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바리 성
[image]
今治城(1602 ~ 1869년). 일본 100명성 중 하나.
에히메현 이마바리시에 남은 이요노쿠니의 성. 윤곽식(輪郭式) 구조의 평성(平城)이지만 바다 근처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자를 가능한 한 넓게 만들어 바닷물을 채워 넣었기에 보통 수성(水城)이나 해성(海城)으로 불린다.
도도 다카토라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이요노쿠니에 들어오자 이요 통치를 위해 쌓은 성. 하지만 1608년 다카토라는 이세노쿠니로 영지를 이동하게 되어 이요는 그의 양자였던 도도 다카요시(藤堂高吉)가 통치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카요시마저도 얼마 안 가 이세로 이동하였기에 후임으로 마츠다이라 사다후사(松平定房)가 오게 되면서 이마바리의 영지는 마츠다이라 가문이 통치하게 되었다. 이후 메이지 유신을 거쳐 폐성되었다.
도요토미 분열의 전쟁,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도도 다카토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총대장으로 하는 동군에 소속하여 군공을 올려 이요노쿠니의 영지를 받게 되었다.[1]
영지를 하사받은 다카토라는 1602년이 되자 해운의 거점인 이마바리에 축성을 시작하였고 1604년에 성은 완공되었다. 다카토라는 이에 그치지 않고 더욱더 개축을 진행하여 현재 볼 수 있는 이마바리 성을 완성시켰지만 본인은 1608년에 이세노쿠니로 영지를 옮기게 되었고, 덴슈는 그의 이동과 동시에 해체되었다.
이후로 이마바리 번은 그의 양자인 타카요시가 다스리게 되었으나 그 마저도 1635년에 이세로 영지를 옮겨 갔기에 이마바리 번주는 공석이 되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 마츠야마 번도 가모(蒲生) 가문의 혈통이 단절되어 공석이 된 상태였기에 막부는 마츠야마 번에는 마츠다이라 사다유키(松平定行)를, 이마바리 번에는 그의 동생 사다후사를 번주로 임명하였다. 이후 마츠다이라 가문은 이마바리 성을 거점으로 이마바리 번을 통치해 나갔으며 칸토의 영지를 가증 받는 등 가문의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이윽고 메이지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고 판적봉환에 의해 이마바리 성은 정치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폐성, 성문 및 야구라들이 전부 해체되며 그 역사는 끝이 났다. 시간이 흘러 1980년이 되자 텐슈와 야구라들을 복원해 나가기 시작했고 2007년의 쿠로가네몬(鉄御門)의 복원을 마지막으로 지금의 이마바리 성이 탄생하였다.
JR 시코쿠의 이마바리역에서 약 도보로 20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현재 성터는 혼마루, 니노마루, 산노마루를 가지고 있고 성문과 야구라가 대부분 복원된 상태며 폭이 넓은 해자가 성을 둘러 싸고 있기에 외관이 꽤나 아름다운 성 중 한곳이다.
텐슈는 콘크리트로 복원되어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입장료는 500엔으로 이마바리 번과 이마바리 성에 대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촬영은 대부분 금지되어 있으며 텐슈의 꼭대기에서 세토내해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는 것이 가능하다. 콘크리트로 복원된 야구라들은 자연사 박물관이나 예술품 전시, 옛 미술품을 전시해 놓고 있으며 이마바리 성에 대한 영상물을 방영하고 있다.
성터 자체가 작기 때문에 이외에는 타카토라의 동상이나 진쟈가 놓여있는게 전부다.
카가와현 타카마츠시의 타카마츠 성, 오이타현 나카츠시의 나카츠 성과 함께 '''일본 3대 수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료 부족으로 인해 덴슈가 정말로 있었는지 의심받고 있으며 현재 복원된 덴슈는 전해져 내려오는 이마바리 성의 원래 덴슈와 다른 형태, 다른 위치에 지어졌다고 한다.
今治城(1602 ~ 1869년). 일본 100명성 중 하나.
