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와 슈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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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크다 이 병신들아'''[1]
1분 40초부터 보면 아래 움짤의 장면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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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도조 히데키의 뒤통수를 치는 움짤의 주인공이다.''' 도조 히데키의 뒤통수를 때리는 사람이 오카와 슈메이.
1. 개요
大川周明 (おおかわ しゅうめい)
'''일본의 괴벨스'''
1886년 12월 6일 ~ 1957년 12월 24일
일본의 극우 사상가. 쇼와유신을 주장하며 황도파에 사상적으로 영향을 줬다.
2. 생애
야마가타 현 사카타 시 출신, 도쿄제국대학에서 인도 철학을 전공했고 이 때문에 그는 인도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15년 인도 독립운동에 관여하여 이를 지원했고 굽타를 자택에 숨겨주는 등 인도독립운동을 도왔고, 1916년에 《인도에 걸친 국민적 운동의 현실 및 유래》라는 책을 썼고 인도의 독립운동 상황을 일본에 알리려고 했으며 이를 통해 타고르를 비롯한 인도의 인사들과 친분을 맺기도 했다. 1927년, 식민회사에 관한 연구를 통해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19년에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입사하고 동아경제조사국에 근무하였으며, 1920년대에는 중국 각지를 방문하고 일본의 새로운 변혁을 역설했다. 1918년 쌀 소동 당시 군이 국민을 진압하는 참상을 목도하고 '도의적 일본의 확립, 국가 개조론을 주장하게 되었으며 이를 시작으로 국가사회주의 사상가 기타 잇키나 미쓰카와 가메다로 등과 교우하며 국가개조운동을 위한 유존샤 (猶存社), 고지샤(行地社), 진무카이(神武会) 등을 결성하였다.[2] 1924년 <일본> 잡지를 창간, <킨케이 가쿠인> 회장 야스오카 마시로 등과 함께 정당과 귀족 계급을 몰아내고 민중이 집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아시아주의의 입장에서 각 지역의 독립운동과 서양열강의 동향에 관해 《부흥 아시아의 각 문제》를 1921년에 편집했으며 압둘 아지즈 이븐 사우드, 케말 아타튜크, 레저 파흐라비 등의 평전인 《아시아의 건설자》를 1941년에 편집했다. 한편 일본정신의 부흥을 제창한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일본정신연구》를 집필하기도 했다. 아마카스 마사히코를 만주에 보내 만주의 종속화에 박차를 가한 것도 오카와 슈메이였다.
그는 이론가에 머물지 않고 체제 전복을 통해 초국가주의적인 정권을 수립하려 했는데, 1931년의 3월 사건[3] , 10월 사건에 관여했다. 1932년 5.15 사건에서는 주동자들에게 사상적 영향을 끼친 것은 물론 더 나아가서 아예 권총 5정, 실탄 125발, 군자금 3500엔을 사건 주동자들에게 건네며 적극적으로 관여했으나, 실패하여 15년을 선고받았으나 최종적으로 4년간 복역하고 출소했다. 출옥 후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의 고문이 되어 중일전쟁을 지지했으며 1938년에는 동아 경제 조사국 부속 연구소 소장을 지내고, 1939년에는 《일본2천6백년사》를 출판했고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역도들로 여겨졌던 호조 요시토시, 아시카가 다카우지 형제를 찬양하는 내용 때문에 큰 비판 받았고 책을 개정해야 했다.
