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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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전쟁 중 리볼리 전투를 다룬 삽화
'''나폴레옹 전쟁'''
'''이탈리아 원정'''

이집트 원정
1796년부터 1797년에 걸쳐 북이탈리아에서 벌어진 프랑스 제1공화국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전쟁.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의 일부로 나폴레옹 전쟁의 최초 국면이라 할수 있다.
툴롱 공략의 승리로 사단장으로 승진한 나폴레옹은 1794년에는 이탈리아 방면군 포병대 사령관으로 승진해있었다. 당시 북이탈리아에는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이 강했고, 이는 국경을 접하고 있는 프랑스로선 늘 골칫거리였기 때문에 이를 해소하기 위해 북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려는 작전이 진행되었지만 3년이 넘도록 성과가 없었다.
결국 툴롱 공략에서 명성을 날린 나폴레옹을 이탈리아 원정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북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를 몰아내게 하였다. 나폴레옹에게 주어진 병력은 4만 명 정도였지만, 나폴레옹이 이끌고 갈 원정군은 보급이 무척이나 빈약해서 사기가 많이 꺾인 상황이었다.
나폴레옹은 원정에 나서기 앞서서 "정부는 제군에게 아무 것도 주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제군을 가장 비옥한 평원으로 데리고 간다. 제군은 거기서 부와 명예를 얻을 것이다"라는 연설을 하여 사기를 단번에 끌어올렸다고 한다.
이 때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어서 북이탈리아로 쳐들어 갔다는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은건 제2차 이탈리아 전쟁 때고 이때는 해안가로 돌아서 산맥을 피했다. 이때 영국 함대가 나폴레옹을 덮쳤다면 역사는 다른 길로 걸어갔을지도 모른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원정대는 북이탈리아를 침공해 오스트리아 군대를 격파했고 1796년 5월, 밀라노를 점령했다. 또한 그 때까지 최전선에서 대치하던 사르데냐 왕국군을 단 한 달 만에 항복시켜버리고 북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군 최대 거점인 만토바를 포위했다.
이 당시 전투 중 전투 자체의 전략적 중요성은 떨어졌지만 이후 나폴레옹의 유명세에 큰 영향을 끼친 전투가 있는데 바로 아르콜 다리 전투이다. 아르콜(Arcole)이란 지역을 통과하던 도중 2,000여 명의 오스트리아군 병력이 지키는 다리를 통과해야 했고, 프랑스군은 다리를 쉽게 돌파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해야 했다. 이때 나폴레옹이 삼색기를 들고 최일선에서 병사들을 독려해 다리를 돌파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이는 이후 나폴레옹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 추가한 영웅담으로 실제로는 강둑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다가 오스트리아군의 총격으로 죽을 뻔 했다. 부상투혼을 발휘한 장 란이 위기에 처한 나폴레옹을 구원해냈다. 이후 3일 동안 돌파 시도와 후퇴를 반복하다가 오스트리아군이 겁을 먹고 후퇴해서 전투가 종료된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만토바를 구원하기 위해 나폴레옹군과 여러차례의 전투를 치뤘지만(카스틸리오네 전투, 알 코레 전투, 리보리 전투) 결국 1797년 2월에는 만토바가 함락되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4월 18일 레오벤에서 정전을 제의하여 레오벤 강화가 체결되었고 1797년 10월 17일 프랑스와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이 마무리 되었다. 한편 강화 논의를 할 동안 프랑스군은 베네치아 공화국을 공격하였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마지막 도제인 도메니코 피사마노는 항복을 결정하고 5월 12일 의회에서는 사실상의 항복 비준인 권한 이양 안건을 통과시켰다. 1797년 10월 18일, 파사리아노에 있는 피나마노의 저택에서 항복 서명을 하며 베네치아 공화국은 멸망했다.
이탈리아 전쟁의 결과로 프랑스는 이오니아 제도와 남네덜란드(오늘날의 벨기에)를 차지했으며 북이탈리아에 프랑스와 같은 공화제를 도입한 치살피나 공화국을 수립했다. 오스트리아는 롬바르디아를 포기하는 대신 베네치아를 획득했다. 이때 쯤이면 지중해를 내해로 만들 정도의 해양 강국이었던 과거의 베네치아의 모습은 다 사라졌다. 이 당시 베네치아 해군의 전력은 갤리선 십여척이 전부여서 쓸 만한 게 없었고, 조선소에서 만들고 있던 프리깃 2척만 강탈해 갔다. 그래도 나폴레옹은 베네치아의 S자 운하와 산마르코 광장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했다고 한다. 이 때 강탈한 프리깃 2척은 이후 이집트 원정에서 나폴레옹이 프랑스로 탈출할 때 타고 온 선박이다. 또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비밀조약으로 프랑스는 라인강 서안을 영토로 삼는데 성공한다. 나폴레옹 또한 이 전쟁의 승리로 국민적인 영웅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
이 시기 나폴레옹이 보여 준 군재는 상당한 것이었는데 아르콜레 다리 전투 같은 프로파간다(...)성을 제외하더라도 이탈리아 방면의 오스트리아 군을 말 그대로 털어먹으면서 빈을 목전에 두고 있었고 오스트리아 군은 독일 남부로 진격해 오던 다른 프랑스 군을 막고 있었는데 이를 막으러 남하하자 이를 추격한 프랑스 군에 의해 포위섬멸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결국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이끈 군대의 상태는 이후의 대육군이나 당시 열강들의 육군과 비교해서도 많이 후달렸던 만큼[1] 나폴레옹의 군재가 동 시대 다른 장군들과는 궤를 달리했음을 보여주는 예시로 나오곤 한다.
다만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침공과 약탈[2]로 큰 피해를 입은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져서, 이탈리아인들 사이에서는 프랑스제 성냥을 사지 않겠다는 불매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1] 당시 혁명군은 혁명 당시 장교진들이 대거 숙청당한 데다 규모를 불리기 위해 일단 징집부터 하고 보느라 보급도 개판이었던 상황이었다.[2] 사실 이탈리아 전쟁 당시, 이탈리아에 원정을 왔던 프랑스군 병사들은 보급이 제대로 안 되어 군화조차 신지 못하고 맨발로 다닐 정도로 거지 꼴이었다. 그러다 나폴레옹의 지휘로 잇따라 승리를 거두자, 부유했던 이탈리아 도시들에 들어가 마구잡이로 약탈을 벌였다. 나폴레옹 역시 이탈리아에서 약탈한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과 귀금속들을 프랑스 본국으로 보냈고, 이 때문에 정부로부터 큰 신임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