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성(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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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농구 선수. 포지션은 파워 포워드-센터. 원주 DB 프로미의 상징이자 한국 농구의 대표적인 전설. 키에 비해 좀 마른 체격이기 때문에 디시 농갤 등에서는 멸치라고도 불린다. 본인 말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체중이 안 불어난다고 한다. 동명이인의 축구선수 못지않은 화려한 커리어를 보유하였다.항상 기록에 욕심없다. 팀이 우선이라고 말해왔는데 이렇게 기록이 쌓인 것을 보면 '나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득점과 리바운드, 블록슛이 쌓인 것은 내가 열심히 한 보상이다. 특히 블록슛은 한국 첫번째 기록이라 큰 자부심과 함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꼭 깨지기를 바란다.
2015년 12월 30일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전에서 전인미답의 1000 블록을 기록한 후 인터뷰
2. 경력
2.1. 고등학교에서 대학 시절
3급 지체 장애인인 부모 밑에서 힘든 성장 과정을 겪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높이뛰기 선수를 하기도 하였으나, 집안 사정으로 운동을 곧 그만두었다. 해운대중학교 3학년 시절 이미 키가 2m를 넘었고, 동아고 채윤동 감독과 이상국 코치의 눈에 띄어 스카우트되었다. 상당히 늦게 농구를 시작한 편이지만, 농구를 시작한지 반년만에 주전 자리를 꿰찼고, 2학년 때는 청소년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잠재력은 있지만 외려 동시대 센터인 김태완보다 낮은 평가를 받기도 했으며, 지금도 말랐지만 그 때는 제대로 못 먹어서 더 마른 몸이기도 했다. 그러나 중앙대 농구부의 대부 정봉섭이 김주성을 스카웃하고 적극 지원을 했고, 고등학교 및 대학교 선배인 조우현이 도움을 주고 하면서 차츰 실력을 키워갔다. 김주성을 스카웃하기 위해 고려대, 연세대측에서 거액의 스카우트 비용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김주성은 그간의 지원에 대한 보답으로 중앙대학교로 진학했다.
중앙대학교 입학 후 잠재력이 폭발. 임재현, 조우현, 송영진, 황진원과 함께 중앙대 무적 시대를 다시금 열었다. 한때 경쟁자로 꼽히던 김태완을 압도하며, 명실방부한 대학 최고 센터로 자리잡았다. 2m 5cm라는 키가 믿겨지지 않는 스피드와 점프력으로 가볍게 덩크를 꽂고 날아다니며 블록을 하면서 상대 팀들의 인사이드를 송영진과 함께 초토화시켜 버렸다. 프로 진출 이후로는 많이 득점 욕심을 내보이지 않는 편이지만, 대학생 시절 김주성은 전형적인 스코어러였다. 김주성에게 일단 볼만 투입되면 어떻게든 득점으로 이어지곤 했다. 임재현, 박지현 두 포인트 가드는 안정적인 리딩으로 볼을 배급해주었다. 김주성이라는 든든한 기둥 덕분에 황진원, 신동한, 조우현 등 슈터들은 마음놓고 외곽에서 지원사격을 했고, 송영진은 내외곽을 오가며 상대 수비를 휘저었다. 공수에서 완벽한 전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김주성의 중앙대 4년은 허재 이후 가장 빛난 시절이었다.
- 1학년이던 1998년에는 2관왕 (대학농구연맹전[9] 공동우승 및 농구대잔치 우승!!)
- 2학년이던 1999년에는 4관왕 (MBC배, 대학농구연맹전 1차 대회 공동우승, 2차 대회 우승, 농구대잔치 우승) + 농구대잔치 MVP
- 3학년이던 2000년에는 3관왕 (MBC배, 대학농구연맹전 우승, 농구대잔치 우승) + 농구대잔치 MVP
- 4학년이던 2001년에는 트윈타워의 파트너 송영진의 졸업에도 불구하고 대학농구연맹전 1, 2차 대회를 석권하며 2관왕에 오르는 등[10]
연세대 1학년 때 1993-94 농구대잔치 우승 및 MVP를 차지하며 데뷔한 어느 유명인 정도만이 김주성과 비교할 만한 대학 시절 커리어를 가진 선수라 할 수 있다. 만약 임재현-황진원-조우현-송영진-김주성의 라인업이 외국인 선수를 뺀 프로팀과 맞붙더라도 농구대잔치 우승을 노릴 만한 전력이었으리라는 게 대부분의 평이다.
