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호(농구)
1. 소개
삼성-KGC-전자랜드에서 활동했던 前 농구선수.
2. 학창 시절
경복고등학교 시절에는 휘문고 오용준과 자웅을 겨루는 포워드 자원으로 청소년대표까지 지낸 인재였지만, 이때의 활약을 바탕으로 입학한 고려대학교 시절에는 한 마디로 이런 선수도 있었는지 궁금했던 선수였다.
물론 프로농구 출범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대학 농구가 뒷전으로 밀리기도 했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초년 시절에는 선배 이규섭에게 밀렸고, 어느 정도 입지를 다진 고학년 때는 이미 대학농구의 패권은 연고대가 아니라 송영진-김주성-황진원을 앞세운 중앙대로 넘어간 뒤였다. 자연히 대학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특히 졸업반인 2002년에는 아예 부상으로 망했다. 결국 드래프트 순위에서 전체 18번으로 밀리고 말았다.
3. 프로 시절
2003년 드래프트는 역대 최악의 드래프트 랭킹에서 세 손가락 안에는 반드시 꼽히는데, 이 해 1순위인 김동우 역시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나머지 로터리 멤버들도 전년의 김주성의 포스에 비춰볼 때, 전혀 로터리로서의 이름값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현호는 2003-2004시즌 중 서장훈이 부상으로 일시 아웃되자 땜빵 주전으로 출전, 악착같은 수비와 궂은 일로 높은 평가를 받았고, 결국 팀이 PO에 올라갔고, 궂은 일을 열심히 한 공로로 어차피 도저히 줄 선수가 없던 그 해 신인상 투표에서 이현호는 신인상을 받게 되었다. 그 해 기록은 다른 해였다면 감히 신인상을 꿈꿀 수 없던 '''38경기 출장 평균 9분 15초 출전, 3.2득점 1.7리바운드(...)''' 이는 KBL 역대 가장 낮은 순번으로 신인상을 탄 기록이다. 그리고 그 해 신인상을 타던 해 6강 PO에서 전자랜드 상대로 경기 종료 직전 그냥 공만 잡고 있어도 될 것을 시간 끌겠다고 냅다 던졌다가 그게 전자랜드의 앨버트 화이트 손에 들어가며 동점 슛을 얻어맞아 지는데 일조하고 만다.
그러나 이규섭이 들어오면서 점차 입지가 축소되기 시작하며 삼성에서의 마지막 시즌에는 아예 잉여가 되고 만다. 마침 서장훈의 존재 때문에 샐러리 캡이 부담스럽던 삼성은 드래프트 2라운드 지명권 순서를 서로 바꾸면서 KT&G의 송태영과 이현호를 맞트레이드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 때부터 이현호는 기회를 제대로 얻었다. 자신의 활용도를 잘 알고 있던 당시 KT&G의 유도훈 감독에게 중용되기 시작한 것. 마침 외국인 선수의 비중을 낮추기 위해 쿼터 출전 제한과 같은 조치가 내려지기 시작하면서 이현호의 비중은 높아지기 시작했다. 골밑에서 투쟁심이 있고, 리바운드나 수비에서 악착같이 덤비는, 궂은일을 도맡아하는 모습으로 점차 시간을 얻기 시작한 것.
KT&G에서 유도훈 감독의 런앤 건의 조연으로 팀의 살림꾼 역할을 했다. 유도훈 감독 사퇴 이후에도 팀의 조연으로 꾸준한 활약을 펼치다가 2009-2010 시즌 도중 김성철이 친정팀 KT&G로 가는 트레이드에서 그 카드로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로 이적하게 되었다. 덕분에 자신의 잠재력을 인정해 준 유도훈 감독과 재회하게 되었고, 그 지휘 아래서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 특히 수비력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외국인 선수나 주전 포워드에게 휴식을 주는데 정말 유용하고, 투쟁심 넘치는 골밑 플레이로 화려하지는 않아도 감독이라면, 꼭 필요한 선수로 자리매김한 것.
그 결과 올해의 수비 베스트 5에 3회 선정(2007~2008, 2009~2010, 2010~2011) 및 식스맨상(2010~2011)에 선정되며 역대 최악의 신인왕이었다는 평가를 단숨에 뒤엎었다.
2011-12 시즌에는 공격력도 괜찮은 모습을 보이면서 심심치 않게 두 자리수 득점도 기록하고 있다. 물론 특유의 악착같은 수비력과 궂은 일은 여전하다. 기량발전상(MIP)의 유력한 후보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중. 그런데 기량발전상이 2011-12 시즌에 폐지되면서 상을 못 받았다. 안습.
2013년 5월 13일, 놀이터에서 흡연하던 청소년들을 훈계했다가 폭행죄로 입건되었다. 그러나 청소년을 훈계하려는 목적이 정상 참작으로 인정되어서 즉결심판에서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운동선수가 입건된 사건 중에는 유례없이 훈훈하게 마무리됐고 팬들로부터도 칭송을 받은 케이스. 현호캅의 탄생.
2013-14 시즌 팀의 주장을 잠시 맡았다가 외국인 선수 포웰에게 주장 자리를 넘겨주고 플레잉 코치로 승진(?)했다.
작전타임 도중 유도훈 감독의 질타에 격의없이 대답하는 동영상이 화제가 된 바 있다. 실제로 자신을 이 정도까지 성장하도록 해 준 은인인 유도훈 감독과는 허물없이 친한 사이.
2014-2015 시즌 후 FA 자격을 얻어 전자랜드와 2년 재계약에 합의하였다.
4. 은퇴
그러나 무릎 부상 악화로 2015 - 2016 시즌 중 현역 은퇴를 선언했고 홈 최종전에서 은퇴식이 열렸다. 특히 마지막 경기인 모비스와의 홈 경기에서 이미 패배가 결정된 상황에서도 모비스 선수들의 배려로 0.6초를 남기고 레이업 슛을 성공했다.
은퇴 후 전자랜드에서 코치 제의를 했지만 거절하고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5. 관련 문서
[1] 인천 전자랜드 공식 프로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