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우(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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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울산 모비스 피버스, 서울 SK 나이츠, 서울 삼성 썬더스 소속의 농구 선수. 현재는 명지고등학교 농구부 코치이자 SPOTV 농구 해설위원이다.
2. 행적
2.1. 아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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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시절, 1999-2000 농구대잔치 결승전의 장면이다. 뒤에 서 있는 중앙대학교 선수는 임재현.
명지중학교 3학년 때 키가 189cm에 이르자 학교 체육선생님의 권유로 농구를 시작했다. 뒤늦게 농구를 시작했으나, 빠르게 성장하며 명지중-명지고등학교의 에이스로 자리잡았다. 명지고 시절 박성근 감독의 지도하에 한 학번 선배인 정훈, 이근석 등과 함께 프론트 코트를 이루었고, 큰 키에 어울리지 않는 3점슛과 길거리 농구를 하며 기른 드리블 능력으로 주목받았다. 2학년 때 정훈과 이근석이 박성근 감독을 따라 낙생고등학교로 전학가며 팀이 약화되었지만, 3학년이 된 후 홀로 명지고를 상위권으로 이끌었다. 대통령기와 쌍용기 대회에서의 맹활약[2] 으로 각 대학의 러브콜을 독차지하게 되었고, 연세대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서장훈의 졸업 이후 장신의 센터/파워 포워드가 없어 중앙대 김주성-송영진, 성균관대 정훈-이한권에 쩔쩔매던 연세대는 큰 구원투수를 얻었다. 동기인 박광재와 함께 더블 포스트를 이루며 주로 4번 포지션에서 활약했다. 수비시에는 주로 센터/파워 포워드를 맡았지만, 공격시에는 체격이 좋은 박광재[3] 가 몸싸움과 리바운드 등 궂은 일을 도맡아하였고, 김동우는 그 덕분에 내외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전형적인 스윙맨의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부상을 당하기 이전 그의 플레이는 엄청난 운동 능력과 스피드를 바탕으로 했다. 196cm이라는 키가 믿어지지 않는 빠른 스피드와 돌파, 높은 점프력을 이용한 덩크슛으로 연세대의 농구에 화려함을 더했다. 다소 자세가 높긴 했지만 틈틈이 크로스오버 드리블을 구사하고 가드[4] 들을 대신해 볼을 운반할 수 있을 정도로 볼핸들링도 좋았다[5] . 틈날때마다 빠른 슛모션으로 던지는 중장거리 슈팅 능력은[6] 상대팀의 장신선수들을 끌어낼 수 있게끔 했다. 이와 같이 내외곽을 겸비한 화려한 플레이와, 깔끔하고 어려보이는 외모로 인해[7] '연세대의 서태웅'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그를 따라다니는 여성 팬들도 있을 정도였다.
1학년 때부터 이미 맹활약하며 중앙대의 연승행진을 저지하고, 부진에 빠져있던 연세대를 대학연맹전 공동우승으로 이끌었다. 2학년 때는 다소 부진했으나 3학년이 된 후 더욱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당시 01학번 고교 랭킹 1위이던 방성윤이 입학하자, 공/수에서 부담을 덜고[8] 더욱 정확해진 슈팅과 돌파를 보여주었다. 방성윤 뿐만 아니라 이정석, 최승태 등 전반적으로 각 포지션에 우수한 선수들이 입학하면서 연세대의 전력은 더욱 강력해졌고, 김동우는 팀의 중심이자 정신적 지주로서 자신의 진가를 발휘했다.
4학년이 되자 주력 선수들이 졸업하며 전력이 약화된 중앙대, 고려대, 성균관대는 점차 쇠락한 반면, 연세대는 4개 대회 연속 우승이라는 쾌거를 기록했다. MBC배 전국대학농구대회, 대학연맹전, 전국체전, 그리고 종별대회까지 우승하며 김동우의 주가 또한 함께 올라갔다. 매 경기 20점 가까운 득점과 2-3개의 3점슛을 기록하며 사실상 대학 최고의 선수로 등극했다. 졸업을 앞두고 대학생 신분으로 마지막 출전한 2002-2003 농구대잔치에서도 이규섭, 정훈종을 상대로 대등한 골밑 플레이를 펼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대회 MVP를 차지했다. 이와 같은 맹활약 덕분에 당장 프로에 와서도 주전감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마침내 2003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1번으로 모비스에 입단했다.
