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중국
盧重國
1949 ~
대한민국의 역사학자. 호는 미관(未盥)이다.
1949년에 강원도 울진군 울진면 화성리(現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화성리)#에서 태어났다. 계명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79년부터 현재까지 계명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인문대학 학장을 연임하였다. 2014년 8월 계명대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했다.
본래 집안 형편이 어려워 1965년에 죽변중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고등학교로 진학하지 못한 채 농사일을 거들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주변 사람으로부터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자 독학으로 공부하여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재수를 하여 계명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하였다. 이때에 전액 장학생으로 들어가 돈을 들이지 않고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대학교 3학년 때에 지도교수의 권유로 연구자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고, 서울대 대학원으로 들어가 당시 한국고대사의 권위자로 이름이 높았던 김철준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이때 공군장교로 군대에 가서 4년 5개월 동안 복무하였다. 전역 후에는 한국사학계에서 최초로 백제사를 주제로 논문을 써서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백제사 전공자 제1호의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회고에 따르면 당시에는 백제사에 대한 선행연구가 없어 자료가 거의 없다시피 한 탓에 무척 전전긍긍하였으나, 때마침 무령왕릉이 발굴되고 백제사 연구에 활력이 돋게 되자 다시 연구에 정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여러 역사학자들과 더불어 한국고대사학회를 창립하여 1~4대 회장을 맡았으며, 대구사학회 회장, 백제학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학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또한 제1기 한일역사공동연구회위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는 노태돈 서울대 교수, 주보돈 경북대 교수와 함께 한국 고대사학계의 거두로 손꼽히는 학자로[3] , 일찍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과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을 절충해서 삼국(三國)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는 수정론을 제기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백제사 연구 분야에 있어 매우 큰 영향을 끼쳤으며, 양기석 충북대 교수와는 국내 백제사 연구계의 양대산맥으로 손꼽힌다. 1986년에 박사 논문으로 발표한 <백제정치사연구>는 오늘날의 백제사 연구에 있어 기틀을 잡았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4] 한편 백제사 연구에서 남긴 족적이 워낙 커서 그렇지 실상은 신라와 가야사 연구에도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둔 바 있다.
현재 발표되고 있는 한국 고대사에 관련된 연구 논문이나 서적치고 노중국의 저서와 논문을 인용하거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그 영향력은 막대하다. 특히 초기 고대국가의 형성 과정 부분이나 백제사의 전개 부분에서의 영향은 피해갈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하다. 대중적으로도 이도학과 함께 백제사 연구의 권위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5]
최근까지도 활발하게 할동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주관한 총 53권의 신편 <한국사> 편찬 작업에서도 고대사 파트의 집필 위원으로 참여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에서 편찬한 5권의 역주 삼국사기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2013년 9월, 동아일보와 한국연구재단이 실시한 조사에서 '한국 역사학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연구인 20인' 중에서 '''1위를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6] 그만큼 그의 논문이 인용되는 횟수가 많다. 다만 노중국의 학설이 모든 곳에서 인정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논문에 인용이 많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인정받는 학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비판을 받는 학설이기도 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대학원 과정을 밟는 노중국 교수의 애제자들이 좀 논다 싶으면 공부하라고 압박을 준다는 이야기가 있다. 계명대학교 사학과 학부와 일부 제자들에게서 애칭으로 노'차이나'(China) 교수님으로 불린다고도 한다. 계명대학교 사학과의 자랑거리.
답사 갈 때마다 그 어느 학부생들보다 빠르시면서[7] 퇴임 직전까지 다들 지친 기색 하나 없으시다 못해 강의까지 퍼펙트하게 해내시는 건 볼 때마다 무서웠을 정도.
1949 ~
1. 소개
대한민국의 역사학자. 호는 미관(未盥)이다.
2. 생애
1949년에 강원도 울진군 울진면 화성리(現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화성리)#에서 태어났다. 계명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79년부터 현재까지 계명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인문대학 학장을 연임하였다. 2014년 8월 계명대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했다.
