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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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본명은 고은태(高銀泰)로 1933년 8월 1일,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난 한국의 전직 시인이다. 단국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8년부터는 문예창작과 석좌교수로 재직했으나 #, 2017년-2018년 미투 운동 때 수십년간 상습적으로 성폭력을 자행해 왔다는게 밝혀져 모든 분야에서 제명되었다.
2. 상세
1974년 대한민국 최초의 진보 문인 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창설하여 활동하였으며 또한 1987년 음악, 미술, 공연, 문학 등 진보적 문화예술계 전체를 아우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을 창설하여 초대 공동의장을 맡았다.
1982년, 그의 나이 49세에 이상화와 결혼해 화제가 되었으며,[2] 이듬해인 1983년, 그의 나이 50세에 딸 차령을 얻었다.
그 뒤 2018년 미투 운동 때 연이어 성폭력 추문이 터져서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었다. 서울시는 2월 28일 고은을 기리기 위해 3억 원을 들여 서울시청사에 조성한 만인의 방을 즉시 철거하기로 결정하고 보도했다. # 그리고 은관 문화훈장 박탈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2018년 7월 25일 부로 위 성추행 -기정사실과 같다만 본인의 주장을 따르면-의혹에 대해 소송이 진행 중이다.
3. 생애
일제강점기 시절인 1933년[3] 군산 미룡동 용둔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제 말기에 창씨개명한 이름은 '타카바야시 토라스케(高林虎助)'였다. 훗날 고은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은 존경받아야겠어요. 우리가 아는 그 시절의 작가들이 대부분 조선 이름을 썼던 게 아닌가 하는데요?"라는 질문을 받자 최남선, 이광수의 예를 들며 반박하기도 했다.
군산고등보통학교(군산고등학교)에 다닐 때인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다. 6.25때 고은의 일가친척들은 대부분 좌익 활동을 했으며 당숙은 인민위원장이었다. 고은 일가는 6.25 당시 용둔리 일대의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고, 이 때문에 마을 사람들과 원수 사이가 되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이 퇴각하자 고은은 군산에서 도피하여 선유도로 피신했다. 이후 중공군이 참전하여 1.4 후퇴로 국군과 UN군이 밀려나자 선유도에서 나와 군산으로 돌아왔다. 당시 무성영화의 변사(당시의 성우 겸 나레이터)를 하려고 했으나 처음 상영회에서 너무 떨어서 잘린 적도 있다고 한다. 또 인맥을 통해 군산북중학교에서 잠깐 교사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군과 UN군이 다시 재반격을 시작하여 치고 올라가자 다시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6.25 도중에 '고은'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51년 봄에는 두 차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때 귀에 청산가리를 부어 고막이 손상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6.25 전쟁 중이던 1951년[4] 에 군산 동국사에서 기승(奇僧) 혜초(慧超)를 은사로 모시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이후 10년간 승려 생활을 하면서 참선과 수양을 거듭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승려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폭음을 일삼았다고 거리낌없이 말하기도 했다. 1953년에는 혜초 스님에게 소개받아 경남 통영 미륵섬 미래사를 찾아가 당시 불교계에서 가장 명성 높은 고승 효봉 스님의 제자가 되었는데, 고은의 삶에서 '효봉 스님의 제자'란 칭호는 두고 두고 이름값이 되었다.
고은이 승려 시절에 법명을 받은 과정이 불확실하다. 어디에서는 고은이 처음 은사로 모신 혜초 스님으로부터 중장(中藏)이란 법명을 받았는데, 나중에 효봉 스님의 제자가 된 뒤 일초(一超)란 법명을 다시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디에서는 혜초 스님이 처음부터 '일초'란 법명을 주었고, '중장'은 혜초 스님의 법호[5] 였다고 한다.
1957년 효봉 스님이 초대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추대되자 스승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불교신문〉을 창간하고 주필이 되었다.
1958년 11월 〈현대시〉에 조지훈의 추천으로 〈폐결핵〉이, 서정주의 추천으로〈천은사운〉 〈봄밤의 말씀〉, 〈눈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60년 첫 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을 냈다.
1962년 종단의 징계를 받아 승복을 벗고 환속했다. 징계 사유는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훗날 고은은 4.19 혁명 정신에 자극을 받아 승단의 개혁을 주장했다가 종단의 정치보복성 징계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당시 신문 기사에도 나와 있듯이 고은의 환속은 성추문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또한 종단의 최고 어른이 자신의 스승이었던 효봉 스님이었기 때문에 고은이 정치적인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는 주장은 그리 설득력이 높지 않다.
환속 이후 1963년 봄 고은은 목포에서 제주도로 가는 배에서 그의 생애에서 세 번째로 자살 시도를 했으나 실패했다. 자신을 물속에 수장시킬 큰 돌과 로프를 가방 속에 숨기고 제주행 배를 탔다가 술을 마시고 잠든 후 깨어보니 제주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후 고은은 1963년부터 1968년까지 4년여 동안 제주도에 거처를 마련하고 은거 생활을 했다고 한다. # # 1968년 제주도에서 가짜 고은 사건이 터졌다. 고은을 사칭한 '가짜 고은'이 지역 유력자의 딸과 사기 결혼을 했다는 것.
1968년 수필집 〈인간은 슬프려고 태어났다〉를 냈는데, 수필집에서 '''자기 스스로를 '성(聖) 고은'이라고 신격화'''하여 사회적 이목을 끌었다. 1970년 짧은 시집 〈세노야〉를 펴낸 뒤, 한동안 작품을 내지 않고 번역가로 활동했다. 이무렵 고은은 북한산 계곡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살 시도를 했다가 근처에서 훈련하던 예비군들이 그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겨져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등단 이후 1970년까지 발표된 그의 시들은 허무의 정서, 생에 대한 절망, 죽음에 대한 심미적인 탐닉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당시 그를 두고 흔히 '''허무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그 뒤 1974년부터 그의 시는 경향이 크게 달라지게 된다. 고은은 1974년 저항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을 발표한 이후 시대상황에 대한 비판과 현실에 대한 투쟁의지를 적극적으로 담는 저항시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70년대 중반부터 갑자기 성향이 완전히 바뀐 것에 대해 고은 본인은 "이쪽으로 흐르던 물이 다른 쪽으로 급격하게 돌아서 흐르기 시작한 것"에 비유했다. 이후 그는 70년대 최고의 저항시인으로 꼽히게 되면서 반독재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아래 항목 참조)
1983년 중앙대학교 영어과 이상화 교수와 결혼한 뒤 부인의 직장이 있는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에서 멀지 않은 안성 대림동산 전원주택 단지에서 살았다.
2013년 수원시의 구애로 안성을 떠나 수원 광교산 자락으로 이주했다. 이에 광교산 일대 주민들이 특혜 및 혈세 낭비라는 이유로 시위를 하며 논란이 되었다. 아마 본인들 거주지 주변의 개발제한구역 해제를 위해 애먼 고은을 타겟으로 삼은 듯 한데 성격 상 수원을 떠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수원시 측에선 난감하게 여겼다. 그리고 실제로 떠나게 되면서 주민들은 욕을 엄청 먹는 중이'''었'''다. 참고로 저 구역은 장안구 상, 하 광교동으로 영통구에 속한 광교신도시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4. 정치적 행보
1958년 등단 이후 고은은 1970년대 초반까지 쭉 순수문학만을 지향해왔다. 그러다가 1974년을 기점으로 갑자기 저항시인으로 변모하여 반독재 투쟁에 앞장 서게 된다. 일부 문헌에는 1971년 3선 개헌 반대 때부터 고은이 반독재 운동에 앞장섰다고 쓰여져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에 대해 고은 본인은 훗날 3선 개헌 당시 자신은 '허무'에 빠져 '무각성적'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1974년 저항시인으로 변모한 이후 고은의 행적을 보면 '''반미''', '''친북''' 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정작 업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민주화, 반독재 활동은 생각보다 비중이 크지 않다. 사실 고은의 반독재 민주화 활동을 보면 반미, 친북, 친미성향 정부에 대한 반정부 활동과 연관된 경우가 많다. 운동권 반미주의 측면에서 고은은 '''독재자인 카다피, 김정일에게 찬사'''를 보낸 바 있기 때문에 반독재, 민주화 운동가라고 부르기에는 논란이 있다.
4.1. 명사(名士) 사냥꾼
고은은 젊은 나이에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당시 불교계 내외로 상당한 존경을 받고, 가장 유명한 고승이었던 효봉스님[6] 의 상좌가 되었다.힘이 없는 악은 의미가 없다. 악이 악다워지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권력이든 물리적 폭력이든 재력이든, 지식이나 기술 혹은 특수한 재능이든 상대를 강제하거나 마비시킬 수 있는 힘을 지녀야만 악은 악답게 자랄 수가 있다. 그의 악이 의지해 자란 힘은 말과 글을 다루는 재능이었다. 말의 재능은 그의 ‘명사(名士) 사냥’ 시절에 이미 충분하게 발휘되었다 - 이문열의 소설 사로잡힌 악령 중에서
상좌의 직함을 단 그는 이후 법조계, 문화계, 예술계 여러 사람들과 교유하였는데 그의 타고난 말재주와 언변으로 유명 명사들이 쉬이 그를 함부로 대접하지 못하게 했다, 나중에 명사들이 타계하자 낸 고은의 자서전에서는 자신과 명사들이 '피를 나눈 것처럼 절친한 사이', '둘도 없던 벗'이라고 포장했다.
- 예: 효봉 스님의 상좌 → 문인들과 교류 → 문인들의 추천으로 등단 → 미당 서정주와 교류 → 서정주 사후 그의 문단 위치를 물려받음
고은의 명사 사냥은 이후 대통령에게까지 발을 넓혀 김대중 대통령과는 각별한 사이가 되었고, 그의 사후 묘비에까지 시를 써 주었다. 노무현 대통령과도 친분이 있었다. 막연한 민족주의 정서[7] 때문에 고은은 북한을 일방향적으로 동경했고, 김정일을 지나치게 훌륭한 사람으로까지 평가하며 실제로 김정일을 만나기에 이르렀다. 그의 명사 사냥꾼의 자질은 한반도 내외에 걸쳐 끊임없이 발휘되었다.
4.2. 반독재, 반미 운동
고은은 1974년 저항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을 발표한다. 이어 고은은 저항문학인들을 결집하여 1974년 11월 18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만들어 초대 대표에 취임했다. 이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현재까지 두 차례 이름을 바꾸면서 저항문학계열을 대표하는 단체 역할을 하고 있으며, 고은은 계속해서 그 중심에 있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민주화 열기가 한창이었던 1987년 9월 17일 ''''민족문학작가회의''''로 확대 재창단하였고, 다시 2007년 12월 8일 ''''한국작가회의''''로 명칭을 바꾸고 시인 도종환을 신임 사무총장에 선출하면서 현재에 이른다.
이문열 등은 70년대 초중반 고은의 성추문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지탄을 받자 순수문학을 하던 그가 갑자기 저항시인으로 돌변했다고 말하고 있다. 저항시인으로 변모한 후 고은은 당시 순수 문학계에 대해 현실 참여를 하지 않는 가짜 문인들이라고 비판했다. 참고로 70년대 초 고은의 성폭력 문제를 거론했던 시인들이 주로 순수문학계였다고 한다.
저항시인으로 변모한 고은은 김지하구출위원회 부위원장(1974년), 민주청년협의회 고문(1978년), 한국인권운동협의회 초대 부회장(1978년)으로 활동했다. 1979년 6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방한 반대운동을 주도하다가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으로 투옥되어 1979년 말 석방되었다. 그동안 6.25때 우리나라를 도와 준 우방인 미국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운동이 없었기 때문에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훗날 고은은 79년 카터 방한 반대운동이 국내 '''반미 운동의 효시'''가 된 사건이었다고 자평하면서 큰 의미를 부여했다.[8][9]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연루 혐의로 다시 투옥되어 복역했다.[10] 그러나 평소 좋지 않았던 귀 건강이 악화되어[11] 옥중에서 귀 수술을 받고 얼마 후인 1982년 8·15 특사로 풀려났다.
1987년 9월 17일, 이미 1974년 자신이 창설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확대 개편하여 '민족문학작가회의'로 재창단했다. 이후 고은은 이 단체에서 의장, 부회장 등을 지냈다.
