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수(조선)

 

李元秀, 1501-1561
1. 개요
2. 생애
3. 아내와의 관계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덕형(德亨). 신사임당남편이자 율곡 이이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이런 저런 사정 때문에 상당한 '''공처가'''였다고 한다.

2. 생애


덕수 이씨 집안 출신으로, 신사임당과 혼인해 초기에는 데릴사위로 살았으며, 신사임당과의 사이에서 여러 자식들을 두었다.
이원수와 이선 부자(父子)는 과거에 몇 번이나 낙방했는데, 특히 이원수는 늦은 나이에 과거에 간신히 급제했으며, 과거를 보러 가다가도 풍악이 울리면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그를 보아 애초에 과거에 진지한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참고로 명종 시절에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하도 과거 급제가 안 되자 이기에게 붙어 벼슬할 궁리를 했다가 신사임당에 의해서 저지당한 것이다. 이후 전개를 보면, 이기에게 붙었다가는 아들의 벼슬길도 막힐 뻔했다.[1] 늦은 나이에 과거 급제 후 한양으로 오는 조운선을 감독하는 수운판관이라는 하급 관직을 역임하기는 했다.
이원수가 이이를 낳은 것에 대해서 이런 야사가 전해진다.

이원수는 신사임당에게 장가든 후 평상시에는 파주의 집에서 과거공부를 하다가 가끔 짬을 내어 강릉의 처가를 방문해 아내와 지내곤 했다. 어느날 파주에서 강릉으로 넘어가는 길에 한 주막에 들러서 하룻밤을 묵어가는데 그날 밤 주막의 과부 안주인이 계속해서 자신에게 치근거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원수는 아내 신사임당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 동침하자는 과부의 청을 거절하고 새벽같이 길을 나와서 강릉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아내와 며칠을 보내고 다시 파주 본가로 가던 이원수는 마음이 움직여 자신을 유혹하던 과부의 주막을 찾아갔다. 그러나 과부는 이원수를 보자마자 온 얼굴에 노기를 띠고 이원수를 문전박대하는 것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이원수는 과부에게 "지난번에는 나를 그리도 유혹하더니 오늘은 왜 문전박대하는 것이오?"라고 물었다. 과부는 노한 음성으로 "당신이 강릉으로 가던 날 당신의 씨를 받으면 하늘이 낸 큰 인물을 낳을 수 있었소. 하지만 그 씨는 지금 당신의 부인이 가지고 있소!"라며 이원수를 두들겨 내쫓았다. 그 때 신사임당이 잉태한 아기가 훗날의 율곡 이이이다.

이야기에 따라서는 너도밤나무 전설에서 호환을 예언하는 인물이 이 과부이기도 하다.

3. 아내와의 관계


신사임당은 살아 있을 때 이원수에게 공자, 증자, 주희의 고사를 들어가며 재혼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이원수는 이미 신사임당이 살아 있을 때 사임당보다 20살이나 어린 주막집 여자 권씨를 으로 삼았으며,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생전의 당부를 무시하고 서모(庶母) 자격으로 권씨를 집에 들였다. 더욱이 권씨는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장남인 이선과 나이가 비슷했다고 한다. 이원수가 이렇게 무리수를 두는 행보를 한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아내 신사임당에 대한 질투와 열등감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겠지만, 사임당의 자녀들은 새어머니 권씨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장남 이선은 매일 새어머니와 싸웠다고 한다. 이원수의 3남인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의 시묘를 마친 이듬해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이이는 금강산에 간다는 이야기를 아버지 이원수에게 하지도 않고 떠나 버렸다고 한다.
실제로 이이는 이후로도 자기 아버지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도 않았고, 아버지에 대한 회상도 한 적이 없다. 아무래도 이이는 아버지를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 듯하다. 어머니에 대한 태도와는 딴판. 그래도 아버지의 재산은 받았다. 당연히 아버지가 죽고 나서. 사실 '''이원수의 재산 상당수는 사임당 신씨가 시집오면서 가져온 재산'''이라 따지고 보면 이이 입장에선 그냥 원래 받을 어머니 재산을 물려받는다는 느낌이 더 강했을 것이다.
다만 아내인 신사임당과의 사이는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한다. 신사임당이 싸울 정도로 일을 몰고 갈 사람이 아닌데다가 이원수 본인도 뛰어난 아내에 대한 질투나 열등감을 속으로 삭힐지언정 신사임당에게 드러내놓고 분풀이를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원수는 신사임당의 부친인 신명화가 '''일부러 그런 성격에 그런 집안 고르고 골라서 맞이한 데릴사위'''였다. 명문가에 부자 집안이었던 신사임당이 덕수 이씨 가문이라고 하지만 부친이 일찍 사망하고 가난했던 이원수와 결혼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명화는 딸이 충분히 제어할 수 있는 데릴사위로 이원수를 지정했다.
[1] 이기는 윤원형의 일파라서 문정왕후 사망 이후 이들은 권세를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기는 명종 7년에 사망했지만 그의 영향하에 있었다면 무슨 말을 들었을지는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