본래 집안 형편이 어려워 1965년에 죽변중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고등학교로 진학하지 못한 채 농사일을 거들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주변 사람으로부터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자 독학으로 공부하여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재수를 하여 계명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하였다. 이때에 전액 장학생으로 들어가 돈을 들이지 않고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대학교 3학년 때에 지도교수의 권유로 연구자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고, 서울대 대학원으로 들어가 당시 한국고대사의 권위자로 이름이 높았던 김철준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이때 공군장교로 군대에 가서 4년 5개월 동안 복무하였다. 전역 후에는 한국사학계에서 최초로 백제사를 주제로 논문을 써서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백제사 전공자 제1호의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회고에 따르면 당시에는 백제사에 대한 선행연구가 없어 자료가 거의 없다시피 한 탓에 무척 전전긍긍하였으나, 때마침 무령왕릉이 발굴되고 백제사 연구에 활력이 돋게 되자 다시 연구에 정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3. 경력
한편 여러 역사학자들과 더불어 한국고대사학회를 창립하여 1~4대 회장을 맡았으며, 대구사학회 회장, 백제학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학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또한 제1기 한일역사공동연구회위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는 노태돈 서울대 교수, 주보돈 경북대 교수와 함께 한국 고대사학계의 거두로 손꼽히는 학자로[3] , 일찍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과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을 절충해서 삼국(三國)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는 수정론을 제기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백제사 연구 분야에 있어 매우 큰 영향을 끼쳤으며, 양기석 충북대 교수와는 국내 백제사 연구계의 양대산맥으로 손꼽힌다. 1986년에 박사 논문으로 발표한 <백제정치사연구>는 오늘날의 백제사 연구에 있어 기틀을 잡았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4] 한편 백제사 연구에서 남긴 족적이 워낙 커서 그렇지 실상은 신라와 가야사 연구에도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둔 바 있다.
현재 발표되고 있는 한국 고대사에 관련된 연구 논문이나 서적치고 노중국의 저서와 논문을 인용하거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그 영향력은 막대하다. 특히 초기 고대국가의 형성 과정 부분이나 백제사의 전개 부분에서의 영향은 피해갈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하다. 대중적으로도 이도학과 함께 백제사 연구의 권위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5]
최근까지도 활발하게 할동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주관한 총 53권의 신편 <한국사> 편찬 작업에서도 고대사 파트의 집필 위원으로 참여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에서 편찬한 5권의 역주 삼국사기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2013년 9월, 동아일보와 한국연구재단이 실시한 조사에서 '한국 역사학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연구인 20인' 중에서 '''1위를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6] 그만큼 그의 논문이 인용되는 횟수가 많다. 다만 노중국의 학설이 모든 곳에서 인정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논문에 인용이 많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인정받는 학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비판을 받는 학설이기도 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4. 여담
대학원 과정을 밟는 노중국 교수의 애제자들이 좀 논다 싶으면 공부하라고 압박을 준다는 이야기가 있다. 계명대학교 사학과 학부와 일부 제자들에게서 애칭으로 노'차이나'(China) 교수님으로 불린다고도 한다. 계명대학교 사학과의 자랑거리.
답사 갈 때마다 그 어느 학부생들보다 빠르시면서[7] 퇴임 직전까지 다들 지친 기색 하나 없으시다 못해 강의까지 퍼펙트하게 해내시는 건 볼 때마다 무서웠을 정도.
[1] 1963년부터 울진군은 강원도가 아닌 경상북도 산하이다.[2] 계명대학교 문과대학은 이후 인문과학대학, 인문대학을 거쳐 옛 국제학대학과 통합되어 2015년부터 인문국제학대학으로 명칭이 바뀌었음.[3] 세 사람 모두 영남 출신인데, 그중에서도 대구권 출신이다. 노태돈 교수는 대구와 인접한 경상남도 창녕군 출신이며,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를 역임한 바 있으며, 노중국 교수는 경상북도 울진군 출신으로 계명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모과에서 교수를 지냈고, 주보돈 교수는 경상남도 진해군(현 창원시 진해구)출신이지만 경북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모과에서 교수를 지냈다.[4] 몇 년 동안 절판되어 도서관이나 헌책방에서나 간간히 볼 수 있을 정도로 희귀 했지만, 18년에 개정판이 나왔다.[5] 다만 이도학은 최근들어 무리한 학설을 밀어붙이는 바람에 학계에서의 위상은 예전만 못해졌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한 가지를 들면 흑치상지의 고향으로 알려진 흑치(黑齒)의 위치에 대해서 이도학은 중국 기록에 나오는 흑치국(黑齒, 지금의 필리핀)으로 보고 백제가 동남아시아까지 진출해 담로를 설치했었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지만, 노중국은 黑齒란 '검은니'로 읽어서 '검은내(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며 지금의 충남 예산 덕산면(옛 이름이 금물현)을 흑치상지가 봉해졌다는 흑치로 비정했다. 이도학은 추후 저서 <백제 사비성 연구>에서 이러한 노중국의 주장을 두고 "그런 식으로 비정할 거면 대한민국 땅에서 흑치 아닌 곳이 어디 있냐"고 비판한다.[6] 아시아뉴스통신[7] 퇴임하시기 전 마지막 강의 답사 코스 중 산 중턱까지 올라가는 곳이 있었는데 학부생들은 다들 힘겨워했는데 교수님은 정말 잘 올라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