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진(농구선수)

 


송영진의 수상 및 영예
[ 펼치기 · 접기 ]





휘문고 농구부 코치
송영진
宋永鎭

<colbgcolor=#003875> 출생
1978년 10월 2일 (45세)
[image] 경상남도 마산시
국적
[image] 대한민국
신체
198cm|체중 95kg
직업
농구선수(파워 포워드,스몰 포워드 / 은퇴)
농구코치
학력
마산용마초등학교 (졸업)
마산동중학교 (졸업)
마산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졸업)
프로입단
2001년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창원 LG)
현역시절 등번호
23[1], 38[2], 2[3]
소속
<colbgcolor=#003875> 선수
[image] 창원 LG 세이커스 (2001~2005)
[image][image] 부산 KTF-kt (2005~2015)
코치
[image] 부산 kt 소닉붐 (2015~2018)
[image] 연세대학교 농구부 (2019~) 휘문고등학교 농구부(2020~)
1. 소개
2. 플레이스타일
3. 선수 경력
3.1. 아마추어 선수
3.2. 프로 선수
4. 지도자
5. 관련 문서

[clearfix]

1. 소개


[image]
선수생활의 전성기였던 중앙대 시절.
[image]
부활의 서막이자 현역 말년의 부산 kt 시절
대한민국농구 선수. 부산 kt 소닉붐의 프랜차이즈 스타. 현주엽을 이겨냈던 살림꾼이자 파이터. [4]

2. 플레이스타일


아마추어 시절 큰 키와 운동능력과 기동력을 가진 빅맨이었다. 외국인선수 2인출전이었던 프로초창기에는 외국인선수 수비를 위해서 벌크업을 강요받았다. 그 결과 장점이었던 민첩함은 사라지고 부상만 남았다. KTF로 이적한 이후 추일승, 전창진 감독 밑에서 재능을 꽃피우게 된다. 공격에서는 준수한 3점슛을 바탕으로 탑에서 경기운영에 많이 관여했다. 조성민을 위한 패턴과 모션오펜스의 중심이었다. 송영진의 핸드오프패스, 스크린, 피딩, 어시스트 능력을 팀에 필요한 여러부분을 메우며 kt의 공격을 이끌었다. 준수한 3점슛으로 공격흐름의 정체를 끊고, 수비의 공간을 잘 벌렸다. 수비에서는 리바운드와 블락, 도움수비 등 평균이상의 수비능력을 보여줬다. 수비를 조율하는 것도 그의 역할이었다.

3. 선수 경력



3.1. 아마추어 선수


중학교 1학년 때 농구를 시작했다. 동기인 황진원과는 이후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모두 같은 팀에서 뛰게 된다. 마산고 재학시절 장신에 빠른 스피드, 그리고 슈팅능력을 바탕으로 청소년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으며, 이후 중앙대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1학년 때는 이은호, 정훈종 등 선배들에 가려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2학년 때 김주성이 입학하면서 함께 무적 중앙대의 시대를 열며 맹활약했다. 김주성과 송영진의 트윈타워는 대학 최고 콤비로 평가받았으며, 한기범-김유택의 재림이라는 호평을 듣기도 했다.
엄청난 점프력과 스피드를 바탕으로 한 덩크와 돌파는 그의 주무기였다. 80kg 정도로 체중이 가벼운 편이어서 몸싸움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운동능력으로 이를 상쇄했다. 그리고 비록 전문 슈터 수준은 아니지만 틈틈이 오픈찬스에서 3점슛을 성공시키며 내외곽을 겸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처럼 파워 포워드 자리에서 속공에도 능하고,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이면서 일찍부터 프로에서도 통할 유망주로 지목받았다. 중앙대에서 무수한 대회를 휩쓸고, 2001년 프로 드래프트에서 당당히 전체 1번의 지명의 영광을 안았다. 당연히, 창원 LG 세이커스에서는 기대가 컸고, 기대대로 활약할 줄 알았는데...

