만, 육군 폭격기라면 항속거리가 길기 때문에 멀리서 발진시켜도 되므로 최악의 경우 작전이 실패하더라도 항공모함을 비롯한 함대는 살릴 수 있다는 의견이다. 이 의견을 낸 사람은 어니스트 킹 해군참모총장의 잠수함 참모인 프랜시스 로우(Francis S. Low) 대령이었다.
문제는 육군의 폭격기들은 활주거리가 길기 때문에 항공모함에서 이함[1]시키는 것이 극히 곤란했고, 덤으로 착륙거리는 더 길기 때문에 사실상 착함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한 번 이함 후 비행해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작전을 시작한 후에는 항공모함과 호위함대는 즉시 반전해서 위험지역을 탈출하고 폭격기만 혼자 목적지까지 가서 폭격을 한 후에 최대한 멀리 도망쳐서 비행기를 버리고 탈출 후 귀환하기로 결정되었다. 귀환 지역은 중국으로 선정되었고 사전에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와 협상을 해서 귀환 루트를 확보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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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공대 1번기의 승무원들. 앞줄 왼쪽부터 제임스 H. 둘리틀 소령(조종사), 리차드 E. 콜 중위(부조종사), 뒷줄 왼쪽부터 헨리 A. 포터 중위 (항법사)
프레드 A. 브레머 중사 (폭격수), 파울 J. 레오나르드 중사 (항공기관사)
해당 지역이 아군 따위는 하나도 없는 적지 한복판인 데다 먼 바다 위에서 파도에 흔들거리는 좁은 항공모함 갑판에서 거대한 폭격기를 이륙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진짜 '''엘리트급 조종사'''가 필요했고 작전을 지휘할 사람으로 슈나이더컵 대회[2]에서 우승을 차지한 경력이 있는 제임스 둘리틀 육군 항공대 중령이 선발되었다.
둘리틀이 처음 제안한 작전은 폭격 후 기수를 북쪽으로 돌려 소련블라디보스토크에 착륙하는 것이었다. 착륙 후 몰고 온 폭격기 전량을 무기대여법으로 넘기는 것을 조건으로 소련과 협상하였으나 당시 소련은 모스크바 전투에 승리하면서 독일군의 공세를 막는데는 성공했으나 뒤이은 스탈린의 반격계획이 실패하여 다시 전선이 밀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은 일본 본토를 공격한 미군 폭격기를 넘겨받을 경우 자극받은 일본이 소련을 침공할 것을 우려하여 거절하였다. 소련이 일본을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지 않겠나 하지만 한창 전쟁 중인 독일과 블라디보스토크 또는 극동 지역은 단순히 전역이 확장되는 수준이 아니라 그야말로 극과 극의 거리였다. 또한 양면전쟁의 위험성도 안고 있기에 당연히 거절. 잘못하면 소련은 좌독일우일본의 샌드위치가 되어 양쪽에서 두들겨 맞을 수도 있다. 실제로 모스크바가 함락될 위기에 처한 그 급박한 상황에서도 소련군은 극동 지역의 병력을 동부전선으로 추가 차출하면서도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최소 30개 사단 이상의 병력을 극동 전선에 그대로 배치했다.
차선책으로 중국에게 입질을 넣어봤는데 당연히 중국에서도 반대가 심했다. 잘만하면 미국의 지원을 받을 수도 있는데도 거절하려고 한 이유는 잘못되면 불똥이 자기들한테 튀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게 되기도 했고,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어르고 달래서 겨우 합의를 본 것이다. 결국 중국 저장성(장강 하류지역)을 향하는 것으로 계획은 수정된다. 본래 계획은 저장성에서 재보급 후 일본과 싸우고 있던 중화민국수도 충칭까지 날아가서 귀환하는 것이었으나, 작전계획이 빗나가면서 연료부족으로 목적지까지 도달하지 못해 등에 불시착하게 된다.

3. 전개


호넷의 모습이 뭔가 이상했습니다. 갑판 위에 크고 이상한 비행기가 있었거든요. 색깔도 뭔가 다르고 해군 항공기가 아니었어요. 그러다가 색이 육군기의 위장색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육군의 B-25였던 거죠.

