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미 시키부

 

和泉式部
978~사망년대 불명
일본 헤이안 시대의 가인(歌人).
이치조 덴노황후 후지와라노 쇼시궁녀 중의 한 사람.
1. 개요
2. 기타


1. 개요


에치젠노카미(越前守) 오에노 마사무네(大江雅致)와 엣츄노카미(越中守) 타이라노 야스히라(平保衡)의 딸 사이에서 난 자식으로, 아명은 오모토마루(御許丸). 즉 외가가 헤이시다.
남편 타치바나노 미치사다(橘道貞)가 이즈미노카미(和泉守) 직에 임명되어 그과 함께 이즈미노쿠니로 건너가 살게 되었는데, 이때 남편의 부임지와 관직명을 합쳐서 부른 이즈미 시키부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이후 미치사다와 헤어져 교토로 돌아가 별거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레이제이 천황의 제3황자 타메타카 친왕(爲尊親王)와의 스캔들을 터뜨려 황/귀족 사회에 큰 소란을 일으키게 된다. 결국 '''부모와 의절하게 된 것'''은 물론, 당연히 서로 신분이 달랐기에 이어지지도 못했다.
친왕이 죽은 뒤에는 그 친동생 아츠미치 친왕(敦道親王)의 구애를 받았는데, 친왕이 시키부를 '''자신의 저택으로 불러들이고'''[1] 그 정실인 후지와라노 나리토키(藤原濟時)의 딸이 '''친정으로 가출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이자 막장 드라마. 이렇게 되어 아츠미치 친왕과의 사이에서 아들 에이가쿠(永覺)를 얻었는데, 아츠미치 친왕도 간코 3년, 즉 1007년에 일찍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간코 말년(1008년 - 1011년경)에 후지와라노 쇼시의 뇨보(女房)로서 입궁하게 된다.
죠와(長和) 2년(1013년)에 쇼시의 아버지인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의 게시(家司)로서 무용(武勇)으로 이름높던 후지와라노 야스아키(藤原保昌)와 재혼하여 그의 부임지인 단고(丹後)로 내려갔다. 만쥬(万寿) 2년(1025년)에 전남편 미치사다 사이에서 태어난 딸 고시키부노 나이시가 사망할 때까지도 살아있었던 것 같지만, 그녀의 만년의 모습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2. 기타


당시 뛰어난 문인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개인 문집으로 《이즈미 시키부 정집(和泉式部正集)》, 《이즈미 시키부 속집(和泉式部続集)》, 그리고 《신한본 이즈미 시키부집(宸翰本和泉式部集)》이 전해졌다. 《슈이와카슈(拾遺和歌集)》 이하 칙선(勅撰) 와카집에 246수의 와카가 채록되었으며, 그녀 사후의 첫 칙선 와카집이었던 《고슈이와카슈(後拾遺和歌集)》에 가장 많은 노래와 시가 수록되었다.
시와 노래로도 유명했지만 타메타카 친왕에 이어 그 동생인 아츠미치 친왕과의 관계로 인해 당대 귀족 사회에서는 남성편력 심한 플레이걸로도 이름을 날렸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는 이즈미 시키부를 '''"나대는 계집(浮かれ女)"'''이라고 평가했고(...), 겐지모노가타리로도 유명한 직장동료 무라사키 시키부는 '''"연애편지(恋文)와 와카를 빼면 본받을 게 없다"'''며 일기에 그녀를 까기도 했다(...) 이건 무라사키 시키부의 성격 상 라이벌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 경쟁심리 때문이기도 했으며, 무라사키 시키부의 성격부터 얌전하고 정숙한 면이 강해 허구한 날 스캔들을 벌이던 이즈미 시키부가 그리 좋게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2] 그와 별도로 정열적인 연가가 뛰어나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었다. 같은 시대의 대가인(大歌人) 후지와라노 긴토(藤原公任) 같은 경우, 그녀의 작풍에서 드러나는 정열적인 사랑의 분위기를 극찬했다. 행적상으로 보아 어우동과 흡사하다.

3. 백인일수



'''제56번 이즈미 시키부(和泉式部)'''

あらざらむ この(のほかの (おも(に いまひとたびの あふこともがな

이제 곧 이 세상 떠나오니 추억 되도록 단 한번만이라도 당신을 만났으면


[1] 신분의 차이가 너무 나서 부인으로 취급받지도 못했다. 첩조차 아닌, 잠자리를 같이 하는 시녀 격이었다. 거의 우격다짐으로 불러들여진 이즈미 시키부가 그 사실을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2] 무라사키 시키부는 경쟁상대이기도 했던 세이 쇼나곤에 대해서도 실력은 인정하지만, 자신만만하고 적극적인 성격이라는 성격 차이와 경쟁자라는 특성 상 글로 자주 디스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