1989년 1월 한겨레신문에 ‘무아마르 카다피 대령에게’라는 칼럼을 썼는데 이 칼럼 내용이 논란이 되었다. 이 칼럼에서 고은은 악명 높은 독재자 카다피를 옹호하고, 미국을 맹비난했다. 고은은 칼럼에서 '''리비아가 테러를 저지르는 것은 미국 탓'''이라는 맹목적 반미주의 입장에서 논지를 밝혔다. 미국에 대항하는 국가들은 자유를 지향하는 혁명국가들이며 미국이 ‘세계 경찰국가’의 못된 패권으로부터 그들 자신의 도덕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한미 연합 군사훈련인 팀스피리트 훈련이 동아시아 긴장완화에 크게 해로운 것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12] 외교관계를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볼 수 없지만 고은은 리비아가가 미국에 반항하기 때문에 정의로운 국가라는 단순한 이분법적인 반미주의를 근거로 두고 칼럼을 작성했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당시 반미가 기본이던 운동권에서도 리비아가 반미국가라고 해서 무고한 민간 여객기를 폭파한 팬암 사건을 대놓고 옹호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다만 '진짜 리비아가 한게 맞느냐?' 같은 음모론을 거론하는 사람들이 간간히 있는 정도였다.
1989년 고은은 문익환 목사의 방북과 동시에 진보계열 문학인들의 방북을 추진했다. 고은은 남북작가회담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3월 중순 북한의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와 교섭하여 3월 27일 남북 작가 회의 회담을 주최하기로 합의했다. 그리하여 27일 고은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 대표단 5명을 데리고 판문점으로 향했으나 경찰에 저지되고 말았다. 이에 고은, 신경림 등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 회원 26명이 서울마포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당시 뉴스 보도 화면. 당시 조사를 받은 26명 가운데 25명은 조사 후 풀려났으나 고은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4월 3일 구속 수감되었다. #
4.3. 민주화 이후의 행보
1988년 12월 23일 진보 예술단체를 총망라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을 창설하여 공동 의장에 취임했다. 출범 이후 '민예총'은 명실상부한 대표적 진보적 문예운동 연합체로 자리잡게 되었다. # 민예총은 창립 10년째인 1998년 회원이 만 명 수준이었으나,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급성장하여 2008년에는 회원이 10만 명에 달했다.
고은과 김대중의 관계는 상당히 각별했다.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되어 찬시를 헌정하기도 했다. 김대중 정권 취임식과 관련된 고은의 기사. 고은은 김대중 정부의 정책이었던 햇볕정책을 적극 지지했으며, 1998년 7월에 통일문화연구소 방북조사단에 포함되어 북한을 방문했다. # 이어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때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방북 당시 고은은 평양 목란관 만찬장에서 자신이 지은 즉흥시 '대동강 앞에서'를 낭독하고 김정일과 건배하며 '''김정일의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북한에서 돌아온 후 고은은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000년 남북정상회담은 우리 현대사중 가장 축복받은 역사의 절정이라고 평했다. 8,15 해방, 4.19 혁명, 광주항쟁, 6월항쟁을 종합한 감격이라고 표현했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인데, 김정일에 대해서는
라고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 또 같은 인터뷰에서 고은은 뜬금없이 '''북한의 문화재가 미군의 융단 폭격으로 남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훼손되었다'''과 함께 평양에 대해서는 "부다페스트를 본따 민족 형식을 가미한 '''서울보다 나은 도시'''"라고 평했다. #우리는 분단현실에서 김 위원장을 비판하고 부정의 대상으로만 삼아 왔다. 그런데 내가 김 위원장을 직접 만나보니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고, 말을 잘하고, 속에 담아 두지 않고 즉각적으로 표현하는 솔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매우 예술적인 취향을 지녔다. 시를 좋아하고 특히 영화 예술에 전문가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정치인을 만났다는 느낌보다는 어떤 예술가를 만난 느낌을 받았다.
노무현 정권이 시작되고 나서도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이어갔다. 과거 고은은 노무현 당시 국회의원을 예찬하는 시를 쓴 적도 있었다. #
2003년 한 인터뷰에서 고은은 당시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갈등을 빚고 있던 대북송금특검법를 거론하며, 대북송금을 옹호하고 특검법을 비판했다. 그는 대북송금 특검이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의미를 축소, 매장하고 오물을 퍼부으려는 행위라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또 고은은 '''북핵문제는 미국 탓이라고 주장하며 미국을 맹비난'''했다. 고은은 "미국은 원자로를 건설해 주기로 하고 지키지도 않았으며, 제네바합의를 무효화시킨 미국은 기만적이다. 또 북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여 전쟁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데, 미제국주의는 전쟁을 시장화하고 있다. 신무기를 소비하여 경제를 활성화해야 하는 미국은 이라크 다음으로 북한을 공격하려 하고 있다. 지금은 평화적, 외교적으로 해결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갈지 모른다. 정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하고 말하는 등, 미국을 제국주의라 부르며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
2003년에는 '민족문학작가회의'와 '민예총'을 이끌며 이라크전 파병 반대 시위를 벌였다.[13] 당시 고은은 "지금 지구는 오만한 침략전쟁으로 불모의 행성이 되고 있다."라며 '''미국정부를 강한 어조로 비난'''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고은의 반전메시지가 적힌 엽서를 시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
2005년 7월 20일에는 진보 문인 100여 명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추모시 <당신은 우리입니다>를 썼다. 이 시는 서울 국립현충원의 김 전 대통령 묘지 곁에 세워진 비석에도 새겨졌다.
2009년 9월 23일 노무현 재단 출범 당시 재단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2010년 이후로는 정치적 행보를 자제하며 조용하게 지낸 편이었다. 노벨문학상을 의식해서 정치적 행보에서 발을 빼고 있는 것이라는 얘기가 많았다. 그러나 '민예총' 지역 행사, 모임, 강연 등에 꾸준히 참여하며 회원들의 의식을 고취하는 강연을 한다고 알려졌다. 또한 2011년 인터뷰에서 "'''자본주의의 타락'''으로 팍스아메리카나 체제가 마구 요동치고 있고 시장사회(자본주의)와 '''미국이 내리막''' 비탈길을 달리고 있다. 21세기 후반에는 '''중국 주도의 세계체제가 가동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미국과 자본주의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을 다시 한번 드러냄과 동시에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 대한 기대감'''을 표출했다. #
2000년대 초중반 당시 진보진영을 떠나서 민족주의적인 의식, 북한에 유화적인 풍조가 절정에 달했고 반미 분위기가 꽤 높았기에 2010년대 이후처럼 크게 문제시되지는 않았다가 박왕자 씨 피살 사건, 천안함, 연평도 포격으로 인해 반북 감정이 급상승하게 되면서 동시에 정권의 기조도 대북강경 노선으로 전환되었을 때에는 정파적 활동을 줄이다보니 대중들의 고은의 정치성향 인식은 막연한 수준에 국한되었다. 한편으로는 보수언론 및 정파에서 그다지 크게 문제시하지 않았던 점도 감안해야 하겠다.
5. 노벨상 후보?
20여개국에 시가 번역되었고 오리엔탈리즘과 민주화 운동 경력같이 서양인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가 많아서 노벨문학상 후보로 자주 거론되었는데, 매년 여러 나라에서 그를 초청을 하며, 2007년 영국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에 이명박 대통령, 가수 비와 더불어, 그리고 한국 문인으로는 유일하게 이름이 올랐던 것이 그러한 점을 보여준다.
다만 '''노벨상 후보는 수십 년 뒤에나 공개함이 원칙이기 때문에 실제 고은이 노벨상 후보에 올랐는지 여부는 지금으로선 알 길이 없다.''' 노벨상은 후보를 선정해서 투표하는 게 아니라 심사위원들이 올해는 누가 받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적어내는 방식이다. 일단 기존 수상자들이 '본인의 수상분야'에 한해 특정 인물에 대한 추천서를 쓸 수는 있지만... 당연히 공식적인 노벨상 후보라는 건 없고, 보통 국내언론에서 후보에 올랐다고 쓰는 것은 유럽권 언론에서 흘러나오는 예상기사들을 받아서 쓰는 것이다.[14]
또 래드브록스 같은 영국의 도박사이트들은 매년 노벨상 수상자 선정을 두고 베팅을 하는데 여기에서 순위권에 자주 오르기는 했다.[15] 일단 래드브록스 자체는 2006년 터키 소설가 오르한 파묵의 수상을 맞힌 이력이 있긴 하지만, 사실 후보로 거론되는 사람들의 저명성 등을 생각하면 애초에 아예 한 번도 못 맞히는 게 더 어려웠긴 하다. 즉, 후보 운운하는 것부터가 어떻게 보면 김칫국.
그가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부터인데, 마침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 이후 또다른 한국의 노벨상 수상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이때 인터넷의 전국적인 보급시기와 맞물려 오프라인에서 가장 많이 오르내리던 이름이 고은이었다. 이때부터 교과서나 모의고사에 출제되는 빈도가 늘었으며, 본인의 저서가 노벨문학상을 주관하는 북유럽쪽으로 번역되었다. 또한 2000년 말 미당 서정주의 죽음과 맞물려 그 자리를 대신하는 수준의 인지도가 생겼다.[16]
구체적으로는 2002년 외신에서 고은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했으나 그때는 별다른 반향이 없었다. 국내 언론은 ‘고은 씨도 노벨문학상 물망에 올랐다.'면서도 그 해는 여성작가의 차례가 올 것이라고 짧게 전달했을 뿐이었다.
2005년부터 고은의 노벨상 후보 이야기가 국내 언론의 큰 관심을 끌었다. 로이터 통신이 한국의 고은을 두 번째로 유력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꼽았고,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발표가 당초 예상된 10월 6일보다 한 주 늦어진 13일로 바뀌면서 기대가 커진 것도 한몫했다.
이렇게 후보로 거론되는 까닭은 고은이 1990년대 이후 1년의 반을 국외에서 보낼 정도로 세계 각지의 문학회를 돌아다니면서 우리 문학 알리기, 시 낭송, 초빙 교수 등 활발한 국외 활동을 하여 국제적인 인지도를 높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때 스스로를 노벨 문학상 후보라고 소개하며 '''셀프 홍보'''를 하고 다녔다. 고은의 노벨상 셀프 홍보를 한겨레신문 등이 긍정적으로 보도하면서 그의 노벨상 후보설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반복되다보니 마치 신빙성 있는 사실인양 확대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어찌되었건, 고은의 노벨상 후보 밀어주기는 문학적 성취보다는 꾸준한 홍보와 한국 문단을 대표한다는 아이덴티티를 적극 어필하여 외신에 알리는 행위가 더 영향이 컸다. 그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거나 한국 문단에서 크게 인정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가 해외에서 받았다는 상들도 과장된 부분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북유럽에서 받았다는 상들이다.
우선 비에른손 상(Bjørnsonprisen)은 비에른손 아카데미에서 매년 수여하는 상이기는 하나, 노르웨이 왕실 및 정부에서 공인하는 훈장은 절대 아니다. 역사도 짧아 2003년에 만들어졌으며, 2017년 이전까지는 해외 문학가들에게도 시상했으나 그 후로는 노르웨이 문학가들에게만 시상하고 있다. 무엇보다 비에른손 아카데미 홈페이지의 수상자 명단을 봐도 고은의 이름이 없다. 2005년에는 마케도니아의 Esma Redzepova가 수상했다고 나온다. 시카다 상(Cikada-priset)의 경우 2006년에 수상한 것은 맞으나, 이 상은 하뤼 마르틴손이 생전에 동아시아(특히 일본)에 관심이 많았다는 이유로 동아시아(한국, 중국, 일본, 대만, 베트남, 홍콩 국적자들이 수상한 바 있음) 시인에게만 수상하는 굉장히 대상이 제한된 상이다. 한국인으로서는 고은 외에 신경림(2007년), 문정희(2010년)가 받았다. 이 상도 역사가 굉장히 짧아 2004년에 처음 만들어진 것이다.일단 노벨상을 주는 북유럽에서는 여러 상을 수상한 바가 있다. 노르웨이에서는 자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비에른스티에르네 비에른손(Bjørnstjerne Bjørnson)을 기린 비에른손 훈장(2005년)을 수여했고, 스웨덴에서도 자국 노벨문학상 수상자 하뤼 마르틴손(Harry Martinson)을 기리는 상인 동시에 동아시아권 문학에 주는 상인 시카다(Cikada)상(2006년)을 수여했다.
