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욱(교수)

 

1. 개요
2. 상세

[image]

1. 개요


대한민국역사학자.
1946년 8월 17일 경기도 파주시 출신으로, 서강대학교 교수다. 2009~2012년에는 서강대학교 총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2. 상세


한국 사학계의 대학자인 이기백의 제자였으며 그의 뒤를 이어 서강대 학파의 거두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현재는 환갑을 넘겨 정년퇴임을 하여 서강대 명예교수로 남아있다. 이기동, 노태돈, 노중국 등과 함께 현재 한국 고대사학계의 거두로 손꼽히는 인물로, 특히 신라와 관련해 많은 저술을 발표하였다. 한편 서울대학교의 노태돈과는 일찍부터 학문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던 사이로써 학계의 대표적인 라이벌로 손꼽힌다.
이종욱은 삼국사기 초기기사를 긍정하여 삼국이 이미 초기부터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루고 있었다고 주장했던 반면에 노태돈은 이와는 정 반대로 삼국지 동이전과의 절충론을 통해 삼국은 여러 부체제의 연합국가적 성격으로 파악하는 견해를 발표하였기 때문이었다. 후에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얼마나 긍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다른 학자들과 충돌이 일어났는데, 초기기록에 대해 수정론적 자세를 취하는 학계의 통설을 포스트 식민사학이라고 비판하는 강수를 두었고 때문에 최근은 학계에서의 입지가 많이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1]
이와 관련하여 이종욱의 박사학위 논문[2]은 삼국사기 초기기록 긍정론의 입장에서 쓰여진 책이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수정론자인 이기백에 대해 수제자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선생님의 연구성과들은 대부분 잘못된 것 같습니다" 라는 내용의 논문을 들고온 것. 그러나 이종욱의 논문을 읽어 본 이기백은 논리적으로 자신의 견해보다 타당한 것 같다며 흔쾌히 박사학위 인준을 시켜주었다.[3]
마찬가지로 이기백의 뒤를 이어 서강대 한국고대사 교수가 된 이종욱 역시 자신의 제자 중 하나가 자신의 골품제 연구를 부정하는 논문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4] 하였는데 흔쾌히 박사학위를 인준해주었다. 이러한 학풍은 서강대 사학과의 전통이 되어, 서강대 사학과의 교수들은 학부와 대학원 수업에서 자신의 연구성과를 학생들이 비판하는 것을 거리끼기는 커녕 오히려 장려하는 분위기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
참고로 이 양반, 발해를 한국사로 보지 않는 대표적인 국내의 사학자이다.

2.1. 화랑세기 관련


한편으로는 박창화가 필사한 화랑세기 진서론을 밀고 있는 대표적인 역사학자인데,[5] 이 문제에 대해서도 화랑세기 위서론을 앞장서 주장하고 있는 노태돈과 대립하고 있다. 다만 학계에서는 대체로 화랑세기를 위서로 보고 있으며, 사료적 가치는 찾아볼 수 없다고 보는 관점이 자리잡고 있는데, 아무래도 화랑세기 필사본을 남긴 박창화 본인부터가 한문 소설가인데다가 필사가 이루어진 경위도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박창화가 죽을 때까지 필사본의 존재를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며, 해방 이후로 남긴 원고에서도 사료의 부족함을 한탄하면서 필사본의 존재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점 또한 필사본의 진위가 의심되는 결정적인 사유 중 하나이다. 사실 진서로 보기에 문제가 많아서 이 또한 많은 문제가 되고 있다.


[1] 아무래도 삼국사기 초기기사가 보다 나중의 기록과는 달리 교차검증이 잘 되지 않고, 고고학적 연구성과와도 쉽게 연결되지 않는데다가 초기 국왕의 수명과 재위기간 및 계보에 조작이 이루어진 점이 확실하기 때문에 어느정도 수정해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견이 학계에서 유력하다.[2] 이종욱, <新羅國家形成史 硏究>, 서강대 박사학위논문, 1981[3] 반면 이종욱 교수의 학술적 라이벌인 서울대학교 노태돈 교수는 서울대학교 박사 학위를 받지 못했었다. 석사 학위자 상태로 서울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고 수십년이 지난 이후에 서울대로부터 연구성과를 인정받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물론 역량이 부족해서 못받은게 아니라 원래 인문학 계열은 박사 학위를 받는게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었다. 한 분야의 학계를 주도하는 인물이고 젊은 시절부터 두각을 보인 인물임에도 함부로 박사 학위를 주지 않았을만큼 엄격했던 것. 과거 인문학 계열 원로 교수님들 중에서는 의외로 석사 학위자로써 명문대 교수로 임용되신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 지금도 이공계에 비해서는 대체로 박사학위 받는데 걸리는 기간이 길고 박사학위를 못 딴 채 박사과정 수료로 마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게 인문학이다. 한 가지 아이러닉 한 점은 차후 그 노태돈 교수의 박사 논문을 심사하고 인준한 인물이 바로 이종욱 교수에게 박사학위를 준 이기백 교수라는 사실.[4] 전미희, <新羅 骨品制의 成立과 運營>, 서강대 박사학위논문, 1998[5] 이때문에 그의 제자이자 유명 블로거인 초록불유사역사학에 대해서는 비판하지만 화랑세기는 긍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현재는 회의적인 시각으로 돌아선듯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