2.2. 프로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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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드래프트 사진으로, 1번 지명권이 삼보에게 가는 순간 전창진과 허재가 붙들고 눈물 감격 생 난리가 났었다. 이에 전창진이 감격한 나머지 휘청거리며 나와서 마이크에 대고 반쯤 잠긴 목소리로 “김주성 선수를 지명합니다” 라고 말하는 전설의 장면을 남겼는데, 이미 국가대표로 수많은 경험을 가진 김주성이었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수많은 1순위 픽들의 변죽 울림을 겪은 팬들이었기에 호들갑이라고 볼만한 상황이었지만, 김주성은 이 첫해부터 그 이유를 몸소 시전해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드래프트 1번 지명으로 원주 삼보 엑써스에 입단했는데, 99년 정인교와 트레이드되어 삼보에서 마지막 선수 생활을 하고 있었던 허재는 김주성의 입단이 결정되는 순간 만세를 부르고 다음 날 새벽까지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셨다고 한다(...). 현장에서 본 위키러 표현으로는 그때 허재가 득음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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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L에서 '외국인 선수들과 부딪치면 과연 얼마만큼 해줄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는 시선도 있었으나, 코트 내외를 넘는 허재의 전폭적인 지원과 갈굼(?) 속에 파워 포워드 자리를 소화하면서 어느 정도의 득점 능력과 존재감 있는 블록슛을 앞세워 가볍게 신인왕을 차지했다. 뿐만 아니라 데뷔 첫 해에 팀을 정규시즌 3위, KBL 챔피언결정전 우승으로 이끄는 위엄을 보인다.
뿐만 아니라 아시안 게임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한국 농구팀이 금메달을 따는데 일등공신이 되기도 했다.
그 후로도 한국프로농구의 간판선수로 계속해서 활약하였다. 포워드 자리에서 마르커스 힉스나 단테 존스 같은 외국인 선수와 매치업되며 굴욕 아닌 굴욕을 겪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지속적인 성장을 했으며, 그 때문에 시즌 MVP 2회, 베스트 5 6회 등 수상경력도 화려하다. 보통 외국인이 독차지하는 블록슛 타이틀도 두 번이나 차지한 적이 있다.
김주성이 있는 한 동부는 만년 우승후보란 말을 들을 만큼 KBL에서는 독보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2009-10 시즌 기록은 16.3 득점, 6.6 리바운드, 3.9 어시스트, 1.1 스틸, 1.5 블록슛.
2012-13 시즌, 1월 28일 연습 도중 발목부상로 전치 4주의 진단이 나왔다. 이 부상으로 말미암아 동부는 DTD 테크를 탔다.
2013-14 시즌에는 여러 부상으로 인해 결장하는 경기가 많아졌고, 부상 여파와 나이 등의 영향으로 인해 예전만 못한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쑥대밭이 되어버린 동부에서는 김주성 만한 선수도 없었다(...). 김주성에게 걸리는 견제를 나눠줄 거라던 용병은 태업 논란에 부상으로 아웃되고 나머지 용병들은 막말로 김주성만도 못한 영향력을 보여주며 동부의 용병농사 흉작을 한탄하게 만들었다. 결국 팀은 13승 41패로 팀 역사상 최악의 성적을 쓰고 말았다. 어쨌건 나이가 있어도 농구 월드컵과 아시안 게임에 차출되며 김주성만한 빅맨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 동시에 김주성 이후 그동안 쓸만한 국내파 빅맨이 많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2014-15 시즌을 앞두고 진행된 신인드래프트에서 허재의 아들인 허웅이 5순위로 동부행이 결정되며 '''KBL 최초로 부자 농구선수[11] 와 함께 뛴 선수가 되었다.'''
2015-16 시즌에는 지난 시즌부터 조금씩 던지기 시작한 3점슛으로 재미를 보고 있다. 한편 12월 2일 울산 모비스와의 경기에서 10득점을 기록하여 문경은 감독의 9,347득점을 넘어서 '''통산 득점 3위에 올라섰다.''' 12월 30일 고양 오리온과의 원정 경기에서 4쿼터 막판 조 잭슨의 골밑슛을 블록하여 전인미답의 '''정규시즌 통산 1,000블록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이 경기에서 두 자릿수 득점을 하진 못했지만, 고양 오리온의 막판 맹추격에 찬물을 끼얹는 3점슛을 성공시키는 등 팀 승리에 공헌하였다.