1. 개요
에히메현 이마바리시에 남은 이요노쿠니의 성. 윤곽식(輪郭式) 구조의 평성(平城)이지만 바다 근처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자를 가능한 한 넓게 만들어 바닷물을 채워 넣었기에 보통 수성(水城)이나 해성(海城)으로 불린다.
도도 다카토라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이요노쿠니에 들어오자 이요 통치를 위해 쌓은 성. 하지만 1608년 다카토라는 이세노쿠니로 영지를 이동하게 되어 이요는 그의 양자였던 도도 다카요시(藤堂高吉)가 통치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카요시마저도 얼마 안 가 이세로 이동하였기에 후임으로 마츠다이라 사다후사(松平定房)가 오게 되면서 이마바리의 영지는 마츠다이라 가문이 통치하게 되었다. 이후 메이지 유신을 거쳐 폐성되었다.
2. 역사
도요토미 분열의 전쟁,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도도 다카토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총대장으로 하는 동군에 소속하여 군공을 올려 이요노쿠니의 영지를 받게 되었다.[1]
영지를 하사받은 다카토라는 1602년이 되자 해운의 거점인 이마바리에 축성을 시작하였고 1604년에 성은 완공되었다. 다카토라는 이에 그치지 않고 더욱더 개축을 진행하여 현재 볼 수 있는 이마바리 성을 완성시켰지만 본인은 1608년에 이세노쿠니로 영지를 옮기게 되었고, 덴슈는 그의 이동과 동시에 해체되었다.
이후로 이마바리 번은 그의 양자인 타카요시가 다스리게 되었으나 그 마저도 1635년에 이세로 영지를 옮겨 갔기에 이마바리 번주는 공석이 되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 마츠야마 번도 가모(蒲生) 가문의 혈통이 단절되어 공석이 된 상태였기에 막부는 마츠야마 번에는 마츠다이라 사다유키(松平定行)를, 이마바리 번에는 그의 동생 사다후사를 번주로 임명하였다. 이후 마츠다이라 가문은 이마바리 성을 거점으로 이마바리 번을 통치해 나갔으며 칸토의 영지를 가증 받는 등 가문의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이윽고 메이지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고 판적봉환에 의해 이마바리 성은 정치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폐성, 성문 및 야구라들이 전부 해체되며 그 역사는 끝이 났다. 시간이 흘러 1980년이 되자 텐슈와 야구라들을 복원해 나가기 시작했고 2007년의 쿠로가네몬(鉄御門)의 복원을 마지막으로 지금의 이마바리 성이 탄생하였다.
3. 유적과 관광
JR 시코쿠의 이마바리역에서 약 도보로 20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현재 성터는 혼마루, 니노마루, 산노마루를 가지고 있고 성문과 야구라가 대부분 복원된 상태며 폭이 넓은 해자가 성을 둘러 싸고 있기에 외관이 꽤나 아름다운 성 중 한곳이다.
텐슈는 콘크리트로 복원되어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입장료는 500엔으로 이마바리 번과 이마바리 성에 대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촬영은 대부분 금지되어 있으며 텐슈의 꼭대기에서 세토내해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는 것이 가능하다. 콘크리트로 복원된 야구라들은 자연사 박물관이나 예술품 전시, 옛 미술품을 전시해 놓고 있으며 이마바리 성에 대한 영상물을 방영하고 있다.
성터 자체가 작기 때문에 이외에는 타카토라의 동상이나 진쟈가 놓여있는게 전부다.
4. 기타
카가와현 타카마츠시의 타카마츠 성, 오이타현 나카츠시의 나카츠 성과 함께 '''일본 3대 수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료 부족으로 인해 덴슈가 정말로 있었는지 의심받고 있으며 현재 복원된 덴슈는 전해져 내려오는 이마바리 성의 원래 덴슈와 다른 형태, 다른 위치에 지어졌다고 한다.
[1] 하지만 가토 요시아키 또한 이요를 영지로 받게 되어 이요를 삼등분하는 복잡한 모양새가 되었다. 정리하면 남부의 토도령, 중부의 카토령, 북,동부는 잡탕으로 구성된 형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