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창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이봉창
李奉昌 | Lee Bong-chang'''

[image][1]
'''출생'''
1900년 8월 10일
한성부 서서 용산방 동문외계 동문외
(現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2가)
'''사망'''
1932년 10월 10일
(향년 32세)
도쿄 우시고메구 이치가야 형무소[2]
'''본관'''
전주 이씨(全州 李氏)
'''별칭'''
일본명은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
아사야마 쇼이치(朝山昌一)
칭호(稱號)는 의사(義士)
'''직업'''
독립운동가, 시인, 교육자
'''가족'''
이진규(부), 밀양 손씨(모)
주간란, 정봉희(서모)
이범태(형), 이봉준, 이종태(이복 동생)
이실(양자), 이은임(조카)
이세창(종손)
'''학력'''
문창초등학교 (명예 졸업장 추서)
간사이공업학교 야간학부 (중퇴)
'''신장'''
172.7cm[3]
'''조직'''
한인애국단
'''의거'''
사쿠라다몬 의거
'''이봉창 의사의 친필 선언문'''[전문]
1. 개요
2. 전반생
4. 순국
5. 기타
6. 후일담
7. 폭탄 이야기
8.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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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사쿠라다몬 의거(義擧)를 일으켜 쇼와 덴노암살을 시도했던 인물.

2. 전반생


서울 용산의 문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가게 점원을 거쳐 용산역에서 역무원과 운전 수습생 등으로 일하다가 일본에 건너가 오사카에서 일본인의 양자가 되었고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일본식 이름도 얻었다.
젊은 시절의 이봉창은 일본을 정말 좋아했으며, 일본어도 현지인 수준으로 유창하게 하고 일본인이 되고자 노력했다. 창씨개명도 자진해서 한 것이었다. 용산역에서 근무하던 당시 3.1 운동이 일어났지만 당시 이봉창은 거기에 큰 관심이 없었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조선인이었고 식민지 사회에서 차별을 받으면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4년 동안 용산역에서 근무할 당시에는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승진 속도와 봉급 차이 등 조선인 차별 대우에 박탈감을 느껴 철도국을 사직하였다. 특히 여기에는 히로히토 천황 즉위식 당시 일주일 동안 유치장에 갇혀 있었던 것이 큰 계기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히로히토 천황의 즉위식은 1928년 11월 10일이었고 이봉창 의사는 11월 7일~11월 15일까지 구금되었다.#, #.[4]

"조선인으로 태어나 이태왕(李太王) 전하(殿下)의 옥안(玉顔)을 뵌 적이 없으며 경술병합(庚戌倂合) 후 신일본인(新日本人)이 되어 천황(天皇) 폐하(陛下)의 성안(聖顔)을 뵌적도 없다. 또 조선 역사도 안 배웠고 일본 역사를 가르쳐 받은 적도 없다. 일국의 국민으로서 그 나라의 역사도 모르고 그 나라 제왕의 성안(聖顔)도 본 적이 없는 것은 참으로 스스로 부끄러운 일이다."

이봉창은 순수하게 천황의 얼굴이 보고 싶어 즉위식에 참석하려 했건만 일본 경찰한글 편지를 발견하면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편지에는 별 내용이 없어 훈방되었으나 조선인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 대우를 받았다는 점에 깊은 회의를 느꼈다.[5]

"일부러 돈까지 써 가며 교토의 유치장을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일본 국민의 자격으로 천황(天皇) 폐하(陛下)를 뵈러 온 것이 아닌가? 한글이 섞인 편지를 갖고 있다고 해서 무엇이 나쁜가? 역시 나는 조선인이다. 조선인 주제에 일본 천황 같은 것을 볼 필요는 없다는 것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벌을 받아 유치장에 갇히게 된 것이다."

"남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게 되었고, 따라서 사상도 저절로 변해... 누군가가 이끌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갈 기분이었다. 자신은 조선인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선의 독립운동에 몸을 던져 우리 2천만 동포의 자주권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마음먹었다."

이후 31세에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공근을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알게 되고 상하이에 있는 거류 민단 사무실에 도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접촉했다. 그러나 워낙 일본인같은 제스처, 능숙한 일본어[6],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멸칭이었던 '가정부(假政府)'[7]라는 표현을 씀에 거리낌이 없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의 의심을 받았다. 누구나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지만 유일하게 김구가 믿어줘 이봉창과 여러번 이야기를 나눴고 이를 통해 진심을 알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구는 이동녕조소앙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이 때 워낙 일본인같아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직원들에게서 '영감'이라 불릴 정도였다. 그 별명을 증명하듯 일본인 사회나 마찬가지인 상하이 훙커우 지역에 거주한지 1년도 안 되어 일본인 지인을 많이 두었다. 심지어 일본 총영사관의 경찰까지 지인으로 두었고 일본 영사의 내정까지 무상으로 드나들었을 정도였다. 이봉창이 의거를 하러 일본으로 갈 때 부두까지 나와서 잘 다녀오라고 마중을 나온 일본 경찰까지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원들과 함께 여관에서 한 술자리에서 자신을 밀정이라고 의심을 하거나 비판하는 태도를 보이는 요인들에게 술과 고기를 직접 사와 대접까지 하면서 대인배스럽게 호탕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 때 이봉창 의사는

