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지마 전투

 

'''이오지마 전투'''
The Battle of Iwo Jima
硫黄島の戦い、デタッチメント作戦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의 일부
[image]
이오지마의 위치
'''날짜'''
1945년 2월 19일 ~ 1945년 3월 26일
'''작전명'''
Operation Detachment (파견 작전)
'''장소'''
일본 제국, 도쿄 도 이오섬
<colcolor=#000> '''교전국'''
<^|1> [image] 미국
<^|1> [image] 일본 제국
'''지휘관'''
<^|1>'''미 해군'''
[image] 체스터 니미츠
[image]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image] 마크 미처
'''미 해병대'''
[image] 홀랜드 스미스
[image]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image] 이치마루 리노스케
'''결과'''
미군의 승리
'''영향'''
새로운 전술로 미군의 피해를 유발함
'''전체 병력'''
7만명(25만명)[1]
함선 5백여 척
2만 2,060명
전차 23대
해안포 33문
대전차포 69문
화포 438문
대공포 300여 문
'''피해규모'''
전사 6,821명
부상 1만 9,189명
호위항공모함 1척[2] 침몰
호위항공모함 1척 소파
정규항공모함 1척 대파
전사/실종 1만 8천여 명
포로 216명
[clearfix]
[image]
상륙을 시도하는 미 해병대(2월 19일)[3]
[image]
[image]
이오지마에 상륙하는 미군. 뒤에 있는 건 LVT(A)-4.
스리바치 산 정상에 게양된 성조기
1. 개요
2. 양측의 대비
2.1. 일본군
2.2. 미군
3. 경과
4. 기타
5. 루즈벨트에게 보내는 서(書)


1. 개요


승리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 모두가 의심했던 것은, 우리 중 어느 누구라도 살아남아서 최후에 묘지에 참배할 수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Victory was never in doubt. What was in doubt in all our minds was whether there would be any of us left to dedicate our cemetery at the end.)

- 제3해병사단장 그레이브스 B. 어스킨 소장

이오지마에서 싸운 군인들 사이엔, 비범한 용기는 당연한 미덕이었다.

(Among the men who fought on Iwo Jima, uncommon valor was a common virtue.)

- 체스터 니미츠 제독, 이오지마 전투 이후[4]




태평양 전쟁 말엽인 1945년 2월 19일부터 3월 26일까지 서태평양의 전략적 요충지인 이오 섬을 두고 벌어진 미 해군해병대일본 제국 육군 간의 전투.
도쿄에서 거의 정남쪽으로 1,216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오지마는 원래 별 볼일 없는 손바닥만 한[5] 화산섬이었지만, 사이판 점령 이후 중부 태평양에서 미 해군이 진격하자 이에 일본 해군이 이곳에 비행장과 레이더 기지를 건설한다. 이 기지는 지리적으로 일본 본토 바로 앞의 전진 기지인데다, 본토 폭격을 목적으로 인근을 지나가는 미 육군항공대B-29 폭격기를 요격하거나 본토에 경보를 해 줄 수도 있었다. 또한 미군은 미군대로 도쿄 폭격을 마치고 귀환하는 B-29 폭격기들을 위한 비상 활주로를 만들 장소를 확보하기 위해서 이 섬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결국 이러한 전략적인 위치 때문에 이오지마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2. 양측의 대비