하지만 한국 문단은 고은을 전반적으로 박하게 평하며 어디까지나 원로라서 대접을 한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문학적 담론이나 평론의 대상으로 활발하게 논의되지도 않을 뿐더러 일반 대중에게도 대표작으로 기억될 만한 작품도 없다. 예를 들어 다른 문학자의 유명한 대표작으로는 윤동주의 서시, 한용운의 님의 침묵, 이육사의 광야, 김소월의 진달래꽃,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등이 있다. 그나마 대중에도 좀 알려진 게 있다면 김연아 헌상시 '오늘 너는 대한민국이었다.' 정도. 하지만 이것도 인터넷 커뮤니티들 반응을 보면 대부분 오글거리고 유치하다며 까는 게 대부분이다. 즉, 애송되는 시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학교 교과서나 참고서에는 간간히 나오는 작품이고 이에 따라 수업시간에 다루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만 노벨 문학상 수상 무렵에 나오는 뉴스 기사 이외에 순수 문학 작품으로 고은을 접한 사람은 적은 편이다. 미당 서정주와 그 제자들이 주류인 한국 문학계에서 비 주류로 밀려있다가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될 무렵부터 문단계의 원로로 자리매김했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이는 고은이 말년에야 미당과 멀어졌고 그 이전에는 미당과 친밀했으며 미당의 제자라는 말까지 불렸던 인물 중 한 명이라는 점을 간과한 억지 주장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고은이 미당과 대등하거나 뒤를 이을 정도라고 하기도 힘들다. 위에 설명한 것처럼 어디까지나 고은은 명사 사냥꾼에 가까웠지 문학적 성취가 대단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당 사후에는 고은은 미당을 혹평했다. 살아 생전에는 전혀 하지 않았던 일.
그의 시 세계는 이상처럼 독특하고 기념비적인 것도 아니고, 이육사처럼 강렬하고 지조 있는 세계를 구현하지도 않았다. 윤동주처럼 널리 애송되고 사랑받는 아름다운 시를 작시하지도 못하였으며, "한국어의 화신"으로까지 평가되는 미당 서정주의 시 세계에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다만 그는 허무주의와 탐미주의의 탈을 쓴 채로 '''의미 없는 텍스트'''를 생산하여 시집이랍시고 출판했으며, 불교 시절 때 배운 선문답을 교묘히 이용하여 해석하기 아리송한, 막상 해석할 내용도 없는 공허한 의미 없는 시 세계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이를 한국 최고의 평론가였던, 1990년도 타계한 김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는 그의 실체를 명확하게 꿰뚫어 본 것인데, 일방적인 북한의 대한 옹호, 동경, 궤를 같이하여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증오성 발언은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 잘 알 수 없는 민족 정서들에 대한 집착'''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자신의 삶에 대한 의식이 없는 의식, 자작농의 밋밋한 삶은 고양된 혹은 충전된 삶에 대한 감각이 마모되어 있어, 비장이나 장엄에 이르지 못하고 있으며, 그렇다고 사실의 정확한 전달이라는 묘사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도 못하다. '''그것은 고은이라는 떠돌이의 의식이 자작농에 기탁한 가면 때문이다.''' 무의식적인 오문들, 달관의 제스처 섞인 선적 언어의 비-선적 남용, 지켜야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 잘 알 수 없는 민족 정서들에 대한 집착 등, 비진정성이 진정성의 탈을 쓰고 있다.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 31쪽)
사실 그의 노벨상 후보 거론도, 후술할 성폭력 파문 이전에 이미 점점 사그라드는 추세였다. 2005년 무렵부터 활발하게 언급되던 노벨상 수상 기대가 몇 년이 지나도록 계속 빗나갔기 때문이다. 거기다 그러는 동안 뭔가 문학적 성취를 이룬 것도 아니고 말이다. 참고로 2011년 당시에는 수상자가 스웨덴의 시인이었고, 근 몇 년 간 시인이 나오지 않았었기 때문에 가까운 해 안에는 시인이 수상할 가능성이 급격히 줄었다는 예상도 나왔다. 2012년에도 또 후보에 올랐다고 했지만 앞서 설명한 것처럼 애초에 후보에 진짜로 올랐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이 그냥 예상이었을 뿐이고, 중국의 모옌(莫言)이 수상했다.
2013년 수상을 앞두고 본인은 "노벨상에 대한 내 소감은 12년도 넘게 한번도 없다." 란 인터뷰를 남겼지만 '''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말만 저렇지 신경을 굉장히 쓴다고 한다.''' 최영미 사건으로 폭로된 고은의 실체를 추정하여 볼 때, 한 때 파계승이었다는 점, 엽색행각을 수시로 벌이고 60년대에는 "가짜 고은"사건을 자발적으로 일으켰다는 점, 여러 사람 앞에서 거리낌없이 지퍼를 열고 자기 성기를 만지는 대담함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고결한 선비의 정신으로 담담하게 노벨상을 대했을 가능성은 적다. '''당신의 행위를 금메달로 가리려 했다는 거라면 모를까.''' 2013년에는 캐나다 작가 앨리스 먼로가 받았다.
일각에서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를 통틀어, 자신들과 정치-이념적으로 동질성이 높은 고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지원하려는 정책적 안배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2016년 10월 노벨 문학상 수상 시즌이 돌아왔고, 래드브록스 등 배팅 사이트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상이 유력하다고 일컬어지는 와중에 일각에서는 고은 또한 유력한 후보라고 발표해 또 다시 주목받았지만, 2016년에는 미국의 포크가수 밥 딜런이 선정되었다. 사실 하루키가 1위로 예측되던 레드브록스 사이트에서 고은은 11위였기에 가망이 없어 보였다. 노벨상 후보로서 언론에 지속적인 관심을 받는다는 점에선 무라카미 하루키도 비슷하지만, 적어도 하루키는 세계적인 관심을 받는데다가 문학적 성취도 고은에 비하면 훨씬 뚜렷하다. 물론 평가야 주관적이긴 하지만 대체로는.[17]
2017년 또한 노벨상 수상 시즌이 되면서 다시 언론을 통해 고은의 수상 가능성을 예측하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다만 사실 이쯤되면 그냥 진짜 가능성이 있는지 이전에 연례행사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2017년 래드브록스 사이트에서 고은은 예측 순위가 4위로 올라갔지만 2017년에는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받았다.
2018년에는 전세계적으로 미투 운동이 폭발하는 와중에 노벨문학상을 결정하는 스웨덴한림원에서도 성추문 스캔들이 터지면서, 시상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18]
2019년부터는 맨부커상 수상 이력이 있는 한강에게 초점이 대신 가기 시작했다. 마침 고은은 후술할 성폭력 사태도 터져, 국내외의 평가도 거의 떨어질 대로 떨어졌고 말이다.[19]
6. 유명 문학가 폄하
고은은 자신보다 잘나고 유명하다고 생각되는 유명 문학인들을 납득할 만한 근거도 없이 악의적으로 비난하고 폄훼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상 평전, 한용운 평전, 미당 담론 등을 써서 별 근거도 없이 악의적인 중상을 가하며 이 시인들을 비판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학 전공 수업에서도 그냥 읽지 말고 무시하라고 한다.
애초에 정규적인 교육 과정을 밟아 문학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이, 시라면 모를까 비평을 쓰기는 능력 밖의 일임을 생각하면 당연한 이야기다. 문학작품의 창작과 평론은 일반적인 인식과 다르게 전혀 별개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굳이 평전을 쓰겠다고 나서서, 궤변으로 점철한 책을 출판까지 했음은, 허명을 얻고 싶다는 고은의 일생을 관통하는 욕망의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그가 쓴 글에서는 어떤 문학적 식견이나 통찰은 전혀 엿보이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색깔의 선명성을 밝히고자 하는 욕구만 잔뜩 드러난다. 그에게 이상이나 한용운은, 친일파와 퇴폐성을 죽도록 미워하는 고결한 자신이라는 허울을 꾸며 보여주기 위해 필요한 발판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말도 안 되는 중상을 동원해 그들을 색정광과 친일파로 만들고는 그들을 비판하는 자신을 한껏 추켜세운 것이다.
6.1. 이상 비난
고은은 저항시인으로 변신한 직후인 1974년 11월 '이상 평전'의 초판을 펴냈다. 이 평전은 문법에서 벗어난 난해한 문장으로 쓰여져 있으며, 때때로 사전에도 없는 단어들이 튀어나오는데 27년 짧은 인생에 고은과는 비교도 안되는 자취를 남긴 천재를 온갖 억지논리로 비난한다. 고은은 '이상 문학은 이 땅의 현대문학에 대한 음습한 주술'이라고 악평했다. 고은은 이상의 여성 편력을 집중적으로 부각하며 그의 시 대부분이 성적인 의미가 담겨진 섹스시라고 폄하했다. 또 고은은 이상이 모던 보이적 용어를 파렴치하게 취득하였으며, 국문학적 소양의 부족에서 오는 혼란과 전문 용어 남용에 의한 자기도취를 일삼았다고 비판한다. #[20] #[21] 이상 평전은 기초적인 사실관계나 지식조차 몰라서 써 놓은 헛소리나, 은근히 열등감을 내비치는 악의적인 문장들이 가득해서, 학부 수업 때는 그냥 읽지 말라는 소리를 듣는다. 막연하게 주워들은 고은의 명성에 기대감을 가지고 이상 평전을 집어든 사람은 세 페이지도 지나기 전에 짙은 실망감을 느낄 것이다. 하술된 괴작 '오늘 너는 대한민국이었다'와 더불어 전공자들 사이에서의 고은의 평가가 줄 잘타고 시인 흉내 잘 내서 학자연하는 늙은이 1 이상이 되지 못하도록 만드는 주된 이유.
6.2. 만해 한용운 비난
고은 씨가 ‘평전’이라는 이름 아래 만해의 불교 정신과 독립운동과 문학 세계를 사정없이 짓이기고 있음에 분노를 느껴야 했다. 고은 씨의 눈을 통해 비춰지는 만해는 시종일관 편협하고 이기주의적이며 최남선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영웅주의의 표본에 불과했다.
고은 씨는 먼저 '''만해의 독립 정신에 대해 비꼬기''' 시작한다. 국권을 상실하고 민중이 처참하게 죽어가던 시대에 분연히 일어선 만해의 뜻이 고은 씨 앞에서는 단지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었던 하나의 계기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중략) 고은 씨의 논리대로 하자면 만해 등 서명을 했던 인물들은 '''장래가 없는 사람'''이나 교단의 임무가 없던 사람들이다.
고은 씨는 만해에 대한 '''기존의 연구 결과를 완전히 무시'''하고 '''악의적으로 만해 스님을 왜곡'''하고 있다. 그럼 고은 씨는 왜 이렇게 평전이라는 이름 아래 만해를 철저히 짓밟고 있는 것일까? 아마 그것은 고은 씨의 '''만해에 대한 콤플렉스'''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단계까지 고은 씨의 행적은 만해와 닮아 있다. 출가했었다는 점도 그렇고, 문학을 했다는 점도 그렇고, 독립운동이나 민주화 운동에 주력했다는 것도 비슷하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한 사람은 한때의 고통이 '''문화 권력을 쥐는 계기'''가 되었지만, 한 사람은 일평생 고난의 세월을 걷다가 영양실조로 죽었다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이번에 고은이 만해의 평전을 낸 것은 '''질투심'''의 발로다. '''자신의 작품이 30~40대 만해가 썼던 작품에 못 미친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것'''에서 비롯된 것. 고은이 2001년 미당 서정주가 사망한 지 반년도 되지 않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미당의 친일 문제를 끄집어내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처럼 만해를 자신의 구미에 맞춰 난도질해 '''그의 사상과 문학 세계를 깎아내리고 자신을 높이는 의도'''로 해석된다.