"왜황을 도살하기는 극히 용이한데 하고(何故, 무슨 까닭)로 독립운동자들이 이것을 실행하지 아니합니까"

라고 묻자 임시정부 요인들은 깜짝 놀라며 “용이할진대 아직까지 왜 못 죽였겠소.”라 묻자

내가 연전에 도쿄에 있을 때 어느 날 천황하야마(葉山)[8]

에 간다고 하기에 왕관(往觀)하였는데 천황이 내 앞을 지나는 것을 보고 ‘이때에 나에게 총이나 작탄이 있으면 어찌할까’하는 감촉이 얼른 생겼었습니다.

이 취중진담이 천황을 암살한다는 엄청난 계획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봉창 의사의 취중진담이 있은지 며칠 후 이봉창은 김구에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9]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하이로 왔습니다.'''

백범일지에는 백범 김구와 이봉창 의사의 각별했던 모습이 나온다.

12월 중순 어느 날, 나는 이봉창 선생을 비일리 법조계[10]

중흥여사로 청하여 하룻밤을 같이 자며 이 선생이 일본에 갈 일에 대하여 여러가지 의논을 하였다. 만일 자살이 실패되어 왜 관헌에게 심문을 받게 되거든 이 선생이 대답할 문구까지 일러주었다. 그 밤을 같이 자고 이튿날 아침에 나는 내 헌옷 주머니 속에 돈뭉치를 내어 이봉창 선생에게 주며 일본 갈 준비를 다하여 놓고 다시 오라 하고 서로 작별하였다.

이틀 후에 그가 찾아왔기로 중흥여사에서 마지막 한 밤을 둘이 함께 잤다. 그때에 이씨는 이런 말을 하였다.

"일전에 선생님이 내게 돈뭉치를 주실 때에 나는 눈물이 났습니다. 나를 어떤 놈을 믿으시고 이렇게 큰 돈을 내게 주시나 하고, 내가 이 돈을 떼어 먹기로, 법조계 밖에는 한 걸음도 못 나오시는 선생님이 나를 어찌할 수 있습니까. 나는 평생에 이처럼 신임을 받아 본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처음이요, 또 마지막입니다. 참으로 선생님이 하시는 일은 영웅의 도량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정식으로 한인 애국단에 가입한 시기는 1931년 12월 13일. 백범일지에는 마지막 사진을 찍을 때 슬퍼하는 김구를 향해 "자신은 영원한 쾌락을 영위하기 위해 가는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며 위로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동차 위에서 깊이 허리를 숙이고 떠난다.

3. 사쿠라다몬 의거




4. 순국


[image]
얼굴이 가려진 채 일본제국 경찰과 함께 재판장으로 들어가는 이봉창 의사. 근데 오른쪽이 더 이봉창같다 .
1932년 9월 16일 일본 대심원(현재의 대법원)에서 첫 공판이 열리고 1932년 9월 30일 오전 9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죄명은 대역죄(大逆罪)로 당시 그의 나이 32세였다.[11]
광복 후 김구가 1946년 일본 정부로부터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돌려받아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공원의 '삼의사' 묘에 안장하였으며[12] 대한민국 정부는 이봉창 의사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5. 기타


  • 그는 '모던보이'적인 생활을 했다고 한다. #
이봉창은 여자와 마작을 좋아했다고 기록이 남아있다.
다이쇼 13년(1924년) 4월 - 계집질과 마작으로 빚을 져서 용산역의 조차(操車)[13]과를 퇴직금을 얻을 목적으로 퇴직함.
쇼와 5년(1930년) 3월 - 가명을 '마츠이 카즈오'로 바꾸고 상경해 도쿄도 교바시구 미나미오다하라마치의 채소절임 가게에 취직한다. 7월에는 도쿄도 혼고구 모리카와초의 모리야 가방 가게로 전직한다.
쇼와 5년(1930년) 12월 - 중화민국 상하이직할시 민행로로 망명한다. 영창공사의 축음기 외판원으로서 일한다.

