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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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선도본에 실린 조선시대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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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복원 관련 자료.
1. 개요
2. 역사
3. 맹선
4. 대중매체의 등장
5. 관련 항목


1. 개요


漕運船
고려, 조선시대에 각 지방의 세곡을 수도로 옮기는 데 사용했던 배.

2. 역사


한국에서 최초로 조운업을 시작한 것이 문헌으로 남은 것은 고려시대다. 다만, 신라시대 때 선부에서 해양 운송을 관장했다는 주장은 있다. 수도 서라벌의 지리적 위치상 낙동강 내륙수로 및 울산항까지 해로로 물자를 모아서 경주로 운송했을 가능성이 높다.[1]특히 울산항은 1500년 전과 지금이 많이 다르다. 현재 울산 남구일대가 모두 모래톱으로 이루어진 바다였고 울산 중구의 토성도 신라시대의 토성이니 울산항이 발굴된다면 획기적인 발견이 될것이다.
고려의 조운업은 중국보다는 늦지만 중국의 조운업은 강과 내륙수로를 사용했으며, 해양을 통한 조운업은 한국이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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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명나라의 조운선. 우리나라 것과 달리 뱃전이 낮은 내륙선이다.
고려시대 조운선은 초마선(哨馬船)이라고 불렸다. 이때부터 한 척당 무려 1,000석(섬)의 곡식을 적재할 수 있었다. 한 섬은 현대 용량단위로는 180 리터, 재래식 무게단위로는 곡식마다 다른데 벼는 200kg, 쌀은 144kg, 보리쌀은 138kg로 당시 조선기술 수준에 1,000석이면 상당한 양의 곡식을 수송할 수 있는 것이다. 도량형의 단위는 시대에 따라 다른데, 고려시대 1석(섬)의 부피는 약 51L, 조선시대로 오면 약 114.5L쯤 된다. 고려시대 초마선은 1000석을 싷었을때 대략 52.9톤쯤 된다.
이 정도 수준의 배는 비슷한 시기 주변국에서도 찾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훨씬 후대인 에도막부 말기 일본의 벤자이센(니부네) 중에 1,500~2,000석을 수송하는 수준의 대형선인 능원회선(菱垣廻船)이 있긴 했으나 수지타산을 맞추려면 다량의 화물을 가득 채워 한번에 날라야 했다. 자연히 운송주기가 오래걸려 신속하게 수요를 맞추기 힘들고 신선도가 중요한 음식류의 경우 지나치게 오랜 수송기간이 악재로 작용했기에, 결국 대형 벤자이센인 능원회선(菱垣廻船)은 그보다 소형인 준회선(樽廻船)에 밀려났다. 처음에는 보조용이던 준회선이 빠르게 수요를 충족시키는 게 가능하다는 점을 상인들이 높이 사면서 주력 상선으로 삼기 시작한 것.