2.2. KBL
하지만, 프로에서는 기대만큼 성장하지는 못했다. 데뷔 시즌에는 개막 후 20경기에서 주전으로 나서며 평균 10점정도의 득점을 기록하며, 충분히 기대에 어느 정도 부응하는 듯 했으나, 시즌 중반 입은 부상으로 결국 커리어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사실 부상 이전의 스피드와 점프력은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다. 그는 명지고 시절 점프력을 키우기 위해 아령을 들고 수시로 앉았다 일어나는 등의 혹독한 연습을 매일 하곤 했다. 그 결과 엄청난 스피드와 체공력을 얻었으나, 그 대가 또한 컸다. 무릎과 발목에 엄청난 부담을 주게 된 것. 대학 시절부터 무릎에 약간의 통증을 안고 살았는데, 여기에 발목 부상까지 겹치면서 사실상 운동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신인 시절 다친 발목이 하필이면, 발바닥 내측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이라서 재활로 고생해야 했다. 더 문제는 이게 진단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2년이나 '''인대가 끊어진 채로 뛰었다'''는 것. 일본에서도 수술을 포기해서 선수 생활의 위기를 맞았지만, 다행히 독일로 건너가서 세 번의 수술을 받은 끝에 겨우겨우 회복되었다. 비록 어찌어찌 선수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으나, 이전과 같은 점프력은 더는 볼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발이 회복이 되니, 이제는 허벅지나 무릎이 계속 아프면서 출장 경험을 통해 기량을 늘릴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워낙 부상이 잦아서 군대도 공익근무요원으로 갔고, 이에 대해서 아무도 딴지를 걸지 않았다(...). 프로 선수 생활 동안 받은 수술만 '''4번'''.
프로에서 통할 만한 결정적인 한방이 없는 것도 문제였다. 사실 대학 시절부터 약간 포지션이 애매하긴 했다. 4번으로 쓰기에는 힘이 부족하고, 3번으로 쓰기에는 야투가 정확하지 않았다. 큰 키에 빠른 모션으로 던지는 장거리 3점슛은 인상적이었지만, 전문 슈터들이 즐비한 프로무대에서는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그리고 운동 능력을 상실하면서 아마 시절 괜찮았던 돌파력은 더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워낙 깡마른 체격이었던지라, 4번 포지션에서 골밑 수비를 하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프로에서 경험을 쌓으면서 포지션을 정하면 해결되는 문제기도 하다. 이규섭이나 전희철처럼, 비슷한 포지션과 플레이스타일을 가진 트위너이지만 경험이 붙고, 포지션이 정착되면서 프로에 잘 자리잡은 선수가 많다. 결국 부상이 그의 결정적인 성장 기회를 앗아간 것.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보낸 모비스에서는 그래도 롤도 있었고 나름 프랜차이즈 스타(?) 대접도 받은 선수였다. 유재학 1기 슈팅-수비전문 식스맨이었던 우지원과 이병석의 은퇴 및 이적으로 구멍난 팀의 3점 슈터 롤을 담당했고, 수비에서도 팀 사정상 4번을 막다가[9] 갑자기 앞선으로 나와 2번을 마크하는 등 나름대로 장신 슈터로서 알뜰한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뭐니뭐니해도 그의 주특기는 KBL에서도 전무후무한 뱅크 3점슛으로, 양 사이드가 아니면 어디에서든 뱅크를 구사할 수 있었다. 성공률도 꽤 높았다는 것이 함정. 45도 각도에서 3점슛을 때렸는데 공이 관중석 방향으로 날라가다가 백보드를 맞고 기가 막히게 들어가는 장면은 상대팀에게 꽤나 굴욕적인 기분마저 들게 했다. 2015년 국가대표 감독을 역임한 김동광은 과거 해설 도중 "뽈(공) 질(길, 슛의 진행방향)이 전혀 없는데 그게 들어가네요. 허 거 참...?"으로 김동우의 3점슛을 평가했다.
관련 영상. 4쿼터 중요한 순간 뱅크 3점이 터지자 관중석에 있던 김동광이 파안대소하는 장면. 영상의 해설은 김동우의 먼 대학선배인 박건연[10] . 위 영상에서도 보이지만 그의 슛은 특성상 일단 림에 맞기 전까지는 메이드 여부를 알 수 없다(...).
다행히 2011-12 시즌을 앞두고는 드디어 아프지 않으면서 프로 데뷔 7년만에 처음으로 정상적인 훈련을 소화했다. 주전은 아니지만, 식스맨으로 활약하면서 모비스에 힘을 보태는 선수. 특히 선수단의 연령이 낮은 모비스에서 데뷔부터 쭉 모비스에서만 뛴 고참으로서의 역할을 다 하고 있다.