6강 플레이오프에서는 부상으로 인한 후유증 때문에 매 경기 20분 이상 소화하지는 못했지만, 클러치 상황의 외곽슛을 허망하게 날려버리고 외국인 선수들이 상대 수비수에 막혀 멘탈이 승천하는 이 답답한 상황 속에서 제 몫을 해줬던 유일한 선수였다. 결국 홈인 원주에서 0:3 스윕을 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팀은 4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다.
2016-17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역대 3번째로 통산 10,000득점을 기록하였다.
2017년 5월 16일 연봉 2억에 1년짜리 재계약을 체결하면서 잔류를 결정했는데, 2017년 12월 18일에 2017-18 시즌을 마친 후 은퇴하기로 결정했다. 관련기사 박수칠 때 떠나라의 좋은 예시가 될지도 모르는 명예로운 은퇴의 사례로 남을 것으로 보이며, 2012-13 시즌을 마치고 은퇴한 서장훈에 이어 KBL 선수 두 번째로 '''은퇴 투어'''를 열 예정이라고 한다. 시작은 2018년 1월 5일 SK 원정경기부터 시작될 예정이다. SK 측은 김주성과 국가대표팀에서 동고동락한 문경은 감독, 전희철 코치, 김선형 선수가 같이 있는 피규어를 제작해서 선물했다. 관련 기사
두번째 은퇴 투어는 2018년 1월 24일 kt 원정경기에서 실시되었다. kt 측은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 획득을 기념하여 결승전 경기가 치뤄졌던 코트의 나무를 일부 활용, 당시 멤버들과 함께한 사진이 담긴 기념액자를 선물하였다.
2018년 4월 18일 챔피언결정전 6차전 경기를 끝으로 결국 은퇴. 향후 지도자 연수 과정을 밟을 예정이다.
2018년 8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얼바인으로 연수를 떠났다고 한다.
2018년 12월 25일, 미국에서 부인, 두 딸과 함께 일시 귀국하여 은퇴식 및 영구결번식을 진행하였다.관련기사
2.3. 지도자 생활
2019년 5월 21일 미국에서 코치 연수를 받던 중 원주 DB 프로미의 코치로 부임한다고 결정했다. 직책은 빅맨 전담 코치로써 새로 이적해온 김종규와 다른 빅맨들을 전담해 맡을 계획이다.기사
2020-21시즌에는 팀이 D리그에 참여함에 따라 D리그 감독도 맡는다. 11월 17일 서울 삼성 썬더스와의 경기에서 사령탑으로의 데뷔전을 가졌는데, 전반부터 7-27로 밀린 끝에 63-85로 대패했다. 결국 1차 D리그에서는 예선에서 1승도 거두지 못했다.
3.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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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다니엘스의 슬램덩크를 블락하는 모습.'''
뭐니뭐니해도 탁월한 BQ+운동능력을 이용한 수비가 김주성의 최고 무기. 인사이드 플레이어지만 사이즈 대비 발이 상당히 빨라 속공 가담에도 매우 뛰어나고, KBL 데뷔 초기엔 중거리슛을 쏠 수는 있어도 뛰어나다 할 수는 없었지만 가면 갈수록 중거리슛에도 능한 면을 보여주게 되었다.[12] 인사이더치고는 마른 몸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보다 힘이 좋은 선수를 상대로는 스피드를 앞세운 페이스업 공격을 하고, 자신보다 작은 국내 선수와 매치업되면 높이를 앞세운 포스트업을 써먹으며 상대를 공략한다. 운동 능력도 나쁘지 않아서, 신인때는 수시로 덩크를 꽂고 외국인 상대로도 인유어페이스 덩크를 시도했고, 은퇴시즌에도 올스타전에서 엘리웁 덩크를 선보이기도 했다. 거기다 패스 플레이로 팀내 볼 흐름을 도우며, 보면 같은 팀 포인트 가드보다도 인사이드에 공 배급은 더 잘해주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직접 잡는 리바운드는 많지 않지만 성실한 박스 아웃으로 팀 동료가 리바운드를 잡게 하고, 스크린 플레이도 열심히 가담한다. 리바운드 후 패스도 일품. 사실상 KBL판 케빈 가넷이라고 보면 된다. 수비 포메이션에 대한 뛰어난 이해도와 긴 리치를 이용한 블록슛, 동 포지션 타 선수들 대비 빠른 스피드를 이용한 가로수비 그리고 무엇보다 인사이드에서의 기민한 헬프디펜스로는 팀 전체의 수비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킨다는 점에서 케빈 가넷의 그것과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다. 더불어 공격에서의 사기더웨이도.