음식류 중에서도 특히 ''''''. 에도시대 술 소비량이 폭증하면서 재때 신선한 술을 빠르게 공급해야 했는데, 수지타산을 위해 운송기간이 긴 능원회선은 술의 신선도와 수요를 맞추지 못해 개발된 게 준회선이었다. 그나마 초마선과 가장 비슷한 시기의 배로는 중국 명나라 때의 내륙수로용 조운선 중에 2,000석을 수송하는 게 있긴 했으나, 여기서 2,000석은 중국과 한국의 석 단위의 차이로 인해 문헌만 봤을 때 중국 쪽이 커 보이는 것일 뿐 실제 수송량이나 배의 규모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이 조운제도는 고려시대 동안 계속 유지되다 조선시대에 들어 전국에 세곡을 관리하는 곳인 조창을 정비하고, 조운선의 선박제도를 체계화하면서 고려시대의 조운제도를 계승/발전시켜 사용하였다.
조운선은 기본적으로 국가에서 만들고 관리하는 시스템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 상업이 발달로 민간자본과 무역업이 발달하면서 민간에서도 관선보다 튼튼한 배를 만들면서 민간에 위탁하는 경우도 생겨났고, 조운에 동원되는 인원도 기존에는 나라에서 조졸[2]을 동원하던 것이 숙종 30년을 기점으로 나라에서 임노동자를 고용하는 형태로 바뀌게 된다. 조선 중후기 상업의 발달, 경강상인의 등장 등으로 민간 선박의 성능이 크게 향샹되었고, <표해록>에도 민간에 좋은 배는 나라의 배보다 좋다고 하는 기록도 나온다.
참고로 조선시대의 해난사고 중 상당수는 탈세 및 횡령이었는데, 텅 빈 폐급 조운선을 몰고 나가서 침몰시킨 다음 "침몰해서 쌀 없어졌음" 하는 레퍼토리였다.
이후 이후 조선 후기로 가면서 대동법 등을 거치며 세금을 기존의 쌀 대신 돈으로 내는 금납화가 퍼지면서 관영 조운업은 쇠퇴하였으나, 근대에 서구의 운송 시스템과 조세제도가 도입되어 정착하기 전까지 조운선과 조운 제도는 조선의 국가경제를 책임지는 핵심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외에도 조운선은 배가 둔중하고 튼튼해 아래 소개할 군용선인 맹선으로도 쓰였고, 국왕의 행차시 배다리를 만드는 데에도 쓰였다.
이 조운선은 북부지방에서 사용하는 것과 중남부 지역에서 쓰는 것이 조금 달랐는데, 북부 지역에서 쓰는 것은 북조선(北漕船)이라고 불렀다. 북조선은 일반 조운선보다 뱃전이 조금 낮은 대신 배가 더 넓어 보통 조운선이 800~1,000석을 수송하는 데 반해 1,000~1,200석의 곡식을 나를 수 있었으며, 북조선은 서울이 아닌 함흥 별궁에 북부지역의 세곡을 모아놓고 북방지역의 재정에 사용했다. 국사시간에 배우듯 조선시대 북부지방은 세곡을 서울로 가져오지 않고 그 지역에서 사용하는 지역이었는데, 그 북부의 세곡을 관리하는 별궁으로 수송하는 것이 북조선이었다.
여담으로 화륜선처럼 수차로 움직이는 윤선 조운선을 조선시대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다. 그러나 중국이나 유럽에서도 증기기관 등장 이전에는 기술적 문제로 항해용으로는 잘 쓰이지 않았던지라 해로를 사용하는 조운선의 특성상 얼마나 쓰였을지는 의문이다.