2.1. 일본군


[image]
육군 중장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후술할 해군의 이치마루 제독과 명목상 동급이었으나, 실질적으로 이오지마의 육해군 수비 병력 전체를 지휘했다.
[image]
▲ 이오지마의 일본 해군 측 최선임자였던 해군 중장 이치마루 리노스케 (市丸利之助) 제독은 제27항공전대 사령관[6]으로 해군 육전대를 이끌며 구리바야시 다다미치와 함께 이오지마 전투를 지휘했다.
이오지마 전투는 이전까지 태평양 전선에서의 전투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는 당시 이오지마 수비대 사령관으로 부임한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장군의 전술에 기인했다. 냉정한 현실주의자였던 그는 이오지마 방어가 강요된 자살 행위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예정된 희생을 조금이라도 일본에 유리하게 이용할 방법을 강구했다. 그리하여 구상한 방어 전술은 장기 방어전을 통해 최대한 미군의 희생과 출혈을 강요하여 본토에 시간을 벌어 주면서, 한편으로는 일본 본토 상륙을 눈 앞에 둔 미군에게 이오지마에서 지옥을 보여주어 상륙전에 대한 트라우마를 심어 주어 일본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상황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구리바야시 다다미치는 전멸을 앞당기는 옥쇄 돌격을 엄격히 금지하고 가능한 오래 병력을 유지하면서 집요하게 전투를 지속하기 위한 지침들을 만들어 부하들에게 숙지시켰다. 이는 '''상당히 유효한 조치였다'''.
모든 전쟁에서 패망 직전 상황에 처한 군대에, 그에 걸맞지 않게 유능한 지휘관이 투입되면 아수라장을 넘어 지옥도가 연출되었던 역사들 처럼 다다미치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일본군의 상황을 생각하면 실로 유능한 지휘관이어서 안습할 따름. 때문에 이오지마 역시 일본군, 연합군 모두에게 지옥도가 펼쳐지게 되었다.
구리바야시 다다미치의 새로운 전술 때문에 이오지마 전투의 시작인 해안 상륙 시점부터 미군은 전혀 낯선 전황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그 당시 일본군은 해안선 방어를 할 때 '군대는 상륙하는 그 시점에 가장 방어가 취약하다'라는 논리를 따라 상륙정이 다가오는 동안 해안선 가까이에 대기하다가 적군이 상륙하면 바로 그때 공격하는 전술을 취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게 공수 양측의 물량과 화력이 어느 정도 비등하다는 전제가 있을 때의 얘기라는 것. 태평양 전역 곳곳에서 전력을 줄줄이 말아 먹고 본토마저 위협받는 이 시점에서 미국은 일본을 압도하는 물량과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상륙하는 시점이 가장 취약한 것은 맞지만, 미군은 이미 타라와 전투에서 일본군이 구축한 방어선에 호되게 데인 이후로는 상륙에 앞서 구형 네바다급 전함, 펜실베이니아급 전함, 테네시급 전함, 뉴멕시코급 전함들의 대구경 함포를 이용한 상륙 준비 포격[7]항공모함 함재기를 동원한 공습을 펼쳐 해안에 설치된 토치카나 방어선을 철저히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그랬기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 일본군은 해안선에 올망졸망 모였다가 사이좋게 포탄에 맞아 사망했다.
