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속으로/에피소드

 


1. 개요
2. 재수가 없어도, 없어도?!
3. 사구사의 비밀
4. 저승에 세 번 간 아버지
5. 알몸으로 뛰었다
6. 귀목고개의 원혼


1. 개요


MBC 이야기속으로의 주요 에피소드를 정리하는 문서.

2. 재수가 없어도, 없어도?!


주인공은 오랜만에 내려갔던 청양의 고향집에서 첫 번째 불행을 겪게 된다. 모처럼 새 옷에 새 구두까지 쫙 빼입고 내려온 고향이었건만, 친구의 결혼식 참석 때문에 일찍 서울로 돌아가는 날 아침부터 구두가 없어진 것이었다. 어찌어찌 구두를 찾았지만 이미 구두는 고향집에서 키우던 개가 물어뜯는 바람에 너덜너덜한 걸레쪽 꼴이 나 버렸고...궁여지책으로 다 떨어진 구두 앞코를 새끼줄로 동여매고(...)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이번에는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여겨 근처 가게 아주머니에게 물으니 버스가 고장나서 오지 못한다고. 결국 새끼줄로 동여맨 구두를 신은 채 5km 가량을 걸어와서 간신히 서울행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점심 나절이 되어서야 서울에 도착한 주인공. 일단 집에 돌아가서 신발 문제부터 해결할 요량으로 귀갓길을 서둘렀지만 도중에 난데없는 페인트 벼락을 맞아서[1] 구두에 이어 새 양복까지 버리는 안습한 사태가 터지질 않나, 원체 단벌신사였던지라 결혼식에 입고 갈 다른 양복이 없어서 할 수 없이 꽉 끼는 양복을 대충 주워 입고 급하게 택시를 잡아탔는데 이 택시 기사가 이제 1주일밖에 안 된 초보라서 목적지를 알려줘도 길을 좀체 찾지 못하는 바람에 한참을 헤매야 했다.[2] 타들어가는 속을 부여잡고 겨우겨우 예식장에 도착하니 이미 시간이 한참 지난 상황. 그래도 죽을 힘을 다해서 전력질주로 계단을 오르던 와중에 문득 쌔한 느낌이 드나 싶었더니 아니나다를까, 안 그래도 꽉 끼는 터라 불안했던 양복 바지 엉덩이 부분이 터지고 무릎이 찢어지고 가랑이가 찢어지는(...) 처참한 몰골이 되고 말았다.
이 고생이 억울해서라도 되돌아갈 수는 없었던 주인공은 오기로 결혼식장에 도착했으나 역시나 이미 식은 끝난 뒤였고, 겨우겨우 부조만 한 뒤 도망치다시피 피로연장에 도착하니 이미 막바지. 간신히 친구들을 만났지만 거의 거지꼴이 되다시피 한 상황인지라 제대로 놀림거리가 되고 말았고, 어찌 추스리고 앉아서 친구들에게 자신이 식장에 오기까지 당한 온갖 못볼 꼴 이야기를 넋두리조로 늘어놓아 가며 식사를 하나 싶었는데......음식을 나르던 직원의 실수로 '''뜨거운 갈비탕 국물이 그만 주인공의 사타구니에 쏟아지는(!)''' 대참사가 터지고 말았다.[3]
결국 팬티차림으로 병원에 실려갔던 주인공은 그야말로 심신 공히 거적이 된 채 가까스로 집에 돌아왔는데....다음 날 신랑인 친구로부터 '''부조를 왜 신부 집에 해서 망신을 시키느냐'''는 원망 섞인 전화를 받는다(...).