- 제임스 피치[3]

둘리틀 중령은 특별히 개조한 B-25 미첼 폭격기와 육군 최고의 조종사들을 불러모아 연일 맹훈련을 했다.
B-25는 본래 육상에서 운용하기 위해 개발된 육군의 폭격기였으므로 활주거리가 짧은 항공모함에서 이함하기에는 힘들었다. 그나마 항속거리가 길면서도 간신히 항공모함에서 이함 가능할 것으로 판단되었기에 해당 폭격기가 선정된 것이다. 기체 무게를 최대한 줄여야 했기 때문에 무전기도 빼버리고 기관총도 기체 상부의 것과 기체 전면의 것만 남기고는 전부 빼버렸다. 대신 적기가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나무 같은 것으로 기총좌 자리에 가짜 기총을 달아 놨다. 또한 어차피 작전상 목적을 달성한 후에도 비행기를 버려야 하므로 기체가 격추당하거나 포획당할 경우 당시로서는 고급 기술인 노든 폭격조준기가 일본에 노획당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아주 단순한 간이형 폭격조준기가 달렸다. 이러면 당연히 명중율은 떨어지지만, 이번 작전은 단지 일본에 폭탄을 떨어뜨린다는 것 자체가 목적인 일종의 심리전이었기 때문에, 딱히 폭격 정밀도가 문제될 건 없었다. 그리고, 심리전이란 측면에서 정훈 목적으로 기록을 남기는 것이 더 중요했기에, 폭격기 중 2대엔 공습 장면을 촬영할 카메라를 탑재했다.
이렇게 극한으로 무게를 줄이고, 그 기체들을 육상에서 항공모함 갑판과 같은 길이에 선을 그어 둔 활주로에서 이함을 맹연습한 육군 조종사들이 이착륙 실습을 전원 성공시킨 뒤, 특공대는 미 해군요크타운급 항공모함 USS 호넷 함에 도착했다. 그리고 B-25를 채우느라 해군 함재기를 전부 빼버려 자체 방호 능력이 없는 호넷의 엄호를 위해 모여든 함대에 마지막으로 동급함인 USS 엔터프라이즈 함이 합류했다. 기동부대 지휘관은 해군 소장 윌리엄 홀시 제독이었다. 엔터프라이즈의 함재기들은 호넷 함의 엄호 외에도 일본 해군이 어선들을 징발, 선원들 외에 해군 하사관 1명과 무전기 1대를 배치해 연안 감시 임무를 맡긴 연안경비정들을 일본 본토에 경보하기 전에 요격하는 임무도 함대의 순양함, 구축함들과 함께 수행했다.

4. 실행


- Are you nervous? / 떨리나?

- No-- Yes, sir. Yes. / 아니 - 네 그렇습니다.

[십자가 목걸이를 잡고 기도를 한다.]

- When did you find religion? / 언제부터 종교를 가졌나?

- When you assigned me to this mission, sir. / 이번 작전에 차출되었을 때부터입니다.

[둘리틀이 잠시 생각하고 부조종사의 어깨를 잡으며]

- I want you to do me a favour. / 부탁 하나만 좀 들어주게.

- What's that, Colonel? / 무엇입니까?

- '''Pray for both of us.''' / '''내 기도도 해주게.'''

