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야마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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戶山流. 일본의 검술 유파. 1925년 제정된 일본 육군의 군도술 체계 軍刀の操法及試斬(군도의 조법 및 시참)을 기반으로, 일본 패전 이후 일본군이 사라진 뒤에 이 검술을 배웠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만들었다. 어원은 '군도의 조법 및 시참'의 연구에 관여한 일본 육군 토야마 육군병 학교.
일본 육군은 러일전쟁 시대까지 프로이센의 화력기동전 교리를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도나 군도술을 정비하는 데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는 이미 일본 군내에 복무하는 장교들이 구 무사 계층으로써 검술에 소양이 있다는 점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일본이 생각하는 미래전쟁은 대포와 총으로 승부가 나지 구태의연한 칼이 나설 여지는 별로 없다고 생각했으며, 병사의 총검술과 기병의 군도술을 간략한 내용으로 채택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러일전쟁과 함께 전환을 맞게 된다.
세간에 알려진 상식과는 반대로 러시아군은 전쟁 내내 백병전을 적극적으로 시도하였으며 특히 뤼순 요새 공방전에서 일본군이 간신히 제압하고 점령한 방어진지를 백병돌격으로 재탈환하는 사례가 매우 빈번하게 일어났다. 또 강력한 방어진지로 보호받는 러시아군의 진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일본군도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이 총검돌격으로 전투할 수밖에 없었다. 기관총과 풍부한 탄약이 완료된 토치카를 상대로 총격전을 벌여도 결국 화력에서 크게 밀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1] 이 경험은 일본군이 백병전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또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채택하고 있던 독일식 화력기동전 교리는 충분한 공업기반에 의한 군수물자의 생산력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그러나 신흥국가인 일본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경제지출로 다가왔으며, 영국 등지에서 막대한 전쟁 차관을 빌려 전쟁 이후에는 당분간 경제침체가 계속되었다. 이때 일본이 주목한 것이 당시 제일의 육군국인 프랑스의 엘랑 비탈#s-2 이론이었다. 강대한 전투의지를 잃지 않을 것을 중심으로 돌격전, 백병전을 중심으로 하는 교리는 분명히 독일식 교리보다 자금 소모가 적었고, 1차대전에서 제1차 마른 회전에서 프랑스군의 공격 정신과 백병전으로 독일의 공세를 돈좌시킨 것을 본 일본군은 일본의 낮은 경제수준과 공업력에 걸맞는, 효과가 입증된 교리라고 생각하고 도입한다.[2]
이 교리에서는 일선에서 장교는 지휘통제 이외에도 병사들에 앞장서 돌격을 선도해야만 했으며, 그 과정에서 호신용 무기이자 상징으로써 군도가 새롭게 주목받았다. 군도 자체는 이미 일본도처럼 쓸 수 있는 양손세이버를 대중적으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기병을 제외하면 따로 군도술을 교육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보병장교들에게 가르칠 군도술 연구 수요가 발생하였다. 더불어 1차대전에서도 참호전이 벌어져, 이 과정에서 짧은 나이프나 도검 등이 활약했고, 독일조차 백병돌격 전문부대인 스톰트루퍼를 편제하였으므로 연구의 당위성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 연구는 백병전 연구를 전문으로 하던 육군 토야마학교(陸軍戶山學敎)에서 이루어져, 1915년 교범으로 정리된다. 교육주해서인 총검술, 양손군도술 교육의 범례(銃剣術、両手軍刀術教育法の範例)도 1916년 출간된다.
그러나 1915교범은 그 전신인 1894년 교범의 내용을 계승-확장한 형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죽도와 목총, 호구를 이용해 시합 형태로 교습하는 내용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토야마학교에서는 이러한 점 탓에 진검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검도식의 작은 베기로는 실전에서 의미가 없다는 의견도 뒤를 이었다. 따라서 진검베기의 방법론이 토야마학교에서 연구되었고, 뒤이어 장교가 전장에서 행군이나 평시 기습당할 것에 대비한 기술이 개발되었다. 이에 따라 검도의 형성에도 관여한 나카야마 하쿠도(中山博道), 쿠니이 젠야(國井善弥), 다카노 사사부로(高野佐三郞), 오오시마 지키타(大島次喜太) 당대의 4명의 검객들이 모여 5본의 거합발도술을 창시한다. 이것을 토야마 육군병학교에서 1925년에 공식으로 채택하여 교습했으며, 전쟁터에서 장교준사관의 호신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발도술과 짚단이나 대나무를 활용한 베기술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군도의 조법 및 시참(軍刀の操法及試斬)이며, 토야마류의 기원이다. 이때의 기술은 다음과 같았다.
이에 따라 군령육제3호에 의해 1934년에 검술교범이 갱신되고, 1935년에는 토야마학교에서 검술교범주해를 발표하며 기존의 거합술을 전면 개편하고 새로운 커리큘럼을 제시한다. 이토 키요시(伊藤清司) 소장, 가와구치 우키치(江口卯吉) 소령, 모치다 모리지(持田盛二) 범사, 사이무라 고로 (斎村五郎)범사와 같은 내외부 인사들이 모여 연구한 신검법은 다음과 같은 변화를 겪었다.
우선 기존 5본 직전의 적은 실제 쓸 일이 적을 거라는 판단하에 폐지. 그대신 일대다수의 검법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5본을 전후의 적으로 대체하고, 6본 좌우의 적을 추가했다. 또 야쿠마루 지겐류(薬丸自顕流)의 카가리우치(懸かり打ち)[3] 를 참고한 돌격형 검법, 7본 돌격을 추가했다. 추가된 기술들은 다음과 같았다.