3. 사구사의 비밀


1987년 강원도 인제군의 한 마을에서 당시 방위병이었던 영석이라는 청년이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영석은 복날이었던 전날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나간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것이다. 친척의 조문을 다녀오던 마을 이장은 이 소식을 듣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영석의 행방을 찾았지만, 그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영석이 전날 친구들과 술을 마셨던 자리를 수색하던 중 근처 고추밭 쪽에서 영석의 신발 한 짝이 발견되고, 뒤이어 아래쪽 개천 둑길 가에서 나머지 신발 한 짝이 발견되었다. 영석의 가족들은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고,[4] 그 이후에도 계속 그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영석이 친구들과 싸우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마을 주민의 증언이 나왔고, 같이 있었던 친구들을 추궁했지만 그들은 영석이 술에 취해 먼저 집에 돌아갔다고만 대답할 뿐이었다.
실종 3일째 되던 날 영석이 술에 취해 실족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장은 주민들과 함께 개천을 수색했지만 비로 개천의 물이 불어난 터라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날 밤 피로로 일찍 잠자리에 든 이장은 이상한 꿈을 꾸는데, 산 속을 헤매던 이장의 앞에 실종된 영석이 어딘가 슬픈 표정으로 나타나서 자신은 '사구사'라는 곳에 있다며 자신을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이 말의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이장은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하기 시작했다. 절의 이름, 숫자의 조합 등등 온갖 궁리를 다 하던 이장은 며칠 만에 드디어 수수께끼를 풀게 되는데, 이장의 해석은 이러했다. 사구사를 한자로 '死求寺'로 쓴 뒤 일종의 파자를 이용해서 단서를 알아낸 것인데, '求'는 물 수(水)자 위에 가로획(一)이 있기 때문에 '물 아래'라는 뜻이고, '寺'를 구성하는 두 글자(土, 寸)를 해석하면 '흙과 가까운 곳'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求와 寺에 들어 있는 점 두 개는 각각 신발을 뜻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 해석을 근거로 이장은 '물 아래, 흙과 가까운 곳'에 영석이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영석의 신발 한 짝이 발견된 개천의 펄흙 밑에 영석이 있을 것이라며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직접 물 속을 뒤지면서 수색을 시작했다. 차가운 물에 앞도 잘 보이지 않는 흙탕물 속의 수색작업은 쉽지 않았으나, 수색 도중 한 마을 사람의 발밑에 무언가가 걸렸다. 그리고 곧 영석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후 영석은 함께 술을 마셨던 친구들의 손에 죽은 것으로 밝혀졌다. 술에 취한 친구가 영석에게 시비를 걸었고, 이에 화를 내는 영석을 집단폭행한 끝에 숨지게 했던 것. 시신을 의도적으로 개천에 유기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들은 폭행치사로 구속되어 죄값을 치르게 되었다.
후에 이장은 영석이 가족도, 친척도 아닌 자신의 꿈에 나타난 이유를 두고 평소 영석을 아꼈던 데 더해 한 가지에 끝까지 몰두하는 성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해석했다.

4. 저승에 세 번 간 아버지


1962년 당시 아버지는 어린 두 아들과 함께 잠을 자다가 갑자기 가위에 눌리고 숨을 쉬지 못하게 된다. 놀란 가족들 덕분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아버지는 딸에게 자신이 저승에 다녀왔다면서 이야기를 들려 주는데, 저승의 명부에 이름이 적혀 있어 이승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염라대왕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남겨질 자식 6남매 걱정에 자식들을 다 출가시키면 반드시 돌아오겠다며 사력을 다해 빌었다. 이에 마음이 약해진 염라대왕은 처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 기특하니 한 번만 살려주겠다고 말하고, 아버지를 이승으로 돌려보내는 대신 사흘 내로 친척 하나를 데려가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간신히 저승에서 돌아오기는 했지만 염라대왕의 말이 마음에 걸린 아버지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가족들은 꿈이라 치부했지만, 염라대왕의 말대로 딱 사흘째 되던 날 문경의 친척집에서 사람이 찾아와 친척의 부고를 전했다.
5년 후인 1967년 어느 겨울 밤, 아버지는 또다시 세 명의 저승사자를 만나게 된다. 당시 작은딸은 밤중에 마당에서 나는 소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뭔가 이상하다 싶은 느낌에 밖에 나가보니 아버지가 마당에 쓰러진 채 차갑게 식어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 옆에서 통곡하는 자식들에게 어머니는 지금 울면 아버지가 눈이 어두워져서 저승에 가지 못한다면서, 고복[5]을 한 다음에 곡을 해야 한다고 일러 주었다. 그런데 슬픔에 복받쳐서 울던 딸이 아버지 위로 쓰러진 순간, 놀랍게도 한 시간 반 동안이나 숨이 멎었던 아버지가 다시 살아났다. 알고 보니 밤에 화장실에 다녀오던 아버지가 넘어지면서 돌에 부딪혀 잠시 의식을 잃었던 것. 그리고 아버지는 이번에도 작은딸에게 저승에 다녀온 이야기를 해 주었다. 두 번째로 염라대왕 앞에 간 아버지는 앞으로 자식 셋만 더 출가시키면 된다며 애원했고, 염라대왕은 두 번이나 명을 어길 셈이냐며 화를 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버지는 남은 자식들을 출가시켜서 아비 된 도리는 해야 한다고 사정했고 또 마음이 약해진 염라대왕은 아버지의 청을 들어주기로 하지만, 이번에는 큰 대(大)자에 점 하나를 찍게 되면 그 때는 더이상 봐주지 않겠다는 기묘한 말을 남긴다.
자신의 목숨이 걸린 큰 숙제를 떠안게 된 아버지는 '큰 대자에 점 하나'의 의미를 놓고 백방으로 풀이를 해 보았지만 아버지는 물론 가족들 중 누구도 의미를 알아내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10년이 지난 1977년의 어느 날 아버지는 방광암 선고를 받고 수술로 방광을 절제한 뒤 옆구리에 튜브를 꽂고 소변 팩을 단 상태로 집에서 요양을 하게 되는데, 방에 누워있던 아버지의 모습을 본 작은딸은 비로소 염라대왕이 말했던 '큰 대자에 점 하나'의 의미를 알아차리게 된다. 이불 위에 누운 아버지의 모습이 큰 대자로 누운 모습이었고, 점 하나는 다름아닌 아버지의 옆구리에 차고 있던 소변 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1년 후인 1978년, 아버지는 막내가 출가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만다.[6]