- 고은은 <이상 평전>을 완성한 이듬해인 1975년 <한용운 평전>을 저술했다. 고은은 자신이 지은 한용운 평전에서 만해 한용운을 극렬히 비난했다. 책에서 고은은 만해 한용운이 "순수한 승려가 아니라 정치 선동가였다"고 말하고 있다. 또 일제시대 때 만해가 지조를 지켰던 것에 대해서 "(만해는) 어떤 사람보다 지배본능이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폄하하고 있다. # # #
- 고은은 평전에서 만해를 소영웅주의자로, 시종일관 편협하고 이기주의적이며 최남선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 고은은 만해는 "이기적인 성정, 늘 원한이 살아 있는 감정적인 품성 때문에 사찰의 덕망의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하루도 견디어내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그는 사랑을 가진 일이 없고, 대중을 이용했으며, 대중을 극단적으로 모멸했다"고 주장했다.
> - 고은 저, 한용운 평전 (301페이지)
- 고은은 또 만해의 신체시 '심'에 대해서도 '비속한 해설'이나 '붓장난', '승려들이 걸핏하면 지껄이는 정도의 사어(死語)'라고 폄하하고 있다.
- 만해의 대표작으로 수많은 학자들이 탁월한 저서로 평가하는 ‘조선불교유신론’에 대해서도 현실인식이 부족한 치기어린 작품에 불과하다고 폄하했다.
- 만해가 불문(佛門)에 든 직후 시베리아와 만주를 주유한 것은 ‘허영’에 불과하며 폄하했다.
- 고은은 만해가 온힘을 기울였던 잡지 <유심>에 대해서도 "공허한 배설물인 논설과 수필"이라며 최악의 평가를 내리고 있다.
- 독립선언서에 추가한 ‘공약삼장’은 최남선에 대한 시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 고은의 한용운 비판은 교수 시절에도 유명했다고 한다. 수업 시간 때마다 걸핏하면 열폭해서 한용운을 까댔다고 한다.
- 고은은 자신의 창씨개명 사실을 스스로 옹호하면서 한용운이 그의 딸 영숙을 창씨개명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면서 한용운을 까기도 했다.
- 고은의 한용운 평전은 불교계에 큰 논란을 일으켰다. 이재형 법보신문 편집국 차장은 "고은 씨는 만해를 정치적인 선동가로만 바라보고 있다.", "이 책은 만해의 본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하고 말했다. #
- 고은은 1988년 제1회 만해문학상을 받았고, 만해축전대회장, 만해마을 명예총재를 맡은 바 있다.
- 서울시는 만해 한용운을 비판하고 3·1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33인을 장래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폄훼한 고은을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중 주요사업으로 선정하여 2017년 11월 서울도서관(옛 서울시청사) 3층에 고은 기념관 '만인의 방'을 개관하고 그곳에 3·1운동 관련 유물을 전시했다. 그리고 2018년 초 성추문 사건이 터지자 2018년 3월 12일에 문을 닫았다.
6.3. 서정주 비난
- 등단 초기인 60년대에는 등단할 때 자신을 밀어 준 미당 서정주를 스승으로 모시고 육친 같은 정을 나누었다고 표현될 정도로 가까운 관계로 지냈다고 한다. 60년대에 가까이에 살며 자주 서정주를 찾아갔다고 한다. 아마도 뻔질나게 미당의 집 문지방을 넘나들었던 것은, 그의 특기인 '명사 사냥'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되지, 그가 육친 같은 정을 나누었다라고 언급하는 것은 이미 사로잡힌 악령에서 묘사된 바 몇 번 만나지도 않은 것이 사후에 육친의 정을 나눈 것 이상으로 포장되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처럼 매우 진의가 불분명한 발언이다.
- 고은은 1970년대 저항시인으로 변모한 후 서정주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서정주가 전두환 정권을 찬양하자 완전히 연을 끊고 죽을 때까지 보지 않았다고 밝혔다.
- 2000년 연말 서정주가 사망하자 고은은 2001년 '미당 담론'을 발표하여 서정주를 비판했는데 제대로 된 학술담론이 아니라 철저한 감성팔이와 억지논리의 산물이다. 여기서 고은은 ‘자화상’, ‘귀촉도’ ‘일본헌병 고 쌍놈의 새끼’같이 미당의 작품 중 친일과 상관없는 작품은 물론 친일전력, 군사정권 협조, 개인 에피소드, 세계관, 철학 등 서정주의 모든 점을 트집 잡아서 열심히 비난했다. 그 비판과 분석이라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들이 말꼬리잡고 늘어지는 식인데, 예를 들어 친일과 상관없는 미당의 초기시 '자화상'의 첫 행 '애비는 종이었다'를 지적하며 서정주는 '노예근성'에 쩔어있는 자라고 비난했고, 이어지는 구절 중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라는 구절을 지적하며 "세상에 대한 수치가 결여된 체질"이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노예근성과 수치심 결여 때문에 나중에 권력에 편에 서서 일신의 안전을 유지하는 삶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 # # 고은이 한창 기세등등하던 시절이라 ‘용기 있는 행동’이란 호평이 많았지만, 그 당시에도 이미 미당 살아 생전에는 침묵하다 세상을 떠나 아무 말도 할 수 없게되니 욕하고 나선다는 비판도 있었다. 고은의 주장대로 육친 수준으로 가까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60년대까지 도움을 여러 번 주었던 것은 분명한데 그런 서정주에게 제대로 된 비판이 아니라 일방적이고 감정적인 비난을 쏟아낸 것은 제대로 된 처신이라 하기 힘들다.
- 서정주 사후 고은은 서정주의 이름이나 그의 호인 미당을 입에 올리는 법이 없었다. 대신 '그 고유명사'라고 불렀다. "내 입에서 그 고유명사(미당 서정주)는 다시는 안 나옵니다. 그게 내 교양이죠."라고 말했다. #
- 언제나 권력에 가까이 했던 서정주는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행위를 했고, 해방 후 1950년대에 자청해서 이승만 평전을 썼다. 고은은 서정주의 이런 성향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까지는 서정주를 스승으로 모시며 '시의 정부(政府)'[22] 라고 찬양하더니 1970년대 저항시인으로 돌아서 스스로 권력을 쥐게된 후 연을 끊었고, 서정주가 죽은 후 그를 부관참시했던 것이다.
- 이 모든 걸 통틀어서 보면, 한 마디로 고은은 자신에게 필요할 때만 서정주를 찬양했고, 그가 죽고 더 이상 반박을 못하게 되자 바로 돌아서서 그를 까내리는 식으로 철저하게 이용한 셈이다. 물론 서정주가 친일파였고 독재정권을 찬양하는 등 문제있는 행적을 보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고은의 이런 행위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고은 본인의 주장 처럼 서정주 생전 육친의 정에 비할법한 깊은 사제 관계를 맺은게 사실이라면, 오히려 서정주의 기회주의만 쏙 제대로 전수 받았다라고 볼 만한 여지까지 있다.
6.4. 박경리에 대한 모욕 의혹
김지하는 고은이 문학계 대선배인 박경리에게 모욕적인 욕설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으나, 이를 증명할 녹취록이나 교차검증 증거가 없기 때문에 확단할 수는 없다. 확실한 것은 이런 얘기가 나올 정도로 고은의 품행이 오래 전부터 올바르지 않았다는 반증일 것이다.그 자리에서 고은이 '박경리에게 손자를 업고 시청 앞에서 김지하 석방 플래카드 들고 시위하라고 했더니 과부년 주제에 말을 안 들어. 하라고 하면 할 것이지'라고 떠벌리자, 리영희, 백낙청이 낄낄 웃더라는 거야. 그 얘기를 교도관에게 전달받았소."
6.5. 박목월 조롱
일단 고은의 대표작 만인보에 <박목월>이란 제목으로 실린 시를 보자.
[23]
박목월의 대표작 나그네에서 구절을 따와 박정희 일가에 아부해서 시인 생활을 했다고 조롱하고 있다. 가난한 문인이자 가장인 사람이 가족을 위해 저 정도 했다는 것이 과연 저렇게 조롱받을 짓일까?
7. 기타
- 6.25 전쟁 당시 친인척들의 좌익 활동과 양민학살 사건으로 인해서 수십 년간 고향을 방문하지 못하다가, 1991년 어머니 팔순 잔치 때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고향 군산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학살의 피해를 입은 지역 주민들의 반대 여론 때문에 군산에 있는 고은 생가는 복원되지 못하고 방치된는 상태라고 한다. # 고은 생가는 2006년까지만 해도 남아 있었으나, 이후에도 끝내 복원되지 못하고 완전 철거되어 현재 그의 생가 터에는 방문객들을 위해 시 한 편과 문패만 걸려 있다.
- 비공식적으로는 몇번 고향을 방문했던거 같긴 하다. 하지만 고향에서 간첩으로 몰려서 신고를 당하는 등 여러 수모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 #
- 20대에 고향을 등진 이후 문인으로 성공한 후에도 고향에 남아 어렵게 살아가던 부모를 오랫동안 외면하고 찾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고향 군산에서는 그의 좌익 활동과 더불어 불효자 이미지까지 겹쳐 인식이 매우 좋지 않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이미지도 희석되고 2000년대 이후 노벨문학상 후보로 계속 거론되자 군산시에서 고은 시비도 세우고, 고은을 기리는 여러 기념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미투 운동으로 고은의 성범죄 논란이 생기자 군산 사회가 큰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2018년 3월 2일 네이버-KBS뉴스9 ‘고은 성추행’에 고향 군산 충격…기념사업 모두 보류
- 고은은 "탈고향 이후 나의 삶에서 아버지가 없었다." 하고 말했다. 또 아버지 사후 고향에서 홀로 지내는 어머니에 대해서, 어머니가 아들인 자신과 함께 살기를 원하지 않고 혼자서 살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 술을 굉장히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승려 시절부터 폭음을 즐겼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술버릇이 매우 더러웠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 ‘술집’이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 술을 좋아하는 것은 집안 내력이라고 하며, 고은의 할아버지는 고향 일대에서 소문난 술꾼으로 매일 술을 마셔야 얼굴이 펴졌다고 한다.
- 술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일화가 있다. 신년목표를 하루에 소주 100잔 마시기로 잡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빨리 성공해서 하루에 200잔을 목표로 잡았다는 일화도 있다.[24] 예전에 한 대학에서 강의하던 고은이 강의 시간에 10분 지각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이유를 밝히길 "술 한잔 하다가 늦었다!"라고 당당하게 둘러대었다고 한다. 한 기자가 고은이 술약속이 있다고 해서 점심 때 인터뷰를 잡았는데, 이미 반주를 하고 있길래 "나중에 술 드신다면서..."라고 하자 "다음날 깼을 때 누구와, 언제까지, 얼만큼 마셨는지 기억나지 않아야 술을 마신 거다. 이건 그냥 곡차다."라고 선언했다고도...
- 2010년 김연아에게 헌정하는 시 '오늘 너는 대한민국이었다'를 썼다. 그런데 이 시에 대한 평이 상당히 좋지 않아 노벨상 후보 자질 논란으로 번지기도 했다. 문학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문체가 요즘말로 매우 오그라들고, 초등학생이라 할지라도 쉬이 쓸 수 있을법한 유치한 수준의 시였기 때문이었다. 하나의 시상을 위해 수 없이 밤을 지새우는 시인의 열정이 느껴지는 것이 아닌, 초등학생이 백일장에서 쓴 졸작처럼 시를 못 써도 너무 못 썼다.
- 2017년 9월에는 수원 연고 야구단 kt wiz 헌정시를 썼다.
제목이 아니다. 저게 kt wiz 헌정시 전문이다. 반응은 별로 좋지 않다. # 다만 나쁘지 않다거나 좋다는 평가도 있는데, 비꼬는 건지 슬로건인 줄 안 건지... 사실 이 헌정시라는 것도 새로 쓴 것이 아니라, 기존에 썼던 "화살"의 한 구절을 재사용한 것이다.
- kt wiz 야구단은 이 '허공이 소리친다, 온몸으로 가자'를 2018년 kt의 캐치프레이즈로 확정했다고 발표했다. kt wiz는 "지상의 허공은 무언가 받아들이는 수동체다. 허공이 소리쳐 공을 부르고, 공은 날아갈 때 에너지를 남기지 않고 간다. 온 힘을 다해서 그렇게 우리도 온몸으로 가자"라고 시의 의미를 해석했다. # 꿈보다 해몽인 셈. 그러나 이후 고은이 성추문에 휘말리면서 이 캐치프레이즈는 폐기되었다.