2012-13 시즌을 앞두고 혼혈 드래프트에서 모비스가 문태영을 영입하자 샐러리 감축 및 김동우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인지 무상으로 SK로 트레이드시키면서 2012-13 시즌부터는 서울 SK 나이츠 소속으로 뛰게 되었다.
2014년 1월 15일, 서울 삼성 썬더스의 우승연과 1:1 트레이드 되어 삼성에서 뛰게 되었다. 서로 의중이 맞는 트레이드라고 한다. 이후 무존재감을 드러내다 차재영의 부상 등으로 포워드진의 부재 속에서 출장, 16득점을 올리며 깜짝 활약을 했다. 다만 팀은 아쉽게 83:84로 졌고, 이날 억울한 판정에 발을 동동 구르며 항의를 하는 바람에 김동우럭, 활어회라는 별명을 얻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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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
2014-15 시즌 현재 백업 멤버로 경기당 평균 10분 정도의 출장시간을 가졌다. 2014년 11월 28일, 고양 오리온스와의 경기에서 9연패를 달리던 삼성의 연패를 끊는, 기적같은 버저비터 역전 3점슛을 성공시켰다. 기사 영상이 3점슛도 뱅크(...). 55초 경 느린화면으로 보면 정말 특이한 궤적으로 슛을 날린다. 팬에게는 매력적인 부분이지만, 후배 선수가 배우기는 어렵고, 배우기를 권하기도 뭣한 능력이다.
2.3. 선수 은퇴 후
2014-15 시즌 종료 후 FA가 되었으나 원 소속 팀 삼성은 물론 어느 팀에도 오퍼가 들어오지 않았고 결국 3차 협상이 시작되기 전인 2015년 5월 21일 은퇴를 결정했다.
은퇴 후 인헌고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으며 2017년부터 2020년까지는 모교 명지고 코치로 재직했다.
2019-2020 시즌부터 SPOTV에서 KBL 해설을 하고 있다.
해설로서는 진중하고 성실한 자세로 초반부터 팬들의 호평을 받았다. 말투가 단조로운 편이지만 가끔씩 뻘하게 터지는 드립도 친다.[11] 처음 해설 추천을 받은 것도 사석에서는 꽤 웃기는 편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3. 시즌별 성적
[1] 신인드래프트 당시 측정치는 맨발 195.2cm이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맨발 198cm인 송영진과 비슷한데, 드래프트 당시 키가 작게 측정된 것이며 맨발 신장은 197-198cm 이상이라는 얘기도 있다. 대학시절에는 200cm으로 표기되었다.[2] 쌍용기 준결승에서는 35점에 덩크슛 3개를 기록하였다.[3] 박광재는 힘이 좋았지만 198cm으로 센터 치고 신장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골밑에서 김주성 등을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박광재의 공격옵션은 자유튜라인 바깥에서 던지는 중거리 슈팅이었는데, 가끔 박광재가 이렇게 슛 쏘러 나오면 김동우가 역으로 골밑에서 리바운드를 잡으려 분투하는 경우도 있었다.[4] 93/94시즌 부터 96/97시즌까지 앤퍼니 하더웨이 전성기로 장신 가드에 대한 로망이 있었던 시절이였고 마이클 조던 현역 시절였기에 운동 능력과 화려함 및 중거리를 동시에 갖춘 플레이가 에이스선수들의 상장과도 같았다. 따라서 알게 모르게 이들이 하는 플레이를 구사하고 싶었을 것 이다.[5] 지금의 최준용이 전성기 김동우의 모습과 흡사하다. 장신에 뛰어난 운동 능력과 포지션 대비 준수한 볼핸들링과 슈팅까지..[6] 2002 연고전 당시 이 빠른 슛모션으로 고려대 백인선, 이현호를 농락했다. 45도 각도에서 경기 초반 연속으로 볼을 잡자마자 점프슛을 성공시키며 고려대 인사이드를 패닉에 빠뜨렸다. 당시 중계를 맡았던 한명재 캐스터는 '던집니다, 들어갑니다' 라는 멘트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7] 어린왕자라는 별명도 있었다.[8] 대학 신입생 시절 방성윤은 100kg대의 거구였고, 둘이 함께 출장하는 경우 힘이 좋은 방성윤이 종종 4번 포지션을 맡으며 김동우가 3번 역할만 전담하기도 했다.[9] 파울로 끊는게 허다하지만...[10] 박건연은 김동우 졸업 후 연세대 감독으로 부임했고, 김태술, 이정현, 양희종을 갖고도 정기전에서 연패하는 바람에 짤렸다(...).[11] 대표적으로 상대 선수의 자유투를 방해하는 흰 봉을 보고 가래떡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