1940년 소책자의 대량 배포를 통해 비로소 군도의 조법이 전군에 알려지게 된다. 뒤이어 더욱 쉽고 간편한 실전도법을 보급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1942년 1월 토야마육군병학교에서 가르치던 돌격형 도법의 구체적인 훈련방법과 기본해설을 함축한 훈련가이드『단기속성교육군도(일격필살)훈련요령』을 발표했으며, 다시 이것을 한 권의 단행본으로 소장하고 싶다는 육군 내 여론에 부응하여 마침내 소화 19년(1944년) 『단기속성교육군도(일격필살)훈련요령』을 포함한 최종판이 발간된다.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에 수록되어 있는 군도의 조법 및 시참. 1944년판번역본 PDF버젼
1944년판 교범의 내용은 크게 나누어 3가지 챕터로 나누어진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린다. 일본에 진주한 미군정 GHQ는 일본군에 학을 뗐으므로 일본 내부의 모든 무도를 금지시킨다는 명령을 내린다. 또 육군 토야마학교도 캠프 자마(Camp Zama)로 개칭되어 미군의 숙소로 쓰였고, 토야마학교의 교관과 간부들도 제대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이루어지고 1952년에 무도가 부활하게 되면서, 토야마학교 출신 간부들이 모여 검술과장이었던 모리나가 세이(林永淸)를 중심으로 민간유파로 새출발하게 된다. 이때 모리나가 세이는 1954년 즈음 자신의 판단을 바탕으로 몇가지 기술을 추가하고 체계를 대대적으로 수정한다. 이로 인해 전쟁 당시의 육군검술과 차이가 있게 되었다. 개정 내용은 다음과 같다.
토야마류는 검술이 아니라 거합술로 분류된다. 제자리에서 칼을 뽑아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을 주로 하고 있으며 특히 일도양단의 기세로 상대를 일격에 참살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며, 이에 따라 다양한 상황에서의 발도술, 그리고 상하좌우와 대각선까지 8방향의 베기를 연습하는 것, 그리고 물체를 베는 타메시기리(試斬)훈련 등이 가장 중시된다.
고류 거합술과의 가장 큰 차이는 고류 거합술이 상대와의 대면 중 불의의 사태, 즉 기습이나 암살, 습격과 같은 상황에 대비하여 급히 칼을 뽑아 제압하고 생존하는 것을 상정하고 있으므로[4] 잔심(残心)을 중시하고 앉은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을 상정하는 데 비하여, 토야마류는 전쟁터에서 적과 마주쳤을 때 군도를 이용해 적을 살상하는 것을 상정하므로 서서 발도하는 것을 가장 큰 차이로 하고 있다. 또 고류 거합술이 기법의 훈련에 중심을 두고 베기는 단순히 수련의 보조적 용도로 보는 반면, 토야마류는 베기술의 비중을 높게 두고 있는 점도 차이이다.
이러한 시스템을 가진 이유는 우선 토야마류의 근본인 군도의 조법이 만들어진 20세기 초반 당시의 전쟁터에서는 검대 검의 싸움이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보았기 때문에 굳이 검으로 검을 상대하는 법을 배워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오히려 칼을 빠르게 뽑고 강하게 베어 속전속결로 적을 살상하는 것을 추구함으로써 불시의 조우나 급변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하고, 군인들로 하여금 쉽고 빠르게 배워 짧은 시일 내에 실전에서 사용이 가능할 만큼의 소양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현대의 토야마류는 민간 유파가 되면서 군복과 군도가 아닌[5] 전통 복장과 전통 카타나를 사용하며, 예법이나 잔심, 칼을 든 상대를 제압하는 이치 등의 옛 요소를 도입한 경향이 있다. 후술하겠지만 자신들의 정체성 일부를 버려 가면서까지 군국주의적 색채를 지우려고 힘을 썼기 때문에 군대스러운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나, 오리지널 군도술은 군도의 조법(軍刀の操法)이라 불리며 현대 토야마류에도 남아 있다. 군도의 조법 및 시참의 내용이 토야마류의 가장 근본이자 근간을 이룬다고 할 수 있으며, 이 메뉴얼은 현대에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현대 일본 유파들에게 압도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비밀스럽고 보수적이며 배우기 힘든 경우가 많은 고류에 비해[6] 원래부터 쉽고 빠르게 익힐 수 있도록 고안된 군도술에 뿌리를 둔 만큼 배우기가 쉽고 간편하며, 특히 베기시참을 통해 시각적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겨 신규 수련자의 유입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수련자의 입장에서도 베기 실력이 늘어나는 것을 통해 재미와 성취감을 느끼기 쉽기 때문에 이런 점이 전후 민간 유파로 새출발한 토야마류가 급격히 세를 확장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현대무도에 토야마류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 나카무라류가 여기에서 파생되어 발도도(拔刀道)라는 장르를 확립했고, 이것이 또 다양한 단체들을 파생시켰기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일본 현대 유파의 중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검성이라 불리는 유명한 검객들이 나서 체계를 확립했다고는 해도 근본적으로 혼자서 하는 거합술이며, 가장 기본적인 내용들만 빠르게 습득하도록 한 만큼 칼을 든 사람을 제압하거나 다른 무기를 든 병사들과 싸워 이기는 방법은 따로 가르쳐주지 않는다. 토야마류의 원형인 군도술의 요점은 적과 무기를 맞대고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백병전이 벌어지기 이전에 신속하게 칼을 뽑아 적을 참살하는데에 중점을 두었다. 즉, 검술의 기본인 상대와 공방을 벌이는 부분까지 빼버렸으므로 당연히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검술이라 부르기 어려운 수준이다.