구리바야시는 이런 해안선 방어 전술의 문제점을 곧바로 파악했다. 그는 해안선에 방어선을 구축하는 대신 해안선 안쪽으로 병력을 빼고, 부임 직후 곧바로 거대한 땅굴로 연결된 탄탄한 방어망을 구축했다.[8] 그리고 일본군의 고질병 반자이 돌격을 금해 쓸데없이 나가 죽기보단 최대한 오래 살아남아서 저항하도록 명령했다.[9] 그 결과 미군은 이오지마에서 이제까지 태평양 전선에서 마주쳐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는 일본군을 맞이하게 된다.[10]

2.2. 미군


[image]
미군이 촬영한 이오지마 공략 컬러 영상
당시 이오지마의 일본군 수비대는 미 해군의 해안 봉쇄로 군수 지원이 끊긴 상태였으며, 미 태평양 함대는 미 해군 항공대와 미 육군 항공대, 해군 함정을 동원하여 1944.6월부터 무려 9달 동안이나 이오지마를 폭격 및 포격을 가한다. 이 공격으로 섬의 모습이 연기에 싸여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8인치 함포에서 20㎜ 기관포까지 모두 동원해 섬이 박살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퍼부어댔지만, 이미 그 시점에 일본군은 지하 동굴에 틀어박혀 있었다. 사실 일본군에게는 이오지마에 배치된 것 자체가 "싸우다가 죽어라."는 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일본군도 악착같이 버틸 수 밖에 없었다.
상륙을 앞두고 상륙 지상군인 제5상륙군단장 해리 슈미트 해병 소장은 원활한 상륙 작전을 위해 해군에게 10일 간의 상륙 준비 포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미 제5함대 상륙지원 기동부대(TF-52) 사령관 윌리엄 블랜디 제독은 포탄 부족으로 그 요청을 거부했다. 슈미트는 절충안으로 다시 9일의 포격을 요구했지만, 블랜디는 단지 3일 간의 포격에만 동의했다. 이로 인해 5상륙군단과 TF-52가 서로 떽떽거리면서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결국 상륙 준비 포격은 3일 남짓 이루어졌고 그대로 상륙할 수밖에 없었다. 5상륙군단의 상급부대인 미 제5함대 56기동부대(TF-56, 5함대 상륙 해상군, 상륙작전시 상륙함을 지휘한다.) 사령관인 홀랜드 스미스 해병중장은 전쟁 후 자서전에서 이오지마 전투 당시 해군의 상륙준비포격 부족으로 해병들의 피해가 컸다고 격렬히 불평했다. 이로 인해 상륙 부대의 피해가 컸다는 주장도 있지만, 쿠리바야시 장군이 지하 터널을 워낙 잘 구축해서 별 효력이 없었을 것이란 주장도 있다. 게다가 이미 9달이나 포격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10일 더 한다고 상황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 아버지의 깃발에서 해병대 지휘관이 통신기를 들고 '포격 더 안 해 주면 당신네 해군도 다른 곳에 못가고 여기 발 묶이는건 마찬가지요. 기어이 3일 동안만 해주겠다고? x나게 고맙군!'라고 하면서 떽떽거리던 장면이 이 부분이다.
미 해병대는 이오지마 점령에 그리 많은 시간이 들지 않을 것으로 오판을 하였다. 심지어 펠레리우 전투를 겪고 나서도 다른 일본군들 같이 이오지마의 일본군도 상륙 시점에 총공격을 가하고 바로 그 저녁에 야음을 틈타 남은 병력을 모두 반자이 돌격에 사용할 것이라 예측했으며 이것만 견뎌 내면 미군의 일방적인 소탕만 남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정작 해병대가 상륙할 때 일본군은 전혀 공격하지 않았고, 해병들이 다가올 반자이 돌격에 대비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는 동안에도 자신들의 지하 벙커에서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 상륙부대의 3개 해병사단이 해안선에 상륙하고 해안선에 진지를 구축하던, 모든 해병들이 해안선의 발이 푹푹 빠지는 화산재 같은 모래에 발이 묶인 바로 그때 일본군의 총 공격이 시작되었다.