태평양 전쟁기에 아시아주의를 내세우며 대동아 전쟁을 옹호하는 활동을 전개, 극우파 지식인으로 명성을 날렸다. 만주사변 때에는 만주국을 건국하는 것을 지지했으며, 만주국은 일본의 도움으로 만주인들의 번영과 경제적인 자립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찬양했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있을 시기에 슈메이는 감옥에 있던 상태였다. 한마디로 감빵에 들어가서도 정신을 못차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과의 전쟁에 관해서는 "최후의 순간까지 이 전쟁을 지지하며 1940년에 일본이 좀 더 준비가 될 때까지 전쟁을 늦추는데 노력해야 한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 와중에 중국에서의 일본군 철수를 주장하는 여운형과 시국을 논하기도 했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이 끝나게 되자 오카와 슈메이는 민간인으로서는 유일하게 A급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그의 죄목은 하시모토 긴고로와 더불어 '광적으로 파시즘과 전쟁을 옹호한 선전선동의 죄'로 자신의 문학적인 인기를 이용해서 일본 국민들을 현혹시켰고, 군부와 결탁하여 군국주의의 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했고 우익 세력을 이끌면서 전쟁을 계속 일어나게 하고 이 전쟁을 칭찬한 것이 이유였다. 검사 측은 오카와가 3월 사건에 가담한 점, 5.15 사건 때 권총을 제공한 점 등을 들어 그를 일본의 군국주의화에 주효한 역할을 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렇게 패전 후에 민간인 A급 전범으로 분류되어 소환되었으나 사실 오카와는 일본 패망 이후 충격을 받아 실제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고 있었으며 친구인 고노에 후미마로의 자살에 또 충격을 받아 재판에 끌려오기 전부터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말이 나오고 있기는 했다. 하늘색 파자마에 맨발에 게다를 신고 출두한 오카와는 재판 첫날, 도조 히데키 바로 뒤에 앉아 있다가 첫번째 공판이 끝나자 갑자기 도조의 뒤통수를 때리며 죽여버리겠다고 마구 난동을 부려댔다. 이후 "Inder kommen Sie!"[4] 를 외쳤고 다시 발음이 비슷한 영어로 It's a comedy!, I, I, Think를 연발해 법정에서는 서로 웃고 난리가 났다고 한다. 다음날 법정에서 호주의 웹 재판장은 오카와 슈메이를 정신이상이라 판단했고 1947년 4월 9일에 재판에서 제외했다. 오카와 슈메이는 미군병원에 입원당한 후 매독에 의한 정신장애를 진단받았다.
그러나 병원에 있으면서 쿠란을 번역하는 등 정신병자와는 거리가 먼 활동을 보였지만 11월에 다른 전범들에 대한 선고가 내려질 당시에도 여전히 정신이상 증세가 확인되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도쿄전범재판에선 불기소되었으며, 그의 정신병이 나은 후 다른 재판에서 처벌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추가적인 재판은 열리지 않앗으며 오카와는 1948년 12월 24일에 석방되었다. 출소된 이후에는 일본 농촌의 부흥을 위해 활동하기도 하였다. 죽기 2달 전에 일본을 방문 중이었던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수상이 그에게 만남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병세가 위중하여 성사되진 않았다. 이 때문에 현재 일본에서는 전범재판 당시 그가 보여준 정신이상 행동이 사형을 면하기 위한 훼이크였다는 여론이 대세다. 실제로 미국측에서 판정한 정신감정에선 이상이 없었지만 타 국가 판사들의 반대로 재판은 이뤄지지 않고 계속 입원처리되었다. 저런 3류 개그를 별다른 검증도 안 거치고 그대로 불기소 사유로 던져버린 점을 통해, 그가 유죄를 받았다 해도 사형 등 중형을 받지는 않았을 거란 의견도 없지 않다.
도쿄 전범 재판이 끝난 후 퇴원한 그는 농촌으로 귀향하여 살다가 1957년에 사망했다.
[1] 사실 전범재판에서 그가 보여준 이상행동은 사실상 사형을 면하기 위함이였다. 자세한 내용은 밑에 후술[2] 유존샤는 1923년 해산 당하였고, 이후 오카와는 기타 잇키와 각을 세우며 원수지간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러나 훗날 기타가 처형당하자 오카와는 이를 매우 안타까워했고, 추억보정인지 나중에는 자신과 기타 사이의 불화가 자신의 철없음에서 기인하였다고 회고하며 기타를 높이 평가하였다.[3] 이 사건은 미수로 끝났지만, 훗날 벌어지는 5.15 사건과 2.26 사건의 맹아가 된다. 당시 군부에서는 징계는 커녕 함구령을 내려서 사건을 서둘러 덮었다. 그래서 이에 희망을 얻은 군부의 장병들이 연달아 쿠테타 사건을 일으키고, 군부가 폭주해서 일본은 망했어요.[4] 독일어로 인도인이여 일어나라! 라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