다만 나이가 들고 국가대표와 소속 팀에서 거의 전 경기를 뛰는 혹사를 겪으면서 체력과 스피드가 줄어 급격히 노쇠화를 겪으며 장점보다는 단점이 부각되고 있다. 실제로 데뷔 10년차 시즌인 2012년 11월 14일, 안양 KGC인삼공사를 상대로 한 경기 리바운드 '''0개'''라는 처참한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당시 감독이었던 에게 니가 갱기를 망치고 이써급의 개갈굼을 당했고, 이게 방송으로 전파되면서 많은 농구팬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김주성이 농구를 못 한다고 갈굼을 먹은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 충격이 더했다. 그도 역시 노쇠화에서 예외는 아닌 듯하다. 프로농구 최초 주성타 갈굼영상 심지어 전 감독님이 아무것도 못하는 X이라고 하는건 덤
이처럼 나이로 인한 노쇠화를 피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는데, 김영만 감독 부임 후 출장시간을 25분 내외로 관리를 해주자 다시금 탑급 빅맨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2015-16 시즌 초반 김주성이 부상으로 결장시에 9위까지 내려간 동부는 김주성의 복귀와 웬델 맥키네스의 합류로 인해 파죽지세로 순위를 끌어올리는 상황이다.[13] 거기에 나이가 들며 골밑 싸움에 힘이 부치는지 2014-15 시즌 부터 간간히 늘려가던 3점슛 시도를 2015-16 시즌부터는 작정하고 슈터로 변신이나 한 듯 던져대는 바람에 상대 입장에서는 더 까다로운 선수로 변해버렸다.[14] 참고로 2016-17 시즌에는 다른 슈터들보다 월등한 성공률[15] 을 보이며 3점슛 성공률 1위를 달리고 있다. (16년 11월 20일 기준)
매우 마른 체형으로 유명하다. 김주성 본인도 몸무게를 늘이고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으나 많이 먹고 운동을 많이 해도 웨이트가 늘지 않거나 조금 늘었다 해도 곧 원래대로 돌아가 버린다고 한다.
어쨌든 KBL 최고 수준의 가치를 가진 선수. 현행 샐러리캡 제도에서는 엄청난 연봉(2010년 기준 6억 9천만원)을 받지만 연봉만큼의 가치를 하고 있다.
4. 이모저모
4.1. 과도한 리액션과 비매너 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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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류의 짤방도 경기당 자기 블록슛 수치만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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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들에게는 불우한 가정환경을 극복한 성실함과 부지런함, 팀에 대한 헌신 등등 좋은 프로 선수의 덕목을 고루 갖춘 선수로 평가받는 김주성이지만 농구 매니아들은 '''경기 매너가 나쁜 선수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등 절로 언짢아지는 사고를 치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일은 경기 도중 서장훈의 목덜미를 배구 스파이크하듯 내려쳤던 사건. 이 사건으로 인해 김주성은 두고두고 농구 팬들에게 '''주성타'''불리며 욕을 먹었다. 이사건으로 이미지가 좋은 김주성을 나쁜 의미로 다시 봤다는 사람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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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곽에서의 신경전과 몸싸움이 가장 치열한 골밑에서 활동하는 선수인 것을 미루어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는데 이게 말이 안되는 것이 골밑이 아닌 곳에서도 악의적인 가격을 하기 때문이다. 09-10시즌 김주성은 3점슛을 날리던 조성민의 뒤통수를 후려갈겼고 곧이어 상대 진영에 공을 몰고오는 조성민의 명치에 펀치를 날리기도 하였다. 이런게 한두번이 아니다. 또 은퇴직전에 까마득한 후배에게 크로스라인을 시전해 주셨다.