그러나 시대가 현대전의 효시인 1차대전 이후이고, 그러한 점에서 빠른 소양 교육과 습득, 당시의 전장을 고려한 실용적 기술들만을 배우기 쉽도록 간단하게 제정한 점에서 볼 때는 '군용무술'로서는 나름대로 합리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검술적인 의의가 크지는 않다는건 분명히 문제이기 때문에 현대의 토야마류에서는 고류에서 모방한 쿠미타치 등의 훈련법을 추가하여 이런 문제를 일부나마 보완하고 있다. 또한 현대 유파인 만큼 고류에 비해 사고의 폭이 넓고 새로운 것을 자주 시도하여 약점을 보완하고 발전해나가고자 하는 모습도 보인다. 즉,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고류와는 대조적으로 개방적이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7] 그 예로 날을 죽인 진검을 이용한 격검을 개최하기도 했다. 참고로 아래의 영상에서 뒤쪽에 보면 서양갑옷을 입고 서 있는 사람이 보이는데, SCA소속 일본인이다. 타 단체의 사람이 격검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토야마류의 개방성을 엿볼 수 있다.
전쟁 전의 군도술을 제대로 계승했는지도 의문인 부분이 있다. 군도의 조법을 계승한 본거합 8본에서도 문제가 있는데, 군도의 조법 3본 좌적과 6본 전후적의 경우, 상대 칼을 자기 칼을 들어 막는 동작이 있다. 그런데 교범에서는 그냥 제자리에서 막는 게 아니라, 좌측으로 빠지면서 막고(우케나가시) 대각선베기로 제압하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토야마류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하고 그냥 제자리에 서서 보폭만 벌리고 칼을 들었다가 대각선베기를 하는 식으로 한다.[8] 가장 중요한 교범의 내용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 거합술적인 측면을 강조하다 보니, 또 하나의 아이덴디티인 돌격검술로서의 모습은 아주 희미해졌다. 수련자들의 수련정도가 전체적으로 낮은 것도 단점이다.[9]
위와 같은 문제는 1934년 육군검술교범을 전후 토야마류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하면서 발생한 것. 1934년 교범은 제1차 상해사변의 전훈을 따라 몸받음과 유술기, 이종격검을 도입한 획기적인 교범이었으나 죽도와 호구를 이용한 격검이라는 한계는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육군 토야마학교에서 진검술 교범을 군도의 조법이라는 이름으로 발간한 것은 격검술은 1934년 교범으로 배우고, 진검술은 군도의 조법으로 배움으로써 상호 보완을 꾀했던 것이었다. 군도조법 교범에서 가끔 "검술을 참고하라" 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바로 1934년 육군검술교범의 항목을 참고하라는 것.
그러나 전후 토야마류의 형성과정에서 군국주의를 연상케 하는 육군검술교범이 배제되면서, 토야마류는 실전격검술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포함하던 돌격검술의 정체성까지 상당 부분을 버리게 되면서 고유의 특징들은 많이 죽어 버리고, 현재와 같은 반쪽짜리 발도술이 된 것이었다.
고류 유파들도 토야마류를 별로 좋게 보지 않는다. 일본인들의 특성상 대놓고 비난하거나 비웃지는 않지만 일본군에서 속성교육용으로 만든 검술을 가지고 전통옷을 입고 고류 코스프레를 한다는 점,[10] 거기에 검술의 깊이나 이치 자체가 아주 얕다는 점도 고류 유파들이 우습게 보는 이유 중 하나. 특히 토야마류가 거합을 표방하는 탓에 고류 거합유파들은 상당히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별것도 아닌 것이 우리랑 비슷하게 보이면서 이미지에 묻어가려고 한다'''는 반응 정도로 압축될 수 있다.
토야마류가 흔히 난징대학살에 쓰인 검법으로도 국내에는 알려져 있지만, 실제론 전군보급이 1940년 되어서야 이루어졌기 때문에 남경학살검법이라고 도매금으로 넘길 수는 없다. 토야마학교에서 후반기교육을 받은 장교준사관들이 기법을 활용했을 가능성은 있다고 하지만 중일전쟁을 맞아 급격히 확장된 일본군의 사정상 남경공략 시점에서 검술교육을 받은 장교준사관의 숫자가 매우 적었으므로 토야마학교 검술이 활용되었을 비율은 매우 적다고 할 수 있다. 본래 돌격 및 호신을 위한 검술이었으므로 결국 쓰는 사람이 문제인 것이다.
악명은 상당부분 나카무라 타이사부로(中村泰三郞)에게서 시작된다. 토야마학교에서 검술교관교육을 받고 부사관으로써 중일전쟁과 2차대전에 참전했던 나카무라 타이사부로는 만주 흑천성 방면으로 배치되면서 근방의 민간인과 포로를 참살하며 베기술 연구를 거듭했다. 전후 그는 자신의 전쟁중의 경험과 토야마류에 합류하면서 배운 것[11] 을 살려 자체적으로 연구를 더해 나카무라류 팔방베기 발도도(中村流八方切り抜刀道)를 창시한다. 베기술과 도검 그 자체에 대한 연구가 매우 깊어 전후 일본 검술계에서는 이름이 높았는데,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는 베기술이나 시참에 대한 인식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이에 베기술을 추구하던 비천 이영식 씨가 우연히 나카무라류의 교본을 입수하여 자체적으로 연구에 연구를 더하고, 마침내 나카무라 타이사부로를 초빙하여 나카무라류를 직접 사사받아 베기술에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데, 마침 세를 한창 늘리던 해동검도에 이영식 씨의 제자들이 들어가게 되고, 해동검도에서 마침내 베기술이 확립되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베기라는 것이 짚단과 대나무를 베는 일본식 시참의 형식을 그대로 따오게 된 것. 해동검도가 이 점에서는 가장 유명하고 베기술과 진검검리를 최고의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우지만, 국내의 대부분의 검술 단체들도 이 영향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한다리 건너 나카무라류를 통하기는 했지만, 그 근원은 토야마류에 있는 만큼 토야마류는 한국 현대 무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셈이다. 그 외에는 무술인 최영철 씨가 스포츠 찬바라 창시자이자 토야마류 수련자인 타나베 테츤도(田邊哲人)에게 토야마류를 배워 잠시 보급한 적이 있었다.
