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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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출신의 화가. 동양화의 전통적 필묵을 활용해 현대적 추상화를 창작한 한국 현대미술사의 거장. 1958년 프랑스로 건너간 이후 동서양 예술을 넘나들며 ‘문자추상’, ‘군상’ 시리즈 등 독창적인 화풍을 선보이며 유럽 화단의 주목을 받았고 유럽과 미국에서 수많은 전시회를 열었다.
2. 생애
1924년 조선 미술전람회에서 수묵화로 입상하는 등 초창기는 동양화가로 활동했지만, 1938년 일본 가와바타미술학교의 초청을 받아 도일한 후 서양화를 공부하면서 동양화와 서양화의 화풍을 조화시킨 작품으로 외신의 주목을 받는다. 그리고 외신 기자들을 통해 프랑스 미술협회의 초청을 받아 1958년 파리로 건너갔고, 프랑스에서도 콜라주 위에 수묵화를 그린 독특한 작품으로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1965년, 북한 공작원이 6.25 전쟁 때 납북된 아들을 만나게 해 주겠다는 말에 속아 동베를린에 간 것이 화근이 되어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됐다. 이 때 작품활동을 할 수 없자, '''휴지 위에 간장으로 그림을 그리고 밥풀을 모아 조각을 했다.''' 이후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1969년 광복절 특사로 사면되어 다시 파리로 떠난다.
이후 백건우 - 윤정희 부부 납치사건의 배후로 둘째부인 박인경이 지목되어 고국에서 좌빨로 낙인찍히자, 그는 이를 견디다 못해 1983년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86세 생일을 이틀 앞둔 1989년 1월 10일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열릴 '고암 초대전'에 전시할 작품을 그리다가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3. 작품
3.1. 문자 추상
3.2. 군상
4. 여담
- 조강지처인 박귀희 씨가 대단한 대인배이자 전형적인 조선 여성이었다. 남편이 프랑스 미술가들의 초청을 받고서는 이혼을 요구하자 순순히 도장을 찍어 주었고,[4] 그리고 그 남편이 간첩으로 몰려 옥살이를 하자 그 뒷바라지를 했고, 그 남편이 고문 후유증을 추스린 후 파리로 다시 떠나자 평생 재혼도 하지 않고 재회를 바랐던 것. 박귀희 씨는 예산군에서 이응노의 집을 개조한 수덕여관을 운영하며 홀로 지냈으며, 2001년에 사망했다. 수덕여관 건물은 이후 문화재로 지정된 상태.
- 그의 손녀도 홍성군 홍북읍 중계리에서 미술 관련 일을 하고 있다.
- 2007년 대전시립미술관 바로 옆에 이응노미술관이 개관했으며, 이응노 화백의 작품 외에도 종종 상설전시로 국내 및 해외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전을 열기도 한다. 입장료가 성인 500원, 청소년 및 대학생 300원이라 학생들이 방학과제 목적으로 오는 일이 많다.
- 2019년, '2019 대전 방문의 해' 문화 예술 축제 기간에 기획되는 이번 전시는 고암의 대표적인 작품과 현대 미디어 아트의 새로운 접목을 시도하였다. 관람객은 전시를 통해 미디어아트 장르를 직접 체험하면서 고암의 작품 철학을 보다 역동적으로 재해석하고, 디지털 미디어 매체로 오감을 일깨워 고암과 '교감'하게 는 등 이응노 미술관의 참신하고 선구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1] 대한제국 충청남도 홍주군 홍천면 중리(중계리?) 386번지[2] 고인의 첫 부인이었던 박귀희 씨가 예산에서 수덕여관을 운영한 것도 있고, 예산이 대표적인 전의 이씨 집성촌이어서 예산 출신으로 아시는 분들이 많지만, 홍성 출신이라고 한다. 그래서 고인의 생가를 관광상품으로 삼으려는 예산군과 홍성군 간의 갈등은 근 20년에 달하고 있다.[3]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교수, 서라벌예술대학 동양화과 교수[4] 그리고 이응노는 자신과 동행한 20세 연하의 제자 박인경과 파리에서 혼인 신고를 했다 그리고 이 박인경이 1977년에 간첩짓을 하다가 백건우의 센서에 딱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