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각종

 

李覺鍾
일본식 성명 : 靑山覺鍾
1888년 4월 23일 ~ 1968년?
1. 개요
2. 상세


1. 개요


일제강점기의 관료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전주(全州).

2. 상세


1888년 대구부 서상면 서내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서내동)#에서 태어났다. 17살 때까지 경상북도 도설 구암강습원(龜巖講習院)[1]에서 조선어와 한문을 배웠고, 그동안 당대 영남 유림의 거두였던 곽종석서찬규(徐贊奎)의 문하에서 한국 역사를 배우기도 했다. 이후 관립한성중학교보성전문학교 법률과 야간부를 졸업하였다. 구암강습원 재학 시에는 경상북도 유림에서 전체 유생들을 대상으로 한 경전 암송 시험의 시경 부문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아 강습원장으로부터 중국국자감에서 간행된 논어·중용 1권씩을 상품으로 받기도 했으며, 관립한성중학교와 보성전문학교 졸업 때에도 우등상장을 받는 등 일찍이 학업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1909년 4월 대한제국 학부위원으로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10월 와세다대학 문학과에 입학하여 졸업 후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11년 조선총독부 내무부 학무국 학무과 속(屬)으로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1917년에 경기도 김포군수에 임명되어 재직하다가 1920년 병에 걸려 군수직을 사임했다.
1919년 3.1 운동을 본 그의 소감은 한마디로 '''추악한 뻘짓'''이라는 것이었고 이런 뻘짓을 막기위해 '''일생을 일제에 충성하겠다'''라고 결심했다고 한다.
한동안 요양하다가 1921년 조선총독부 제2과 및 사회과 촉탁으로 관직에 복귀한 뒤 본격적으로 황민화 운동에 앞장섰다. 각종 강연과 칼럼을 통해서 충실한 황민이 되는것만이 조선인이 살길이라고 역설했다.
그의 최고의 친일행각은 1937년 조선총독부 경성보호관찰소 촉탁보호사와 학무국 사회교육과 촉탁을 겸임하면서 황국신민서사를 만든 일로, 일본인이 만든게 아니라 '''조선인인 그가 직접 펜을 들고 쓴 것'''이었다. 그가 만든 황국신민서사는 수많은 조선인들을 동남아와 태평양에서 죽게 만든것이나 다름없으니 실로 '''펜대를 굴려서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학살자'''라고 해도 무방하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각종 직책을 지내면서 황국신민서사를 쓴 사람 답게 각종 강연을 다니며 징용, 징병에 나갈 것을 독려했다. 아마 그에겐 일본이 패망하거나 조선이 독립한다는건 절대 있을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해방이 되면서 이각종의 인생도 쫑이 났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황국신민서사의 저자인 그를 기소한건 당연한 일이었으나 재판 과정에서 '''일본 패망에 큰 충격을 받아''' 정신이상이 되었다는 판정을 받아 석방되었다. 물론 오카와 슈메이처럼 정신이상을 연기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겠지만.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1968년 사망한 것만이 알려져있다. 1970년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에서 박준호 소방관과 찍힌 사진이 발견되었으나 사진의 진위여부에 대해선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1948년 11월 민족정경연구소(民族政經硏究所)에서 펴낸 《친일파군상(親日派群像)》에서는 그의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의 유형을 '자진적으로 나서서 성심으로 활동한 자'면서 '친일과 전쟁협력으로써 관헌의 환심을 사서 관력을 빌어 세도를 부리며, 이권 등을 획득하여 사익을 도하며, 또는 대의사, 고관 등 영달을 목적한 자'로 분류하였다[2]#.
당연한 이야기지만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에서 발표한 친일파 명단과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되어 있으며 고려대학교의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친일파 동문 10인의 행적을 발표할때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1] 현재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에 있는 구암서원(龜岩書院)으로 추정된다.[2] 이 책은 박춘금·고원훈 같은 악질 친일파도 그 친일의 동기가 '자신들의 친일이 장래에 민족적으로도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며 나름대로 그 동기를 두둔하는 논조를 보인다. 그럼에도 이각종을 위와 같이 표현했다는 것은 이각종이 얼마나 악질 친일파였는지 가늠할 수 있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