戶山流. 일본의 검술 유파. 1925년 제정된 일본 육군의 군도술 체계 軍刀の操法及試斬(군도의 조법 및 시참)을 기반으로, 일본 패전 이후 일본군이 사라진 뒤에 이 검술을 배웠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만들었다. 어원은 '군도의 조법 및 시참'의 연구에 관여한 일본 육군 토야마 육군병 학교.
1. 토야마류의 기원
일본 육군은 러일전쟁 시대까지 프로이센의 화력기동전 교리를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도나 군도술을 정비하는 데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는 이미 일본 군내에 복무하는 장교들이 구 무사 계층으로써 검술에 소양이 있다는 점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일본이 생각하는 미래전쟁은 대포와 총으로 승부가 나지 구태의연한 칼이 나설 여지는 별로 없다고 생각했으며, 병사의 총검술과 기병의 군도술을 간략한 내용으로 채택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러일전쟁과 함께 전환을 맞게 된다.
세간에 알려진 상식과는 반대로 러시아군은 전쟁 내내 백병전을 적극적으로 시도하였으며 특히 뤼순 요새 공방전에서 일본군이 간신히 제압하고 점령한 방어진지를 백병돌격으로 재탈환하는 사례가 매우 빈번하게 일어났다. 또 강력한 방어진지로 보호받는 러시아군의 진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일본군도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이 총검돌격으로 전투할 수밖에 없었다. 기관총과 풍부한 탄약이 완료된 토치카를 상대로 총격전을 벌여도 결국 화력에서 크게 밀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1] 이 경험은 일본군이 백병전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또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채택하고 있던 독일식 화력기동전 교리는 충분한 공업기반에 의한 군수물자의 생산력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그러나 신흥국가인 일본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경제지출로 다가왔으며, 영국 등지에서 막대한 전쟁 차관을 빌려 전쟁 이후에는 당분간 경제침체가 계속되었다. 이때 일본이 주목한 것이 당시 제일의 육군국인 프랑스의 엘랑 비탈#s-2 이론이었다. 강대한 전투의지를 잃지 않을 것을 중심으로 돌격전, 백병전을 중심으로 하는 교리는 분명히 독일식 교리보다 자금 소모가 적었고, 1차대전에서 제1차 마른 회전에서 프랑스군의 공격 정신과 백병전으로 독일의 공세를 돈좌시킨 것을 본 일본군은 일본의 낮은 경제수준과 공업력에 걸맞는, 효과가 입증된 교리라고 생각하고 도입한다.[2]
이 교리에서는 일선에서 장교는 지휘통제 이외에도 병사들에 앞장서 돌격을 선도해야만 했으며, 그 과정에서 호신용 무기이자 상징으로써 군도가 새롭게 주목받았다. 군도 자체는 이미 일본도처럼 쓸 수 있는 양손세이버를 대중적으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기병을 제외하면 따로 군도술을 교육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보병장교들에게 가르칠 군도술 연구 수요가 발생하였다. 더불어 1차대전에서도 참호전이 벌어져, 이 과정에서 짧은 나이프나 도검 등이 활약했고, 독일조차 백병돌격 전문부대인 스톰트루퍼를 편제하였으므로 연구의 당위성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 연구는 백병전 연구를 전문으로 하던 육군 토야마학교(陸軍戶山學敎)에서 이루어져, 1915년 교범으로 정리된다. 교육주해서인 총검술, 양손군도술 교육의 범례(銃剣術、両手軍刀術教育法の範例)도 1916년 출간된다.
그러나 1915교범은 그 전신인 1894년 교범의 내용을 계승-확장한 형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죽도와 목총, 호구를 이용해 시합 형태로 교습하는 내용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토야마학교에서는 이러한 점 탓에 진검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검도식의 작은 베기로는 실전에서 의미가 없다는 의견도 뒤를 이었다. 따라서 진검베기의 방법론이 토야마학교에서 연구되었고, 뒤이어 장교가 전장에서 행군이나 평시 기습당할 것에 대비한 기술이 개발되었다. 이에 따라 검도의 형성에도 관여한 나카야마 하쿠도(中山博道), 쿠니이 젠야(國井善弥), 다카노 사사부로(高野佐三郞), 오오시마 지키타(大島次喜太) 당대의 4명의 검객들이 모여 5본의 거합발도술을 창시한다. 이것을 토야마 육군병학교에서 1925년에 공식으로 채택하여 교습했으며, 전쟁터에서 장교준사관의 호신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발도술과 짚단이나 대나무를 활용한 베기술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군도의 조법 및 시참(軍刀の操法及試斬)이며, 토야마류의 기원이다. 이때의 기술은 다음과 같았다.
- 1본 전적(前敵) - 앞에 있는 적을 향해 칼을 대각선으로 발도해서 베고, 수직 내려베기로 제압.
- 2본 우적(右敵) - 오른쪽에 있는 적을 향해 발도해서 수평으로 베고, 수직 내려베기로 제압.
- 3본 좌적(左敵) - 왼쪽에 있는 적을 향해 발도해서 찌르고, 칼을 막은 다음 대각선 내려베기로 제압.
- 4본 후적(後敵) - 후방의 적을 향해 몸을 돌리면서 칼을 뽑아 한손으로 대각선 내려치기한 다음 양손으로 수직 내려베기로 제압.
- 5본 직전의 적(直前之敵) - 눈앞의 적을 향해 칼을 위로 뽑아 수직으로 내려베고 찌른다.