영화 진주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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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리틀 특공대 작전 중 경순양함 내쉬빌의 포격에 격침당하는 일본군 위장감시선 니토마루-23. 1942년 4월 18일 새벽.
4월 18일 아침 7시 38분, 작전 수행을 위해 항해하던 미 함대는 경비정 니토마루를 발견한다. 발견되자마자 경순양함 USS 내쉬빌 함이 함포로 쉽게 격침시켰지만, 이미 니토마루가 긴급무전을 날린 뒤였다.
이걸 포착한 미국 함대는 결국 아침 08시 20분 원래 예정된 위치보다 310km 더 먼 35°N 154°E 지점에서 10시간이나 일찍 출격시키게 되었다. 일본까지 1,200km가 남은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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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넷의 비행갑판을 뒤덮은 폭격기들[4]
여기에다 항모에서 이함하는 것은 단발기를 모는 해군 조종사들한테도 위험천만한 일인데, 모의훈련 이외에는 항공모함에서 이함한 적이 없는 특공대원들은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이함을 시도해야 했다. 그리고 둘리툴 중령이 탑승한 1번기는 다른 B-25를 주기하느라 다른 대원들보다 이함 거리가 더욱 짧았다. 따라서 1번기는 거의 추락하기 직전까지 기수가 낮아졌지만 이함에 성공했다! 그 뒤를 따라서 2번기, 3번기가 연달아 출격했고 결국 모든 특공대원이 호넷 승조원들의 응원을 받으며 무사히 이함하여 일본 본토를 향해 출격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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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중 폭격기에서 촬영된 사진
한편 일본 해군은 니토마루로부터 받은 무전을 통해 미 항모의 존재를 확인하고 요격을 준비한다. 다만 함재기에 의한 공습일 것이라고 생각한 탓에 공습은 항모가 좀 더 접근한 다음날 아침에나 이뤄질 것이라고 판단해 즉각 요격기를 발진시키지 않았다. 그 시점에서 B-25는 이미 이함을 개시했고 미 함대는 신속하게 퇴각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만일 작전의 실체를 알았더라면 호위 전투기도 없고 빈약한 무장을 지녔던 둘리틀 특공대는 일본 본토 상공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부 요격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20시간쯤 빨리 B-25 편대가 일본 상공에 모습을 드러낸다. 일단 그 시점에 일본 육군 비행장에서도 요격을 위한 준비는 갖춰진 상태였고, B-25 역시 공습 이전에 발견되었다. 하지만 폭격기의 고도가 묘하게 높은데다, 암만 봐도 항모의 함재기로는 보이지 않았던 탓에 일본군의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부대는 아군 육군의 쌍발 폭격기일 것이라고 판단하여 발견했으면서도 보고를 하지 않았고, 어떤 부대는 "국적 불명의 쌍발기 발견"이란 보고를 올렸지만, 일본군 사령부는 '''"미 해군은 쌍발기를 운용하지 않는다"'''며 믿으려 하지 않았기에 장장 15분간 전화 통화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해군 항공대가 운용하는 1식 육공 G4M으로 오인했다는 설도 유력하다. 어찌됐든 상식적으로 육상에서 발진하는 미 육군 폭격기가 일본 본토에 나타날 리는 없었기에, 이런 대응 자체가 무작정 안일하다고만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추가로 원래 계획상으로는 야간폭격이었으나, 계획보다 일찍 이륙한 덕분에(?) 백주대낮에 폭격이 이뤄졌으므로 심리적인 효과가 더욱 극대화되었다. 게다가 그 때가 하필이면 방공훈련이 끝난 직후였다고 하니,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다. 하늘에 떠 있는 뭔가 이상한 폭격기도 일본 비행기인 줄 알았던(손을 흔들어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일본인들은 그 폭격기가 폭탄을 떨어트리는 걸 보고서야 미군기라는 걸 알고 크게 당황했고, 일본 육군이 허겁지겁 Ki-45와 당시 실험기이던 Ki-61 전투기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이미 특공대 전원은 중국소련으로 진로를 잡은 뒤였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일본 육군기를 '''세 대나 격추'''한다.
존 톨랜드의 일본 제국 패망사에 따르면 폭탄이 실제로 떨어진 지역 부근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도쿄 시민들은 공습 훈련을 실전 수준으로 최대한 끌어올리는 정도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 상황을 제대로 파악치 못한 JOAK(일본 제1라디오) 방송은 첫 번째 폭격과 동시에 갑자기 방송을 중단했고, 학교 운동장에 있던 아이들과 붐비는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은 미항공기의 원형 적ㆍ백ㆍ청 표식을 욱일기로 착각하고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였다.[6]

5.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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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리툴 특공대의 공습으로 파괴된 공장 잔해

이 공습은 겉으로는 일본에 공포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지만, 어쨌든 본토가 적의 공격에서 안전하다고 수 세기 동안 믿어온 나라로서는 심리적으로 충격을 받기에 충분했다.

