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천
1. 소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남자 당구 선수 중 한 명이며,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2. 상세
현대 당구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나다고 정평이 나있는 선수를 꼽으라면, 대표적으로 4대천왕(토브욘 브롬달, 프레드릭 쿠드롱, 딕 야스퍼스, 다니엘 산체스)를 꼽을 것이다. 그러나 4대 천왕을 논하기 전에, 한국의 '''이상천'''이라는 선수를 빼 놓을 수 없다.
전세계 통틀어 당구 역사상, 이상천 선수의 감각을 따라오는 선수는 전례를 찾아볼 수가 없다. 아무리 4대 천왕이라 할지라도 감각적인 부분에서 만큼은 그러하다. 그리고 4대 천왕 모두가 이상천 선수의 당구 구사 능력(특히, 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인정하고 있으며, 이는 4대 천왕뿐만이 아니다. 이상천 선수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매년 국제대회가 열리는 것만 봐도 그의 위상을 분명히 알 수 있다.
3쿠션의 경우, 과거의 당구와 현대의 당구를 비교해보면, 이상천 선수의 영향이 큰 것 같다. 과거에는 분명 기본적인 앞돌리기, 뒤돌리기, 옆돌리기, 대회전 등의 정석적인 방식이 주류를 이뤘다. 하지만 현대의 당구는 이에 탈피해 조금 더 자유스럽고 창의적인, 독창적인 방식으로 난구 자체를 마치 이지볼처럼 풀어내는 선수들이 많다. 과거의 실제 당구 경기에서 정석적인 방법을 벗어나 자유스러운 방식으로 공을 구사하는 선수는 몇 없었고, 그 중 가장 위에 군림하고 있었던 선수가 바로 이상천 선수다.
당구 수지 300(4구 기준)은 아마추어 단계에서 수준급이라 할 수 있는데[3] , 이를 3개월 만에 달성했다고 한다. 쉽게 말해, 보통 일반인이 2~3년 길게는 5년 이상을 노력해야 얻을까 말까한 실력을 불과 3개월만에 이뤄낸 것이다. 수지 300이 되기 전에 포기하는 일반인들이 대다수이다. 여담으로, 서울대학교를 다니다가 당구의 길로 빠져들어 중퇴하였다.
그리고 도장 깨기와 유사하게 전국 각지의 실력자들을 찾아나서며 한국 당구계를 평정하였다.
이상천 선수가 당구를 구사하는 모습을 보자면, 현대 당구에서 볼 수 있는 정석적인 자세와는 거리가 멀다. 자세도 반쯤 서서 당구를 구사하며, 타구법도 손목의 스냅을 자주 이용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전문적으로 당구를 배운 것이 아니라 독학으로 당구 실력을 쌓으며 선수의 몸에 최적화된 자세를 감각적으로 체화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천 선수의 당구 경기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그의 감각은 완벽 그 자체이고 심지어 경이롭기까지 하다. 실제로 당구를 좀 친다는 사람이 보아도 이건 분명히 전혀 나오지 않을 각 같이 느껴져도 이상천은 쭉쭉 잘만 뽑아냈다.
보통의 선수들은 쓰리쿠션에서 '''볼퍼스트''' 형식을 기본기로 하고 '''레일퍼스트''' 형식이 보조를 이루는 형태로 당구를 구사한다. 하지만 이상천 선수는 '''볼퍼스트''' 형식뿐만 아니라 '''레일퍼스트''' 형식까지 기본기로 갖춘 선수이다. '''레일퍼스트''' 형식은 변수가 매우 많다. 당구대의 쿠션상태와, 당구대의 온도, 당구대의 마모 정도, 당구공의 상태 등등.. 즉, '''레일퍼스트''' 형식을 기본기로 갖추기에는 제약조건이 너무나도 많다. 대부분의 3쿠션 선수들이 '''볼퍼스트'''를 선택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상천의 천부적인 감각은 앞으로도 보기 힘들 것이라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스트로크의 완급 조절을 통해 항상 수구가 2적구의 한 뼘 내지 두 뼘 내의 거리에 위치하도록 하는 그의 능력은 압권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단순히 스트로크의 세기만을 조절한다고 해서 이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적절한 스트로크 타법과, 그립법, 세기와 두께 중 어느 한 가지라도 틀어져서는 안된다. 이 모든 요인을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조화시켜 컨트롤 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프레드릭 쿠드롱이 난구도 쉽게 풀이한다는 점에서 유명하기도 하고 대단하지만, 그 이전에 이상천 선수가 있었다. 물론 보기에는 쉬워보이고 독창적이라고 느껴지는 선구이지만 실제로 구사하기에는 매우 어렵다. 이러한 이상천 선수의 스타일은, 한국 당구의 강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여러 당구 경기를 지켜보다보면, 한국선수들만의 특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004년 10월 19일 위암으로 타계했다.
3. 수상 기록
- 1982년 전국체전 우승
- 1990년 미국선수권 우승
- 1991년 독일 베를린 월드컵 우승
- 1992년 벨기에 브뤼셀 월드컵 우승
- 1993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월드컵 우승
- 1999년 미국 라스베가스 월드컵 우승
- 2003년 제1회 한밭배 전국 3C 우수선수 초청경기 우승
[1] 영어권에서는 보통 상 리(Sang Lee)로 통한다. 영문 위키피디아에도 이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2] 당구의 매력에 이끌려 재학 중 중퇴했다고 한다.[3] 일반적으로 이 수준 이하면 큐대가 찢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맛세이(찍어치기)를 금지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