이에 따라 군령육제3호에 의해 1934년에 검술교범이 갱신되고, 1935년에는 토야마학교에서 검술교범주해를 발표하며 기존의 거합술을 전면 개편하고 새로운 커리큘럼을 제시한다. 이토 키요시(伊藤清司) 소장, 가와구치 우키치(江口卯吉) 소령, 모치다 모리지(持田盛二) 범사, 사이무라 고로 (斎村五郎)범사와 같은 내외부 인사들이 모여 연구한 신검법은 다음과 같은 변화를 겪었다.
우선 기존 5본 직전의 적은 실제 쓸 일이 적을 거라는 판단하에 폐지. 그대신 일대다수의 검법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5본을 전후의 적으로 대체하고, 6본 좌우의 적을 추가했다. 또 야쿠마루 지겐류(薬丸自顕流)의 카가리우치(懸かり打ち)[3] 를 참고한 돌격형 검법, 7본 돌격을 추가했다. 추가된 기술들은 다음과 같았다.
- 5본 전후적(前後敵) - 앞뒤에서 적이 올 때 먼저 뒤로 돌면서 칼을 뽑아 적의 베기를 흘려내고 대각선 내려베기로 제압한 다음, 신속히 다시 돌아 다른 적도 수직 내려베기로 제압.
- 6본 좌우적(左右敵) - 좌우에서 적이 올 때 약간 옆으로 빠지며 발도하여 오른쪽의 적을 베고, 다시 돌아서 왼쪽의 적을 대각선으로 내려벤 다음 찌른다.
- 7본 돌격(突擊) - 미리 발도한 상태에서 칼을 한손으로 들고 돌진, 적진 돌입 시점에서 양손으로 잡고 정면-우측-좌측의 적을 차례로 벤 다음 마지막 적을 추격하여 정면으로 내려벤다.
1940년 소책자의 대량 배포를 통해 비로소 군도의 조법이 전군에 알려지게 된다. 뒤이어 더욱 쉽고 간편한 실전도법을 보급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1942년 1월 토야마육군병학교에서 가르치던 돌격형 도법의 구체적인 훈련방법과 기본해설을 함축한 훈련가이드『단기속성교육군도(일격필살)훈련요령』을 발표했으며, 다시 이것을 한 권의 단행본으로 소장하고 싶다는 육군 내 여론에 부응하여 마침내 소화 19년(1944년) 『단기속성교육군도(일격필살)훈련요령』을 포함한 최종판이 발간된다.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에 수록되어 있는 군도의 조법 및 시참. 1944년판번역본 PDF버젼
1944년판 교범의 내용은 크게 나누어 3가지 챕터로 나누어진다.
- 단기속성교육군도 일격필살 훈련요령 - 1부. 토야마학교에서 종래부터 교육하던 돌격형 도법을 수록하고 있다. 베기는 정면 수직 내려베기와 좌우 대각선 내려베기로 총 3개, 찌르기는 명치를 찌르는 것 1개이다. 올려베기나 복잡한 찌르기가 없는 것은 단시간(교육범례상으로는 일주일) 만에 훈련을 수료해야 하므로 가장 쉽게 배울 수 있으면서도 강한 위력을 가져야만 하기 때문이었다고 명시하고 있다. 제자리/상의탈의에서 20m돌격/완전군장, 평지에서 험지, 주간에서 야간, 적지에서의 발도 후 전진요령 등 다양한 상황에서의 단계적인 교육을 목표로 하고 있다.
- 군도의 조법 - 2부. 토야마학교에서 1934년에 개정한 거합발도술이다. 특징은 1925년부터 그랬지만 앉아서 하는 고류와는 달리 서서 하는 발도술이라는 것. 행군시 습격에 대비하여 전후좌우의 적을 각각 대처해 제압하는 방법을 수록하였다. 발도와 납도의 요령을 쉽고 자세하게 서술. 총 7본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5본 돌격은 거합발도술이라기보다는 돌격검술이고 1부와 겹치는 부분이 좀 있다. 전후 토야마류 형성의 뼈대이자 중심이 된 파트.
- 시참 - 3부. 물체를 베는 훈련법과 요령을 상세히 해설한 파트. 토야마학교에서의 교육 노하우를 정립하여 짚단, 대나무, 베기대의 제조법이나 베기용 책상 만드는 법, 가마니를 이용한 찌르기 표적 만들기, 훈련도구 제조법과 사고사례, 주의사항까지 다양한 노하우를 수록하고 있다. 베기훈련의 목적은 군도 사용자들이 자신의 군도의 위력을 확인하고 그럼으로써 신뢰와 확신의 마음을 가지도록 하며 실전베기에서의 기본을 확립하는 것이라고 한다. 토야마류와 나카무라류의 베기기술의 원조로써, 현대 일본도 베기문화의 사실상의 시조나 다름없는 파트.
2. 민간유파 토야마류로 부흥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린다. 일본에 진주한 미군정 GHQ는 일본군에 학을 뗐으므로 일본 내부의 모든 무도를 금지시킨다는 명령을 내린다. 또 육군 토야마학교도 캠프 자마(Camp Zama)로 개칭되어 미군의 숙소로 쓰였고, 토야마학교의 교관과 간부들도 제대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이루어지고 1952년에 무도가 부활하게 되면서, 토야마학교 출신 간부들이 모여 검술과장이었던 모리나가 세이(林永淸)를 중심으로 민간유파로 새출발하게 된다. 이때 모리나가 세이는 1954년 즈음 자신의 판단을 바탕으로 몇가지 기술을 추가하고 체계를 대대적으로 수정한다. 이로 인해 전쟁 당시의 육군검술과 차이가 있게 되었다. 개정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기초거합(基礎居合) - 군도조법7본이 어렵다는 요청이 있었던 전쟁당시의 경험을 되살려 기초교육용으로 만든 기법. 칼을 꽃는 법부터 발도법, 호흡법 등의 기본적인 내용을 함께 배울 수 있는 기본적인 도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 6본이다.