3.2. 프로 선수


창원 LG에서는 프로의 험난한 벽앞에 한계를 보였다. 원래 빠른 움직임과 스피드가 주 무기였던 선수가 프로에서 외국인 선수와 대결하기 위해 억지로 몸을 불렸다가[5] 스피드는 죽고, 몸빵도 되지 않으면서 이도저도 아니게 변해버린 것. 사실 프로 첫 해 평균 8.9점으로 다른 신인이라면 칭송받았을 수도 있었지만, 그 해 김승현이 등장해서 꼴찌팀이었던 대구 동양을 우승시키면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통에 송영진은 제대로 묻혔다. 결국 LG에서는 두 자리수 평균 득점은 커녕 이도저도 아닌 모습을 계속 보여주면서 성장이 정체되었고, 결국 LG는 2004-05 시즌이 끝나고 FA가 된 현주엽을 데려오면서 그를 보상 선수로 보내버렸다.
송영진은 LG에서의 시간이 굉장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화려하게 데뷔했으나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김승현에게 빼앗겼고 개인적인 성적도 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후 인터뷰를 찾아보면 LG 시절이 트라우마로 남아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태환 감독과의 갈등도 있었으며 선수단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고 극도의 스트레스정신과 치료까지 받았다.[6]
그런데 새로 옮겨간 KTF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추일승 감독의 조련 아래 한 단계 더 성장한 것. 과거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자신의 장점인 스피드와 움직임을 다시 되찾은 것이었다. 2005-06 시즌 향상된 기량을 보이며 기량발전상을 수상했고, 2006-07 시즌에는 평균 13.7점을 넣으며 KTF의 사상 첫 챔프전 진출의 주역이 되었다. 장신 슈터로 성장하여 국가대표로 선발 되기도 하였다. 역대 보상 선수 가운데 가장 성공한 케이스.(우지원이나 이상민이 이름값으로는 가장 높지만 이들은 특수한 경우인지라...) 그 뒤로는 FA 자격을 얻고도 팀에 남으며 자신을 알아준 팀에 대한 애정을 보였다.
추일승 감독 시절에는 스몰 포워드에 가까운 플레이를 하면서 외곽슛을 주로 던졌다면 전창진 감독 부임 이후에는 파워 포워드에 가까운 선수가 되었다. 전창진은 송영진을 보고 저렇게 큰 선수가 외곽을 떠도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하면서 인사이드에서 수비와 리바운드 등 궂은일을 해주길 원했고 송영진은 이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하였고 은퇴 직전까지 kt의 골밑을 지켰다.
포워드가 많은 kt지만, 큰 키를 바탕으로 골밑에서 활약해주는 선수는 송영진이 역시 1옵션. 움직임도 괜찮고, 미들 라인이나 골밑에서든 어느 위치에서든지 다양하게 쓸 수 있기 때문에 비록 신인 시절의 기대처럼 4번 자리에서 대활약하는 정도는 아니어도 상당히 유용한 활약을 보여주는 선수다. 수비력도 적당히 괜찮은 편이라서 kt 이적 후에는 국가대표에도 종종 발탁될 정도로 성장했다. 기대만큼은 아니라도 준수한 파워 포워드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2013-2014시즌에는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팀내 빅맨 자원인 민성주, 장재석, 김승원의 성장세가 더딘 관계로 결국 주전으로 계속 출전하며 팀의 6강 진출에 힘을 보탰고, 준PO에서는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를 상대로 평균 12.8득점을 넣으며 후안 파틸로[7], 전태풍, 조성민과 함께 4강 진출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4강에서는 친정팀인 LG에게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당하고 말았다.
시즌이 끝난 후 다시 FA 자격을 얻은 송영진은 2년간 보수 총액 2억원(연봉 1억 5천만원, 인센티브 5천만원)에 재계약했다. 아울러 김승현, 황진원, 전형수, 이현준이 은퇴하면서 97학번 중 유일한 현역 선수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2014-2015 시즌 이후 정들었던 코트를 떠나게 되었고 97학번의 현역 선수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4. 지도자


[image]
kt 코치 시절
2014-15 시즌 종료 후 은퇴한 이후 친정인 부산 kt 소닉붐의 수석코치를 맡게 됐다.
하지만, 3년간 팀 선배이자 주장 출신이었던 조동현 감독의 성적부진으로 인해 2017-2018 시즌 이후 팀을 떠나게 되었다.
2017-18 시즌 종료 후 조동현 감독의 계약 만료 때 동반 사임했고 미국 연수를 거쳤다.
이후 2019년 정기전 직후 자신의 모교가 아닌 은희석 감독의 연세대학교의 코칭 스태프로 합류했다.

5. 관련 문서


[1] 01-02 시즌~03-04 시즌 창원 LG 시절[2] 04-05 시즌 창원 LG 시절, 부산 KTF 시절[3] 부산 kt 시절[4] 실제로 현역 시절 현주엽이 이루지 못했던 KBL 파이널 무대에서 코트에 뛰었고 비록 플레이오프 우승을 못했지만 10-11 시즌 정규리그 우승을 했다.[5] 김태환 감독은 그를 4번으로 기용하고 3점 슛이 좋았던 외국인 에릭 이버츠를 외곽으로 빼기 위해 체중 불리기를 지시했다. 워낙 살이 안 붙는 체질에 위장이 선천적으로 약했는데, 밤마다 라면을 두 개씩 먹으며 억지로 체중을 불렸다. 80kg였던 체중을 순식간에 92kg까지 불리며 운동능력이 눈에 띄게 줄었다.[6] 이게 더 뼈아프게 느껴질 수 밖에 없는 게 드래프트 당시 전체 1순위인데다가 송영진의 고향이 마산이었기 때문.(당시에는 통합 전이었다.) 즉, LG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고 이적하지 않았으면 보다 먼저 로컬 보이로 자리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7] 2012-13 시즌 안양 KGC에서 뛰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용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