3. 맹선


맹선(猛船)은 조운선 중 800석 이하급의 쌀을 수송할 수 있는 조운선을 군용으로 사용할 때의 이름이다. 승선 인원에 따라 대맹선·중맹선·소맹선으로 나뉘는데, 대맹선은 수군 80명, 중맹선은 60명, 소맹선은 30명 정원이다. 세종 시대 병조선(兵漕船)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도입되었으나, 아직 관련 제도가 정비되지 않아 이때의 병조선은 지방마다 그 수준이 들쭉날쭉하고 대충 만들어 성능도 떨어졌다. 때문에 조선 조정에서는 한때 중국선이나 일본선, 유구국의 동자갑선 등 외국 선박을 사들이고 기술자를 초청하여 외국의 선박을 도입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다음과 같은 이유로 중단된다.
  • 중국선(당선)은 한국 지형에 맞지 않는다.
  • 일본 배는 빠르기는 하나 방수가 떨어지고 선체가 약하다.
  • 유구국의 동자갑선은 군선으로 쓰기 불편하다. 특히 유구국이나 중국의 배는 갑선(甲船)인데, 갑선은 선체를 이중으로 만들기에 그 제조과정이 복잡하고 충격을 받으면 쉽게 떨어져 부서지며, 나무를 많이 소비한다.(여기서 갑선의 이중선체 구조는 배의 내구력을 직접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선체를 두껍게 덧붙이는 게 아니라, 따개비나 바다벌레(목선천공충)를 막기 위해 선체 겉에 조금 얇은 나무를 덧붙이는 것이다.)
  • 기존의 한선은 단선이라 튼튼하고, 한선도 좋은 목재로 만들어 석회로 방수하고[3] 바다벌레를 막기 위해 겉을 그슬려 탄화층을 만들며,[4] 정기적으로 개삭(묵은 부품을 갈아끼우는 것. 완전조립식인 한선의 특징이기도 하다.)을 해 주면 얼마든지 오래 쓸 수 있다.
위 내용을 주장한 것은 세조 시기 외국을 직접 다니며 각국의 선박들을 면밀하게 비교 검토한 신숙주다. 이후 외국식 선박의 도입 대신 기존의 조운선을 유사시 상장(상부 구조물)을 설치해 싸움배인 맹선으로 쓰도록 하는 제도가 완전히 정착한다.
그러나 맹선은 본래 곡식 수송선인 조운선을 개조해 만들었기에 선체가 속도를 내기에는 부적합하여 왜선들을 추적하기는 힘들어 소형선들과 협동 작전을 펼쳐야 했다. 더욱이 시간이 지나면서 왜구들이 맹선보다 더 크고 누각을 설치한 대형선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싸움배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5] 명종판옥선이 새롭게 등장하였고, 조운선은 다시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판옥선 역시 속도전보다는 내구력과 화력에 투자한 배라서 속도가 느렸기에, 여전히 소형선들과의 합동 작전을 필요로 하였다.
이후 명종조에 들어 판옥선방패선이 등장하면서부터는 더 이상 군용으로 쓰이지 않게 되었다.
여담으로 조선 전기에 시암. 타이 등에서 방문한 사신들이 왜구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요청하자 귀국길에 조선의 병선들이 일정거리를 호위한 적이 있어 원해까지 제한적이지만 이동이 가능했다는것을 알 수 있다.

4. 대중매체의 등장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 등장. 남만무역 추가 후 등장한 배로, 같은 시기 추가된 한국 배인 거북선과는 달리 상거래용에 좋은 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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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상에 등장하는 모습.@
모바일 게임인 베네치아스토리에도 등장한다.#
종영 드라마인 공주의 남자에도 등장. 11,12화에 등장하며, 죄인들을 태우고 강화도로 가던 중 수양대군의 음모로 2척 중 죄인들을 태운 한 척이 침몰한다. 간신히 무인도에 죄인들이 상륙하자 떠나가지 않고 주변에서 감시하는데, 이때 추적을 피하던 죄인들이 모여 얘기하던 중 수양대군의 부하들이 탄 배를 '맹선'이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5. 관련 항목



[1] 경주 근처의 울산항은 통일신라대에 멀리 중동의 물품까지 모이는 국제항이었으며, 경주의 시대별 신규 사찰 창건 추세와 도시 확장 방향 연구에 따르면 통일신라기에 울산항으로 이어지는 경주 동남방향이 크게 발전한 것이 울산항의 중요성과 관련이 크다고 추정되고 있다.[2] 조운업을 전담한 선원들. 세습직으로 조운업 외에 다른 일에 동원되지는 않았으나, 신분은 양인이면서 천시되던 신량역천 중 하나였다.[3] 기록에는 유회로 나온다. 기름에 반죽한 석회를 말한다.[4] 이를 연훈법이라고 한다. 이 방법을 쓰면 탄화층이 생겨 바다생물들이 붙지 못하고, 이미 붙은 경우 열로 죽이는 효과가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탄화층이 사라져 가면 주기적으로 다시 해주어야 하지만, 이는 과거의 갑선이나 현대의 배도 마찬가지다. 갑선의 경우 겉에 붙인 목재에 바다생물이 잔뜩 붙으면 당연히 수리해줘야 하고, 현대 배도 주기가 길 뿐 주기적으로 손봐줘야 한다.[5]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중국 해적들이 일본 왜구들과 협업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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