1본 정면베기
2본 양손찌르기
3본 오른쪽대각선베기
4본 왼쪽대각선베기
5본 찌르기를 걷어올리고 왼쪽대각선베기
6본 찌르기를 쳐내리고 정면베기
2본 양손찌르기
3본 오른쪽대각선베기
4본 왼쪽대각선베기
5본 찌르기를 걷어올리고 왼쪽대각선베기
6본 찌르기를 쳐내리고 정면베기
- 본거합(本居合) - 군도의 조법 7본에서 기원한다. 다만 폐지되었던 직전의 적을 정면의 적으로 이름을 바꾸어 5본으로 추가, 원래 5본이었던 돌격은 다수의 적/돌파로 이름을 바꾸어 8본으로 넘겼다. 단체에 따라 시참 방법인 스에모노기리를 발도술로 만들어 추가한 곳도 있다. 스스로도 토야마류의 중심이 되는 기법이라고 인정한다. 그외 각 본이 원래 머리베기로 끝났으나 대각선베기로 개정했다.
- 오쿠이아이(奥居合) - 본거합 8본에서 첫타만 하는 것. 본거합에서는 첫타를 날리고 뒤이어 결정타를 날리도록 되어 있는데, 결정타를 제외하고 칼을 뽑아 베는 발도베기에 해당하는 첫타만 한다. 발도술만을 집중적으로 훈련하기 위한 체계.
- 구미다치(組太刀) - 2명이서 공방을 반복하는 약속대련. 모리나가 세이가 1944년에 창시했다는 카타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3. 특징
토야마류는 검술이 아니라 거합술로 분류된다. 제자리에서 칼을 뽑아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을 주로 하고 있으며 특히 일도양단의 기세로 상대를 일격에 참살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며, 이에 따라 다양한 상황에서의 발도술, 그리고 상하좌우와 대각선까지 8방향의 베기를 연습하는 것, 그리고 물체를 베는 타메시기리(試斬)훈련 등이 가장 중시된다.
고류 거합술과의 가장 큰 차이는 고류 거합술이 상대와의 대면 중 불의의 사태, 즉 기습이나 암살, 습격과 같은 상황에 대비하여 급히 칼을 뽑아 제압하고 생존하는 것을 상정하고 있으므로[4] 잔심(残心)을 중시하고 앉은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을 상정하는 데 비하여, 토야마류는 전쟁터에서 적과 마주쳤을 때 군도를 이용해 적을 살상하는 것을 상정하므로 서서 발도하는 것을 가장 큰 차이로 하고 있다. 또 고류 거합술이 기법의 훈련에 중심을 두고 베기는 단순히 수련의 보조적 용도로 보는 반면, 토야마류는 베기술의 비중을 높게 두고 있는 점도 차이이다.
이러한 시스템을 가진 이유는 우선 토야마류의 근본인 군도의 조법이 만들어진 20세기 초반 당시의 전쟁터에서는 검대 검의 싸움이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보았기 때문에 굳이 검으로 검을 상대하는 법을 배워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오히려 칼을 빠르게 뽑고 강하게 베어 속전속결로 적을 살상하는 것을 추구함으로써 불시의 조우나 급변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하고, 군인들로 하여금 쉽고 빠르게 배워 짧은 시일 내에 실전에서 사용이 가능할 만큼의 소양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현대의 토야마류는 민간 유파가 되면서 군복과 군도가 아닌[5] 전통 복장과 전통 카타나를 사용하며, 예법이나 잔심, 칼을 든 상대를 제압하는 이치 등의 옛 요소를 도입한 경향이 있다. 후술하겠지만 자신들의 정체성 일부를 버려 가면서까지 군국주의적 색채를 지우려고 힘을 썼기 때문에 군대스러운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나, 오리지널 군도술은 군도의 조법(軍刀の操法)이라 불리며 현대 토야마류에도 남아 있다. 군도의 조법 및 시참의 내용이 토야마류의 가장 근본이자 근간을 이룬다고 할 수 있으며, 이 메뉴얼은 현대에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현대 일본 유파들에게 압도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비밀스럽고 보수적이며 배우기 힘든 경우가 많은 고류에 비해[6] 원래부터 쉽고 빠르게 익힐 수 있도록 고안된 군도술에 뿌리를 둔 만큼 배우기가 쉽고 간편하며, 특히 베기시참을 통해 시각적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겨 신규 수련자의 유입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수련자의 입장에서도 베기 실력이 늘어나는 것을 통해 재미와 성취감을 느끼기 쉽기 때문에 이런 점이 전후 민간 유파로 새출발한 토야마류가 급격히 세를 확장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현대무도에 토야마류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 나카무라류가 여기에서 파생되어 발도도(拔刀道)라는 장르를 확립했고, 이것이 또 다양한 단체들을 파생시켰기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일본 현대 유파의 중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 약점
비록 검성이라 불리는 유명한 검객들이 나서 체계를 확립했다고는 해도 근본적으로 혼자서 하는 거합술이며, 가장 기본적인 내용들만 빠르게 습득하도록 한 만큼 칼을 든 사람을 제압하거나 다른 무기를 든 병사들과 싸워 이기는 방법은 따로 가르쳐주지 않는다. 토야마류의 원형인 군도술의 요점은 적과 무기를 맞대고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백병전이 벌어지기 이전에 신속하게 칼을 뽑아 적을 참살하는데에 중점을 두었다. 즉, 검술의 기본인 상대와 공방을 벌이는 부분까지 빼버렸으므로 당연히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검술이라 부르기 어려운 수준이다.