5. 알몸으로 뛰었다


전날 친구와 술을 마시면서 밤샘을 한 주인공은 새벽에 목욕을 하러 동네 목욕탕에 들어간다. 술이 덜 깬 상태에서 옷을 벗고 탕에 들어가려던 찰나, 웬 머리 긴 여자가 있는 것을 본 주인공은 기겁을 하고 나와서 팬티만 겨우 걸친 채로 맞은편으로 들어가서 다시 탕에 들어가려 하는데, 실은 주인공이 맨 처음 들어갔던 곳이 남탕이 맞았고 다시 들어온 맞은편은 '''여탕'''이었다. 술이 덜 깬 주인공이 먼저 목욕을 하던 '''머리 긴 남자'''를 여자로 착각했던 것. 웬 헐벗은 남정네가 여탕 문앞에 서 있는 것을 본 여자들은 당연히 기겁을 하면서 비명을 질러댔고...그제서야 술이 확 깨면서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을 깨달은 주인공은 여자들의 비명소리를 뒤로 한 채 미처 옷도 챙기지 못하고 바가지 두 개로 앞과 뒤를 겨우 가린 채(...) 목욕탕을 뛰쳐나왔다.
간신히 탈출(?)하기는 했으나 몰골이 몰골인지라 일단 급한 대로 대문이 열린 집을 찾아 무작정 들어가기로 하는 주인공. 그런데 그 집 마당에는 개 한 마리가 묶여 있었고, 그 와중에 눈에 띈 개 깔판으로 몸을 가릴 심산으로 개집에서 깔판을 꺼내는 순간 개가 매섭게 짖어댔고, 문이 열리면서 집주인이 나오자 주인공은 급한 김에 화장실에 숨는다. 그러나 결국 문이 열리고, 도망칠 곳이 없어진 주인공은 절박한 심정으로 집주인에게 옷 좀 빌려달라고 하소연하지만 집주인은 주인공을 도둑 내지는 미친놈(...)으로 오해하고 급기야 경찰에 신고를 하고 만다.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한 데 더해 동네 사람들까지 구경을 나오는 등 일이 커져 버렸고...결국 주인공은 화장실에서 개 깔판을 허리에 두르고 목욕탕 바가지를 든 처참한 모습으로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고의성이 없었기 때문에 무죄 방면되기는 했지만 제대로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6. 귀목고개의 원혼