- 고은의 외동딸인 미술가 고차령의 작품이 2012년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아트광주12'에 전시되어 화제가 되었다. 고은이 직접 아트페어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트광주12'는 출품작들의 수준이 너무 낮다는 비판에 휩싸였다. 향후 출품작의 수준을 반드시 심사해야 하고 저명한 미술가들의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고 지적되었다. #
- 2012년 당시 대선에 출마했던 문재인 후보를 '숫처녀'에 비유하여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2018년 미투 운동 이후 윤단우 작가가 다시 한번 이를 거론하며 재발굴되었다. # 윤 작가는 "숫처녀를 칭찬으로 입에 올리는 인간이나 그걸 칭찬이라고 낼름 옮기는 인간(안도현)이나"라고 비판했다.
- 별세한 마광수 교수에게 호된 비판을 들은 일이 있다. “엄청난 권력을 갖고 있어서 문단정치, 문단권력이 나온다. 후배들이야 출세하려면 이들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라며, 고은은 사실상 시인이 아니라 시인 흉내내는 정치꾼이라는 내용이었다. 당시에는 워낙 독설을 입에 달고 사는 마 교수라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고은의 엽기적 엽색 행각이 수면 위에 드러나며 재조명을 받고 있다.
- 3.1운동을 심각하게 폄훼하였다. 고은은 만해 한용운이 개인적인 컴플렉스에서 3.1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주장했고, 당시 민족대표 33인을 장래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폄하한 바 있었다.
- 신라 말기의 지식인 최치원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처음에 글을 배울 때 읽은 것이 바로 최치원의 전기였다고 한다. 그런데 고은은 최치원이 경주시 출신이 아니라 군산시 출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 야사에 그렇게 적혀 있다고 하는데 그 야사의 출처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 교과서에 실린 애창곡 〈등대지기〉[25] 의 작사가로 알려졌다. 이 노래는 1970년대 양희은, 은희 등이 건전가요로 부르면서 유명해졌다. 당시에는 원곡이 영국(또는 아일랜드) 민요이고, 고은이 여기에 아름다운 노랫말을 붙였다는 식으로 알려졌다. 사실 이 곡은 일본 소학교(초등학교)에서 사용하는 『학교창가집』에 1947년부터 실린 〈灯台守〉[26] 이며, 가사 또한 일본 시인 가츠 요시오(勝承夫) 씨가 붙인 것이다. 1970년대 등대지기 수록 음반들을 보면 한국어 가사가 조금씩 다른데, 이것은 일본어 가사를 사람마다 제각기 다르게 옮겼기 때문이다. 고은도 그런 번역자 중의 한 명일 뿐이다.
- 세월호 참사의 추모시를 쓴 적 있다. 참사 100일(2014년 7월 25일)을 기해 나온 추모시집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에 실렸으니 사고 직후에 쓰인 것.
보기
8. 수상
- 1974년 - 한국문학작가상
- 1988년 - 만해문학상 (시집 만인보)
- 1991년 - 중앙문화대상
- 2002년 - 은관문화훈장
- 2005년 - 노르웨이 국제문학제 비에른손 훈장
- 2006년 - 스웨덴 동아시아 문학상 시카다상
9. 작품
9.1. 시집
<해변의 운문집> (1964)
<신 언어의 마을> (1967)
<세노야> (1970)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 (1974)
<부활> (1975)
<제주도> (1976)
<입산> (1977)
<새벽 길> (1978)
<고은 시선집> (1983)
<조국의 별> (1984)
<지상의 너와 나> (1985)
<시여 날아가라> (1987)
<가야 할 사람> (1987)
<전원시편> (1987)
<너와 나의 황토> (1987)
<백두산> (1987)
<네 눈동자> (1988)
<대륙> (1988)
<잎은 피어 청산이 되네> (1988)
<그 날의 대행진> (1988)
<만인보(萬人譜)> (연작: 1986~2010): 1986년부터 2010년까지 집필된 30권 4001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연작시로, 고은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만인보'는 만인의 삶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으로 고은은 "반만년의 한국사에 명멸한 인간 군상의 부침과 영욕을 담아냈다."고 말했다.
<독도> (1995)
9.2. 소설집
<어린 나그네> (1974)
<일식(日食)> (1974)
<밤 주막> (1977)
<산산히 부서진 이름> (1977)
<떠도는 사람> (1978)
<산 넘어 산 넘어 벅찬 아픔이거라> (1980)
<어떤 소년> (1984)
<갠지스 강의 저녁노을> (1986)
<화엄경> (1991)
10. 사건 사고
10.1.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2016년 최순실 게이트로 정국이 혼란한 가운데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고은의 이름이 올라왔다는 보도가 터졌다. SBS뉴스 보도자료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지지했다는 명목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노벨문학상의 계절이네요. 일전에 고은 선생님, 문재인 후보하고 소주 한잔 얼큰하게 하시더니 일갈. “보통 정치하는 사람들 똥갈보 같은데 이 사람은 숫처녀 그대로란 말이야!”
하지만, 안도현이 2012년에 주장한 것과 달리, 본인은 문재인을 포함해서 정치인은 누구든지 지지를 한 적이 없다고 인터뷰에서 주장했다.SBS뉴스 보도자료
10.2. 성폭력 파문
10.2.1. 과거의 성추문과 가짜 고은 사건
고은의 성폭력 의혹은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다. 이미 그가 문단에 등단한 직후부터 고은의 성추문에 대한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 60~70년대 동안 고은이 폭음을 하며 성폭력과 기행을 일삼은 탓에 일부 문인들이 그를 실제로 경찰에 고발하는 등 여러 차례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당시 고은의 성추문은 2018년 미투에서 폭로된 것처럼 단지 성추행이나 성기 노출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훨씬 심각한 수준의 것들이었다.그의 악이 번성하는 한 파렴치한 엽색(獵色)의 식단도 풍성했다. 자랑스레 휘젓고 다니는 색주가는 기본이었고 손쉽고 뒷말없는 유부녀는 속되게 표현해 간식이었다. 더욱 악의 섞어 말하자면 신선한 후식도 그 무렵에는 그에게는 흔했다. 시인의 허명에 조금했다가 화대도 없이 몇 달 침실봉사만 한 신출내기 여류시인이 있는가 하면, 뜻도 모르고 관중의 갈채에만 홀려 있다가 느닷없이 그의 침실로 끌려가 눈물과 후회 속의 아침을 맞는 얼치기 문학소녀가 있었고, 그 자신이 과장하는 시인이란 호칭에 눈부셔 옷 벗기는 줄도 모르다가 (중략) 놀라 때늦은 비명을 지르는 철없는 여대생도 있었다.
그는 당사자 여성만 아니라 한 가정과 동료문인까지 파멸시켰다. 시인이자 한국 문학계에 길이남을 러시아어 번역자인 구자운은 환속하여 세상에 나온 고은에게 호의를 베풀어 그를 자기 집에서 먹고 자게 해줬는데 고은은 그 은혜를 구자운의 아내와 간통하는 걸로 갚았다. 구자운의 부인은 자녀들을 버리고 떠나버렸고 본래 다리에 장애가 있었던 구자운은 아들 둘과 남겨진채 폭음으로 고통을 달래다 위암으로 숨을 거두었다. 진짜 사이코 스릴러는 이 다음인데 문상객들이 찾아가보니 고은은 자기 때문에 가정이 박살나고 요절한 시인의 시신 옆에서 사발에 막걸리 부어놓고 젓가락으로 두들기며 반야심경을 읊고 있었다고 한다.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13>비운의 시인 구자운 소설가이자 동서문화사 사장인 고정일의 폭로
이 무렵 등장한 것이 당시 문단에서 널리 회자된 '''가짜 고은 사건'''이다. 고은은 자신의 기행과 성폭력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극구 부인하며 자신를 사칭한 '가짜 고은'의 짓이라고 말했다. 고은 본인의 기억에 따르면 '가짜 고은'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61년이라고 한다. 이어 1962년 고은이 종단으로부터 징계를 받고 환속하자 '가짜 고은'도 머리를 기르고 환속한 세속인 차림으로 고은 행세를 하고 다녔다. 고은이 밝힌 환속 이유를 다룬 1963년 경향신문 기사에는 '가짜 고은'이 전국 각지에서 갖가지 범죄를 저지르고 다녀서 수배령이 내려졌으나 체포하지 못하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렇게 전국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가짜 고은'이 나타나 추행과 기행을 일삼자 '가짜 고은은 홍길동'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생겨났다. 이에 진짜 고은은 '가짜 고은'이 한두 명이 아니라면서 자신의 유명함을 한탄하기도 했다. '가짜 고은'의 악행은 갈수록 대담해져서 서울에서는 모 대학 영문과 졸업반인 여대생과 결혼하고, 제주도에서도 충남대 가정과 출신의 여자와 동거하는가 하면, 계룡산에서는 공주지방의 문학청년들의 추앙을 받으며 금품 수취도 일삼으며, 각종 사기행각을 벌였다. '가짜 고은'의 악행 때문에 진짜 고은이 억울하게 가해자로 몰려 죽도록 얻어맞은 적도 여러 차례라고 한다.하나의 전쟁이 사소한 발단으로 시작되듯이 그의 환속도 사소한 데서 고려되었다.
작년과 금년 사이에 가짜 고은이 생겨나서 서울을 중심으로 김천, 여주, 대전, 제주, 수원, 대구 등지를 비롯해서 각 산중사원에서 '''갖은 비행, 부녀농락, 협박, 사기, 가짜약혼''' 등을 하면서 명예가 훼손됨으로써 화가 났지만, 중부서에서는 전국적으로 수배하고 있으나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
그 가짜는 정부고관댁을 방문해서 '''사기행각'''을 하였다. 이렇게 신변의 인격이 구석구석에서 타락하기 때문에 그는 날마다 우울하였으나 한편 마음대로 해먹으렴 하고 잠자코 있었다.
아뭏든 그는 현 종단의 형성내질이나 아직도 봉건적인 운명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외부적인 것보다 자신의 비승려성을 발견하고 나서 환속할 것을 홀연히 결심한 것이다.
- 경향신문 1963년 8월 3일자 3면 《시인 고은은 왜 환속했나》
인터넷도 휴대폰도 없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가짜 고은'은 신통하게도 진짜 고은의 지방 스케줄을 척척 알아내어 경주, 김천, 충남 등 각지에서 열린 백일장, 한시대회 등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하여 추행과 기행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공교롭게도 '가짜 고은'이 이런 물의를 일으킬 때마다 진짜로 초청받은 '진짜 고은'은 무슨 사정 때문인지 행사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분개한 지방 문인들이 고은을 고발하기도 했다. 고은은 이에 대해 '가짜 고은'의 소행이라고 계속 강변하였다. '진짜 고은'은 이런 신출귀몰하던 '가짜 고은'을 붙잡기 위해 기를 썼다고 하지만, 문학 관련 행사장에 수없이 나타난 '가짜 고은'과 좀체로 마주치지 못했다.
고은의 주장에 의하면, 이런 신출귀몰하던 '가짜 고은'이 잡힌 것은 두 차례였다고 한다.