그러나 시대가 현대전의 효시인 1차대전 이후이고, 그러한 점에서 빠른 소양 교육과 습득, 당시의 전장을 고려한 실용적 기술들만을 배우기 쉽도록 간단하게 제정한 점에서 볼 때는 '군용무술'로서는 나름대로 합리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검술적인 의의가 크지는 않다는건 분명히 문제이기 때문에 현대의 토야마류에서는 고류에서 모방한 쿠미타치 등의 훈련법을 추가하여 이런 문제를 일부나마 보완하고 있다. 또한 현대 유파인 만큼 고류에 비해 사고의 폭이 넓고 새로운 것을 자주 시도하여 약점을 보완하고 발전해나가고자 하는 모습도 보인다. 즉,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고류와는 대조적으로 개방적이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7] 그 예로 날을 죽인 진검을 이용한 격검을 개최하기도 했다. 참고로 아래의 영상에서 뒤쪽에 보면 서양갑옷을 입고 서 있는 사람이 보이는데, SCA소속 일본인이다. 타 단체의 사람이 격검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토야마류의 개방성을 엿볼 수 있다.
전쟁 전의 군도술을 제대로 계승했는지도 의문인 부분이 있다. 군도의 조법을 계승한 본거합 8본에서도 문제가 있는데, 군도의 조법 3본 좌적과 6본 전후적의 경우, 상대 칼을 자기 칼을 들어 막는 동작이 있다. 그런데 교범에서는 그냥 제자리에서 막는 게 아니라, 좌측으로 빠지면서 막고(우케나가시) 대각선베기로 제압하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토야마류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하고 그냥 제자리에 서서 보폭만 벌리고 칼을 들었다가 대각선베기를 하는 식으로 한다.[8] 가장 중요한 교범의 내용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 거합술적인 측면을 강조하다 보니, 또 하나의 아이덴디티인 돌격검술로서의 모습은 아주 희미해졌다. 수련자들의 수련정도가 전체적으로 낮은 것도 단점이다.[9]
위와 같은 문제는 1934년 육군검술교범을 전후 토야마류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하면서 발생한 것. 1934년 교범은 제1차 상해사변의 전훈을 따라 몸받음과 유술기, 이종격검을 도입한 획기적인 교범이었으나 죽도와 호구를 이용한 격검이라는 한계는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육군 토야마학교에서 진검술 교범을 군도의 조법이라는 이름으로 발간한 것은 격검술은 1934년 교범으로 배우고, 진검술은 군도의 조법으로 배움으로써 상호 보완을 꾀했던 것이었다. 군도조법 교범에서 가끔 "검술을 참고하라" 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바로 1934년 육군검술교범의 항목을 참고하라는 것.
그러나 전후 토야마류의 형성과정에서 군국주의를 연상케 하는 육군검술교범이 배제되면서, 토야마류는 실전격검술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포함하던 돌격검술의 정체성까지 상당 부분을 버리게 되면서 고유의 특징들은 많이 죽어 버리고, 현재와 같은 반쪽짜리 발도술이 된 것이었다.
고류 유파들도 토야마류를 별로 좋게 보지 않는다. 일본인들의 특성상 대놓고 비난하거나 비웃지는 않지만 일본군에서 속성교육용으로 만든 검술을 가지고 전통옷을 입고 고류 코스프레를 한다는 점,[10] 거기에 검술의 깊이나 이치 자체가 아주 얕다는 점도 고류 유파들이 우습게 보는 이유 중 하나. 특히 토야마류가 거합을 표방하는 탓에 고류 거합유파들은 상당히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별것도 아닌 것이 우리랑 비슷하게 보이면서 이미지에 묻어가려고 한다'''는 반응 정도로 압축될 수 있다.
5. 한국과의 관계
토야마류가 흔히 난징대학살에 쓰인 검법으로도 국내에는 알려져 있지만, 실제론 전군보급이 1940년 되어서야 이루어졌기 때문에 남경학살검법이라고 도매금으로 넘길 수는 없다. 토야마학교에서 후반기교육을 받은 장교준사관들이 기법을 활용했을 가능성은 있다고 하지만 중일전쟁을 맞아 급격히 확장된 일본군의 사정상 남경공략 시점에서 검술교육을 받은 장교준사관의 숫자가 매우 적었으므로 토야마학교 검술이 활용되었을 비율은 매우 적다고 할 수 있다. 본래 돌격 및 호신을 위한 검술이었으므로 결국 쓰는 사람이 문제인 것이다.
악명은 상당부분 나카무라 타이사부로(中村泰三郞)에게서 시작된다. 토야마학교에서 검술교관교육을 받고 부사관으로써 중일전쟁과 2차대전에 참전했던 나카무라 타이사부로는 만주 흑천성 방면으로 배치되면서 근방의 민간인과 포로를 참살하며 베기술 연구를 거듭했다. 전후 그는 자신의 전쟁중의 경험과 토야마류에 합류하면서 배운 것[11] 을 살려 자체적으로 연구를 더해 나카무라류 팔방베기 발도도(中村流八方切り抜刀道)를 창시한다. 베기술과 도검 그 자체에 대한 연구가 매우 깊어 전후 일본 검술계에서는 이름이 높았는데,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는 베기술이나 시참에 대한 인식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이에 베기술을 추구하던 비천 이영식 씨가 우연히 나카무라류의 교본을 입수하여 자체적으로 연구에 연구를 더하고, 마침내 나카무라 타이사부로를 초빙하여 나카무라류를 직접 사사받아 베기술에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데, 마침 세를 한창 늘리던 해동검도에 이영식 씨의 제자들이 들어가게 되고, 해동검도에서 마침내 베기술이 확립되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베기라는 것이 짚단과 대나무를 베는 일본식 시참의 형식을 그대로 따오게 된 것. 해동검도가 이 점에서는 가장 유명하고 베기술과 진검검리를 최고의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우지만, 국내의 대부분의 검술 단체들도 이 영향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한다리 건너 나카무라류를 통하기는 했지만, 그 근원은 토야마류에 있는 만큼 토야마류는 한국 현대 무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셈이다. 그 외에는 무술인 최영철 씨가 스포츠 찬바라 창시자이자 토야마류 수련자인 타나베 테츤도(田邊哲人)에게 토야마류를 배워 잠시 보급한 적이 있었다.
