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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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春琴
1891년 4월 17일 ~ 1973년 3월 31일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정치깡패. 본관은 밀양(密陽)[2] . 인촌 김성수와 송진우를 살해위협하고 폭행했던 사람이다.
1891년 4월 17일 경상남도 양산시에서 태어났고, 밀양에서 자랐다. 빈민층으로 태어나 까막눈을 겨우 면한 수준으로, 1904년경 14살 때에 대구로 가서 일본군 병영에서 급사로 일했다. 여기서 일하면서 익힌 일본어로 1907년 일본에 건너가 막노동, 광부일 등을 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재일교포 폭력조직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나고야에서 조선인회장으로 취임하는 등 거물로 성장했다. 이 당시 일본 극우파 및 야쿠자의 원조이자 흑룡회의 막후실세인 도야마 미츠루의 밑으로 들어갔고, 정치에도 발을 들였다.
1920년 30살의 나이로 이기동과 함께 도쿄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을 규합한 상구회(相救會)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회장직에 취임했다. 상구회는 곧 상애회(相愛會)로 개편되었으며, 일본자본가들을 위해 노조파업을 때려부수는 극우 폭력조직으로 기능하였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을 때에는 시체 처리와 한국인 색출 등 일본 극우파들의 선동질에 적극 협력하였다. 이후 일본 정객들의 도움을 받아 상애회 조직을 일본 전역으로 확대했고, 1924년 한국에도 지부 개념으로 '노동상애회'를 조직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동아일보에서 사설을 통해 극딜을 퍼붓자, 열이 뻗친 박춘금은 1924년 4월 2일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와 사장 송진우를 식도원이라는 요정으로 불러 포박을 하고, 두 민족지도자에 대해 거침없는 발길질과 오물을 퍼붓는 야만성과 대담함을 보여주었다. 이때 김성수와 송진우는 꽁꽁 묶인 채 박춘금에게 무려 3시간 동안이나 머리, 얼굴, 가슴, 배 등을 뚜드려 맞았고, 박춘금이 인촌 김성수의 목을 칼로 내리찍으려 하자, 송진우가 급하게 동아일보 사설내용에 대해 사과를 하여 김성수는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3] 그리고 김성수와 송진우는 무려 3천 원이나 되는 거금을 박춘금에게 주겠다는 약속을 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4]
이러한 일로 기세가 오르자, 이제 박춘금은 한국에서도 온갖 극우테러에 앞장섰다. 1924년 전라남도 하의도[5] 소작쟁의가 있었을 때에는 깡패들을 몰고 가서 하의도 주민들을 주먹과 총칼로 때리고 쏘고 베어눕혀 진압하는 등 악명을 떨쳤다. 이외에도 이 사람이 저지른 깡패질은 수없이 많은데, 주로 노동쟁의, 소작쟁의 활동 있을 때마다 깡패들을 동원해서 농민, 노동자들을 때려잡았다. 물론 1928년 4월 하의도에 또 한번 소작쟁의가 일어났을 때에는 무장경찰 20여 명을 대동하고 하의도에 나타나 행패를 부리다가 붙잡혀서 주민들로부터 몰매를 맞는 개굴욕을 당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이렇게 온몸을 던져 싸우는 그의 노력에 일본 정객들이 감동했음인지 1932년에는 깡패 주제에 일본 제국 의회 중의원까지 올라갔다. 1932년 일본 제국 중의원선거에서 도쿄시 제4구(혼죠구, 후카가와구)[6] 에 후보로 나서서 당선된 것. 이후 1940년과 1942년 선거에서도 중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참고로 '''일본 제국 시대 중의원 중 유일한 조선인'''이었다.[7][8]
제국의회 중의원 당시엔 "조선인과 내지인의 동등한 권리 실현"이나 "참정권, 자치권 획득"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고 한다. 쉽게 말해, 독립운동 대신 자치론 운동을 한 것. 참고로, 당시 조선인들은 식민지의 2등 국민 위치였기 때문에 국가운영에 전혀 참여할 수 없었고, 조선반도의 지배는 내지(일본)에서 파견된 조선총독부 관료들에 의해 행해졌다. 여기에 대항하여 꽤 많은 사람들이 조선인 협의회를 설립하고, 지역마다 조선인 자치기구를 만들려 하였다. 사실 불행하게도 1930년대 중반쯤 가면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이 이 노선을 타게 된다. 특히 민족개량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이러한 경향이 많이 보였다. 대표적으로는 춘원 이광수나 최남선 같은 경우가 그러했다. 당시 그들의 눈에 일본은 동아시아의 패자였고,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이었다. '''일본이 망할 리가 없는 강대국이라 생각해서 독립을 포기하게 된 것.''' 그래서 박춘금 같은 인물을 자치론 옹호자들은 고평가했다.