출처 : 일본 제국 패망사 p.497

물론 대규모 공습이 아니라 불과 16대의 쌍발 폭격기를 투입했을 뿐이라 둘리틀 특공대의 성과는 사망자 50명과 가옥 262채 파괴 , 제철공장 1, 석유저장소 1, 발전소 몇 동, 개장중이던 해군 경항모 류호 우현 직격 등으로 크진 않았다.[7] 하지만 류호의 취역 지연은 미드웨이 해전 이후 일본 해군이 항모와 항공대 전력을 저때 보충하지 못하는 데 일조했다. 그리고 '일본놈들 땅에 폭탄을 떨궈서 한 방 먹여준다'는 목적은 달성된 상태였으며, 그 결과 일본군 수뇌부는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8] 언론에는 둘리틀 중령의 이름을 빗대서 "Do little"이라 깎아내리면서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대응하고 있었지만, 한창 승승장구하면서 태평양 반쪽을 집어삼키고 인도양까지 넘보는 상황에서 본토의 수도 한복판에 폭탄이 떨어지는 바람에 천황까지 위험에 처하게 만든 것은 일본군의 장성이라면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또한 이 사건 때문에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미 항모들을 격멸해야 한다는 생각이 힘을 얻어서 이런저런 이유로 지지부진했던 미드웨이 해전의 작전 준비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상세는 미드웨이 해전 항목을 참고. 그리고 일본 육군은 이를 계기로 방공도시계획을 진행시키고 대폭격기 요격부대를 창설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미 해군을 상대할 귀중한 전력이 둘로 분산되어 버려 미드웨이에서 절반이 깨지고, 웨이크, 펠렐루, 오키나와에서 차례차례 깨지며 일본군 항공전력의 숙련도는 급격히 저하되었다.
공습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기자들의 질문에 "글쎄요...군사기밀이니 자세히는 말씀 못드리고요, 뭐 샹그릴라에서 날아올랐다고 해두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샹그릴라는 히말라야 산맥에 있다는 전설속의 이상향이다. 즉 호넷 등의 함선이 참가했다는 기밀을 지키기 위해 대충 가상의 이름으로 둘러댄 것. 그런데 기자들은 이게 정말 함선 이름인줄 알고 <비행기가 '''USS 샹그릴라 함'''에서 날아 올랐다>는 기사를 냈다. 그리고 나중에 미 해군은 정말로 USS 샹그릴라 함을 취역시킨다.
이 작전에 참가한 B-25 16대는 당연하게도 모두 손실되었지만, 특공대원 80명 중 69명이 생환했다. 둘리틀 중령은 중령 계급조차 출격 몇달 전에나 진급했던 것임에도 이 작전의 성과로 인해 대령 계급을 건너뛰고 바로 준장으로 진급했고 명예 훈장까지 받았다. 소령에서 준장까지 같은 해 안에 달성한, 기절초풍할 진급이었다. 그리고 1896년생인 둘리틀 중령은 1993년에 사망할 때까지 엄청나게 장수했다. 둘리틀의 최종계급은 끝까지 다 올라갔다. 휘하 장교들도 꽤 순조롭게 진급했는데, 데이비드 M.존스 대위소장까지, 테드 W. 라우슨 중위소령까지, 윌리엄 M 바우어 중위대령까지 각각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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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이동중인 14번기 승무원들
공습에 참가한 80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다음과 같다.
  • 총 16대 중 10대는 도쿄, 2대는 요코하마, 1대는 요코스카, 2대는 나고야, 1대는 고베를 타격했다. 이 중 윌리엄 팔로우 중위가 이끄는 나고야 타격기의 승무원이 전원 상하이에서 일본군에게 생포되었으며 딘 홀마크 대위가 이끄는 도쿄 타격기의 승무원도 윈저우에서 일본군에게 생포되었다. 이 기체 승무원 10명 중 2명이 익사했다.
  • 1명은 불시착하던 비행기에서 탈출하다 사망.
  • 2명은 비행기가 바다에 떨어지면서 익사.
  • 에드워크 요크 대위가 이끄는 5명은 그들이 탄 도쿄 타격 8호기가 소련 영토에 착륙. 기체는 압수당하고, 5명은 억류자 수용소행. 13개월 후에 이란으로 탈주함. (사실상 석방)
당시엔 미국과 소련이 동맹국이었고 소련은 일본과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억류자로 분류된다. 소련과 일본이 중립국인 상황인데, 자기네 나라를 폭격으로 박살낸 군인들을 아무런 제재없이 본국으로 돌려보내면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쉽게 말하면 직접 풀어주고 집에 보낸 후에 서류엔 탈주로 가라쳐서 처리한 것이다. 정확하게는 이란의 억류자 수용소로 이송한 다음에 이란에 주둔하는 영국 육군 기지 근처에서 풀어준 것. 풀려난 미군들은 영국군 점령지까지 걸어간 후 절차를 거쳐 미국으로 귀국했다. 이렇게 해놓고 서류상으로는 '탈주'한 것으로 처리했다. 소련에서 잡혔는데 왜 이란인가 하면 렌드리스 물자의 이동 문제로 이란을 영국과 소련이 분할 점령하던 시기였다. 즉 영국령으로 보내기 위해서 일부러 가까운 이란으로 이송한 것이다. 둘리틀 특공대 외에도 기체 이상이나 항로를 잃거나 피격 등으로 인해 소련 극동 지역에 불시착한 미군 항공기 승무원은 모두 이런 방식으로 소련에서 아무런 저항 없이 편안하게 '탈주'했다. 단, 승무원들이 '탈주'한 것과는 별개로 항공기 자체는 소련이 압수해서 연구용으로 잘 써먹었다. 자세한 내용은 Tu-4 문서 참조.
  • 8명은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그들 중 3명은 총살.[9] 5명은 포로수용소행. 그중 1명은 병으로 사망. 나머지는 종전때까지 수감.
  • 64명은 중국인들로 인해 보호받고 생존. 중국인 대부분은 일반인들.
  • 살아남은 공습 대원중 4명은 나중에 독일군의 포로가 됨.
  • 다른 13명은 2차대전 중 전사.
포로가 된 8명은 당초 민간인을 살해한 전쟁범죄자라 하여 모두 사형판결을 받았지만, 천황과 도조 히데키, 아돌프 히틀러 등이 자국 포로에 대한 보복행위를 우려하는 뜻을 내비치며 최종적으로는 3명만이 처형되었다. 나머지는 종신형을 받고 베이징 포로 수용소에 수감, 그 중 1명이 사망해서 결국 최종적으로 송환된 건 4명이었다. 또한 처형당한 3명의 시신은 화장 후 적십자를 거쳐 미국에 인도됐다.
한편 폭격 후 엔진 이상으로 소련으로 날아간 1기는 승무원들은 나중에 미국으로 탈출했지만, 기체는 소련이 압류하여 항공기 개발에 이용했다. 나머지 모든 둘리틀 특공대 기체는 중국에 추락하였고 중국인들의 도움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아무리 무모한 작전이라도 적지 한복판에서 비행기를 버리고 낙하산 탈출하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0%에 육박하기 때문에 중국측의 반대를 어르고 달래서 폭격기들이 중국에 착륙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후에 작전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측의 우려대로 일본군은 중국인들을 상대로 분풀이를 열심히 했다. 그 보복으로 중국의 비행장을 공격하고 중국인들을 학살하여 상당히 많은 중국인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때문에 둘리틀 특공대의 폭격기 착륙을 중국측이 대국적인 견지에서 허락하지 않아서 폭격계획이 무산되었다면 미드웨이 해전은 아예 없어졌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중국에서 많이 나오고 있다. 이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모두에게서 나온다.[10]