3. 경과


[image]
쌍방의 인적 물적 손실이 막대했던지 개전 첫날에만 미합중국 해병대 2,500여 명이 전사 및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하는 피해가 났다. 당시 전황 보고를 들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물론 일본군 쪽의 손실은 말할 것도 없었다. 21,000명의 이오지마 수비대 중 살아남은 사람은 1/10에도 못 미쳤고, 그나마도 태반이 죽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포로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미 해병대가 철저하게 일본군 수비대를 쓸어 버렸기 때문이다. 화염 방사기를 동원해 동굴을 통째로 태워 버리는 일은 다반사였으며, 공병대가 TNT로 동굴 내부를 싹 쓸어 버리거나 불도저로 동굴을 메워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즉, '''다 죽어서 잡을 포로가 없었다.''' (태평양 전쟁 기간중 미해병대와 일본군은 서로의 포로를 잡기보다는 사살하는게 암묵적인 룰이었다)
해군 수병들과 해병대원들은 상륙 직전까지만 해도 "1주일 만에 끝나겠지? 저런 별볼일 없는 섬 따위... 일본 애들도 얼마 못 버틸 테고 말이야." 하는 농담을 주고 받을 정도로 전투의 전망을 낙관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이, 일본군은 지연전을 목표로 섬 전체를 요새화시켜둔 상황이었다. 상륙 직후의 막대한 희생과 스리바치 산 함락 이후로도, 미군은 섬 내륙 지역으로 더디게 전진하며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하였다. 특히, 센다 사다스에 소장이 지휘하는 혼성 제2 여단의 강력한 저항에 미군은 3월 2일부터 8일간 약 3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해 센다가 지키는 타마나 산을 우회해야 했다. 하지만 타마나 산의 일본군은 개전 17일후 폐쇄된 참호안에서 화염방사기에 타죽을 운명에 놓이게 된다. 센다는 쿠리바야시에게 옥쇄하겠다고 요청하나 쿠리바야시는 이를 거부하고 대신 본대에 합류할 것을 명령한다. 하지만 결국 미군의 공격에 본대에 합류 직전 센다 군은 전멸하고 센다와 참모진들은 자결한다. 이후 쿠리바야시는 센다의 최후를 보고 받고 최후의 전투를 준비한다.
3월 26일, 쿠리바야시는 남은 3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마지막 돌격을 감행했으나[11] 실패하였고, 대부분의 병력이 전사했으며 이 때 함께 돌격한 쿠리바야시도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일본군의 마지막 조직적 공격이었다.
이 후 일본군은 이오지마 곳곳에서 일본군의 유격전이 있었지만 큰 피해는 주지 못했고, 일본군은 이 소규모 유격전으로 인해 1200여명이나 전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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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주일 만에 끝난다는 전투는 끔찍한 희생자를 만들면서 1개월 이상이나 계속된 끝에 미군의 승리로 끝난다. 이 전투는 최초로 일본군보다 미군의 인명 피해가 컸던 전투였다. 물론 미군의 인명 피해는 부상이 대부분이었으나 이는 기존까지 미군이 겪지 못한 뼈아픈 참사였다. 물론 일본군 자체는 전 병력이 전사하다시피하여 사실상 궤멸했지만. 전 병력 11만 명 중 미 해군 및 해병대의 전사자는 6,821명, 부상은 19,189명에 실종이 494명이었다. 일본 육해군은 21,000명 가운데 216명만 남고 전원 전사했다.
결과적으로 뒤이은 오키나와 전투까지 합쳐져서 일본군에게 호되게 데인 미군은 쿠리바야시의 의도대로 일본 본토까지 공격하는 것에 상당한 부담감을 가지게 되었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쿠리바야시가 이 전투를 통해 미국이 부담감에 눌려 일본과의 전쟁수행을 포기하고 협상에 들어가는 것을 기대한 것과 달리, 빠른시일 내로 전쟁을 끝내야 했던 미국은 협상단보다 더욱 더 뛰어나고 훌륭한 대화수단을 선보였다.