6. 관련 항목
[1] 당시 러일전쟁을 참관하던 유럽의 무관들은 이런 모습을 비웃었다. 프랑스의 최첨단 75mm야전속사포의 화력을 적재적소에 투입함으로써 토치카나 참호를 쉽게 제압할 수 있으며 무모한 백병돌격 자체를 덜떨어진 행동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또 일본군의 공업생산력의 부족으로 준비포격을 위한 포탄조차 만성적인 부족에 시달려 충분한 준비포격이 어려웠기 때문에, 압도적 생산능력을 가진 유럽에서는 애초에 포탄이 부족할 일 자체가 없으므로 충분히 사전 제압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이 우쭐함은 피값을 치루게 된다.[2] 다만 이 문서를 일부러 찾아 볼 위키러들은 모두 알다시피, 엘랑 비탈교리를 바탕으로 한 프랑스는 1차대전에서 엄청난 피를 봤다. 프랑스는 2차대전보다 1차대전에서 희생된 병사가 더 많다.; [3] 공터에 막대기를 여러 개 세우고 괴성을 지르면서 돌진하여 모두 쳐서 쓰러트리는 훈련법. 중간중간에 장병기를 든 상대가 가끔씩 교전을 한다.[4] 실제 거합술은 모두 이런 식으로 호신과 자기 방어, 혹은 역으로 상대를 기습해 암살하기 위한 기술이다. 애초에 기습이 아닌 전투 상황이라면 잘 빼들고 있는 칼을 굳이 다시 칼집에 집어넣어서 발도술로 적을 공격할 이유가 전혀 없다. 발도술이 필살기처럼 묘사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창작물에서의 허구적 묘사일 뿐이다.[5] 다만 일부 수련자들은 자의적으로 전통 일본도의 칼날에 신군도의 외장을 구해다가 끼우거나, 모조 신군도를 사용하기도 한다. 일본의 총도법 상 일본도로 인정되는 것은 일본 내에서 장인이 전통적인 기법으로 만든 도검에 한정되는데, 일본도는 어디까지나 칼날 부분만을 본체로 간주하고 그 외의 외장은 모두 일종의 장식품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칼날만 전통 일본도라면 외장을 어떻게 꾸미든 본인의 자유가 된다.[6] 오랜 역사를 가진 만큼 체계의 수준이 깊고 높아 다 배우려면 10여 년도 넘게 걸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며, 진검 수련보다는 목검으로 하는 형 수련이 대부분이라 젋은 사람들은 고리타분해하는 경우도 많다. 그 외에도 고류 특유의 보수적인 부분이라던지, 기술 유출에 민감해서 폐쇄적인 성향을 띄는 부분들도 신규 수련자가 입문하려는데 있어서 상당히 큰 장벽이다. 관류나 야규신간류의 시마즈 켄지 계열 등이 이런 점을 좀 완화해서 장벽을 낮춘 덕분에 수련자가 다른 고류에 비해 비교적 많은 편이다.[7] 사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는데, 현대의 고류는 실용적인 전투 기술이 아니라 전통 문화 보존으로써의 성격이 강해져서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해서 다음 세대로 넘겨 줄 것을 추구한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보수적인 성향을 띄게 될 수밖에 없고, 자신들의 기술이 외부로 유출되어 왜곡되거나 반대로 타 유파의 기술이 유입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폐쇄성을 띄게 되는 것이다. 반면 토야마류는 근현대의 군도술을 기반으로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유파이기 때문에 그 깊이가 얕을 수 밖에 없고, 전통이라 할 만한 부분 역시 거의 없기 때문에 굳이 옛 모습을 유지하는 것을 고집할 필요성 역시 별로 없다. 무엇보다 토야마류 스스로가 이러한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와의 적극적인 교류를 통해 자신들의 약점을 보완해 가면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 나가려는 경향을 띄게 되는 것이다.[8] 상대의 공격 라인, 중심선으로도 표현하는 부분에서 벗어나야 상대의 강한 베기를 안정적으로 빗겨내며 반격이 가능하다. 그러나 현대 토야마류식으로 제자리에서 상대 중심선을 벗어나지 않으면, 강한 베기에 칼이 밀려버린다! 어떻게든 힘으로 막아낸다 하더라도 이 상태에서 어거지로 대각선베기를 시도하려고 하면 머리나 어깨에 칼이 꽃힐 수도 있다. 모든 고전 검술에서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개념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 애초에 현대 토야마류를 정립한 모리나가 세이 자신이 전문 무술인이 아니라 군인으로서 검술과장으로 재직하며 군도조법을 배워 가르치던 사람인 만큼 중요한 개념을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은 높다. 아니면 창시 당시에 영향을 주었던 뛰어난 검객들의 피드백이 끊긴 상황에서 20여 년간 토야마 학교에서 군도술을 가르치다가 점점 내용이 변질된 상태로 훈련되고 있었고, 모리나가 세이는 본인도 모르고 이것을 충실히 흡수했을 뿐일 가능성도 있다.[9] 발도시 빠르게 하지 못하고 사고 날 것을 지나치게 의식하거나, 자세가 어설프고 속도가 느린 것 등[10] 다만 토야마류가 스스로를 고류라고 칭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토야마류는 자신들이 구 일본군의 군도술에 뿌리를 둔 유파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11] 나카무라 타이사부로가 전쟁중 토야마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것을 근거로 군도조법을 민간인 학살에 사용했다는 인식이 있으나 실제로 나카무라가 얻은 것은 검술/총검술 즉 목총과 죽도를 이용한 격검교관 인증서였다. 토야마학교의 진검술 자체는 전후 나카무라가 토야마류 재건 이후 합류하면서 배우게 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