또 다른 상징적인 조치로, 프랭크 녹스 당시 해군장관의 요청으로 폭탄 중 초탄에 1908년 미 해군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받은 훈장을 매달아 같이 떨어트렸다. 영화 진주만에서도 폭격 직전 폭탄창의 문이 열리면서 신관 앞부분에 묶어놓은 훈장이 바람에 흔들리는 장면으로 이 일화를 재현했다.
2016년, 미 공군은 B-2의 뒤를 잇는 차세대 스텔스 전략폭격기 B-21에 Raider라는 명칭을 부여하며, 둘리틀 특공대에서 따온 명명이라고 밝혔다.
육해군이 합동하여 작전을 성공적으로 끝냈고, 해군 장병들도 열심히 도왔으나, 두리틀 장군은 전후 B-36 폭격기를 옹호하면서 해군을 디스하는 바람에 해군에게 심어주었던 좋은 이미지를 다 날려먹었다.

6. 전후


둘리틀 소령은 1993년 9월 27일에 만 96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2019년 4월 9일(현지 시간), 마지막 생존자였던 리처드 콜이 향년 103세로 세상을 떠나며 둘리틀 특공대 비행사들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17년 메모리얼 데이CSI 뉴욕맥 테일러 역으로 유명한 배우 게리 시나이즈와 리처드 콜이 인터뷰한 영상이 있다. 리처드 콜은 작전 당시 둘리틀이 직접 탑승한 1번기의 부조종사였으며 작전 이후에는 중국-버마 전선에서 복무했다. 최종 계급은 중령이었다.