4. 기타


  • 천여명의 해군 소속 조선인 군속들도 전투에 휘말려 사망했다. 비행장 등 섬 내 해군 시설 건설을 위해 입도했던 조선인 군속들은 전투가 시작되자 전투원으로 취급되었고, 태반이 전사하였다. 1945년 3월 9일자 서일본신문에서는 반도 용사도 돌격했다는 제하로 이들의 옥쇄를 보도하였다.
  • 이오지마 전투에서는 총 27명의 장병들이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해병대 23명, 해군 4명에게 수여되었으며 이 중 13명은 사후 추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을 통틀어 해병대에서 수여받은 명예 훈장이 82명인데 약 28%의 비율이다. 심지어 전사자들 중에는 더 퍼시픽의 주인공으로도 잘 알려진 존 바실론 중사처럼 이전에 명예 훈장을 받고 다시 실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사례도 있었다. 그만큼 이오지마 전투가 매우 격렬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 이오지마가 점령됨으로 인해 미국은 일본 본토를 공습할 B-29의 최전방 기지이자 피격기, 혹은 재보급기와 호위 전투기를 위한 중간 기착지를 얻게 되었고, 점령 이후 본격적인 일본 본토 공습을 가하게 된다. 미군의 이오 섬의 확보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오지마 점령 이후 오키나와 공략 전 전진 기지의 획득과 함께 기존에 티니안이나 사이판, 에서 B-29 폭격기의 항속 거리 문제로 인한 폭장량의 제한이 점차 완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포함하여 손실되는 B-29 폭격기나 승무원의 희생이 줄어들게 되었고[12],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폭격기의 공습을 경고해줄 수 있는 경보망이 무너져 버려 본토 폭격의 피해를 고스란히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특히나 피격 및 기체 고장으로 불시착하는 수많은 폭격기들이 이 섬 덕분에 구원받았다. 미 육군항공대 추산으로 이오지마 비행장에 불시착한 24,000명의 폭격기 승무원 중 절반인 12,000명은 이오지마가 없었더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이 섬은 수많은 목숨을 희생한 대가로 수많은 목숨을 구했다.

이오지마 전투에서 상륙한 해병대원들이 입은 엄청난 피해 때문에 이오지마 전투의 의의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는 입장도 존재한다. 하지만 해병대원의 희생을 대가로 비용/전력을 확보했다는 반론도 있다. 이오지마는 일본 본토를 폭격하는 데 필수적인 전략 거점이라는 점도 있고 본토 상륙에 교두보를 얻는 동시에 진격할 때 뒤통수를 맞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점령했어야 한다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처음부터 핵을 쏘지 않는 한 통상 작전으로는 반드시 공략해야 했을 것이며 애초에 미국이 가지고 있던 핵조차 몇 개 없었던 데다 도쿄 대공습의 위력이 핵보다 강했으나 버텼던 것을 보면 미국 입장에선 핵은 도박수였다. 그러니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본격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 이 때다.
그리고 이오지마는 일본에도 최대 요충지였는데. 이오지마는 사이판, 티니안, 괌에서 발진하는 폭격기가 지나갈수 밖에 없는 위치에 있어 폭격기를 쉽게 감시할 수 있었지만, 이오지마를 뺏기자 의지할수 밖에 없는건 감시정과 이즈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 밖에 없었고, 감시정들은 어선같은 민간선을 징발한 수준이라 미 잠수함들에게 속절없이 사냥 당했고[13] 오가사와라 제도와 이즈 제도는 그래도 감시정들보단 나았지만 섬이라 그냥 우회해 버리면 그만이고, 발견이 돼도 B-29의 최대속도 574km/h를 생각하면 거의 뒷북 수준의 경보를 보내는것 이라서 조기경보망 자체가 일거에 무너졌다.
  • 한편 이 전투의 처절함에 빗대어 이글루스이오공감을 이오지마라 부르곤 했다. 비꼬는 의미이다. 이오공감이 사라지면서 이 말도 자연스레 쓰이지 않게 되었다.
  • 과달카날 전투의 존 바실론처럼 이오지마 전투에서도 기관총 무쌍이 등장했다. 그 주인공은 전쟁 전 공구를 제조하는 공장에서 생산직으로 근무하다, 1942.9.22일 미 해병대 예비군으로[14] 입대한 토니 스타인(Tony Stein) 상병으로 그는 버려진 해군 전투기에서 떼어낸 30구경 7.62mm AN/M2 경기관총에다가 M1918 브라우닝의 양각대와 M1 개런드의 개머리판으로 만든 기관총을 직접 제작한 후 스팅어(Stinger)라고 이름을 붙여 그걸로 일본군 진지들을 쓸어버렸다. 탄약이 떨어지면 탄약을 보충할 겸 부상자를 해변으로 후송하면서, 그렇게 8번을 왕복하며 전장을 종횡무진했다. 이 영웅적 행동으로 명예 훈장이 수훈되었다. 그는 원래 해병 중의 해병이라는 미 해병대 제3사단 제1공수연대 소속이었지만 1944.1.8일 미 해병대 사령관 알렉산더 반데그리프트 해병 중장의 부대 해체 명령에 따라 이오지마 전투 당시에는 새로 창설된 미 해병대 제5사단 28연대 1대대 A중대 소총 부분대장으로 근무 중이었다. 그러나, 이오지마 전투 중인 1945.3.1일 중대 척후로 19명의 해병들과 함께 정찰을 나갔다가 일본군 저격병의 총을 맞고 전사했다.
  • 콘솔판 콜 오브 듀티 시리즈의 하나인 월드 앳 워-파이널 프론트의 마지막 미션이 바로 이 부분을 소재로 하였다.