첫 번째는, 제주도에서 지역 유력자의 딸과 사기 결혼한 '가짜 고은'이 검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검거 시점에 대해서는 고은 스스로도 증언이 오락가락한다. 어떤 인터뷰에서는 1963년의 일이라고 하며, 다른 인터뷰에서는 1968년의 일이라고 했다. 체포 정황에 대해서도 본인이 직접 체포했다고 하기도 하고, 붙잡혔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8년에 직접 체포했다는 회고는 후술하는 두 번째의 서울에서의 체포 이야기와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개연성이 높은 회고에 의하면, 고은은 잘 알려진 대로 1963년 목포발 제주행 배에서 세 번째 자살 시도를 하려다 실패해서 제주도 산지항에 도착했다. 그의 제주 방문은 이때가 세 번째[28] 였는데, 그가 이번에는 제주도에서 눌러 살려고 왔다고 밝히자 제주일보 등 지역 언론에서 '진짜가 나타났다'는 기사를 실으며 이전에 누군가 고은을 사칭해 사기 결혼을 했다가 들통나 붙잡혔다고 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 사기 결혼 이야기와 사칭범 검거 사실은 고은의 주장 외에는 다른 객관적인 자료(언론기사, 사건기록, 관련자 증언 등)로 검증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오히려 고은이 환속하기 이전 아직 승려 신분으로 제주도를 방문했을 때[29] 한 여자와 사실혼 관계까지 치달았다고 주장한다. 사기 결혼 이야기는 이 과거 행적을 둘러대기 위해 꾸며냈다는 것이다. #
두 번째는, 서울에서 활개치던 '가짜 고은'을 종로3가 백궁다방[30] 에서 형사와 함께 검거했다는 것이다. 고은은 이 사건에 대해서도 1970년대 중반의 일이라고 했다가, 1968년의 일이라고 하는 등 증언이 오락가락했다. 그래도 이 사건은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 1968년에 일어난 사실로 확인되며, 1970년대로 기억하는 것은 단순한 기억 착오로 보인다.
고은과 지인들은 이 당시의 정황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한 뒷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검거 당시 이 '가짜 고은'은 시인을 사칭한 사기를 노모를 모시는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었으며, 심지어 대학 영문학과 졸업반 여성과 관계를 갖고 결혼까지 한 상태였다. 체포된 '가짜 고은'은 진짜 고은에게 감옥에 가게 되면 어머니와 아내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고 하소연하고, 사기결혼을 한 그의 아내도 '남편을 새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눈물로 호소하였다고 한다. 고은은 이를 딱하게 여겨 고발장을 찢은 뒤, 술을 사주며 따귀만 두어 대 갈긴 뒤에 용서를 해주었다고 한다. #1 #2 이는 고은의 호방하고 따뜻한 인격을 보여주는 미담으로 회자되었다.▼ 2일 서울 성동경찰서는 S출판사원 전의섭씨(32, 서울 성북구 삼양동)를 잡아 즉결 심판에 돌렸는데…
▼ 전씨는 시인 고은씨(33)로 행세하면서 주로 바람난 문학소녀들을 꾀어내 농락하고 다녔다는 것으로…
▼ 이 바람에 진짜 고씨는 난데없이 알지 못하는 여자들로부터 다정한 전화와 편지를 받고 당황하곤 하다가 지난 28일 모 여선생과 만나기로 돼있던 다방에 형사와 함께 나가 전씨를 붙잡았다고…
▼ 철창 신세가 된 전씨는 자기의 승명이 「고운(高雲)」이라 『고운입니다』하면 여자들이 으례 「고은」인줄 알고 따라다니더라고 극구 변명…
- 동아일보 1968년 10월 2일자 3면 《휴지통[31]
》
그러나, 당시의 동아일보 기사를 자세히 보면 '진짜 고은'이 '가짜 고은'을 잡고서도 용서해줬다는 미담도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우선 실명까지 적시된 이 '가짜 고은' 전씨는 전업 사기꾼이 아니라 직장인(출판사 직원)이었다. 자기 직장이 버젓이 있는데 생계를 위해 전업 사기행각을 벌였을 가능성은 낮다. 또한 기사에는 그가 즉결심판에 처해졌다고 나온다. 이것은 죄질이 경범죄 수준으로 미미했음을 의미한다. 이때 잡힌 '가짜 고은' 전씨가 1960년대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사기, 혼인빙자간음 등으로 이미 수배가 내려진 당사자였다면, '진짜 고은'이 고발장을 찢건 말건 무거운 형사처벌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는 출판계에 종사하던 범인 전씨가 이름이 익은 관련 문인들을 사칭하며 사기 데이트를 벌인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가짜 고은' 이야기가 100% 거짓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당시 고은에 얽힌 수많은 기행 및 범죄행각이 모두 '가짜 고은'의 소행이라고 보기에는 명쾌하게 설명되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 많다. 1968년 '가짜 고은'이 검거되었지만 이후에도 수년간 '가짜 고은'의 출몰은 끊이지 않았다. 이문열은 고은을 모델로 한 것으로 유명한 소설 사로잡힌 악령에서 이러한 고은의 해명을 빗대어, "해방 뒤 이 나라에는 가짜 백작사건까지 있었지만 가짜 문인이 있었다는 말은 그의 연보나 자서전 이외에는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 거기다 그 소동이 있었다는 60년대 중반만 해도 그의 지명도는 전국적으로 가짜가 돌아다닐만큼 높지도 못했다. 그 전에도 그 뒤에도 그보다 지명도 높은 사람이 수없이 많았는데 어째서 그들에게는 한 번도 그같은 가짜 소동이 없고 그때만 해도 그리 대중적이지 못하던 그에게만 집중적으로 가짜 소동이 일어난 것일까."고 꼬집었다.
결국 '가짜 고은' 주장에도 불구하고 1960~70년대 초까지 고은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소문이 계속 늘어나자, 당시 고은이 몸 담고 있던 순수 문학계는 점점 그를 배척하였다. 이에 심각한 위기 의식을 느낀 고은은 다시 네 번째 자살시도를 했다. 1970년 무렵 북한산 정릉 계곡에서 수면제 100여 알을 먹고 잠들었으나, 마침 주변에서 훈련하고 있던 예비군들에 의해 발견되어 북한산 입구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져 다음날 30시간만에 깨어났다. 다행히 그의 주머니 속에 다소간의 돈이 들어 있었던 탓에, 이 돈으로 병원비를 지불하고 그를 입원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외진 병원이었지만 어찌 알았는지 최인훈 등 동료 문인들이 병문안을 와서 그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
순수 문학계에서 멀어지던 '''고은은 1974년 갑자기 저항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를 발표하며 저항시인으로 변신'''했고, 이어 74년 11월 진보 성향 문인들을 결집하여 국내 최초의 진보 성향 문인 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족문학작가회의)'를 창설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하여 '''진보 문학계의 좌장'''이 되었다. 이후로는 '가짜 고은' 사건도, 고은과 관련된 성폭력 루머도 더 이상 나돌지 않게 되었다.
고은의 이러한 변신은, 본인의 추악한 악령을 감추고 민주화 운동이라는 거대하고도 절대적인, 시대의 숙제이자 사명감이라는 타이틀 뒤에 숨어 더욱 악이 번성하게끔 하였다. 이 악은 절멸되지 않으며, 오히려 주위에 부역자, 동조자들로 인하여 엽색행각은 사소한 일, 대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 정도로 묵과되었으며, 고은을 비난하는 것은 곧 민주화 정신의 문학계를 비판하는 것으로 걷잡을 수 없이 그 의미가 커져만 갔다.
이후 진보문단의 거장이 된 고은은 성추행 파문이 불거지기 1년전인 2017년 3월 TV에 출연하여 당시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아울러 문단 내 성폭력 사태에 대해 "슬픈 일"이라고 말하면서 "현대 초기에는 퇴폐적, 퇴행적 일탈을 한 문인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작가들도 사회가 요구하는 윤리적 기준을 갖춰야 한다"'''고 일침을 놓았다. #
10.2.2. 이문열의 소설 사로잡힌 악령
1994년 소설가 이문열이 소설 사로잡힌 악령을 발표하여 문학계에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승려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폭음을 일삼던 문인이었는데, 유명 원로 스님의 수제자라는 명성을 이용해 문화예술계의 고위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문학계의 중심인물로 군림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주인공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여성 문학 지망생들을 농락하는 악마성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가 지나친 악행을 일삼자 일부 문인들은 그를 문학계에서 배척하려고 시도한다. 이에 주인공은 살길을 모색하기 위해 이번에는 민주투사로 변모한다. 그리고 오히려 더욱 유명 인사가 되어 자신의 권력으로 예전보다 더 심한 악행을 일삼으며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소설속에서 또 다른 효봉스님의 문도의 입을 빌려, 그가 무턱대고 계속해서 스승님을 찾아 어찌어찌 상좌가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또한 문단에 데뷔한 후 자칭 효봉 스님의 상좌(수제자)라고 말하는 등 효봉 스님의 명성을 이용하여 문화예술계의 고위 인사들과 쉽게 교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소설에서는 '''명사 사냥꾼'''으로 표현되었다. 한 예로 말 몇 번 섞어본 것이, 몇 년 뒤에는 아주 잘 아는 사이로, 또 몇 년 뒤에는 죽마고우로 포장되어 사람들을 현혹했다는 대목이다.
남북작가회담을 추진하다가 구속된 일도 소설 속에서는 방북을 선수치고 싶었으나 빼앗긴 것에 대한 분, 그러나 이러한 일로 또다시 추앙받게 되고 떠받들어 받게 된 씁쓸한 현실에 대한 비난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이 소설 주인공의 실제 모델이 바로 고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자 당시 고은이 좌장으로 있던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을 비롯해 진보 계열 문인들이 집단으로 들고 일어나 이문열을 공격했다. 당시 진보 문인들은 민주투사 출신이며, 현재 진보 계열 문인들의 정신전 지주인 고은을 의도적으로 비방하고 있다며 이문열을 맹비난했다. 당시 고은은 김영삼 정권이 자신을 표적으로 삼아 음해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맹공에 밀린 이문열 작가는 "특정인물을 상정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비난이 수그러들지 않자 자신의 출간 단편집에서 제외했으며 이 책에 대해 절판 조치까지 취했다. 때문에 이 작품은 1994년 출간된 중단편집 '아우와의 만남' 초판에서만 볼 수 있다.
한가지 알아둬야 할 것은 이문열이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고은을 상당히 존중했다는 점이다. 이문구의 <산 너머 남촌>에 실린 송기숙의 발문, 시골 밭둑의 싱싱한 수풀을 보면 1982년 79년 지미 카터 내한 반대시위에 대한 재판을 받기 위해 대구교도소로 이감되어 있던 고은을 면회하기 위해 송기숙, 이문구, 황석영, 김지하 등이 대구로 왔는데 대구에 살던 이문열도 찾아가 함께 면회했다. 그런 이문열이 왜 10여년 뒤에 <사로잡힌 악령>을 썼을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그때는 없었다.
2018년 미투 운동의 최전선에 선 최영미가 그의 시로 고은을 천하에 고발했을 때 많은 국민들이 충격의 도가니에 빠진 것에 반해, 그 당시 훨씬 높은 수위로 강도높게 소설적 표현을 이용하여 고은을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실체가 널리 알려지지 못하였다. 만약 그 당시 정의가 바로세워졌다면, 노벨상 후보라는 문단의 오점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사로잡힌 악령 전문
더 자세한 내용은 사로잡힌 악령 참조.
10.2.3. 2017-2018년 미투 운동 때 성폭력 의혹이 제기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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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미의 '괴물' 발표와 JTBC 보도
2018년 2월 6일 JTBC는 고은이 그동안 공공연하게 제기되어 왔던 문단 내 성폭력 문제의 주요 가해자라는 주장을 보도했다. 이후 파문과 의혹이 급격히 확산되었다. #1 #2 #3 #4
최영미는 그동안 문학인 4명에게 성추행을 당했는데, 그 네 명 모두 고은이 창단하여 초대 회장을 맡았던 문인단체 '한국작가회의(구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이라고 추가로 밝혔다. #
- 고은 옹호
이승철 시인이 SNS을 통해 최영미를 비난하여 논란이 되었다. 이승철은 "최영미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며 비난했다. 이승철은 '''"이 땅의 민족문학은 사실상 최영미 현상으로 인하여 절단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최영미의 성격을 거론하며 인신공격성 발언을 이어갔다. "최영미, 그녀는 선병질적으로 튀는 성격이었다. 매우 완강한 자존의 소유자였고, 어찌 보면 유아독존적 처신이었다." 이어 이ㅇ철은 "미투 투사들에 의해 다수의 선량한 문인들이 한꺼번에 도매금으로 매도되는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이승철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국장과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총장을 역임한 바 있다. 고은은 '민족문학작가회의'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또한 고은은 현재 '한국문학평화포럼'의 명예회장직을 맡고 있다. #
- '한국작가회의(구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반응
이후 소속 회원인 이윤택까지 성폭력 논란에 휩싸이게 되자 '한국작가회의'는 사건이 터지진지 16일(2월 22일)만에야 고은, 이윤택 징계안 상정 및 처리에 대한 보도자료를 냈다. 이 징계 상정안은 3월 10일 이사회에서 통과여부가 확정될 방침이라고 한다. 이는 징계안이 가결되기 전에 고은이 직접 거취를 결정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준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창업주인 고은을 징계하는 안에 대해 한국작가회의 내에서 반발이 상당하다고 한다. 한국작가회의 소속 한 여성 시인은 "고은은 남자한테도 뽀뽀하는 천진한 분이고, 옛날 윤리와 지금의 윤리는 다른데 작은 흠으로 거장을 매장시키면 안 된다"며 작가회의 결정에 반발했고 한다. #
- 고은의 반응
2월 18일 고은 재단을 통해 수원시가 마련해준 광교산 자락의 주거 및 창작공간[32] 을 올해 안에 떠나 “‘자연인’으로 살 수 있는 곳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할 것”이라는 계획만을 짧게 밝혔다 # # 그러나 고은 재단은 "퇴거 방침은 최근 불거진 성추행 의혹 논란과는 무관하다."라고 선을 그었다. #
- 연이은 추가 폭로
- 2000년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술집에서는 고은이 자신의 시집 출판 계약을 논하는 자리에서 중소출판사 여직원의 신체를 더듬었다고 한다. 고은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여직원은 회사에 피해라도 갈까봐 저항하기 힘든 상황이었다고 한다.
