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석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이규석은 그의 첫째 동생이다.
2. 생애
이희석은 1897년 12월 16일 경상도 함안도호부 산내면(현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에서 아버지 이재훈(李載壎)[3] 과 어머니 영산 신씨 신덕진(辛德津)의 딸 사이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가야읍 검암리로 이주하였으며, 1911년 상경하여 중동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부터 이중건(李重乾)이 함안군 여항면에 설립한 동명학교에 교사로 근무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전념하였다.#
그러던 1919년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배 차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귀향한 조한휘(趙漢輝)·한종순·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 등은 3월 19일 함안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한편, 그는 조한휘로부터 서울의 만세운동 상황에 대하여 전해듣고 이 계획에 적극 찬성하여, 대산면의 한문교사인 안지호와 연락을 취하면서 3월 19일 함안면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8일 밤, 그는 조한휘가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의 문장이 너무 길어 1장에 등사할 수 없게되자, 이를 1장 분량으로 개작·축소하여 다량 등사하였다.
이튿날인 19일 정오, 그는 이찬영과 함께 인근의 비봉산(飛鳳山)에 올라가 고천제(告天祭)를 올리고,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면내에 분산해 있던 시위군중에게 봉성동으로 모이라는 신호를 하고 곧 하산하여, 수백명의 시위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오후 2시경, 3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경찰주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출동한 마산경찰서장 키타무라(北村)와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도끼·몽둥이·돌을 들고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주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이에 응하지 않자 구타하였다.
이어 시위군중은 폐쇄해 놓은 함안군청 문을 부수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서, 함안군수 민인호(閔麟鎬)를 붙잡아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하였다. 그리고 사기가 충천한 시위군중은 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를 차례로 시위행진하며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때 조한국(趙漢國)·강상중(姜相中)이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연락되는 전화선을 끊어 놓았는데, 오후 5시 40분경, 전화가 불통되자 비상사태가 돌발한 것으로 짐작하고 출동한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도착, 현지 경찰과 합세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는 잠시 피신하였으나, 결국 체포되어 그해 12월 28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년형을 언도받았다.
그런데 그는 형무소로 호송되던 도중에 일본 경찰을 구타하고 요행히도 탈주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강상대(姜相大)라는 가명으로 서당을 신학문 강습소로 개편, 군북면 강습소 및 대산리 강습소 등으로 개편하여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1930년부터는 경성부에서 이중건이 경영하던 신소년사(新少年社)의 주필을 맡아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데 힘썼다.
또한 1940년 일제의 창씨개명을 피하여 강원도 김화군 오선산으로 피신하여 농토를 개간, 야학교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진력하였으며, 일제 말에는 철원군으로 피신하여 화전민 생활을 하던 중 8.15 광복을 맞았다.
이후 조용히 지내다가 1950년 9월 15일에 별세하였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