7. 매체에서의 등장


영화 진주만의 후반부가 바로 둘리툴 특공대의 작전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많은 부분이 영화적으로 각색되었다. 이를테면 불시착 후 미 육군 승무원들이 일본 육군과 총격전을 벌이는 부분은 완벽한 픽션.
루이스 마일스톤의 미국 전시 선전영화인 퍼플 하트가 여기서 생포된 조종사들의 영웅적인 투쟁기를 다루고 있다.
동경 상공 30초(Thirty Seconds over Tokyo)라는 전시선전 영화 역시 이 사건을 정면으로 다룬다. 일부 필름은 영화 미드웨이에 삽입되었고(앞부분에 나오는 빨간 화면의 특촬이 바로 그 작품이다.) 영화 진주만에서 폭격장면의 일부 화면 구성이 이 영화를 그대로 따랐다.[11]
극우 꼴통 소설인 감벽의 함대에서는 하와이가 일본에 함락되었다는 심히 현실성 없는 상태의 미국이 B-36을 실전배치해서 1942년 1월에 100여대로 동경공습을 감행한다. 작중 환생한 다카노 이소로쿠 제독의 대사에도 둘리틀 사건이 언급된다. 당연히 작품이 작품이니까 B-36은 일본에서 먼저 개발된 요격기 슈스이에게 개발살난다.
일본의 3차 진주만 공격 강행으로 하와이가 일본에게 점령된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물 Days of Infamy에서는 둘리틀 공습이 하와이를 목표로 진행된다. 하와이 해전 초반에 미 해군 항모 전단이 날라가는 바람에 폭격기는 미 본토에서 출격해서 폭격후 그냥 바다에 빠지고 조종사들만 기다리는 구축함이 건져주는 스토리다. 한마디로 개그지만 작중에서 이 폭격을 교훈으로 해서 미국은 하와이 주변의 무인도에 기습상륙해서 몰래 B-17을 수용할 수 있는 비행장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이런 전법으로 하와이 탈환전을 성공시킨다.
미국의 SF드라마 Space Above And Beyond(국내에서는 '스페이스2063'이라는 이름으로 방영되었다.)에도 둘리틀 특공대를 모티브로 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교전 중 우연히 나포된 외계인 우주선의 조작법을 익혀서 외계인 본거지를 습격하는 내용인데, 대놓고 작전 기획하면서 둘리틀 특공대처럼 아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 자살에 가까운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대사가 나온다.
전함소녀에서 호넷의 함재기로써 둘리틀 특공대 소속의 미첼이 등장한다. 성능은 폭격기 2인자. 특이하게 노즈아트로 호넷이 그려져있다.
벽람항로에서 호넷의 스킬 '둘리틀 공습'으로 등장한다. B25를 발진시켜 추가로 폭격하는스킬. USS샹그릴라의 명명일화 때문인지 샹그릴라도 둘리틀 공습을 가지고있다.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 1권의 '벚꽃은 미드웨이에서 지다'편에서 언급된다. 매우 무모하고 위험한 작전이라는 점 때문인지, 특공대를 이 사람들로 바꿔서 그렸다.
월드 오브 워플레인에서 전투에서 폭격기로 높은 점령 성과를 낸 유저에게 제임스 해럴드 둘리틀이 탑승했던 B-25가 새겨진 훈장이 주어지며, 이 훈장의 설명 역시 둘리틀 특공대에 관한 설명이 기술되어 있다.
2019년 영화 미드웨이 중반부에 둘리틀 특공대의 이야기가 나온다.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 위 항공모함에서 이항하는 모습부터 도쿄 공습 장면, 그리고 폭격기를 버리고 탈출한 후 중국인들과 함께 이동하다가 일본군의 보복공격을 당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이후에는 미드웨이 해전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등장하지 않지만 엔딩 부분에서 중국인들이 특공대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일본군에게 무참히 보복당했다는 사실과[12] 특공대의 생존자들이 2019년을 끝으로 전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매년 모임을 가졌다는 사실이 언급된다. 에런 엑하트[13]가 둘리틀 중령을 연기했다.

8. 여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둘리틀 특공대가 도쿄를 공습했을 당시 독립운동가이자 해방후 좌우합작운동으로 유명한 몽양 여운형 또한, 이 공습을 도쿄에서 목격했었다. 1937년 중일전쟁 시기부터 일제의 패망을 예견했던 그는 둘리틀 공습을 계기로 일제가 연합군에게 패망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사실을 확신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퍼뜨리다 유언비어죄로 일본 측에게 체포되어 감옥서 보내야 했지만, 어쨌든 둘리틀 공습은 목격한 여운형에게 일제 패망을 확신하고 이를 미리 대비하게 되는 계기가 됐던 것만은 분명하다. 여운형은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하기도 했다.