6. 후일담


의거 이후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자들은 조선의 친일파였다. 재일 친일파의 대표격인 박춘금은 1월 8일 궁내성을 비롯하여 여러 일본 고위층 인사들을 방문해 불경범인이 조선인인 것에 대해 송구스럽다며 사죄를 했으며 9일에는 친일단체 120명을 소집해 궁성 입구에서 또 직접 사죄를 했고 국내의 친일 세력들은 1월 9일 서울의 요정 식도원에 모여 이봉창 의거에 대해 사죄하기로(매일신보 1932년 1월 10일자)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저 사건을 자신들이 했다고 알렸는데, 그 결과 일제의 감시 때문에 각종 지원이 끊겨서 김구가 그림을 그려 팔며 힘들게 임시정부를 운영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반전된 것은 윤봉길의 의거 이후로, 윤봉길의 의거에 감명을 받은 장제스의 지원 아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회생의 길을 얻고 남경중앙군관학교 분교에 조선인 훈련반도 보내고, 돈을 지원받아서 보내기도 한다. ##
한편으로는 일본 본토의 고위 관료들에게는 이 사건은 재앙이었다(...). 당시의 일본에서 천황이 가지는 상징성이나 위치는 지금에 비해서도 압도적인 것이었는데, 그 천황이 암살당할 뻔했으니 발칵 뒤집힌 건 당연지사. 당시 수많은 고위 관료들이 책임을 통감한다며 자진 사퇴하거나 해임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편 80년대 중순에 이봉창 의사의 조카가 힘들게 살아갔던 것이 신문에 실린 적이 있었다. 과거 자료에서 이봉창 의사의 부인이 80년대 중반에 서거했다고 했지만, 이봉창 의사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다른 독립운동가와 헷갈린거 아닌가 의심된다. 특히 윤봉길 의사의 부인이 80년대 중반에 서거했기 때문에 비슷한 의거를 일으킨 윤봉길 의사의 경우와 혼동한 것으로 여겨진다.
비슷한 인물로 조명하가 있다. 이쪽은 쇼와 천황의 장인으로서 당시 일본의 국구였던 구니노미야 구니요시[14]를 독 묻은 칼로 찔러서 죽음에 이르게 했다. 국내가 아닌 타국(대만)에서 의거를 일으킨 점도 비슷하다.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인 배경식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이봉창 의사의 최고 업적이라 함은 임시정부가 의열투쟁의 길로 나가게 한 것과 함께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의거를 일으키게 한 것이라고 뽑았다.[15]
도쿄 신주쿠구에 있는 요초마치 놀이터 부지가 옛날 이치가야 형무소 자리였는데, 놀이터에 사형된사람들을 기리는 비석(刑死者慰靈塔)이 있다. # 그런데 그 인근에 쓰레기들이 많아서.....#

7. 폭탄 이야기


이봉창 의사의 의거 때 쓰인 수류탄은 김홍일(당시 쓰던 가명은 왕웅)이 만들었다고 한다. 이봉창 의사에게 수류탄 던지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사람도 김홍일이라고 한다. 후에 한국에 돌아와 중장까지 지내게 되는 그는 1931년에는 중국 국민혁명군 소속으로 상해 병공창의 병기창 주임으로 근무하며 무기를 관리하고 있었다.
이봉창 의사는 2개의 폭탄을 준비했는데 1개는 김홍일을 통해 상하이 병공창에서, 1개는 김현을 하남성 유치한테 보내서 얻어온 것이라고 한다. 1개는 의거를 위해서 다른 하나는 자결용이었다.
이봉창 의사는 마미(麻尾)라는 수류탄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는 무게가 가벼워 멀리 던질 수 있고 휴대가 간편하며,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불발탄이 없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폭발력이 다소 약하다는 단점도 있었다.[16]
[image]
마미(麻尾) 수류탄

국군의 병기를 관리하는 책임 장교였던 나의 상식에 의하면, 아무래도 그 거리가 100m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표적물을 보통 수류탄을 던져 가지고 실수 없이 명중시키기란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을 거듭한 끝에, "약간 구식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보통 수류탄 대신에 마미(蔴尾) 수류탄을 구해서 이 동지한테 주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 마미 수류탄은 보통 수류탄에 비해서 폭발력이 약하다는 것이 좀 단점이긴 하지만, 그 대신 중량이 가벼워서 멀리까지 던질 수 있는 데다가 불발탄이 없고, 또한 휴대하기가 간편한 이점이 있었다. 하지만 제 아무리 휴대하기가 간편하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 수류탄을 도쿄까지 안전하게 운반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로 당시 김구 선생과 나는 보통 고심한 것이 아니었다.