4.1. 이오지마의 깃발


[image]

Holland, the raising of that flag on Subachi means a Marine Corps for the next 500 years.

홀랜드, 스리바치의 저 깃발은 '''해병대의 다음 500년'''을 의미하오.

제임스 빈센트 포레스탈 해군 장관, 1945년 2월 23일[15]

누구나 어디선가 한 번쯤은 본 기억이 있을 사진이다. 이오지마에서 가장 높은 스리바치 산 정상에 성조기를 게양하는 장면이다. 사진의 원 제목은 "Raising the flag on Iwo jima"이다. 영화 '아버지의 깃발' 포스터를 비롯하여 미 해병대 전쟁 기념관을 비롯하여 수많은 곳에 석상으로도 만들어져 있다.
원래는 더 작은 깃발을 먼저 세웠지만, 후에 좀 더 폼나게 더 큰 깃발을 세우는 장면이다. 맨 처음 세워진 깃발은 전투가 계속되다가 급하게 올리느라 좀 작은 깃발을 사용했다. 이 때의 사진도 남아 있는데 해병대 기관지 "레더넥" 의 종군 카메라맨 '루이스 R. 로워리' 하사가 촬영했다. 이후 대대장 존슨 중령은 이 깃발을 대대 금고에 반납, 대대 소유물로 보관하고 "대신 더 큰 깃발을 달라!"라고 지시, 진주만 공습당시 격침된 함선에 있었던 성조기를 보관하고 있던 LST에서 해병대원들이 꺼내와 두 번째로 깃발을 세우다가 사진이 촬영된 것. 조 로젠탈이 찍은 이 사진은 퓰리처 상을 받았다. 워낙 광원이나 구도가 완벽하고 역동적이라, 당시에도 로젠탈이 이 사진을 찍기 위해 깃발 세우는 연출을 반복시켰다는 소문이 꽤나 나돌았다. 사진을 찍을 때 같은 곳을 촬영한 영상이 있고 회고록과 증언 등이 나와 사라진 상태다.
이 두가지 버전 사진 중에 두번째 버전 필름이 먼저 미국으로 들어가 전국의 신문 1면에 실리게 되었다. 심지어 신문 1면을 보관하게 깃발 계양장면 사진이 접히지 않게 해달라는 독자들의 요청에, 배치를 바꾸어 다시 신문에 실릴 정도였다. 두번째 버전의 사진의 구도가 워낙 완벽하여, 첫번째 사진이 먼저 미국으로 들어 갔다고 해도 이정도로 큰 방향이 있을지 의문이 될 정도이다. 이후 이 사진은 미 해병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어 전후 미국 각지에 세워진 해병대 기념비들 역시 사진 속 장면을 본따 세워졌다.
그러다 2016년 미 해병대는 사진 속 인물들이 기존에 알려진 것과 약간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여 기존에 알려진 내용을 정정했다. 깃발을 세운 인물들도 상황이 워낙 긴박하여 헷갈려 하였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기억을 조합하여 진실을 찾게 되었다.
이 사진은 본국에 보내지자마자 잔악한 일본군에 미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상징이 되었고, 정치적 쇼맨십에 능했던 루즈벨트 당시 미 대통령은 이 해병들을 본국으로 송환해, 맨해튼 프로젝트 등에 쓸 전시 국채 판매의 광고판으로 써먹으려 했으나, 송환 명령이 내려지기 전 앞서 말한 3명이 전사하는 바람에 나머지 해병들만 본국으로 송환됐다. 이 기간 중 아이라 헤이즈 해병은 알코올 중독에 걸렸다. 아이러니한 건 이 사람만 찐이고 브래들리와 개그넌은 구라였으며, 실제 깃발을 올린 슐츠와 켈러는 이를 말하지 않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싸웠으며, 죽을 때까지 자신들이 진짜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위 사진의 주인공들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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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생, 체코슬로바키아(현재 슬로바키아) 출신.
-미 해병대 제5사단 28연대 2대대 E중대 2소대 소총분대장. 계급은 병장
-원래 도로공사 인부였으나 1939년 미 해병대에 지원 입대. 쿠바 관타나모 해군기지 소총경비중대와 해병대 제1여단 7연대 3대대 본부중대, 패리스 아일랜드 신병 훈련교관(DI)으로 복무했고, 해병 중의 해병이라는 제3레이더스대대에서 근무하다가 1944.1.8일 미 해병대 사령관 알렉산더 반데그리프트 해병 중장의 해병대 내 엘리트 부대 해체 명령에 따라 28해병연대 E중대 소총분대장으로 복무 중이었다.
-1945년 3월 1일 이오지마에서 아군 함포의 오인사격으로 전사[16]
마이크 스트랭크
[image]
-1924년생 텍사스 출신. 스트랭크 분대의 부분대장, 계급은 상병.
-고등학교 미식축구선수 출신으로 고등학교 졸업 후 미 해병대에 징집되었다.(징집기수) 신병훈련 수료 후 해병대 공수부대에 지원, 해병 중의 해병이라는 미 해병대 제3사단 제1공수연대 본부중대와 1공수연대 1대대 화기중대, 1대대 본부소대에 근무하다가 1944.1.8일 미 해병대 사령관 알렉산더 반데그리프트 해병 중장의 해병대 내 엘리트 부대 해체 명령에 따라 28해병연대 E중대 소총분대 부분대장으로 복무 중이었다.
-1945년 3월 1일 마이크 스트랭크가 전사하자 분대 지휘를 맡지만 그 역시 스트랭크가 전사한 지 수 시간만에 일본군의 박격포 공격으로 전사.[17]
할론 블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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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생 켄터키 출신. 스트랭크 분대의 소총수, 계급은 일병.
-고교 졸업 후 냉장고 공장에서 생산직으로 일하다 1944년 징집되었다.(징집기수) 미 해병대 제5사단 28연대 E중대에 배치되어 1945년 3월 21일 이오지마 전투 당시 일본군 저격수의 총탄을 맞고 전사.
프랭클린 수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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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생 애리조나 출신. 스트랭크 분대의 소총수, 당시 계급은 일병(최종 계급은 상병)