가면 갈수록 늘어가는 할리우드 액션도 문제.[16] 파울 유도는 잘 하면 좋은 것이지만 눈에 띄게 과도한 액션이 많으며 이로 인한 비판도 많이 받는다. 2011년 3월 25일 벌어진 동부와 LG간의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제대로 할리우드 액션을 자행하면서 비판이 더욱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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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5 시즌 전자랜드와의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리카르도 포웰에게 강력한 몸통박치기를 시전했다. 문제는 그러고도 더블 파울로 포웰도 파울을 함께 받았고, 포웰을 파울 트러블로 몰아넣었다. 농구 관련 사이트에선 황순팔과 함께 쌍으로 까였다.[17]
제일 큰 문제는 김주성의 이런 모습이 사람들에게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주성이 프로 데뷔 이전이나 이후에도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가 좋은 데다 모기업 동부화재 보험 광고를 찍으면서 부모의 얘기가 나오니까 라이트팬들에게 "농구 잘하고 성실한 효자" 이미지가 씌워진 덕분. 이미 효자 이미지가 나오기 전부터 플랍질이나 서장훈한테 저지른 주성타 등 타 팀 골수팬들에게는 비호감 1순위였다. 지금은 인터넷과 미디어 발전 덕택에 전성기 때 효자 이미지로 드러나지 않은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플라핑에 대한 농구팬들의 시각이 많이 안 좋아지는 장면들이 많이 연출되면서 나날이 비판의 강도가 오른다. 급기야 2016-17 시즌에는 경기 중 몸싸움 여파로 넘어지자 대다수의 농구팬들이 저거 나이 먹어서 드르렁하는 거다 라면서 조롱하는 이야기도 많이 보일 만큼 저런 리액션들 때문에 본인의 주가를 많이 깎아먹는다.
최근에는 심지어 코치로 부임한 이후 신인에게 1대 1코칭을 할 때 플라핑을 가르쳐 크게 비난받은 적이 있었다 영상링크
DB팬들은 KBL 레전드 아니냐 인정해줘라라고 계속해서 외치고 있지만 이 과도한 플랍질, 상대 선수의 부상도 거리낌없어하는 잔혹함은 많은 팬들이 은퇴 이후에도 김주성과 DB를 곱지 않은 눈으로 보게되는 원인이 되었다.
4.2. 흑역사
2004년 3월 7일, 전자랜드와 TG삼보의 경기가 펼쳐졌다. 시즌 순위는 결정된 상태에서 우지원과 문경은이 시즌 3점슛 부문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었고 김주성 역시 블록 순위에서 1위를 다투고 있는 상황. 순위와는 관계 없지만 과연 문경은이나 김주성이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 농구팬들은 관심을 가지고 경기를 보았다.
그리고 농구팬들은 경기라는 이름으로 펼쳐진 희대의 상부상조 개그를 보고 만다. 전자랜드 선수들은 김주성이 블록 하기 좋게 슛을 갖다 바치고, TG 선수들은 문경은이 슛 쏘기 좋게 알아서 노마크로 자리를 비워주는 상황이 경기 내내 이어지는 어이없는 꼴이 펼쳐진 것이다. 형님 좋고 아우 좋고인지 뭔지 하여간 이들이 벌인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 인해 김주성은 그 경기에서 11블록을 달성하고 트리블 더블도 덤으로 하며 시즌 블록 1위를 차지한다.
하지만 당연히 어이가 가출하는 상황을 본 농구팬들의 분노가 폭발했고, KBL은 결국 그 시즌의 3점슛 1위와 블록 1위를 해당자 없음으로 수상 처리하며 어물쩡 넘어갔다.
하지만 2017년 KBL 홈페이지의 주요 기록 항목을 보면, 문경은의 3점슛 조공 기록과 김주성의 한 경기 최다 블록 기록으로 저 2004년 3월 7일 짜고친 고스톱 같은 날의 기록이 버젓이 올라가 있다. 이뭐병
4.3. 김주성 외곽슛 개발 막은 한국농구
2015년 스테판 커리의 MVP 이후 세계 농구 트렌드가 꽤 크게 바뀐 시점에서 되돌아본다면, 서장훈은 한국 농구의 또 하나의 편견에 시달린 선수이다. 바로 외곽 공격은 영양가가 없다는 식의 시각이다.