이야기속으로의 공포 계열 에피소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명지산의 귀목고개에서 출몰한다는 여자 귀신에 얽힌 이야기다.[7] 1986년 당시 대기업 부장이었던 박모씨는 잘 알려지지 않은 등산로를 따라 산을 오르고 있었다. 한창 등산로를 따라가던 중 귀목고개에 접어들었을 때, 뒤에서 같이 가자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여긴 박모씨가 뒤를 돌아보았지만 소리만 날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10여분 정도 기다려도 인기척이 없자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그 순간 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청으로 치부하고 더 올라가 귀목봉 인근에 다달았을 때, 이번에는 앞쪽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그의 앞에 갑자기 흰 옷을 입은 여자가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놀란 그는 호신용으로 가지고 있던 가스총을 겨누었지만 여자는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박모씨의 발 밑 땅 속에서 마치 여러 사람이 웅성거리는 듯한 끔찍한 아우성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박모씨는 도망치다시피 그 자리를 떠나 하산했다고 한다. 그리고 5년 후 귀목고개에서 겪은 기묘한 일을 거의 잊어갈 때쯤, 박모씨는 우연히 귀목고개에서 자신과 같은 경험을 했던 사람들이 여럿 나타났다는 한 등산 잡지의 기사를 보게 된다.
한편 박모씨의 체험보다 1년 앞선 1985년 12월 중순, 월간 《산》의 한 기자가 사진가 후배와 함께 취재차 귀목봉에 올랐다. 첫눈이 내려 곳곳에 눈이 쌓인 등산로를 지나 귀목고개 능선에 도달했을 때, 두 사람은 앞쪽에서 여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 소리를 들은 기자는 당시 미혼이었던 후배에게 '색시감 건졌다'라고 농을 건네며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걷고 있었는데, 한참 동안을 걷고 나서야 눈 위에 사람의 발자국이 전혀 찍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율한다. 그리고 여인의 목소리가 흐느끼는 소리로 변하나 싶더니, 박모씨가 겪었던 것처럼 발 밑에서 수십 명이나 되는 군중의 아우성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귀목고개가 있는 지역은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접전지로, UN군에 밀려 후퇴하던 북한군이 후퇴 과정에서 양민학살을 저질렀고, 이는 귀목고개도 예외가 아니었다. 실제로도 귀목고개 인근 지역 주민들 중에는 당시 북한군에게 가족을 잃었다는 사람이 적지 않았고, 한 주민은 어느 날 밤 귀목고개에 갔다가 북한군이 가지고 다니던 전깃줄로 나무에 목을 매고 죽어 있는 여자들의 시체를 목격하기도 했으며, 이후 마을 사람들은 귀목고개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한동안 위령제를 지내 주었다고 한다.
[1] 근처 건물 외벽에 페인트를 칠하던 도장공의 실수로 페인트가 쏟아졌다.[2] 이 당시는 아직 내비게이션 자체가 없었던 1970년대라(에피소드의 시간적 배경이 방영 시점인 1996년에서 22년 전) 택시 기사의 지리감각에 의존해야 하는 시절이었다.[3] 정확히는 뜨거운 국물이 영 좋지 않은 곳을 직격한 건 아니고 사타구니 부근 허벅지 쪽으로 쏟아졌다. 그 와중에 친구들이 환부에 소주를 붓는 등 급한 대로 응급처치를 하면서 한 말이 가관인데 "조심해! 이녀석 결혼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중요한 거 다칠라!'''"[4] 당시 담당 경찰관의 증언에 따르면 영석의 신분이 방위병인 관계로 실종신고를 할 시 탈영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에 가출신고로 처리했다고 한다.[5] 皐復. 사람이 죽었을 때 고인의 옷(주로 속적삼 또는 상의)을 가지고 지붕 위에 올라가거나 마당에 나가서 북쪽을 향해 옷을 휘두르며 고인의 주소와 성명을 왼 뒤 큰 소리로 길게 '복(復)! 복! 복!'하고 세 번 외치는 일. 죽은 사람의 혼이 다시 돌아와 육신과 합쳐져 소생하기를 기원하는 의식이다.[6] 당시 의료기술이 아직 현대만큼 발전하지 못했던 점을 감안하더라도 암 선고 1년만에 세상을 떠난 점을 보면 거의 말기에 가까운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7] 방송 이전에도 귀목고개에서 귀신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여럿 있었다. 지금도 귀목고개를 검색해 보면 간간이 목격 증언들을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