- 2008년 4월 고은은 지방의 한 대학 초청 강연회에 참석했다. 행사 후 당시 20대 여성 대학원생 3명과 30대 문인(폭로 당사자)과 5명이 함께한 뒤풀이 성격의 술자리에서 고은은 20대 여성 대학원생의 신체를 만지더니 급기야는 바지를 벗고 고은 자신의 성기를 노출하는 추태를 보였다고 한다.
고은과 가까운 일부 문인은 사실상 고은의 추태를 간접적으로 돕는 역할도 했다고 한다. 그들은 고은과의 술자리에 여성 제자만 불렀다고 한다. 여성을 같은 문인이 아니라 접대부로 취급하는 저급한 문화에서 비롯된 것. #
- 최영미 추가 폭로
내 입이 더러워질까봐 내가 목격한 괴물선생의 최악의 추태는 널리 공개하지 않으려 했는데, 반성은커녕 여전히 괴물을 비호하는 문학인들을 보고 이 글을 쓴다. 내가 앞으로 서술할 사건이 일어난 때는 내가 등단한 뒤, 1992년 겨울에서 1994년 봄 사이의 어느날 저녁이었다. 장소는 당시 문인들이 자주 드나들던 종로 탑골공원 근처의 술집이었다. 홀의 테이블에 선후배 문인들과 어울려 앉아 술과 안주를 먹고 있는데 원로시인 En이 술집에 들어왔다. 주위를 휙 둘러보더니 그는 의자들이 서너개 이어진 위에 등을 대고 누웠다. 천정을 보고 누운 그는 바지의 지퍼를 열고 자신의 손으로 아랫도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보는 놀라운 광경에 충격을 받은 나는 시선을 돌려 그의 얼굴을 보았다. 황홀에 찬 그의 주름진 얼굴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아- ” 흥분한 그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들렸다. 한참 자위를 즐기던 그는 우리들을 향해 명령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야 니들이 여기 좀 만져줘.” ‘니들’ 중에는 나와 또 다른 젊은 여성시인 한명도 있었다. 주위의 문인 중 아무도 괴물 선생의 일탈행동을 제어하지 않았다. 남자들은 재미난 광경을 보듯 히죽 웃고….술꾼들이 몰려드는 깊은 밤이 아니었기에 빈자리가 보였으나, 그래도 우리 일행 외에 예닐곱 명은 더 있었다. 누워서 황홀경에 빠진 괴물을 위에서 내려다보더니 술집여자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한마디 했다. “아유 선생님두-” 이십 년도 더 된 옛날 일이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처치하기 곤란한 민망함이 가슴에 차오른다. 나도 한때 꿈 많은 문학소녀였는데, 내게 문단과 문학인에 대한 불신과 배반감을 심어준 원로시인은 그 뒤 승승장구 온갖 권력과 명예를 누리고 있다. 공개된 장소에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물건’을 주무르는 게 그의 예술혼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나는 묻고 싶다. “돌출적 존재”인 그 뛰어난(?) 시인을 위해, 그보다 덜 뛰어난 여성들의 인격과 존엄이 무시되어도 좋은지. -시인 최영미 2018.2.27-
- 탑골주점 주인 한복희씨 반박문 발표
고은이 수없이 성희롱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위행위를 한 것을 본 기억은 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반박문이라고 나온 것이 오히려 고은이 수없이 기행적인 행동과 성희롱 발언을 했음을 다시 한번 입증해 준 꼴이 되고 말았다. 또 단순히 사실관계를 부인하는 반박문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유려한 필체와 화려한 수식어로 이루어져 있어서 대필 의혹까지 받고 있다. #"그분은 승려출신이라는 자긍심이 항상 있었고 입으로는 '''수없이 기행적인 행동과 성희롱 발언을 언급 했을지언정''' 의자 위에 등을 대고 누워 바지 지퍼를 내리고 자신의 아랫도리에 손을 넣고 만지고 그런 추태적 성추행 기행을 했던 기억은 아닌것 으로 안다."
- 출처
반박문을 기고한 한복희씨가 운영하던 '탑골'주점은 고은이 창설한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소속 작가들이 매일 안방 같이 드나들던 아지트와 같은 곳이라고 한다. 당시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 작가들은 한복희씨를 '한선생'이라고 불렀다. '민족문학작가회의'는 30주년 기념식에서 한복희씨에게 감사패와 함께 준회원 자격을 부여한 바 있다. # # #
이승철도 다시 한번 최영미의 발언을 반박했다. "최영미가 언급한 그 시절에 난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매일매일 일과처럼 우린 그 <탑골>에서 술을 마셨다. 허나, 난 <탑골> 주점에서 최영미가 동아일보에 기고한 고발장 내용 같은 사실을 전혀 목격한 적이 없다. 그런데 왜 최영미는 바로 엊그제 일처럼 생생한 사실 묘사를 하면서 그때 한 자리에 있었다는 문인들의 이름을 안 밝히고, 일방적인 주장을 하는 건가"라면서 최영미를 비난했다. 이승철은 이미 지난 2월 7일 자신의 SNS을 통해 최영미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면서 맹비난한 바 있었다. #
- 영국 가디언지 반박 성명 발표
애스틀리씨는 “현재까지 한국 언론에 보도된 내용은 한 사람의 문제 제기에서 비롯되었고,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다른 고발자들의 진술들은 입증되지 않은 것들 뿐이다. 성추문 스캔들로 인한 그의 추락은 그가 한국 사회에서 누린 명사로서의 지위와 대중적 찬사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애스틀리씨는 또 “블러드액스 출판사는 여전히 고은의 문학적 유산을 지지한다.”고 덧붙였다. 블러드액스 출판사는 '만인보'를 비롯하여 고은의 여러 시집을 출간하여 판매 중에 있다."상습적인 성추행을 했다는 혐의에 대해 단호하게(flatly) 부인한다. 나는 한국에서 시간이 흘러 논란이 수그러들고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지만, 관련 사실과 맥락을 접하기 힘든 나의 해외 독자들을 위해 분명히 밝힌다. 나는 나 자신과 부인에게 부끄러울 행동을 한 적이 없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시인으로서 명예가 실추되는 일 없이 계속 집필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는 점이다.”
애스틀리씨는 현재 고은이 종양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해 회복 중이라며, 최근의 수술과 그에게 가해진 비난의 결과 인해 몸이 매우 약해진 상태라고 전했다. # 고은이 입원해 있는 병원이 어느 곳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고은은 불과 며칠 전에도 수원 광교 자택 정원에 있는 모습이 언론에 포착된 바 있다.
- 최영미의 반응
아울러 최영미는 SNS에 통해 "제가 괴물에 대해 매체를 통해 한 말과 글은 사실입니다. 문화예술계 성폭력을 조사하는 공식기구가 출범하면 나가서 상세히 밝히겠습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
고은의 성추행 부인 성명이 나온 다음날 새로운 폭로가 나왔다. 박진성은 3월 5일 자신의 블로그에 ‘고En 시인의 추행에 대해 증언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고은의 성추행을 목격했다고 밝혔다.
2008년 4월 C대학교(충주대)에서 주최한 ‘고은 초청 강연회’ 후 뒷풀이에서 고은은 옆자리에 앉은 20대 여성의 손과 팔, 허벅지를 차례로 만지며 성추행했다. 피해 여성이 당황해했지만 고은의 성추행은 계속 되었다. 이에 박진성은 뒷풀이 모임을 주선한 H대학 K교수에게 항의했지만 가만있으라라는 얘기와 함께 묵살당했다. 성추행이 이어지자 피해여성이 저항했고 고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성 3명 앞에서 지퍼를 열고 자신의 성기를 꺼내 3분 넘게 흔들었다. 고은은 자리에 앉더니 “너희들 이런 용기 있어?”라고 말했다. 고은에게 성추행을 당한 여성은 밖으로 나가 울고 있었고 박진성은 그녀가 다 울때까지 기다렸다가 택시에 태워 보냈다. 박진성이 돌아와 피해여성을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하자 술자리는 급속도로 가라앉았고 고은은 그 여성이 “참석자 중 가장 젋고 예쁜 여성”이었다고 말했다. 그때가 아직 날이 훤한 오후 5시였다. 당시 식사 겸 술자리는 방이 따로 있는 그런 음식점이 아니라 오픈된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옆자리에는 다른 손님들이 있었고 시인 일행의 술자리를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후 K교수가 2차로 노래방을 가자고 얘기했으나 기분이 가라앉은 고은은 싫다고 말했고 고은과 K교수 단 둘이서 함께 어디론가 떠나면서 모임은 끝났다.
박진성은 최근 고은의 공식입장을 보며 참담함을 느껴 내 문학 인생을 다 걸고 목격담을 밝히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울러 용기를 내 준 최영미를 응원한다고 말했다. #저는, 저와 그 당시 여성들만 당한 줄 알았습니다. 아니었습니다. 문단에서 굴러먹은 지 17년째, 고En 시인의 그런 만행들은 여기저기서 들려왔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2018년. “30년 전 격려 차원에서 그랬다”는 고En 시인의 변명을 보고 또 한번 경악했습니다. 30년 전이면 1988년인데, 그 이후에 제가 들은 똑같은 패턴의 희롱과 추행들은 유령이 한 짓입니까? 어제 "부끄러울 일 안 했다, 집필을 계속하겠다", 고En 시인의 입장 표명을 보고 다시 참담함을 느꼈습니다. 정말 궁색한 변명입니다. 그의 '''추행과 희롱을 보고 겪은 시인만 적게 잡아 수백명이 넘습니다'''. 수십년 간 고En 시인이 행해온 범죄입니다. 문단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을 왜 노 시인은 부정하는 것입니까.
문단의 선배 시인님들. 고En 시인의 '성기 노출'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것은 범죄입니다. 제발 모른 척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후대에, 그리고 당대의 여성들에게 당당하십니까. 고En 시인의 진정한 사과를 바랍니다. 묵살하지 마십시오. 그 당시 고En 시인에게 ‘성범죄’를 당했던 여성들에게 진정한 사과를 하실 수 있는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저 역시 방관자로서, 석고대죄하는 심정으로 씁니다. 제발, 사과하시기 바랍니다. 고En 시인님.