광복 후에는 일본으로 도피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반민특위 조직이 결성되자, 1949년 7월 반민특위에서 '''반민족행위 1급 피의자'''로 지목해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과 GHQ 사령부에 '박춘금을 체포하여 강제 국내송환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부에 의해 와해되고 해산되면서 박춘금은 일본에서 평생 동안 기거하게 된다. 이후 박춘금은 도쿄 민단 중앙본부 고문을 맡았다.
여담이지만 당시 민단은 의외로 파시스트나 친일파 내지는 친일경력자들이 많았다. 삼무사건이나 니가타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에도 민단이 관여하고 있었다. 사실 박열 선생은 민단 최초의 단장이었으나, 민단 내부의 파시스트나 친일파들과의 갈등으로 생전에 민단에서 나갔다.
1955년 6월 조국통일촉진협의회를 조직했으며, 1957년에는 일한문화협회를 설립하고 상임고문을 맡았다. 1962년 도쿄에 있는 아세아 상사의 사장으로 재직했다. 1962년, 한일회담이 진행되었을 무렵에 잠깐 국내로 귀국했던 적이 있었다. 이때 굉장히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었는데... 1973년 3월 31일 게이오기주쿠대학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83세
이후 밀양에 몰래 묻히고 송덕비까지 세워졌다가 이게 발각되어 시민들의 항의 끝에 파묘되고 송덕비도 철거되었다. 친일인명사전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그는 아시아주의라든가 오족협화 사상을 진짜로 믿은 악랄하면서도 어찌보면 순진한 친일파였다고 한다. 이미 1910년대부터 한일합방 자체가 1:1의 동등한 합방이 아니고 일본 주도의 일방적인 병합, 병탄임이 드러났고, 당시 일진회의 주도자였던 이용구 같은 경우 나중에 속았다고 할 정도였는데도 말이다.
[1]
朴春琴
1891년 4월 17일 ~ 1973년 3월 31일
1. 개요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정치깡패. 본관은 밀양(密陽)[2] . 인촌 김성수와 송진우를 살해위협하고 폭행했던 사람이다.
2. 생애
1891년 4월 17일 경상남도 양산시에서 태어났고, 밀양에서 자랐다. 빈민층으로 태어나 까막눈을 겨우 면한 수준으로, 1904년경 14살 때에 대구로 가서 일본군 병영에서 급사로 일했다. 여기서 일하면서 익힌 일본어로 1907년 일본에 건너가 막노동, 광부일 등을 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재일교포 폭력조직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나고야에서 조선인회장으로 취임하는 등 거물로 성장했다. 이 당시 일본 극우파 및 야쿠자의 원조이자 흑룡회의 막후실세인 도야마 미츠루의 밑으로 들어갔고, 정치에도 발을 들였다.
1920년 30살의 나이로 이기동과 함께 도쿄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을 규합한 상구회(相救會)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회장직에 취임했다. 상구회는 곧 상애회(相愛會)로 개편되었으며, 일본자본가들을 위해 노조파업을 때려부수는 극우 폭력조직으로 기능하였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을 때에는 시체 처리와 한국인 색출 등 일본 극우파들의 선동질에 적극 협력하였다. 이후 일본 정객들의 도움을 받아 상애회 조직을 일본 전역으로 확대했고, 1924년 한국에도 지부 개념으로 '노동상애회'를 조직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동아일보에서 사설을 통해 극딜을 퍼붓자, 열이 뻗친 박춘금은 1924년 4월 2일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와 사장 송진우를 식도원이라는 요정으로 불러 포박을 하고, 두 민족지도자에 대해 거침없는 발길질과 오물을 퍼붓는 야만성과 대담함을 보여주었다. 이때 김성수와 송진우는 꽁꽁 묶인 채 박춘금에게 무려 3시간 동안이나 머리, 얼굴, 가슴, 배 등을 뚜드려 맞았고, 박춘금이 인촌 김성수의 목을 칼로 내리찍으려 하자, 송진우가 급하게 동아일보 사설내용에 대해 사과를 하여 김성수는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3] 그리고 김성수와 송진우는 무려 3천 원이나 되는 거금을 박춘금에게 주겠다는 약속을 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4]