-피마 인디언 출신으로서 고등학교 졸업 후 건설현장 목수로 일하다, 1942년 미 해병대 상근예비역으로 징집되었다.(징집기수) 신병훈련 수료 후 해병대 공수부대에 지원, 해병 중의 해병이라는 미 해병대 제3사단 제1공수연대 3대대에 근무하다가 1944.1.8일 미 해병대 사령관 알렉산더 반데그리프트 해병 중장의 해병대 내 엘리트 부대 해체 명령에 따라 28해병연대 E중대 소총분대 소총수로 복무 중이었다. 사진으로 유명세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간 후 영웅으로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진정한 영웅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그곳에서 전사한 군인들이라 말했다고 한다. "45명의 소대원 중 단지 5명만이 살아남고, 250명 중대원 중 27명만이 죽거나 다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내가 영웅이겠는가?" 또한, 그는 저 깃발이 꽂힌 날 상륙했으므로 역사적인 순간에 그 자리에 있었다면 몰라도 사진에 찍혔다고 영웅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높으신 분들은 그런데 관심이 없었고, 국채 판매고를 올리는 데만 열중했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 사람들은 그에게 가게를 차려 주었으나. 그 대신 해병대 작업복을 입고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을 것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물론 가게는 말아먹고 이곳저곳을 방랑하다, 1955년 애리조나의 인디언보호구역에서 알콜 중독으로 사망했다.
아이라 헤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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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디트로이트 출신, 미 해병대 제5사단 28연대 2대대 E중대, 계급은 일병(최종 계급은 상병)
-1943년 미 해병대 상근예비역으로 징집되었다.(징집기수) 28해병연대 E중대 소총분대로 자대 배치를 받아 소총수로 복무 중 이오지마 수바라치산 정상에 2번째 깃발을 세우는 사진에 찍혔지만, 알려지지 않았다가 2016년 사진속 인물로 공식 판별되었다. 당시 정상에는 2소대 일부와 3소대 병력이 섞여 있었는데, 슐츠는 스트랭크의 분대원은 아니다. 죽을 때까지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1995년 사망.
해럴드 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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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아이오와 출신, 미 해병대 제5사단 28연대 2대대, 최종 계급은 상병
-이오지마 수바라치산 정상에 2번째 깃발을 세우는 사진에 찍혔지만, 알려지지 않았다가 2019년 사진속 인물로 공식 판별되었다. 죽을 때까지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1979년 사망.
해롤드 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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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위스콘신 출신, 미 해병대 제5사단 28연대 2대대 E중대 의무부사관이었다. 계급은 해군 의무병장(PM2).
고등학교 졸업 후 장의사로 일하다 1942년 해군에 징집되었다. 해군 의무병으로 오클랜드 해군병원에 근무하다가 해병대 28연대 E중대로 전출되었다. 그는 이오지마 수바라치산 정상에 첫 번째 깃발을 세운 인물이었지만 2016년까지 두 번째 깃발을 세우는 사진 속 인물로 오인되었다. 스리바치 산 전투 이후 인명 구조 및 부상에 따른 공로로 해군 십자장을 받았다. 자신들이 영웅이라는 사람들 말에 그는 "우리들은 적당한 시간에 적당한 장소에 있었기 때문이지 영웅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하지치 그 이유는 사후에야 밝혀지는데, 그는 자신이 깃발을 올린 사람이 아닌데도 자기가 올렸다고 거짓말을 한 국민사기극의 주범이다. 가장 오래 살았고, 가장 좋게 최후를 맞은 인물. 1994년 사망. 아들 제임스 브래들리는 역사학자가 되어, 베스트 셀러이자 자기 아버지와 부대원들의 삶을 그린 저서 '아버지의 깃발'을 썼다. 사후 두 번째 성조기 게양 사진 속 인물이 아님이 밝혀져 말이 좀 나왔지만, 아들이 이오지마 전투를 다시 세상에 알린 공적을 인정해서 흐지부지 넘어갔다. 제임스 브래들리도 아무 이의 없이 이를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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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뉴햄프셔 출신, 미 해병대 제5사단 28연대 2대대 전령, 당시 계급은 일병(최종 계급은 상병)
-신발공장 생산직과 자전거 배달원으로 일하다 1943년 미 해병대 상근예비역으로 징집되었다.(징집기수) 신병훈련 수료 후 찰스턴 해군조선소 경비중대와 미 해병대 제5사단 헌병중대를 거쳐 당시에는 28연대 2대대 전령으로 저 사진에 나오는 깃발을 산 정상까지 가지고 올라간 인물로 2019년까지 두 번째 깃발을 세우는 사진 속 인물로 오인되었다. 1979년 사망.