- 박진성
이와 관련해 박진성이 지목한 고은의 측근 ‘H대학 문예창작과 K 교수’는 “박진성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일은 전혀 없었다. 100퍼센트 소설이다. 그가 왜 이런 글을 썼는지 너무 황당하고 당혹스럽다. 고의로, 악의적으로 이렇게 쓴 것이라고밖에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익명 제보자가 1990년대 중후반 고은이 저녁을 먹고 2차로 간 노래방에서 고은이 광고 프로덕션 사장인 여성의 “손과 가슴, 그리고 중요 부위”를 심하게 더듬었다거나, 또 다른 광고계 인사의 집에 초대받아 간 자리에서는 고은이 베란다에서 바지를 벗고 성기를 흔들다가 소변을 보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박진성도 이후 자신에게 고은의 성폭력과 관련된 여러 구체적인 제보가 들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 고은재단 성명서 해명과 시사저널의 반박 보도
그러나 3월 7일 '시사저널'은 고은재단 측의 해명이 사실과 다르다고 보도했다. 시사저널은 영국의 출판사 블러드액스 북스에 요청하여 고은 측이 보낸 성명서의 원문을 입수했다. 시사저널의 취재에 따르면 고은의 성명서를 가디언지에 전달한 닐 애스틀리(Neil Astley)씨는 단순한 출판사의 직원이 아니라 출판사 블러드액스 북스의 창업자이자 편집장이다. 블러드액스 북스는 '만인보' 등 고은의 여러 시집을 출간했다.
고은 측이 블러드액스 북스에 보낸 워드파일 이름은 ‘영국에 보내는 고은의 입장문(Ko Uns statement)'이라고 되어 있다. statement는 흔히 성명서로 번역되는 단어다. 고은재단은 "국내 언론을 배제하고 해외에 입장을 밝힌 건 아니다"라고 해명했으나 이메일의 제목은 한글로 '입장문'이라고 적혀 있었다. 또 워드파일 원문에는 행사 불참 통보와 관련된 내용은 전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
- 일부 여성 문인들의 고은 지지와 최영미 반대
2018년 7월 3일 네이버-연합뉴스 일부 여성 문인 '최영미 서울시 성평등상 수상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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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미와 박진성을 비롯한 언론사 대표와 기자들에게 손해배상 청구 소송 제기
고은 측은 성추행 의혹이 허위 보도라는 입장을 일관하고 있다. 최영미는 2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오늘 법원으로부터 손해배상 청구 소장을 받았다"며 "힘든 싸움이 시작되었으니, 밥부터 먹어야겠다"라는 메세지를 남겼다.
위 소송에 대한 재판은 해를 넘긴 2019년 1월부터 시작되었다. 고은은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재판정에 출석하지 않고 있으며 그의 변호사만 출석하고 있다. 그간 최영미는 고은에게 직접 성추행을 당했거나 목격했다는 증언을 대거 수집해서 재판부에 제출했으며 원고(고은)가 직접 출석해서 대질 신문을 받을 것을 요청했으나 원고측은 응하지 않고 있다. 관련 기사
2019년 2월 15일 고은이 최영미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1심에서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최영미에게 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다. 선고 직후 최영미는 성추행 가해자가 피해자를 고소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면 안된다며 진실을 은폐한 사람들이 반성하기 바란다고 소감을 전했다. 그런데 해괴하게도 최영미에게는 승소를 판결하면서 같은 내용을 증언한 박진성에 대해서는 패소 판결을 하며 1천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10.2.4. 재평가 및 여론
저런 사건들이 밝혀진 뒤론, 거의 모든 곳에서 여론과 인식이 매우 좋지 않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유사 자위행위를 하고, 거리낌 없이 자신의 성기를 만져달라고 요구하며, 노래방에서는 자신의 성기를 노출하는 등 너무나도 충격적인 증언의 연속이라 사람 그에 대한 평가는 더 나빠질 수도 없을 정도로 추락했다. 게다가 말년에 노망이 들어 버젓이 저지른 행위들이라기보단, '''이미 60년대부터 축적된 추악한 행태와 엽색행각이 말년에 이르러서까지 자제가 되지 않았음'''을 사람들이 깨달아 가기 시작하면서, 그는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랍다" "이토록 거대한 악이 지금까지 존경받으며 성장해 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평소 고은의 시에 아는 바가 전혀없었음에도, 이렇게까지 떠받들여지는 것이 이상하다 했는데, 그 주위사람들이 지금까지 떠받들여줘서 그런 것 아닌가? 도대체 이런 사람을 왜 그토록 찬양했는가? 어이없다" 말하며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다. 실제로 이번 사태 이전에도 그의 바르지 못한 행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떠돌았고, 자신을 치켜세우기 위해 존경받는 문인들을 근거없이 깎아내리고 말도 안 되는 인신공격을 하는 등 치졸하고 유치한 행태가 잘 알려져 있긴 했으나, 그의 작품을 떠받드는 문학계에게 억눌려 무시되곤 했던 것.
소수의 지인들이나마 '작가의 도덕과 작품은 별개'라며[33] 그를 옹호해 주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고 되려 욕을 바가지로 먹는 상황. 사실 그의 평가가 완전 나락으로 떨어지는데는 이 '''지인들의 옹호'''가 말 그대로 결정타를 날렸다고 할수 있다.
옹호해주겠다고 나선 인간들조차 "그 분이 그럴 분이 아니다"라는 말은 하나도 없고 '그때는 시대가 그랬다라거나' '그런 행위로 시인의 업적이 폄하되어서는 안된다'는 소리 밖에 안나오면서 '''옹호자들조차 그런 일이 없었다고 도저히 말을 못할만큼 명명백백하게 그 짓을 했다'''는걸 역으로 입증해버렸기 때문. [34]
이로 인해 1994년에 이미 이를 세상에 폭로한 이문열이 재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간 고은의 행태를 알고도 이를 묵인한 문단 권력의 추악한 협잡배에 대한 분노도 상승하고 있는 상황. 대중은 "이를 알고도 묵인한 그들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들인가? 이게 과연 예술과 인생을 논하는 문학가들, 시인들이 할 일인가?"하며 혀를 끌끌 차고 있다.
2018년에 출간된 수능특강에 수록된 <머슴 대길이>는 미투운동 이후 EBS 수능특강 관련 강의에서 해당 부분을 '''전부 편집'''했다.
10.2.5. 지자체의 반응
수원시는 2013년 8월 고은에게 수원시 상광교동 광교산 자락 아래 주거·창작 공간으로 마련된 '문화향수의 집'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고은은 수원시로부터 수도요금, 가스요금 등을 면제받는 혜택을 누리고 있는데 그 비용이 연 1,000만원에 상당한다고 보도되었다. 이제 이에 대해 광교산 주민들이 개발제한구역과 상수원 보호법에 묶여 있는 지역에서 고은에게만 특혜가 제공되고 반발하면서 퇴거 집회를 열고 있는 상황이다. 주민들은 "시는 생계를 이어가려는 주민들에게 고발과 벌과금을 부과하면서 고은 시민에게는 혈세를 들여 각종 혜택을 주고 있다."며 형평성 문제를 제기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은의 성추문 파문이 발생하자 이찬열 바른미래당 국회의원(수원시 갑) 등이 퇴거를 요구하는 등 수원시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했으며 2월 18일 고은 재단이 1년 내로 퇴거하겠다고 밝히면서 이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수원시는 올해 고은 등단 60주년을 기념해 추진할 예정이었던 문학 행사를 전면 재검토하기로 했다.
수원시가 고은재단과 함께 건립을 추진 중이던 '고은문학관' 설립에도 제동이 걸렸다. 이미 수원시는 고은문학관 부지로 팔달구 장안동 시유지를 제공하기로 결정했고, 염태영 수원 시장은 고은문학관 건립사업 벤치마킹을 위해 2017년 6월 스위스의 세계적인 건축가인 페터 춤토르가 설계한 독일 쾰른의 콜롬바 박물관과 스위스 발스의 온천단지를 방문하기도 했다. # 고은의 성폭력 파문이 발생한 후 한명숙 수원시의원과 시민들이 고은문학간 설립 계획을 철회할 것을 요청했다. 수원시는 약 3주간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2월 27일 고은의 복수의 '성기 노출' 증언들이 나오자 마침내 28일 긴급 발표를 통해 고은문학관 건립을 전면 철회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수원시는 고은이 쓴 위안부 피해 할머니 추모시도 철거했으며 권선구 권선동 올림픽공원 내 ‘평화의 소녀상’ 아랫단 우측에 설치되어 있던 고은의 추모 시를 2월말 철거했다고 3월 7일 언론을 통해 밝혔다. #
한편 서울시는 2017년 11월 21일,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중 주요사업의 하나로 서울도서관(옛 서울시청사) 3층에 고은이 대표작 <만인보>를 쓴 서재를 재현한 '만인의 방'을 개관했다. 사실 1933년생인 고은은 사실 3·1운동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며 위에 썼듯이 고은은 3·1운동의 의의를 심각하게 폄훼한 인물이다. 그는 만해 한용운이 개인적인 컴플렉스에서 3·1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주장했고, 당시 민족대표 33인을 '''장래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폄하한 바 있었다. 그리고 서울시는 3억원의 예산을 들여 의욕적으로 '만인의 방'을 꾸몄고 여기에 3.1운동 관련 유물과 기념물을 전시했다.[35]
그 뒤 '만인의 방' 개관 두 달여 만에 고은의 성폭력 파문이 발생하면서 이곳을 폐쇄하라는 여론이 거세졌지만 2018년 2월 11일에도 서울시는 철거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 사실 서울시도 내부적으로 상당히 난감해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러다가 고은의 성기 노출 및 자위행위 폭로가 터지자 결국 고은 기념관인 '만인의 방'을 철거했다.##
고은의 고향 군산시에서는 시민들의 당혹감과 충격이 이어졌다. 일부는 군산으로 모셔오자는 반응들이 있었으나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잠잠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고은 아버지의 행적 때문에 군산시에서는 '''그에 대한 반감도 상당했다.'''
군산에서는 배우 김수미, 개그맨 박명수 등과 함께 고은을 군산을 빛내는 유명인으로 지정하고 있다. 군산에 있는 은파호수공원에 고은의 시비가 있으며 군산 벽화마을 벽화에도 고은의 시문이 새겨져 있다.여기부터가 고은의 잊고 싶은 그 날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몇 년 전 군산문화원에서 시인의 생가 표지판을 마을 입구에 만들었다. 그렇지만 '''마을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실제 생가와는 동떨어진 곳에 푯말을 세웠다고 한다.'''
(중략)
군산의 향토학자 한 분은 "6·25 동란 때 용둔리 일대의 '''좌우익 학살 현장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선산 김씨 일족들과 좌익 활동을 했던 고은 일가친척들과의 풀지 못한 한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또 그는 '''"고향을 등진 뒤로 노모와 가족들을 외면해 왔던 고은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반감도 절반의 이유쯤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군산시청에서는 직접적인 입장은 내놓지 않았으나 고은의 개인적인 일이기 때문에 시에서는 직접 이 문제를 개입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태추이를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포항시는 시청사 1층, 2층 계단 벽면에 설치된 〈등대지기〉를 덧칠해서 없애기로 했다. 포항시는 2014년부터 시청사 내 계단 오르기 운동을 전개하면서 계단 벽면을 다양한 벽화, 시화로 장식했는데, 그 중의 하나로 고은이 작사한 것으로 알려진 〈등대지기〉를 설치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성추행 폭로 이후에는 계단을 이용하는 민원인과 공무원들의 항의와 불만이 이어졌다. 결국 포항시는 2018년 3월 9일에 페인트를 덧칠하는 방법으로 철거하기로 했다고 공표했다. #
전술했듯이 〈등대지기〉는 19세기 미국의 찬송가 곡조에 일본 시인 카츠 요시오(勝承夫)가 가사를 붙여 만든 곡이다. 고은은 단순히 일본어 가사를 번역했던 사람 중 하나일 뿐이니 다소 과민한 반응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대중의 고은에 대한 분노가 매우 높다는 방증이라고 볼 수 있겠다.
2018년 3월 19일 경기도와 경기관광공사는 2016년 12월 개장한 파주시 임진각국민관광지에 위치해있는 독개다리 스카이워크(인도교) ‘내일의 기적소리’에서 고은의 이름을 스티커로 가리고 안내판을 철거했다고 밝혔다. '내일의 기적소리'는 6·25 전쟁 때 폭파돼 교각만 남은 임진강 경의선철교 독개다리에 설치한 스카이워크로, 고은이 직접 이름을 지었다. 이곳은 ‘분단 65년, 한반도 통일의 열망을 담아 고은이 명명하고 쓰다’라는 안내판과 ‘내일의 기적소리’ 시와 지형도를 담은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현재 조형물에선 고은의 이름을 스티커로 가렸으며 안내판은 철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