용병 이전 전통적 한국 농구는 양궁농구라는 양날의 검을 가진 농구스타일이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외국에 비해서 장신센터가 골밑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오랜 컴플랙스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중국과의 국제경기에서 한국이 외곽이 밀려서 지는 경우는 적었고, 높이의 차이 골밑파워 차이로 밀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전성기 이후 장신인 서장훈이 골밑을 버리고 미드레인지 점퍼를 던진다는 이유로 겉멋이 들었다며 욕을 엄청 먹었다. 그런 이유로 장신 센터인 김주성, 하승진의 경우 중거리 슛 센스가 생각보다 좋았음에도 감독들이 의도적으로 중거리슛을 자제하도록 지도했고, 그 결과로 김주성은 충분히 성공한 선수가 되긴 했지만 수비와 팀 플레이 중심의 선수로의 한계를 가지게 된다. 김주성이 초창기 골밑 플레이가 막히면 공격에서 막힐 수밖에 없지만, 어차피 공격은 2명이나 되는 용병에게 맡기면 되니까 한계로 여겨지지 않았다. 김주성은 공격에서 조금 막혀도 수비와 팀플레이에서의 기여도로 충분하다는 것이 중론이었고, 당연히 김주성 스스로도 안주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김주성이 이미지와는 달리 중장거리 슈팅 능력이 없는 선수가 아닌 것이, 선수 생활 후반에 3점 슛을 개발한 이후로 선수 생활 연장이 가능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만약 김주성이 더 일찍 미들슛과 3점을 장착한 선수였다면 더욱 뛰어난 선수가 되었을 수도 있다. 김주성이 한국 역대 최고의 선수 중의 하나지만 역대 No.1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선수는 아니고, 또 중국 등 국제경기에서 훌륭하게 활약했지만 그렇다고 압도한 것은 아니기에... 스스로 골밑에서의 활동 제한을 두고 잠재력을 선긋지 않았더라면 더 뛰어난 선수가 되었을 수 있다는 아쉬움인 것이다.[18]
5. 여담
김주성의 밑으로 여동생이 하나 있다. 여자배구팀 흥국생명에서 뛰었던 김향란으로, 여동생도 오빠처럼 키가 커(186cm) 포지션도 센터(미들블로커)로 활약했다. 오빠보다 일찍 성인 무대에 뛰어들었지만 배구선수의 특성 상 롱런하지 못하고 일찍 은퇴했다. 그래도 엄청난 족적은 남기고 은퇴를 했는데 배구 프로화 이전 슈퍼리그 시절에 '''한 경기 최다 블로킹인 8개'''를 기록하기도 했다. 김주성이 김향란의 플레이를 보고 많이 조언을 했다는 과거 신문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키가 큰 김주성 김향란 남매와 달리 척추 장애를 가지고 있는 어머니 신장은 160cm 정도고[19] 아버지는 170cm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한국프로농구의 빡빡한 샐러리캡(연봉총액제한) 때문에 한 선수가 한 팀에서 오래 뛰다 명예롭게 은퇴하기가 참 까다로운 게 현실인데, 김주성은 그 높은 연봉에도 불구하고 입단 때부터 '''은퇴할 때까지 단 한 팀에서 뛰었다.''' 일단 구단 내에서는 성골이라 할수 있는 중대 출신이기도하고 은퇴하자마자 팀의 코치로 합류한것을 보면 차기 DB 감독 유력 후보로서 손색이 없다.
로드 벤슨과 함께 개그 콘서트에 출연한 적이 있다. 3분 43초부터...
남자프로농구 유일의 합법적 병역 브로커인데, 야구 최대 합법적 병역브로커처럼 정작 본인도 군 면제[20] 를 받았고 아시안 게임 금메달로 6명의 선수를 병역 혜택을 제공했지만 국가대표 은퇴로 병역 브로커 활동도 끝났다.
어렸을 적에 바라는 것이 딱 한 가지밖에 없었는데 그게 밥이었다고 한다(...).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엄마 밥주세요" 외엔 달리 말을 잘 안했다고... 집안 형편이 어렸을 때 어려웠던 것도 있었겠지만 투정 한 번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같은 팀 선배였던 허재에 대한 존경심이 굉장히 강한데, 허재는 원주 숙소 생활을 함께 했던 시절 자신의 부인이 싸다준 보약을 전부 김주성에게 먹일 정도로 김주성을 굉장히 정성껏 기른 선배였다. 여러모로 애착이 강할 수밖에 없는듯.