5. 루즈벨트에게 보내는 서(書)


이오지마의 일본 해군측 최선임자인 이치마루 제독은 미군이 지휘소 근처까지 쳐들어오자 죽음을 직감하고, 대담하게도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직언을 고하기로 하고 편지를 쓴다.
이를 하와이 출신 해군 하사관인 미카미 히로부미(三上弘文) 병조에게 영어로 번역하게 하여 일본어, 영어 각각 1장으로 된 문서를 무라카미 해군 대위에게 건넸다. 무라카미 대위는 최후의 돌격에서 전사했는데, 이 서한은 일본 장교들의 시신을 뒤지던 미군에게 발견되어 7월 11일 미국의 신문에 게재되었다.
그 내용인 즉슨, '여태까지 앵글로색슨을 위시한 백인들이 세계를 갈라 먹고 있었는데 욕심이 너무 많은 것 아니냐? 우리 일본이 아시아의 유색 인종들을 해방시켜서 잘 살아 보려고 하는 것인데 니들이 딴지를 걸어서 전쟁이 난 것이다. 제발 우리의 진심을 이해하고 양보 좀 해라.'는 것으로,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개소리지만 찬찬히 읽어 보면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보인다. 영문, 일문 편지 전문출처 이는 일본 군부가 선전한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의 실체가 일선 군부대에는 알려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만큼 일본 국민들이 군부와 덴노에게 철저하게 세뇌가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말단 수병이나 위관급 장교도 아닌, 나름대로 배웠다는 엘리트인 제독조차 이런 개소리를 진지하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구리바야시 다다미치처럼 이치마루 제독도 시신이 수습되지 않았지만 마지막 돌격시 함께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1] 이오지마 전투에 종군한 미군의 전체 군종(Armed Forces)의 미 해군, 미 해병대, 미 육군항공대의 총합 병력이 25만명이며 섬에 상륙한 지상군으로 일본군과 직접 교전한 미군은 7만명이다.[2] USS Bismarck Sea. 가미카제 자폭 공격으로 침몰. 일본기 공격으로 침몰한 최후의 미군 항모.[3] 하얀색 줄이 가로로 처진게 전부 미군 상륙정이 지나가면서 내는 파도이고 뒤로 보이는 봉우리가 바로 이오지마 전투의 최대 격전지 중 하나였던 스리바치 산이다.[4] 니미츠의 이 '비범한 용기는 당연한 미덕이었다' 발언은 해병대 창설 이래 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미 해병대 장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54년 세워진 해병대 전쟁 기념비 기단에 새겨져있다.[5] 찌그러진 마름모 형태로, 말은 그래도 장축이 8.5km 정도 되었다. 전차를 밀어넣기엔 애매하지만 활주로 깔고 2만 명이나 되는 병력이 버팅길 수는 있는 크기. 자급자족 따위야 말도 안되지만...[6] 항공대는 진즉에 전멸하여, 잔존 병력은 모두 육전대로 편성됐다.[7] 위엄 쩌는 파괴력으로 탱크와 비행기 잘 잡아먹기로 유명하던 독일의 8,8cm FlaK도 인치로 환산하면 3.46인치 정도 된다. 이 전함들이 구식이긴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무식하게 9문 12문씩 탑재하고 다니는 12~16인치 대구경포의 파괴력은 지상 공격용으론 상상을 초월한다. 예를 들어, 155mm(약 6.1인치정도다.) 곡사포의 살상반경이 50m 정도이다. 미국의 전함 테네시의 14인치 함포의 별명은 '수영장 제조기'였으며 대공용 부포로 5인치(127mm)를 달았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서부전선 사진들을 찾아보면 티거와 판터등이 통째로 뒤집혀 대파된 사진들을 볼수있는데 이게 대부분 전함보다 작은 구경을 주로 쓰는 미육군 포병대의 화력에 당한것이다.육군포병이 아무리커봤자 8인치 전후였는데(그나마 240mm=약 9.45인치포가 있긴했다) 12~16인치면...[8] 다만 이오지마가 화산섬이라 유황 가스가 많아 한 팀에 1명이 1분 간격으로 뛰어들어가 공사를 하고 바로 뛰어나오는 식으로 해야 해서 전투 당시 원래 계획의 80% 정도 완성된 상태였다.[9] 이런 전술은 후일 오키나와 전투로 이어지게 된다. 단, 어디까지나 옥쇄를 주 목적으로 하는 자살적인 공격을 금지한 것이지 반격 자체를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쿠리바야시 장군은 필요하다면 화력 지원 하에 소규모로 국지적인 반격을 가하는 것은 허용했는데, 이때 적에게 이동할 때에는 사격을 가하기 전까지는 최대한 은엄폐 및 기도비닉을 유지하라고 강조했다. 기존의 반자이 돌격같은 경우 말이 공격이지 사실상 얌전히 자살하는 식으로 옥쇄하느니 적에게 총 한방이라도 쏴보고 죽겠다는 생각으로 가하는 경우가 많아 은엄폐를 별로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에 비하면 상당히 합리적인 명령이었다.[10] 사실 펠레리우 전투에서의 일본군도 이오지마 전투와 비슷한 방식으로 미군을 괴롭혔지만, 펠레리우 전투 자체가 워낙 유명하지 않다 보니 이쪽이 더 많이 알려져 있다.[11] 반자이 돌격이 아닌 제대로 된 돌격[12] 영화 아버지의 깃발을 보면 이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미군이 이오지마 섬을 함락한 직후, 곧 엔진이 파손된 B-29 폭격기가 연기를 내뿜으며 간신히 착륙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실제로는 비행장 남북에서 전투를 벌이는 그 긴박한 상황에 파손된 B-29가 착륙한 것이 첫 번째이다. 전투중인 비행장에 착륙할 정도로 이오지마 비행장은 대체불가였다.[13] 당시 얼마나 상황이 절망적이었냐하면 사실상 일본은 해군 자체가 의미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미 연합함대가 수상함 항공모함 가리지 않고 씨가 말랐고 사냥감에 비해 태평양에 배치된 미국 잠수함이 너무 많아서 미국 잠수함은 메달이라도 하나 따자는 식으로 온 태평양을 휘젓고 다녔다.[14] 미국의 예비군은 우리나라의 상근예비역과 유사한 제도이다.[15] 다만 이 사진을 찍을 때가 아닌 첫 번째 성조기를 내걸었을 때 이 말을 했다.[16] 전에는 박격포를 맞고 전사했다고 했었으나 책에서는 아군의 오사인것으로 판명되었다.[17] 사진에서 맨 오른쪽 에 위치했는데 그의 어머니는 미국 신문에 실린 이 사진을 보고 가장 오른쪽에 있는 해병대원을 자신의 아들로 한눈에 바로 알아 봤다고 한다. 정부에서 초기 발표시 다른 사람으로 발표했기에 아무도 믿지 않았으나 18개월 후 의회 조사 결과 할론 블럭 본인으로 밝혀졌다. 뒷 모습밖에 안 보이는 흑백사진인데도 알아보다니, 어머니의 초능력이 대단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일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