김홍일,『대륙의 분노 - 노병의 회상기』, 문조사, 1972, 273쪽

백범 김구는 훗날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직전에 이봉창 의사의 의거 실패를 기억하여 제대로 터지는 폭탄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 하나로 무시무시한 전적을 올렸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이봉창과 윤봉길이 의거 시 사용한 폭탄 모두 상해에 있는 중화민국 병공창에서 제작한 것이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 당시 창장은 자신들이 건네주었던 폭탄 화력이 미약하여 암살 미수에 그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여, 윤봉길에게는 시험을 거듭한 폭탄을 성심성의껏 제조하여 20여 개를 무료로 제공하였다. 이 폭탄 제조에 대한 썰은 총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김홍일이 직접 제작했다는 썰이고, 다른 하나는 김홍일이 폭탄제조자 왕바이슈를 주선했다는 점.
그런데 김홍일 장군이 대만대사로 활동하던 중에 왕바이슈와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이때 이 왕비아슈가 이봉창 열사의 폭탄을 제조해 주었다고 하였기에 대체로 김홍일이 중국 병기공창 주임으로 있을 동안 왕바이슈를 만나게 되었고, 이후 김구의 요청에 따라 왕바이슈와 김구를 이어 주었고, 폭탄제조에 필요한 화약을 제공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독립운동의 특성상 기록을 남길 수가 없어 거의 모든 독립운동 관련기록이나 사실은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기억에 의존하기 때문에 위 썰도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8. 대중매체에서


  • 1965년작 영화 <일본제국과 폭탄의사>에선 배우 김진규가 연기했다.
  • 1969년작 영화 <상해 임시정부와 김구 선생>에선 배우 이순재가 연기했다.
  • 1979년작 KBS-TV <일요사극 맥> '벼랑 위의 파수병(2부작)'에선 배우 서영진이 연기했다.
  • 1985년작 KBS1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선 배우 이두섭이 연기했다.
  • 1995년작 KBS 대하드라마 <김구>에서도 나오나, 배우의 이름은 불명이다.
  • 2019년작 MBC 드라마 <이몽>에선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으나, 이름이 언급됐다.

[1] 잘 알려진 이봉창 의사가 수류탄을 들고 태극기 앞에서 찍은 사진은 위 사진에서 얼굴을 떼와 따로 합성한 것이다. 원래 찍은 사진이 얼굴에 그림자가 많이 져 알아보기 힘들어서였다고.[2] 현 도쿄구치소. 옛 이치가야 형무소는 없어졌다.[3] 링크[전문] 나는 적성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야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서하나이다. 대한민국 13년 12월 13일 한인애국단 앞 선서인 이봉창[4] 2번째 링크의 경우 글 목록의 다른 글들은 환빠스틱한 내용들이니 게시물 본문만 읽자.[5] 이봉창의 전향 과정은 식민지 체제의 모순을 드러내는 사례로 쓰인다. 만약 일본이 선전했던 대로 식민지인에 차별이 없이 근대화를 위한 것이었다면 전향 전의 이봉창 같은 "훌륭한 근대화 사례"는 권장되기 마련인데 오히려 그런 이봉창마저도 의심하고 잡아가두었기 때문.[6] 처음 임시정부와 접촉할 때도 한국어를 안 쓰고 일본어를 썼다.[7] 사실 일본어로 '임시정부'를 뜻하는 일반명사이지만 당시 임시정부를 보는 일제의 시선이 좋았을리가 없으므로 멸칭으로도 자주 쓰였다.[8] 일본 가나가와현에 있는 마을. 황실 별장이 있어 천황 등의 황실 인물들이 자주 왕래했다.[9] 김구는 그 때까지도 이봉창을 믿지 못해 자신의 이름을 '백정선'이라는 가명으로 말했다 한다. 덕분에 이봉창은 죽을 때까지 김구의 이름을 백정선이라 알고 있었다 한다.[10] 상하이에 있던 프랑스 조계. '법'은 프랑스의 중국어 음차 표기인 '법란서'의 준말이다. 임정이 이곳에 있었으며 프랑스 조계는 강대국인 프랑스의 사법권이 미치므로 일본이 간섭할 수 없었다. 임정 인사들은 상하이에서도 여기를 벗어나면 일제 밀정들의 위협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실제로 그러한 사건이 일어나면 중국에서 항의하겠지만 당시 중국 상황이 여간 개판이 아니었던 탓에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11] 당시 일본에서 천황을 포함한 황족에게 위해를 가하는 범죄는 대심원에서 1심 재판만 행해져 항소가 불가능했고 사형만이 선고될 수 있었다.[12] 이봉창 의사는 서울 용산구 출신이다. 삼의사 중 유일하게 고향에 안장된 셈.[13] 열차를 편성하거나 다른 선로에 넣거나 나누거나 하는 일[14] 고준 황후의 아버지이자 현임 나루히토 천황의 진외증조할아버지이기도 하다.[15] 전술한 이봉창 의사의 모던보이적 성향에 대한 책을 썼다. 물론 후기에서 몸이 안 좋아져서 엄청 고생했다고 썼지만 말이다.[16] 이 당시에도 수류탄 기술이 결코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폭발력이 정말 강력한 것을 사용했다면 빗나가고도 '''천황이 탄 마차까지 동반유폭될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