위에 언급된 서장훈과의 사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퇴 인터뷰에서 가장 존경했던 선배를 서장훈을 꼽았다. 그 인터뷰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그때 그렇게 쳐놓고서. 사실 그 사건 이후 김주성과 서장훈이 사이가 나빠졌다는 루머가 있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중인 듯.[21]
농구계에서 선행으로 유명한 선수인데, 아시안게임 금메달 2개로 매월 30만 원씩 받는 선수 연금을 장애인과 저소득층 등 불우이웃에 기부하겠다는 뜻을 보였다.[22] 국내 선수가 평생 받을 수 있는 자신의 연금을 기부하는 것은 김주성이 처음이다. 연금 외에도 선수시절 자신의 리바운드와 연계해 연탄과 도서를 저소득층에게 전달해 해왔다.
6. 관련 문서
[1] 음력 1979년 9월 20일[2] 프로축구 K리그 1에서 뛰고있는 이동국과 동갑이다.[3] 참조.[4] 그러나 성장은 부산에서 했다. 기사에서 장수 남평마을이 고향이라고 했는데, 본인의 고향인지 부모의 고향인지도 확실치 않다. 일례로 경기도 안산시 태생인 김연경 선수가 한때 전라남도 구례군 출신(실제로는 부모의 고향)으로 잘못 소개된 적이 있었다.[5] 원주 DB 프로미 공식 프로필.[6] 중앙대 시절의 번호이자, 2002년 입단 이후 2009-10 시즌을 제외하면 무려 15년 동안 사용한 번호이기도 하다. 2018년 12월 25일 은퇴식 및 영구결번식이 진행되었으며, 이로써 KBL 팀 창단 이후 이전에 뛰었던 선수가 같은 번호를 단 선수가 단 한명도 없이 오직 한 팀에서만 원년번호를 달고 은퇴한 김유택, 김병철에 이어 세 번째 선수가 되었다.[7] 2009-10 시즌에 코치에서 감독으로 승격한 의 권유를 받고 달게 되었으나, 고작 입은 기간은 1년 뿐. [8] 전직 배구선수로 흥국생명에서 센터로 활약하였다.[9] 1998년에는 한 번만 열렸다.[10] 2001-02 농구대잔치에서는 준우승.[11] 허재, 허웅 부자.[12] 15년 이후에는 3점슛을 장착해 거의 슈터만큼 쏘고 있다[13] 동부 선수들에게 있어서 김주성의 존재는 절대적이어서, 김주성이 없는 날에는 다들 무언가에 쫓기듯 초조한 플레이를 하는 경향이 있다.[14] 단순히 시도를 늘리는게 아니라 성공률마저 50%에 육박하니 매치업 상대들은 환장할 노릇.[15] 김주성이 57%대로 3위인 부산 kt 이재도가 45%임을 대비하면 굉장히 높은 수치이다.[16] 2016년에는 KBL 센터에 있는 심판 교육장 칠판에 ''''김주성이 넘어졌을 때 무조건 휘슬을 불지 마라''''는 문구가 적혀 있기도 했다. *[17] 황현우(황순팔에서 개명함) 심판은 주심으로 있었고, 오심으로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으레 황순팔이 그랬겠거니 생각하고 깠다. [18] NBA는 신발 신은 키를 재지만, 한국 농구는 신발 벗은 키를 재는 경우가 많다. 듀란트처럼 빅맨이 하기 싫어서 키 속이는 경우나 그렇지 상당수가 프로필 키보다 작다. 그래서 김주성이 미국을 갔다면 205가 아닌 '''210을 넘는 사이즈'''로 여겨질 수도 있다. 이 정도 신장에 이 정도 스피드면 NBA에서도 나쁘지 않다. 단지 이 정도 피지컬로는 도저히 빅맨으로서 벤치 멤버도 불가능하다. 즉, 2010년대 이후 김주성 스타일의 선수가 외곽슛도 괜찮았으면 신장 대비 나쁘지 않은 스피드와 열심히 하는 수비를 무기로 NBA 벤치라도 도전해볼 만하지 않았을까.[19] 그러나 그의 어머니의 실제 키는 척추가 휘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180cm이 넘는다. 김주성의 외할아버지는 키가 207cm이나 되는 거구였는데, 그 큰 키를 외가쪽 혈통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20] 부모의 장애로 인한 생계 곤란으로 병역면제.[21] 서장훈이 인터뷰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고 특정 선수를 비난하면서 웃는 얼굴의 쓰레기가 있다는 말을 했다. 그 쓰레기가 김주성을 가리키는 말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22] "저도 힘들게 살았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그런 분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생각해 왔었고, 이렇게 금메달 2개를 따서 도울 수 있어 정말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