이러한 일로 기세가 오르자, 이제 박춘금은 한국에서도 온갖 극우테러에 앞장섰다. 1924년 전라남도 하의도[5] 소작쟁의가 있었을 때에는 깡패들을 몰고 가서 하의도 주민들을 주먹과 총칼로 때리고 쏘고 베어눕혀 진압하는 등 악명을 떨쳤다. 이외에도 이 사람이 저지른 깡패질은 수없이 많은데, 주로 노동쟁의, 소작쟁의 활동 있을 때마다 깡패들을 동원해서 농민, 노동자들을 때려잡았다. 물론 1928년 4월 하의도에 또 한번 소작쟁의가 일어났을 때에는 무장경찰 20여 명을 대동하고 하의도에 나타나 행패를 부리다가 붙잡혀서 주민들로부터 몰매를 맞는 개굴욕을 당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이렇게 온몸을 던져 싸우는 그의 노력에 일본 정객들이 감동했음인지 1932년에는 깡패 주제에 일본 제국 의회 중의원까지 올라갔다. 1932년 일본 제국 중의원선거에서 도쿄시 제4구(혼죠구, 후카가와구)[6] 에 후보로 나서서 당선된 것. 이후 1940년과 1942년 선거에서도 중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참고로 '''일본 제국 시대 중의원 중 유일한 조선인'''이었다.[7][8]
제국의회 중의원 당시엔 "조선인과 내지인의 동등한 권리 실현"이나 "참정권, 자치권 획득"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고 한다. 쉽게 말해, 독립운동 대신 자치론 운동을 한 것. 참고로, 당시 조선인들은 식민지의 2등 국민 위치였기 때문에 국가운영에 전혀 참여할 수 없었고, 조선반도의 지배는 내지(일본)에서 파견된 조선총독부 관료들에 의해 행해졌다. 여기에 대항하여 꽤 많은 사람들이 조선인 협의회를 설립하고, 지역마다 조선인 자치기구를 만들려 하였다. 사실 불행하게도 1930년대 중반쯤 가면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이 이 노선을 타게 된다. 특히 민족개량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이러한 경향이 많이 보였다. 대표적으로는 춘원 이광수나 최남선 같은 경우가 그러했다. 당시 그들의 눈에 일본은 동아시아의 패자였고,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이었다. '''일본이 망할 리가 없는 강대국이라 생각해서 독립을 포기하게 된 것.''' 그래서 박춘금 같은 인물을 자치론 옹호자들은 고평가했다.
광복 후에는 일본으로 도피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반민특위 조직이 결성되자, 1949년 7월 반민특위에서 '''반민족행위 1급 피의자'''로 지목해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과 GHQ 사령부에 '박춘금을 체포하여 강제 국내송환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부에 의해 와해되고 해산되면서 박춘금은 일본에서 평생 동안 기거하게 된다. 이후 박춘금은 도쿄 민단 중앙본부 고문을 맡았다.
여담이지만 당시 민단은 의외로 파시스트나 친일파 내지는 친일경력자들이 많았다. 삼무사건이나 니가타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에도 민단이 관여하고 있었다. 사실 박열 선생은 민단 최초의 단장이었으나, 민단 내부의 파시스트나 친일파들과의 갈등으로 생전에 민단에서 나갔다.
1955년 6월 조국통일촉진협의회를 조직했으며, 1957년에는 일한문화협회를 설립하고 상임고문을 맡았다. 1962년 도쿄에 있는 아세아 상사의 사장으로 재직했다. 1962년, 한일회담이 진행되었을 무렵에 잠깐 국내로 귀국했던 적이 있었다. 이때 굉장히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었는데... 1973년 3월 31일 게이오기주쿠대학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83세
이후 밀양에 몰래 묻히고 송덕비까지 세워졌다가 이게 발각되어 시민들의 항의 끝에 파묘되고 송덕비도 철거되었다. 친일인명사전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3. 평가
역사가들에 따르면 그는 아시아주의라든가 오족협화 사상을 진짜로 믿은 악랄하면서도 어찌보면 순진한 친일파였다고 한다. 이미 1910년대부터 한일합방 자체가 1:1의 동등한 합방이 아니고 일본 주도의 일방적인 병합, 병탄임이 드러났고, 당시 일진회의 주도자였던 이용구 같은 경우 나중에 속았다고 할 정도였는데도 말이다.
4. 관련 문서
[1] 일본 제국 중의원에 당선되었을 당시. 가운데에 있는 남자가 박춘금이다.[2] 무덤 앞 상석에 밀성박공휘춘금지묘(密城朴公諱春琴之墓)라고 새겨져 있다.#[3] "인신공격한 것은 온당하지 못한 줄로 증함"이라는 사과문을 써주었다고 한다.[4] 여담으로 송진우는 나중에 "그런 사실이 없다"고 발뺌했다가 거짓말이 탄로나서 후배 기자들에게 사임 요구를 받는 등 곤욕을 치렀다.[5] 바로 김대중 대통령이 태어난 그곳이다.[6] 혼죠구는 현재의 스미다구 남부, 후카가와구는 현재의 고토구 북서부 일대에 해당한다.[7] 조선 친일파들에게 선심쓰듯이 나눠준 귀족원 의원도 아니고 무려 '''도쿄 한복판의 일본인 유권자들이 뽑는''' 중의원에 3번이나 조선인으로서 당선된 것을 보면, 이 사람이 얼마나 훌륭한(?) 친일파였는지 알 수 있다.[8] 전후에 한국계 아라이 쇼케이와 하쿠 신쿤이 중의원이 된 적이 있으며, 아라이와 하쿠는 일본으로 귀화한 이후에 중의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