"지난 4월 18일 미국 비행기의 동경 공습을 직접 목격했는데 미국기의 성능은 일본기 성능보다 우수해 일본기가 미국기를 추적하지 못했다. 동경에서 미국 방송을 들으니 미국도 전쟁 준비에 광분해 최후의 승리는 미·영에 있게 될 것이며, 미·영이 승리하면 조선의 독립이 확실히 가능하고, 전쟁이 끝나면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은 독립운동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전쟁은 장기전이 될 것인데, 내 생각에는 일본의 물자 부족 때문에 뜻밖으로 빨리 종결될 것이다.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이 미국과 함께 일본에 선전을 포고했고, 나도 조선 독립을 희망하고 있다."

여운형이 친구 오건영에게 전한 말, 사상휘보 속간 26호, 1943년



[1] 일반적인 함재기가 항공모함에서 뜨고 내리는 건 기본적으로 발함-착함이라고 하나, 이 경우는 예외적으로 이함-착함이라 한다. 왜인지 하면, B-25 자체부터가 일반적인 함재기가 아닌 육상기지용 중형폭격기이다. 함재폭격용으로는 주로 급강하폭격기 위주였다.[2]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슈나이더컵 대회를 모델로 한 작품인 붉은 돼지의 미국인 조종사 커티스의 모델이 바로 슈나이더컵에 출전하던 시절의 둘리틀 중령이다.[3] 히스토리 채널, <배틀 360>, 출격! USS 엔터프라이즈[4] 일반적인 함재 전투기나 함재 폭격기라면 날개를 접어서 격납고에 넣을 수 있지만, 이건 육상기지용 폭격기인 B-25다. 덩치도 덩치거니와 날개 접기 같은 건 될 리가 없으니 비행갑판에 계류한 것.[5] 단 이함할 때 부상자가 한 명 발생하였는데 해군항공대 요원 중 한명이 폭격기의 프로펠러로 인해 팔이 절단되었다.[6] 일본 제국 패망사 p.495[7] 하지만 적진 한가운데에 달랑 쌍발 폭격기 16대에 탑재된 500파운드폭탄 64발로, 간이조준기만을 이용한 고공수평폭격으로 이룬 전과임을 생각하면 매우 준수한 결과이다.[8] 그런데 사실 일본군은 4년전에 '''중국군'''에게 방공망이 뚫린 적이 있는데다가(이들은 일본 본토에까지 들어간 후 삐라를 살포한 뒤 귀환했다.) 그 때 방공망이 뚫려놓고도 대비도 안 했기에 이 정도로 뚫리는건 당연할지도 모른다.[9] 나고야 폭격기 조종사 딘 E. 홀 마크 중위, 도쿄 폭격기 조종사 윌리엄 G 패로우 중위, 그 밖에 한 명.[10] 물론 중국이 반대했다면 미국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련을 설득했을 것이다. 소련 입장에서는 일본과 전쟁 중이 아니었기 때문에 반대했던 것이지만 사실 소련은 일본의 내부 사정을 꽤 잘 알고 있었으며 폭격기 조종사들을 받아들인 뒤 잡아떼도 일본 입장에서는 속수무책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은 외교관계자는 물론 군부마저도 소련과의 전쟁은 극도로 꺼리고 있었다.[11] 심슨가족의 한 에피소드의 제목이 이 영화의 제목을 패러디한 "Thirty '''Minutes''' over Tokyo"다. 시즌 10의 23화. 심슨가족이 졸지에 일본 도쿄로 여행을 가서 바보스러운 짓들을 해대는 에피소드인데, 그 백미는 호머 심슨이 아키히토 덴노를 집어던지는 부분. 당연히도 이 에피소드는 일본에서 방영되지 못했다.[12] 이 때 작중에 등장한 장면은 둘리틀에게 라이터를 선물받았던 중국인이 그것 떄문에 일본군에게 추궁당하며 학살 위기에 처하는 장면이다. 둘리틀 특공대와 관련하여 학살된 중국인은 약 25만 명이라고 한다.[13] 다크나이트에서 하비 덴트 역할을 맡았던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